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이동이 다가오고 있다!
변하고 있다!
나는 오늘 1시간에 설교 3편 들었다: 몇 일 전 만해도 좋아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한 번 들으려면 그가 시무하는 교회에
가거나 카셋 테이프를 사다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인테넷에 들어가 한자리에서 좋아하는 목사님 세 사람의 설교를
한시간에 다 들었다!
엘리베이터 속의 김 선생님: 어느 좋다는 대학병원의 엘리베이터 안.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목에 건 의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환자들이 탈 때마다 의사는 환자를 행해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이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의사를 행해 김 선생님 잘 좀 봐 주세요라고 했었다. 이 정도면 고객 만족이 성공한 셈이다.
정문 앞에 선 은행장: 은행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출근해서 은행 정문에 선 은행장. 출근하는 은행원들을 향해 절을 하며
잘 부탁합니다! 라고 일일이 인사한다. 은행을 찾는 외부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내부고객(은행원)을 먼저 만족시키는
것이 은행장의 책무이다.
내가 찾는 화장품: 외국 출장 간 한 남편이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백화점 화장품 코너를 찾았다. 말도 잘 안 통해서 손짓
발짓을 겨우 원하는 제품을 이야기했다. 그 코너의 직원은 친히 그를 데리고 옆 코너로 가서 그가 원하는 친절히 제품을
알려주고 떠났다. 경쟁 회사의 제품이었다. 그 후 그 남편은 출장 때마다 첫 번째 화장품 코너회사의 제품을 하나씩 아내
에게 사다준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전자우편: 긴급 기도 요청 이라는 제목의 전자우편이 인도네시아 선교사로부터 왔다. 열어보니 자바지역에
서 모슬렘 폭도들이 교회를 불사른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날로 순식간에 전 세계에 전달됐다. 전 세계의 교회가 그날로 이
사실을 알게 됐다.
Elli의 병세: 동료 사역자로부터 전자우편이 왔다. 이전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함께 일하던 Elli라는 자매선교사가 뇌종양으로
수술 후 요양 중인데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위험하다는 것. 말레이지아에 사는 Elli의 오랜 친구인 Grace가 그 다음날로
그가 있는 캐나다로 날아갔다. 2-3일에 한 번씩 Elli의 상황이 내 컴퓨터 통신에 들어온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그를 위해 기도
했다.
인터넷 경영자의 10초 활용법: 어제 구입한 책 이름이다. 1년 전만 해도 시(時) 테크. 혹은 1분 경영자라는 말과 책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런데 이젠 10초 경영이란 말이 등장했다. 10초 안에 의사결정하고 판단하지 않으면 인테넷 사업에서는 뒤질 수밖에
없다.
기존의 삶의 틀이 변하는 것은 고객만족의 현장에서뿐만 아니다. 삶의 모든 환경이 변하고 있다. 이전에도 세상과 교회의
삶의 형태에 주요한 변화가 있어왔다. 각 경우 한 세계가 끝나고 또 다른 세계가 시작됐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에 대해서
사람들은 반응하고 사고하고 행동했다.
오늘날은 그 변화의 크기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위기만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기회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앞 세대의 세상과 교회들은 창조적 혹은 파괴적으로 반응했다. 오늘 우리들 또한 그렇게 반응
할 것을 도전 받고 있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동이란?모든 현상에는 그 현상이나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특정한 형식(운동체계, 사고방식)이 있다. 이 틀을 패러
다임이라고 한다. 패러다임의 원리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사람은 물리학자이며 과학사가인 토마스 쿤(Thomas
Khun)이다. 그는 과학의 세계에서의 패러다임의 이동(Paradigm Shift)에 대해서 말했다. 과학의 세계에서는 대개 과거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것에 의해서 전적으로 그리고 돌이 킬 수 없게 대치된다. 즉 뉴톤의 패러다임은 코페르니쿠스 법칙을 대치
했고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대치됐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이동은 때로는 현재의 패러다임이 가지고 있는 과학적 순서에 의해서
일어나기도 보다는 많은 경우 어떤 과학적 법칙이 한동안 지배하다가 그 법칙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많은 문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이나 분위기에 의해서 이전 법칙의 질서에 의한 방법이 아니라 혁명적인 방법으로 혹은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법칙
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토마스 쿤은 이 과정을 회심(conversion)이라는 종교적 단어로 표현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때로는 구 법칙이 새 법칙에 대해서 저항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패러다임 변화가 이것을
증명한다. 구 패러다임은 새 패러다임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나타나고 그러다가 결판이 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 새로
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비판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것이 상대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즉 패러다임은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나 기준을 인정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사고와 행동을 틀을 말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쿤은
말하기를 각 그룹은 자신의 패러다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패러다임을 사용하며, 우리가 한 패러다임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 패러다임의 적실성을 경험할 수 없고 다른 패러다임 속에 있는 사람을 강제적으로 새로운 자신의 패러다임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패러다임 이동이 아닐 경우 패러다임들 사이에 경쟁과 긴장
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나 패러다임도 절대적일 수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하나의 신학
적 패러다임도 절대적일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신학적 인식의 대상인 하나님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절대적인
하나님을 인식해 가는 우리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패러다임 사이에 창조적인 긴장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할 책임이 있다.
패러다임 이동을 이야기하는 이유우리가 패러다임 이동(변화, 창조)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
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세상은 여러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늘 변하고 있고, 내부적으로 때로는 창조적인 때로는 파괴적인
인간들의 혁명적 사고에 의해서 계속 변화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에 반응하는 사람들도 가지각색이다.
성(gender; 전통적으로 sex라고 표현했으나 1994년 제4차 북경여성세계대회 이후 남녀구별을 gender라고 표기한다.
이것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는 패러다임 이동의 결과이다!), 교육정도, 사회적 수준, 세계관 등에 의해서 사람들
이 어떤 상황에 대해서 반응하는 방식이나 그 틀이 다르게 나타난다. 성경에 대한 해석과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특정한 패러다임이 형성되고 또 그러한 패러다임의 결과에 대해 반응하거나 어떤 기대하
는 결과를 얻기 위해 특정한 패러다임을 창조해서 강요(적용, 격려)해야 하는 것 때문에 패러다임 이동에 대한 필요가 이야기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자연스럽게 발생한 패러다임의 결과는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
역사와 사회의 발전과 긴장 혹은 갈등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패러다임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학문명과 통신 기술의 발달은 인간들의 의사소통을 더욱 효과적이고 빠르게 해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사소통 패러다임(의사소통방식)이 등장했지만 그 결과는 항상 좋은 것으로 만 나타나지 않았다. 즉 통신
기술의 발달로 의사소통이 더 잘되기 위한 패러다임으로 발전 될 것을 소망했지만 그 결과는 더 많은 인간 소외, 비인격적인
만남, 공동체성의 파괴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마샬 맥루한이 말 한대로 매체는 메시지이다(Medium is message)라는 패러
다임 때문에 필연적으로 매체의 오용은 메시지의 왜곡을 가져왔다. 그래서 이것에 대응하는 패러다임 (예를 들면 얼굴과 얼굴
을 대하는 만남) 에 대한 욕구가 등장한다. 패러다임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변증법적으로 발전되고 진행되는 것이다.
신학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이동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동의 법칙을 신학의 변천과정에 적용해서 설명한 사람은 로마 캐토릭
신학자 한스 융 (Hans Kung)이다. 그는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변화를 크게 여섯 개의 큰 패러다임 이동으로 나누었다. 초대교
회시대(primitive church), 교부시대(the patristic period), 중세교회(the middle age), 종교개혁(the reformation), 계몽주의
시대(the Enlightenment), 그리고 교회연합의 시대(ecumenical)로 구분했다. 각 시대별로 시대적 상황과 문화, 내부 외부적
인 요인에 의해서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가 이해되고 전달됐다는 것이다. 또 제임스 마틴(James Marine)은 역사 속에서 교회
와 신학의 패러다임 이동을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째로 전 비평(pre-critical) 혹은 상징시대(symbolic), 둘째로 후 비평시
대(post critical) 혹은 통전적(holistic)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합적 시대(ecumenical) 등으로 구분했다. 한스 융은 자신
의 이러한 여섯 가지의 패러다임 구분이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것으로 이들 사이에 광역(macro-), 중간(meso-) 그리고 작은
(macro-) 패러다임으로 구분되어야하며 언급한 여섯 가지 구분은 광역 패러다임 이동을 말한다. 이러한 각 광역 패러다임은
신학 전체의 주요한 패러다임 이동을 의미하며 한 광역 패러다임 안에서 신학자들은 비록 각 영역의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모
습으로 다른 의견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하나님, 인간, 세상을 보는 관점에 대한 전체적인 유사한 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 광영 패러다임 속에 속했다고 본다.
한편 과학적 패러다임 이동과 신학적 패러다임 이동은 그 적용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과학적 패러다임 이동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과거의 패러다임이 거의 전적으로 폐기되지만 신학에서는 과거의 패러다
임이 새로운 형태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4세기에 어거스틴이, 16세기에 루터가, 그리고 20세기에 칼 바르트가 발견한 로마
서의 패러다임은 과거의 패러다임의 재발견으로 그들 앞 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성경적 구원에 대한 이해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것이었다. 또한 신학에서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전적으로 살아지기보다는 과거의 패러다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부분적
으로 소개하거나 과거의 패러다임에 보완되는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대의 교회에 대한
전격적인 패러다임 이동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의 많은 부분은 캐토릭의 전통 가운데 남아 있었다. 또 한가지 신학적 패러다
임 이동과 과학적 패러다임 이동과의 다른 점은 신학에서는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이 과학처럼 전격적이
지는 않다는 것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이 운용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길을 열어간다.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계몽주
의 패러다임의 척도 안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을 찾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 등이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변화의 요구교회 역사와 신학의 패러다임 이동은 선교의 패러다임 이동과 축을 같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학 역사는 바로 선교의 역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으로 볼 때 선교는 일종의 과정(process)이
다. 즉 선교는 전달하려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그 가치를 전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이 효과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특정한 패러다임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크게는 교
회 전체적으로 작게는 선교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선교해야 할 오늘날 상황은 과거 그 어느 때 보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
가 전달해야 할 기독교의 믿음의 본질이 적실성 있게 전달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된다. 과연 그렇다면 선교 패러다
임의 이동이 요구되는 오늘의 변화된 선교적 상황은 무엇인가?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1991
118)는 오늘날의 선교 패러다임이 바꿔야하는 일곱 가지 주요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1. 지난 천년동안 기독신앙의 출발과 중심이었으며 또 실제적으로 기독교에 의해서 형성된 서구(west)가 세계에서
그 절대적인 위치를 상실했다. 세계 각처의 사람들이 서구의 목조르기로부터 해방 되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2. 오늘날은 억압과 착취의 불의한 구조들의 도전이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 보다 크다. 경제, 정치적 억압뿐만 아니라
인종과 성차별은 그 어느 때 보다 구체적이다.
3. 서구 기술과 발전, 더 나가서 서구의 진보주의 전체에 대한 본질적인 의구심이 일고 있다. 결국 계몽주의의 신(神)인
진보(progress)가 거짓 신(神)으로 증명되고 있다.
4.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오늘날 제한된 자원을 가진 축소된 지구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과 환경이 서로
상호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5.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지구를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전체를 동시에 죽일 수 있는 능력도
가지게 됐다. 만일 환경 파괴의 재앙이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요구한다면 핵으로부터의 위협은 우리들로 하여금 평화와
공의를 위해 대응하도록 도전한다.
6. 만일 문화가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하는 인간의 소리를 발전시키는 것 이라면 유럽에서 발전되고 만들어진 신학이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학에 대해서 더 이상 우월함을 주장할 수 없다. 이제까지 천년이상 당연시했던
서구 신학의 우월성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7. 수세기 동안 다른 종교에 대한 기독교 종교의 우월성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당연시되어 왔다. 기독교가 사실 유일
하고 진리인 구원의 종교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인간 권리의 가장 본질로 생각
하는데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요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다른 종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 접근 방법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야한다고 도전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패러다임 이동
우리는 이러한 세계적인 주요한 변화에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요한 변화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몇 가지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전통적인 가치관 혹은 삶 방식과 새로운 가치와의 충돌이 그 어느 때 보다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최근 민주화
로 인한 정치적 변화와 세계화, 개방화의 영향으로 기존의 유교적 사고의 틀을 가진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간의 의식의 차이
가 삶의 많은 부분에서 충돌하고 있다. 민주화 개방화의 영향으로 많은 경우 기성세대들도 유교적 하이러키(hyrichry)구조에
서 벗어나고 있지만 사회 전체는 아직도 오랫동안 길들여진 권위주의문화, 형식위주의 문화로 인한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삶의 구조하에 놓여 있다. 이 비효율적 구조로부터 탈피해 가는 과정은 기존의 기득권 구조가 원해서라기 보다는 경쟁력이라는 관점에서 타율적으로 이뤄지고 이따. 그 사이에서 긴장이 팽배되고 있다. 한편 앞으로는 이러한 폐쇄적 유교문화는 더욱
급속히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동인이 의식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시장경제 사회구조로의 변화로 인한
생존과 효율 차원에서 타율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 결과 현실과 의식 사이의 긴장은 계속 될 것이다.
둘째, 새로운 세대가 기성세대의 기득권에 저항할 만한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30-40년 동안의 빠른
사회 성장(경제든, 교회든)의 주도 세력이 기성세대였으므로 그들의 공적과 업적을 저항할 만한 힘이 아직 새로운 세대에게
없다. 이것은 정치, 문화, 종교에서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저항에 실패한 새로운 의식세대에게서 부분적으
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창의적 삶의 패러다임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동화, 현실 도피, 무력감, 절망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절망감은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생활 방식(청소년 비행, 유괴, 살인, 극단적 도덕적 탈락)으로 나타
나고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새로운 세대들이 있다. 그러나 아직 대세는 아니다.
셋째, 한국의 경제발전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 결과 급속히 형성된 중산층의 이러한 삶의 질에 대한 향상 혹은 향상을 위한 욕구(그렇지 못한 상태로부터의
욕구)는 때로는 과도한 자기 과시(과 소비, 불필요한 소비 구조 문화 및 대형화 추구- 냉장고에서부터 대형교회, 대형집회
까지)와 집단별 이기주의(한의약 분쟁, 쓰레기 소각장 마을 유치반대, 개 교회 주의까지)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경제
발전의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계층의 절망감으로부터 파행적인 저항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여유가 사람
들로 하여금 자기 울타리 밖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은 교회의 해외 선교에 큰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국내
적으로는 종교(기독교)의 필요성에 대한 정서적 의존도(왜냐하면 교회가 물질적 축복을 위해 오는 곳으로 가르쳐졌기에)가
낮아지고 있다. 이것은 오늘의 한국 교회 성장 중지의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이다.
네째, 이러한 오늘날 한국사회의 가치와 의식의 충돌은 교회 안에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론, 공동체, 선교의
과제와 방법론 등에서도 세대간에 부딪치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세대는 기성세대가 이룩해 놓은 교회성장의 열매를 능가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또 의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앞 세대로부터의 도움을 구체적으로 받지 못하고 있다. 얼마동안
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새로운 세대들이 창조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은 그들이 대응해야 할
긴박한 상황(context; 예를 들면 80년대 90년대의 긴박한 정치적 상황)가 없어졌다고 간주하고 현실 문화 안에서의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공의, 평화, 가난한자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적 치유, 상담, 자기
관리 등에 더 집중한다. 이러한 현상이 선교에 헌신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 선교에 나가는 사람의 수는 그에 비례에 늘지
않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즉 다원주의 문화의 결과 다양한 삶의 선택의 장이 열리기는 했지만 아무
것에도 헌신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선교동원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투자한 것에 비해
열매는 매우 적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런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맺으면서,
오늘의 세상과 다가오는 세상은 지난 19세기 혹은 20세기의 세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류 역사가 늘 변화해 왔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문명사적 전환기라고 규정할 만큼 이전과는 다른 삶의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기존의 경계를 넘게 하고 적절한 반응을 요구한다. 결국 오늘 우리의 시대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변혁적 해석(transformational hermeneutics)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해석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선교 패러
다임이 이동돼야 한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전격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반응하는 선교 패러다임 없
이는 세계선교의 앞을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1900년 세계인구 대 기독교인의 비율이 34.3%에서 2001년 현재는 33.0%로
줄어들었다는 단순한 통계(David Barrett 2001 World Statistics) 하나 만으로도 오늘의 선교 패러다임이 이동돼야 할 필요
성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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