중언의 가치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와 관련된 많은 일들의 진행이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삶의 일상적인 만남과 거래가 지속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인, 상업적인 모든 일들이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서 주장하고자 하는 취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어하신 것이라"(요일 5: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진실하지 않는 것은 말하고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 동료들은 믿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고 그분의 증언을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증언을 믿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모한 행동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믿음만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믿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믿을만한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차라리 눈 없이 보고 귀 없이 들으며, 발 없이 걸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예컨데 캘리포니아를 향해 여행을 했을 때, 나는 안내책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책자를 통해 일리노이주를 떠나 미시시피강을 건너고 미주리주를 지나 네브라스카주에 이르며, 그 다음에 록키산맥을 넘어서 몰몬교들의 거주지인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 시에라 네바다를 거쳐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곳들을 지나가면서 아내책자 내용이 올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사분의 삼 정도의 여정을 잘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여행에 대해서 안내 책자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회의론자일 것입니다.
나에게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열개의 표지물을 알려주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서 그 열개 중에 아홉개를 찾았다면, 우체국에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됩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해 내가 전에 전혀 가지지 못했던 새 생명과 소망, 평화와 기쁨과 영혼의 안식 등을 얻게 된다면, 또는 절제를 얻게 되거나 악에 저항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나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만드신 도시'를 향한 바른 길에 들어섰다는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라면, 나머지 일들도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아직도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이와 같은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은 상황이 어찌되었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있는 곳에는 참된 펴오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 아내가 남편을 의심한다면 그 아내는 얼마나 비참한 자십니까? 아들이 집을 떠난 후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하여 아들의 사랑까지 의심한다면 그 어머니는 얼마나 비참함을 느끼겠습니까? 참된 사랑에는 결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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