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

예림의집 2017. 12. 5. 08:49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


기독교 변증은 단순히 주어진 사실들(facts)을 통한 중립적 논쟁이 아니다. 모든 사실들(facts)이 하나님에 의해 해석된 것이 기 때문에 자연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며 기독교 변증을 위해 도입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존재하는 사실들이 중립적인 것으로 믿고 해석하며 이해하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중립성을 깨기 위해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특이하게도 반틸은 일반 계시도 성경과 마찬가지로 그 목적에 있어서 필수적(necessary)이고 권위(authority)가 있고 충분하며(sufficient) 명백하다고(perspicuous) 주장한다. 사실 일반 계시로 인해 믿지 않는 자도 하나님을 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롬 1: 21).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 사실을 누르고(suppress) 부인한다. 이런 일반 계시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기인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된 실재(reality)는 내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틸은 말하기를 “성경 이 계속 말씀하는 것처럼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온 우주가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론 반틸은 일반 계시를 특별 계시와 동등한 가치를 두면서 특별계시의 필요성., 권위, 충분성, 명백성을 일반 계시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계시의 역할과 의미와 목적 에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틸은 다음과 설명한다. "만일 인간이 에덴동산에서조차 자연에 나타난 일을 바로 깨달아 알기 위해서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초자연적 계시를 꼭 필요로 했다면 인간이 타락한 지금에 있어서 초자연적 계시의 필수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초자연적 계시의 내용은 만일 인간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었다."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서로 다른 목적과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더욱이 일반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할 수 없다. 반틸은 계속 설명하기를, “따라서 죄인을 향해 주어진 하나님의 정확무오하게 영감 된 계시인 성경은 우리들 앞에 주어진 빛으로서 우리는 그 빛 안에서 세상의 모든 사실들을 해석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유한한 존재들은 그것이 자연적으로나 구속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세상만사를 포함하는 한 계획안에 서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반틸은 이렇게 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의 불가분의 관계를 강조하고 한편 특별 계시의 우선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성은 우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계시에 대한 이러한 반틸의 견해는 특별 계시인 성경이 일반계시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님 을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인한 구속의 필요성에 따라 특별 계시가 주어진 것이며,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 둘 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차원에서 볼 때 동등하게 권위적이라고 하겠다. 물론 일반 계시를 통해서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반틸은 말하기를 “어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적 사실이어야 한다. 따라서 죄인이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것 보다 더 쉬운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일반 계시 역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특별 계시의 필요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일반 계시에 문제가 있어서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계시 역시 하나님이 계시라고 한다면 특별계시의 도움을 통하여 일반 계시가 주는 유익과 효력 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존 프레임은 일반 계시와의 관계에서 특별 계시가 주어진 목적 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소개한다. 첫째, 일반 계시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둘째, 타락 후 일반 계시에 대한 죄 된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셋째, 일반 계시를 통해서 이룰 수 없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주시기 위해서. 이렇듯이 일반계시는 특별계시 없이는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 특별계시로 일반계시가 치유 된다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는 서로 보완적이다. 서로 대치되고 한 쪽으로 인해 다른 쪽이 무시되고 불필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 개혁주의 안에서도 일반 계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신학(the natural theology)의 위험성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자연신학은 특별 계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이지 특별 계시를 인정할 경우 일반 계시는 일반 계시의 원래적 역할과 목적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이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경험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에게 심겨진 하나님의 신성과 솜씨와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 계시나 특별 계시는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이지 권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칼빈 역시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흔히들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은 능력, 영광, 혹은 지혜 정도로 한정하지만 칼빈은 이러한 속성 외에 하나님의 공의, 선(goodness), 의(righteousness) 등도 자연에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누구라도 일반 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킬빈은 특별계시와 일반 계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으로 우리를 위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여 신뢰하도록 초청하는 그의 피조물에 흔적으로 나타난 그 지식과 정확하게 같은 목적 을 가지도록 되어 있다.” 물론 여기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가 정확하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원래적 목적을 의미한다. 일반 계시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신뢰하도록 하는 목적을 지녔지만 타락으로 인해 그 목적이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에서 죽음으로 타락되었기 때문에 만약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면 우리가 논한 모든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Cognitio Dei Creatoris)은 소용없게 된다.” 이렇듯이 반틸은 칼빈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개혁주의의 핵심적 모토 중에 하나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지만 그렇다고 일반 계시를 무시하는 차원에서 “오직 성경”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불신자들을 향하여 기독교를 변증할 때는 일반 계시의 중요성이 더 절실하게 요구된다.

반틸은 타락으로 인한 일반 계시의 무력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일반 계시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과 대면하였던 것처럼 분명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자신의 눈을 빼었기에 일반 계시에 나타나는 하나님 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구속의 은혜가 필요 없었다는 것 이다. 반틸은 성경관을 하나님의 주권 사상과 연결시킨다. 만약 하나님이 그의 계시에 있어서 주권적이 아니면 어떠한 것에도 주권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의 영역에서 주권적 하나님은 또한 지식의 영역에도 주권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별 계시인 성경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으며 우리 신앙과 삶의 궁극적 규범이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생명과도 같은 가르침이다. 뿐만 아니라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우주와 인간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출발점(starting point)과 준거점(reference point)으로 삼아야 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바로 알 수 없고 어떤 것도 가능하지도 않으며 어떤 것도 이치에 맞지 않게 된다. 종교 개혁자들은 성경의 네 가지 특성, 즉, 권위(authority), 필요성(necessity), 명백성(perspicuity)과 충분성(sufficiency)을 강조하였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바로 성령의 영감(inspiration)에 근거한다. 성경은 그 자체에 궁극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궁극적 권위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의 말씀인 성경도 같은 권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성경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가 교회로 말미암아 계속적으로 모든 자에게 전해져야 하며 성경 자체 진리성에 관한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는 마치 성경이 교회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개혁주의에서는 교회가 성경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성경을 필요로 하는 대상은 교회만 아니라 불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요 또한 온 우주이다.

성경의 명료성 혹은 명백성이란 성경과 성경이 말씀하시려는 것 사이에 인간 해석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로마 천주교에 의하면 성경은 흐려지고 손상되어 교회의 무오한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교회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면 교회를 구성한 인간의 권위가 궁극적 기준이 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해석도 인간의 손에 달려 있게 된다. 끝으로 성경은 성경 자체로 충분하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개혁주의 모토는 성경의 충분성을 대변한다. 성경의 충분성은 또한 이 말은 성경 자체가 충분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충분성은 앞서 논한 일반 계시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일반 계시를 바로 볼 수 있도록 하는 특별 계시가 성경 외에 또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시와 인간과 지연과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해석할 수 있는 계시는 오직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