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어떤 불신자들은

예림의집 2018. 1. 2. 18:23

어떤 불신자들은


한편 불신자들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창조자로 또한 해석을 부여한 존재로 내세우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대안은 무엇인가? 자신들의 신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이 궁극적 해석자라고 할 것인가? 이것 역시 자신의 일방적인 해석 아닌가? 혹 누구도 해석을 달지 말자고 할 것인가? 사실 이렇게 요구하는 것도 나름대로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나무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해석 되어진 것이며 이 사실을 그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는 것이라는 주장만큼 합리적인 주장은 없다. 이렇게 주장하는 종교는 거의 없다. 있더라도 그들의 세계관은 일관적이지 않다. 기독교 성경의 위치는 단순히 인간의 이성적 혹은 경험적 판단에 의해 진위가 결정되는 그러한 종교적 경전이 아니다. 절대적 진리이다. 궁극적 기준이다.

성경은 모든 사실을 존재하도록 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고, 모든 사실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모든 사실을 아는 유일한 길이라 할 수 있다. 주어진 사실들(facts)을 중립적으로 보고 해석하고 그 사실들의 진실성을 이성으로 혹은 경험으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들을 의미있게 하고 기능하게 하는 보편적 원리를 성경은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성은 하나님의 진리성과 함께 간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그의 계시는 그 완정성과 절대성을 담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완전성과 절대성은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전제해야 모든 것 이 가능하고 이치에 맞다고 하는 것은 절대성(the absolute)에 관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의 일률성이 있어야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주전자에 끓인 보리차를 유리컵에 따라 마시는데 하루는 보리차이고, 하루는 주스가 되고, 하루는 소금물이 되고, 하루는 입을 대는 순간 사라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한 이렇게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의 일률성(the uniformity of nature) 때문이다. 이 일률성은 내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이고 내가 유리컵에 따라서 생기는 것 이 아니라 일률성이 있기 때문에 예측대로 보리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혹 많은 사람들은 내가 주전자에 보리차를 끓였기 때문에 당연히 유리컵에 따른 물은 보리차이며 내가 마시는 것은 보리차가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당연성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이러한 당연성은 우연히 주어질 수가 없다. 당연성은 일률적이고 일관적인 정규성(regulari ty)을 의미하는데 어떻게 우연(chance)이 이러한 정규성을 창출할 수가 있는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