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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밀레니움과 한국교회의 선교운동

예림의집 2017. 3. 15. 09:32

새 밀레니움과 한국교회의 선교운동


들어가는 말 

"저희가 모였을 때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6-8)


1999년의 마지막 날 사람들은 로마의 과장에 모여서 횃불과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기도와 찬양을 하고 있었다. 깜빡거리는 횃불은 어둠 속에서 악령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고, 수많은 남 여가 외치는 주문은 마치 거대한 벌떼가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머리위로는 새해가 아니라 마지막 날을 위한 교황청의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 종소리는 하나의 무시무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나는 참 하나님을 찬양하네. 나는 사람을 부르고 제사장들을 모으고 , 나는 죽음을 통곡하며, 나는 사탄을 패망시키고 마지막 심판의 종소리를 울리네." 

마지막 운명의 시각을 알리는 괘종 시계가 울리자 군중들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고 숨도 마음대로 내쉬지 못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포에 놀라 죽었고 그들의 영혼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있음에도 땅이 열려 교회와 경배자들을 삼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마치 악몽에서 깨어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후 군중 속에서 흐느낌과 웃음소리가 들리고, 남편과 아내, 종과 주인이 서로 껴안았다. 서로 악담을 주고받던 원수들이 마치 친구들처럼 화해하기 시작했고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로마의 언덕 위에 있던 모든 교회들이 종들이 찬양의 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옛적의 예언자들이 말하던 쓴잔을 지나갔고 새로운 세상이 탄생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새로운 밀레니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왜 새로운 밀레니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2000년이라는 단어가 주는 마술적 힘 때문인가? 심판의 두려움 혹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인가? 인류는 두 번의 새로운 밀레니움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새로운 소망에 엇갈리고 있었다. 세 번째 밀레니움을 맞아하고 있는 오늘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미래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새 밀레니움에 대해서 선지자적 이야기를 해왔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독재(George Owell ), 미래의 충격과 권력의 이동 (Alvin Tofler), 문명의 충돌(Samuel P. Huntington)과 문명의 붕괴(Joseph A. Tainter)의 어두운 미래를, 어떤 이들은 새로운 매가트렌드의 사회질서(John Naisbitt)와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경제체제의 신세계의 질서를 그려내기도 했다.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통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더욱이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소망하는 이들은 무엇을 기대해야 하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미래학자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선단적 판단의 덩달아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의 승천을 눈앞에서 보면서 제자들이 예수께 질문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질문을 우리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사람들처럼 미래의 불확실함과 가상적 소망에 대한 긴장 속에서 막연한 환상이나 기대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므로" 미래에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섭리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새로운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새로운 밀레니움에 한국 선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명제는 새로운 밀레니움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인가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새로운 밀레니움은 바로 오늘의 연장이다. 우리는 새로운 밀레니움에 소망을 걸거나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한국선교를 냉철히 뒤돌아보고, 이미 다가와 있고 다가오고 있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때와 기한의 권한을 하나님께 둔 채 최선을 다해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 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때와 기한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선교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할 때, 한국교회는 새로운 밀레니움에 맞는 패러다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새로운 태도로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난 지 30년 정도가 됐다. 그 중에서도 지난 15년 간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찬양한다. 그러나 동시에 때로 선교의 주체가 우리 자신이 되고 내가 때와 기한을 정하여 사역한 시간들이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지난 두 차례의 "한인선교사지도력 개발회의"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백과 회개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교사들의 몸부림이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아직 그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할지라도,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제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는 한국교회는 이러한 시도에 근거하여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와 모색이 현장의 선교사들 사이에서, 선교운동가와 전략가들 사이에서 각각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교회 선교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는 하나님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본 논고는 이러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새로운 밀레니움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새로운 밀레니움 
시간적으로 볼 때, 2000년 1월 1일은 1999년 마지막 날 다음 날 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언제가 새로운 밀레니움의 시작인가에 대해서 논쟁한다. 2001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2000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인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가이다. 인류는 20세기 후반, 특히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문명사적전화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류가 지난 수 천년동안 만들어 온 문화와 삶의 대부분의 형태와 그 내용 혹은 그 질서가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삶에 새로운 삶의 질서와 이데올로기가 형성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뒤돌아보면 세계복음화의 급속한 진보가 일어난 19세기말과 20세기 초, 세상은 새로운 문화와 세상의 질서가 만들어지던 상황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부정적으로 평가되던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세계복음화의 급속한 진보는, 지리적 발견과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일어난 유럽의 패권주의적 식민지 정책에 기인했고, 20세기 중반부터 세계복음화의 둔화는 2/3세계의 독립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인한 새로운 서구세력에 대한 반발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그 원인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세계질서변화와 움직임을 선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는 선교의 방향은 새 밀레니움 속에서 세상이 어떤 방향을 움직이는 가를 확인하는 가운데 정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와 변화의 종국적인 섭리자라는 관점에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섭리해 가시는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변하고 있고, 이에 따라 우리의 복음화 전략이 새로운 모양새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 문화적 개방과 재편성 
과연 어떤 문명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모더니티 사회의 가장 큰 문화적 특징은 문화적 개방과 재 편성현상이다. 특히 오늘의 20세기말과 21기 초의 20-30년간에 생기는 빠른 문화적 변화는 인류가 수 천년 동안 만들어온 문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갈 만큼 급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는 문화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의 내용 자체까지도 영향을 미쳐 삶의 모든 환경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고 또 더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특히 현대 사회의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제까지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진행되던 문화가 서로에 대해서 개방되어 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었다. 지난 2000년 동안 쌓아온 기술이 요즘에는 단 몇 년 사이에 바꿔져 간다. 수십 년을 거쳐야 전달되던 생각, 기술, 정보가 단 몇 시간 내에 혹은 단 몇 분내에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전달된다. 바로 오늘 아침 지구의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몇 시간 내에 전 세계에 알려진다.
즉 인간 삶의 대부분의 것들이 서로 개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억압되고 통제된 공산주의 사회보다는 자유롭고 삶의 욕구를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체제나 문화로 이동하거나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구 소련의 붕괴는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토카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고 구 소련과 동독의 붕괴는 자유라는 문화를 경험한 이후 막을 수 없었던 시대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개방 다음 단계는 사람들이 더 선호하는 문화로 전체 문화가 재편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 소련과 동구권은 자본주의와 민 그래서 구 소련과 동구권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사회로 재편성되고 한국 젊은이들의 입맛은 햄버거와 초콜릿 맛으로 재편성된다. 즉 새로운 하나의 동일한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세계 어느 곳에 가도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의 맛은 동일하다. 전세계적으로 신세대, 신 일류, X 제너레이션 등의 개념이 동시에 확산된 것도 이런 이유이다. 
동일한 문화, 동일한 패션, 동일한 삶의 방식들이 공유된다. 이렇게 다양했던 문화들이 문화의 개방으로 교류되고 새로운 문화로 재편성되어져 간다. 이렇게 의사소통방식의 발전의 결과 문화가 개방되고 새로운 문화로 재편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오늘날의 모더니티 사회에서 두 가지 극단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개방으로 인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현상이다. 몇 시간 TV뉴스를 청취하고, 몇 개의 신문과 전문잡지를 뒤적이고,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에 연결하고 나면 세상 돌아가는 일을 대충 알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의 아주 사사로운 부분까지 대부분 알고 있다. 또 기독교인들도 수많은 정보와 교육을 통해서 이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기독교 세계관, 제자양육, 10도-40도 창 전도, 미전도 종족입양, 창의적 선교접근지역 등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다. 바로 얼마 전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어났던, 빈야드 운동, 파워 이반젤리즘 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고 있다. 선교의 새로운 다양한 전략과 대안들에 대해서 다 잘 알게 된다. 모더니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 구석구석에서 돌아가는 대부분의 것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마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또 다른 극단적 현상은 문화적 개방으로 세상 돌아가는 것과 그 의미를 다 잘 알 것 같지만 실제 속으로 들어가면 그 내용이나 의미에 있어서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고 곧 친해지기도 하지만 그 친구가 무슨 상처와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상대의 깊은 상처를 이해하지는 않고 무조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말한다. 매년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가는 것 같지만 그 선교사들 가운데 오직 적은 수 만이 미전도 지역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성장률은 2.3%인데 비해 모슬렘의 성장률은 2.9%로 평균 인구 성장률을 앞지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세게 인구 대 기독교인의 비율이 32%정도라고 하지만 이 수는 로만 캐토릭 및 기독교 유사종교를 다 포함한 수이며 실제 개신교도들의 수는 10%에 불과하고 그 중 거듭난 기독교인의 수는 얼마인지 알 수 없고 또 그 중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얼마나 적은 수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대학생과 신세대들이 감각적이고 참을성 없고 버릇없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자라나는 20년 동안 기성사회가 만들어 놓은 입시라는 규범을 통과하기 위해 거의 초죽음이 됐고, 깨어진 가정 속에서 눈치보며 자라고 그래서 그들이 갈곳이란 오락실과 침침한 다방구석이었으며 권위라면 진절머리 내게 된 것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고민을 풀어 주려고 생각하는 사람과 교회는 거의 없다. 결국 모더니티 사회 속에서의 문화적 개방은 그 다양성과 확장으로 인한 유익에도 불구하고 문화의 익명성에 의한 깊은 단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의 변화는 선교현장과 선교전략, 그리고 선교사들의 성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최근 한국에서 더 많은 선교관련 모임과 정보 그리고 대회들 속속 진행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지만 의도한 것처럼 준비된 선교자원이 발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적 변화에 대응하는 선교동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사랑에 헌신하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그 곳에 삶을 드리지 않고, 선교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기는 하지만 그 일에 헌신하지 않는다. 

2) 의사소통 방식과 질서의 변화 
오늘의 사회 그리고 더욱이 다가 올 미래 사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의사소통 방식과 질서의 변화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의사소통 속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의 방식 더 나아가서 의사소통의 근본적인 원리와 질서마저도 변화시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의 단순히 편지나 만남을 통한 의사소통 방식에서 인터넷, 이동 통신, 팩스 등으로 그 도구가 바뀐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의사소통의 질서가 바뀐다. 전자상거래의 발전으로 인한 기존 유통방식의 몰락, 이동 통신으로 인한 지역 개념의 파괴,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독점으로 인한 권력 구조의 개편 등은 전혀 새로운 의사소통 질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질서는 단순히 기존 질서의 가속화 내지는 개량화가 아니라 본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새로운 통신 수단은 빠른 의사소통의 유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가져 왔다.  
1954년의 DNA의 발견은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줌으로서 마침내 생명을 복제해 낼 수 있는 기술로 발전하고 그 결과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창조질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컴퓨터의 발전은 가상공간(Cyber space)의 개념을 만들어 냈고,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체(reality)와 비 실체(virtual reality), 절대적 가치(truth)와 상대적 가치(non-truth)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함으로서 절대적 기준과 가치에 대한 헌신의 필요성의 부정하게 만든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선교에 대해 도전을 받고 들을 때 감동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에 자신을 드리는 헌신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화적 현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등장과 변화 
이러한 문화적 변화와 의사소통 방식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삶의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개인주의, 상대주의, 경제 우선주의, 환원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이데올로기가 등장한다. 반면에 긍정적 이데올로기도 등장하는데 힘과 권한의 수직적 개념에서 수평적 개념으로의 이동 때문에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네트웍 중심 구조로, 남성지배 구조에서 여성의 참여구조로, 제공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통에서 다양한 선택의 수용으로 바뀌고 있다. 
최근 사회적으로 NGO 개념의 부상, 블럭화 경향, 국가간의 경계가 지리적 개념에서 민족 개념으로의 전환, 자본주의 이후 사회 구조로의 사회주의적 전통을 전제로 한 제 3의 길(안소니 기빈스, 슈레더) 등의 개념이 등장한다. 한편 이러한 변화는 세계선교에 있어서도 새로운 형태의 성경적 에큐메니칼운동(Bosh)이나 2/3세계선교와 1세계선교의 협력과 파트너십, 비 거주지 선교, 전통적 선교를 보완하는 비전통적 선교, 평신도 전문인선교의 확산, 다국적 선교단체의 확산, 현지인 중심의 선교전략 등이 소개되는 사회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또한 정보 양의 확산과 이동의 확대로 인해 동등하고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으로 인해 민주적이고 극대화된 효율의 장점과 더불어 정보의 독점 혹은 왜곡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예를 들면 70, 80년대 쇠퇴해 가던 미국의 경제와 힘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동안 투자한 정보화사업의 결과와 구 소련의 몰락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공백에 힘입어 세계 정보체제를 독점함으로서 다시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함으로서 21세기의 Fax Americana를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는 21세기의 선교의 주 영향권이 2/3세계로 넘어오지 않는 사회적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정보의 공유화 민주적 의사소통 방식의 확장은 선교사 세대간의 긴장을 해결해 나가는 요인이 될 수도 있고,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는 구 세대와 신세대간의 긴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작지만 전문적이고 창조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선교를 할 수 있는 선교단체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도시나 산업사회 혹은 새로운 사회계층(Cyber citizen, Technocrat)에 대한 선교 방법이 요구 될 것이다. 선교동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과거의 대규모적이고 일시적 영향력을 주는 방법에서 일상적이고 개별적인 동원 방식이 더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단기선교 운동의 급부상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의 결과이다. 

한국사회와 교회의 대응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는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일어나기 위해 한국교회는 먼저 몇 가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첫째는 교회 전체의 의식구조의 변화이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라면 교회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선교도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지적되고 있는 많은 선교지의 문제들은 사실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한국교회 전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Up grade)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잘 준비된 선교사를 배출해 낼 수 없고, 새로운 시대의 맞는 선교전략의 창출과 적용은 불가능하다. 결국 한국교회는 이미 변화되고 있는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은 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변화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이 진리임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변화되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카리스마가 교회에 존재해야 한다. 즉 오늘의 변화하는 지구촌 사회에 이성과 마음에 매력적이 되길 위해서는 교회가 이 시대의 표적들에 즉각적이고 영적인 태도 방법으로 반응하는 능력과 모든 문화 속의 인간의 진정한 가치들을 통합해 내고 흡수하는 능력을 가꾸어 가는 힘을 소요해야 하는 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카리스마이다. 그 결과 레슬리 뉴비긴이 주장한대로 "사실의 세계(World of facts)"와 "가치의 세계 (world of values)"를 이분하는 것을 거부하고 세상의 모든 생각과 사상 그리고 문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되는 힘이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힘 즉 카리스마가 한국교회에서 나와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후기 기독교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기독교와 사회와의 관계 설정 문제, 국내 복음화 문제, 복음주의 중산층들의 하향적이며 성육신적 삶의 유도하기 위한 영적 각성의 문제, 통일 전후의 한국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역할, 세계선교에서의 한국 교회의 과제 등에 대한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역량이 마련 되야 하고 이러한 큰 변화 안에서만 한국교회가 성장해 가야지만 21세기 선교운동이 성공적일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교 역사 속에서 분명히 발견하는 것은 한 국가의 선교운동은 그 국가 교회의 부흥의 열매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영적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 21세기의 한국교회의 선교의 미래는 없을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가 유교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고, 이 부분의 의식을 전환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지 알 수 없다. 이것은 한국교회와 선교운동안에서도 동일한 문제로 등장한다.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이 변하는데 의식의 패러다임이 적절히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일(Changing World, unchanging Word)은 불가능 해 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합리주의 정신의 확산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한국 사회와 교회는 아직 한번도 합리주의 정신을 실현해 본적이 없다. 근대국가의 형태를 띤 이후에도 한국사회는 일제시대. 한국전쟁, 독재정권의 시대를 지나면서 합리적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없었다.
유교사상을 문화의 뿌리에 둔 사회로서 정상적인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았고 60년대 이후의 사회의 갑작스러운 경제 성장 그리고 교회의 놀라운 수적 부흥은 합리주의적 사고보다는 목표 지향적, 관계 중심적 사역 구조를 만들어 냈다. 지적되고 있는 한국선교사들의 현지사역의 문제점인 직접선교보다는 고용된 현지인을 통한 간접사역, 팀 사역이나 협력사역보다는 개별사역, 속한 시일 안에 열매를 거두려는 조급함, 지나친 간섭과 재정후원을 인한 의존심 함양, 시간 및 재정 사용의 문제, 일반선교지 집중, 자기 교파연장주의, 프로젝트 위주의 사역, 인적 물적 자원의 중복투자, 선교보고의 진실성 문제와 한국 교회의 선교사역의 문제점인 균형 잃은 선교신학, 단일 문화관, 정보 및 전략부재, 경쟁적 개인주의, 적절한 선교사 선발과 훈련, 비전문인에 의한 선교교육 및 행정, 파송, 후원, 수용기관 간의 협력 부족 (임종표/박기호 22-24, 31-33) 등과 더불어 세대간의 갈등, 선교사와 파송자 간의 갈등, 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의 미 창출, 중복투자, 연합운동의 실패 등은 대부분 합리주의를 경험해 보지 못한 문화의 결과이다. 

세째로, 개방성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단일문화, 단일민족의 정신의 오늘의 지구촌 사회와 선교라는 전 지구적인 사역에 결정적인 장애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비록 한국 사회가 세계화를 외치고 있지만 여전히 그 변화의 속도가 느리고 세계 사회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향상되지 못하는 것이나, 한국이 세계 선교사 파송 4-5위 국가이면서도 세계 선교계에서의 영향력이 미미한 것은 개방성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미래 사회는 누가 가장 창조적인 생각과 실천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선교운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방적이지 못한 문화와 구조 안에서는 결코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실천할 수 없다. 한국사회 안에서도 교회는 가장 비 개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무조건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가 사회의 흐름과 사상 혹은 문화를 뛰어넘는 창의력을 들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므로 사회의 주 문화(main culture)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하위 문화(sub-culture)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한편 선교하는 사람들은 외부 세계를 접하므로 가장 개방적일 수 있음과 동시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버릴 수 있는 집단이다 만일 한국교회와 선교운동이 개방성을 통한 창조적 공동체로 바뀌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21세기의 한국교회와 이의 선교운동은 성공적일 수 없다. 


새로운 선교운동을 위한 제안 
이미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한국선교의 문제점이 대부분 드러났고 그 대안도 마련되었다고 본다. 한편 문제는 이러한 문제점과 대안들이 21세기라는 새로운 환경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 되야 하는 가의 문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세 가지 영역에서 대안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사람, 원리, 실행의 문제이다. 즉 리더십, 신학, 전략의 문제 일 것이다. 우리가 새롭게 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이 세 가지 원칙적인 문제에 모두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리더십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인간상 즉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한다. 과연 한국교회와 선교운동은 성경적이며 시대가 요청하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의 원인은 올바른 리더십이 형성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들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섬김의 지도력, 위치(position)가 아니라 영향력(influence)을 주는 지도력, 오늘의 변화된 시대적 문화나 이데올로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creative)이고 준비된(equipped) 그리고 함께하는(partnership) 리더십에 대한 연구와 대안이 제시돼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래의 사회 구조는 좀 더 수평적이며 분권적인 형태를 띄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화에 적절한 리더십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보다는 때로는 다양한 의견과 방향을 통합해 가는 조정자 (Coordinator), 촉매자(Catalyst), 연결자 (network-er), 혹은 촉진자 (facilitator)로서의 창의적이고 효율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가 되야 한다. 따라서 유교적 전통과 문화로부터 출발된 한국교회와 선교운동이 구조가 어떻게 해야만 합리적이고 통전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을 키워 낼 것인가, 비민주적이고 자의적인 구조 안에서 배양된 선교사 개인과 선교운동구조가 어떻게 연합적이고 개방적인 인격과 운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가진 단일 문화의 성향에서 내용 중심적이며 유기적인 관계 중심의 지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명분과 관계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리와 효율에 중심을 두는 지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등이 관심을 두어야 할 과제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책임 (accountability)지는 지도력을 만들어 낼 것인가를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의 선교운동은 리더십의 개발과 더불어 새로운 세대를 준비시켜야 한다. 오늘의 리더십이 한국선교를 출발시키는 데 그 역량을 발휘함으로서 그 역할을 했다면 이제 다음 세대 리더십들이 출발된 한국선교를 한 단계 높이기 위한 작업을 시도하기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고 등장 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는 짧은 기간이지만 급격한 변화를 경험한 연고로 세대간의 이해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가 비교적 큰 편이다. 이 간격을 줄이고 창조적인 리더십의 공유와 협력 그리고 전수가 일어나도록 피차 노력해야 한다. 

2)신학 
모든 문제의 근원은 신학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신학은 당기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선교역사가 30년으로 일천하므로 한국교회의 선교신학과 그 정신이 완성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자전(Self-propagating)의 네비우스(Nevius)선교 정신에 의해서 선교되고 성장하고 마침내 타국을 선교하게 된 한국교회가 선교지에서는 의존적이고 패권주의 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는지 철저히 회개하고 변화 되야 할 신학적 원칙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한다. 왜 한국교회 안에 한쪽에서는 선교사 양성소 같은 교회가 있는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선교는 자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신학적 이유를 살펴봐야 한다. 왜 교회 안에서 제자훈련과 교회 성장을 강조할 때 선교가 설자리가 없는지,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가 실제적으로 선교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고 선교는 내부의 필요를 다 채운 다음 참여할 이차적인 과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선교의 주체가 교회라면 교회는 선교를 주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또 왜 그렇게 선교가 활발하게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신학교 안에서 선교학부가 차지하는 위치는 부수적인가에 대해서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직신학 등 다른 신학과 선교학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서로간에 솔직한 대화가 일어나지 않고 독립된 별개의 학문으로 존재한다면 성경은 하나님의 선교를 기록한 책이라는 명제가 실제적으로 서로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혹은 통합적 시간이 왜 존재하지 않는지 신학적 대화를 해 보아야 한다. 복음주의신학의 전통 안에는 해외선교에 대한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복음주의운동은 주로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으로만 이해되는 지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화와 통합작업이 이뤄져야만 실제적인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일어나는 신학적 토대가 마련 될 것이다. 

3)전략 
이제 한국교회선교는 전략적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까지 선교를 출발시키는 데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출항한 선교운동이 잘 그 항로를 찾아가기 위한 전략적 논의가 계속 되야 한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대로 전략이 실행 되야 할 현장인 세상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감으로, 그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전략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더니티(modernity)로 대변되는 오늘의 사회 속에서 한국선교가 전통적인 선교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다면 선교전략 전반에 관한 재고(re-structuring)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계속 문제되고 있는 선교사 동원, 훈련, 배치(재배치, 전략적 배치), 교육, 귀환, 탈락, 지원, 관리 등의 문제가 재고돼야 한다. 또한 새로운 선교전략과 패러다임 위한 창조적인 선교 방법과 형태가 구체적으로 만들어지도록 해야 하는 전략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 동안 보내는 일에만 집중했었지만 이제는 보내는 자(sender), 보내심을 받는 자(being sent), 그리고 수용자(receiver)의 각 관점에서 전략적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한국교회선교운동이 이제까지 구멍가게식 경영을 했다면 이제는 그 규모와 역사 면에서 백화점식 전문적인 운영을 해야할 시점에 와 있다. 선교동원, 파송, 후원, 관리 면에서 이제는 전문적인 지식과 이를 운영할 인적 자원의 축적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한국교회선교운동은 단순히 보내는 일에 급급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관건은 드러나는 문제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나 자기학대적 접근이 아니라, 이 문제들을 풀어 갈 수 있는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문명의 붕괴에서 조셉 테인터(Joseph Tainter)가 지적한대로 문명의 붕괴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투자된 에너지가 그 한계효용치를 넘어서서 아무리 많은 에너지를 투자해도 더 이상의 생산성을 향상시키지 못할 때 일어난다고 지적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선교가 이제까지의 패러다임으로 지속된다면 가까운 시간 안에 한계효용치를 넘어서고 말 것이다. 그 분기점이 현재라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영적 부흥을 통한 선교, 저 비용 고효율의 선교, 전략적이며 총체적인 선교, 거품이 아니라 실제적인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선교가 일어나기 위한 전략적 재고(re-structuring)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존 구조에 대한 창조적 부인, 새로운 외부적 힘, 수용하려는 의지, 그리고 신적 간섭이 있어야 만 가능한 것이다. 

맺으면서 
전술 한 것처럼 늦었지만 한국선교에 대한 자기반성의 목소리가 선교사들과 선교운동가들로부터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선교가 영적 각성과 부흥을 경험한 자들에 의해서 시작되듯이 한국교회선교운동의 새로운 도약은 영적 각성을 통한 회개와 새로운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함으로 시작돼야 할 것이다. 더욱이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면서 한국교회는 일종의 분수령에 서 있다.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 들어가고 있고, 교회적으로는 후기 기독교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Os Guiness가 말 한대로 대부분의 기독교국가들이 현대화를 경험하며 후기 기독교사회로 진입하면서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몸집만 비대해져 버린 움직이지 못하는 비만증 환자로 변해 버린 것처럼 변해버릴 기로에 서 있다. 만일 오늘의 한국교회의 선교운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화되어 한 단계 올라선다면 이러한 분기점에 서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영적 부흥과 지속적인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토론의 위한 제안 
1. 새로운 밀레니움을 맞이하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들은 무엇인가? 
2. 이러한 변화에 대해 한국 사회 특히 교회 그리고 선교구조에서 반응해야 할 부분들을 어떤 것들인가? 특히 기존의 패러다임과 비교해서 변화해야 할 부분은 어떤 것들인가? 
3. 한국교회 선교의 up-grade를 위해 변화돼야 할 지도력, 신학, 전략의 중요한 부분들은 무엇인가? 
4. 한국의 선교운동이 바꿔져야 할 것 중 한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참고도서 
Bosch David, TRANSFORMING MISSION, Orbis 1991 
Eden Mattyn and Well David Ed. THE GOSPEL IN THE MODERN WORLD, IVP 1991 
Erdoes Richard, "The Year 1000"  Psychology Today, May 1989 44-45, reprinted from AD 100; 
Living on  the Brick of the Apocalypse (San Francisco: Harper & Row, 1989) 
Huntington  P Samuel, THE CLASH OF CIVILIZATION(문명의 충돌),  김영사 1997 
Naisbitt John, MEGATRANDS ASIA(메가트렌드 아시아), 한국경제신문사 1996 
Newbegin Lesslie,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Eerdmans 1989 
Phillips James Ed. TOWARD THE 21ST CENTURY IN CHRITIAN MISSION, Eerdmans1993 
Sine Tome, WILD HOPE, Word,1991 
Tainter A. Juseph, THE COLLAPS OF COMPLEX SOCIETY(문명의 붕괴).  대원사 1999 
임종표 편집, 한국선교의 반성과 그 준비,  한인선교사 지도력 개발회의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