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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림의집 2017. 8. 4. 15:06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 본 글은 "중국교회의 그 놀라운 성장"(OMF.로뎀, 토니 램버트)에서 요약한 것입니다. 중국교회 최근의 각 분야의 기독교 성장을 더 알길 원하시는 분은 책을 참조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인 1949년만 해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학생운동((IVF)를 가진 나라로서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에 반응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에드니와 같은 중국 내지선교회(CIM/현재의 OMF)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공산화와 이어진 선교사 철수와 교회 폐쇄로 인해 대학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캠퍼스에서 추방당하고 분산되었다.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을 지배한 상황에서 기독 지성인들의 주장은 고난과 억압으로 되돌아 왔다. 중국 공산당은 20세기 초 영국 등 서구 열강에 의해서 중국이 유린 당 하고 있을 때 1919년 5월 4일 전 독일 식민지역 이었던 중국 지역들을 일본에게 양도한 서양 세력을 비난하기 위해 일어난 5.4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 1921년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중국 통치는 사상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반 기독교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966년 전후로 일어난 문화혁명으로 전 중국의 지식인들은 농부로 강제노역으로 내 몰렸다. 교회는 전면적으로 폐쇄되었고 긴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대학안에서 기독학생들의 모임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문화혁명의 선봉에 섰던 홍위병 젊은이들은 마오쩌둥 사상을 가장 열정적으로 응원한 계급임과 동시에 마오쩌둥사상을 사상을 가장 위협하는 존재이다. 197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마오쩌둥의 사상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바로 홍위병 역할을 했던 그 젊은이들로 부터였다. 1966년 문화혁명이 일어난 지 10년이 지난 후 그 젊은이들은 공산주의가 사회주의 이상향으로 자신을 이끄는 대신 가난과 계급투쟁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자신들이 뼈져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8년에 이르러 후야오방과 덩샤오평 등 개방정책을 주도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강제 노동 수용소와 공장에 있는 지식인들을 대학의 강단으로 돌려보냈다. 그후 지난 20년 동안 중국은 세계관의 혼돈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그들의 성경으로 삼았던 그만의 경전(마오가 한 말에서 따온 인용문들로 된 작은 빨간 책), 매일 열렸던 정치 연구 수업은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산혁명의 주도 세력이었던 젊은이들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세계관으로서 마오이즘이 붕괴하자 젊은이들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적으로 사상적으로 공허해 지기 시작했고, 덩샤오핑과 그 이후 시대에 어설프게 이루어진 사상 재건은 이 공허를 채워주지 못했다. 이러한 낌새가 1970년 초 중반에 들어서면서 바깥세계에서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찾아 홍콩으로 헤엄쳐 간 홍위병들 중 몇몇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1979~80년 중국 안에 교회들이 처음으로 문을 다시 열었을 때, 그곳에 예배드리러 오는 젊은이들과 학생들의 수에 적잖이 놀라기 시작했다. 중국대학과 학교에 기독교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농촌과 강제 노동에서 복귀한 교수들 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영향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20대 젊은이였을 때 IVF 운동 등을 통해서 들었던 복음을 간직하고 있었고, 다시 돌아온 대학 안에 그 복음을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간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화혁명의 고난 속에서 일생동안 격은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인물은 중국과학원의 펑 교수와 같은 이들이었다. 그는 베이징 대학 근처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증거 했고, 학생들을 위해 비공식인 뒷 모임을 열기도 했다. 1989년 6월 4일 일어난 천안문 민주화 사건은 중국 전체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