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신약신학

1세기의 메시아 운동

예림의집 2016. 12. 31. 17:38

1세기의 메시아 운동


예수님 당시 다양한 계파가 존재했던 유대 사회의 그룹들 안에 강렬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 이 대망 사상은 일반 백성에게도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대망하는 메시아 강림에 대한 이야기는 1세기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고 중요한 유대 종말 사상의 하나였다. 예수님을 전후로 약 1백 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10여개의 메시아 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리라 믿었고,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크고 작은 혁명 그룹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1세기 배경에서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당시 메시아를 신이라는 존재로서 잠시라도 생각했던 1세기 유대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네가 그리스도냐?”하고 질문했을 때, 그들 모두가 삼위일체 신학을 가졌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구절과 ‘인자’라는 구절이 당시 유대교 속의 적어도 어떤 그룹에게는 메시아적 의미를 지닌 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 용어들이 신적 존재 자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제2 성전시대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1세기에는 여러 그룹들 안에 다양한 메시아 대망 사상이 있었다고 이미 말했는데, 메시아에 대한 통일된 개념은 없었다. 하지만 왕권자체에 대한 생각이 메시아를 언급하는 본문들 보다 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왕이 도래한다는 의미는 첫째, 그가 성전을 회복하고 지으실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 그가 적들과 결정적인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며, 이스라엘을 구출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예수’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유대인에게는 본래 성이라는 것이 없다. 굳이 성에 대응하는 것을 든다면 이름 앞에 지파나 아버지의 이름, 출신지를 쓴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히 드문 이름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예슈아(예수아)’, ‘예수’, ‘예슈’, ‘예호슈아(여호수아)’ 등으로 발음되는 이 모두가 ‘구원’이란 뜻을 가진 낱말인데 조금씩 다르게 발음된다. 1세기 당시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면 예수 역시 어떤 예수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생긴 호칭이 ‘나사렛 예수’ 또는 ‘나사렛 사람 예수’이다. 예수는 제자들과 반대자들에 의해 여러 번 ‘나사렛 예수’로 언급되고 있다(마 2:23, 21:11, 26:71, 막 1:25, 10:47, 14:67, 눅 4:34, 18:5, 7, 19:19).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베들레헴 사람 예수’로 불리지 않았고, 누가가 ‘본 동네’라고 한 가버나움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고 사셨지만 ‘가버나움 예수’라는 호칭도 없다. 그렇다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예수’라는 말도 없다. 기독교 박의 자료도 나사렛 예수가 사실로 살았다는데 대해서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2:23에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어떤 학자는 ‘나사렛 사람’과 ‘나실인’을 연관시켜 해석하려고 시도하며, 다른 학자는 이사야 11:1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네쩨르)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에 나타나는 ‘네제르(가지)’를 나사렛의 히브리 발음이 ‘나짜렛’과의 유사성을 찾아 설명하력 한다. 이 구절의 ‘네쩨르’가 메시아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함으로 마태가 이를 약간 변형시켜 ‘나사렛 사람(헬라어: 나조 라이오스)’로 썼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마태복음 2:23의 출처를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예수는 당대 사람에 의해 ‘나사렛 예수’로 불렸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나사렛 사람 예수(히브리어로 예슈 하노쯔리)’라 하며, 히브리어에서 기독교인은 ‘나즈룻(ㅌ)’이라고 통요하고 있다. 이 히브리 단어들은 모두 나사렛이란 지명에 관련되었을 뿐, 메시아(헬라어로는 그리스도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짐)와는 전혀 무관하다. 따라서 이 히브리 용어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무시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들이라 하겠다. 탈무드에서 조차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가증한 싹’으로 말한다. 1세기 당시 나사렛은 옆 동네 가나에 비해 보잘 것 없는 마을이었다. 빌립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했을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대답한 나다나엘의 말에서도 나타난다(요 1:46).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1세기경 나사렛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으며 당시의 인구는 약 150명이었다. 나사렛은 하부 갈릴리의 구릉지에 있으며 해변 길(비아 마리스)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음에도 상거래의 주요 거점이 되지 못했다. 나다나엘의 속단과 오해는 예수 당시와 오늘날 까지도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마법사 나사렛 예수상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는 나사렛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였다고 외쳤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리적 출신보다는 본래적 출신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세기 메시아 운동이 활발했다고 했는데 당시 메시아라 자칭하거나, 메시아로 일컬어져 많은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 메시아가 죽임을 당하면 따르던 사람들은 엉뚱한 줄에 섰었던 것으로 이해했다. 이후 따르던 자들은 그 운동을 포기하거나 혹은 그의 가족 중에서 새로운 리더를 얻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예외가 되었다.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당국에 의해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거의 30년 동안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중심에 서 있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아무도 야고보가 메시아라 말하지 않는다. 이들은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메시아였다.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실패한 것이 아니었으며 진정한 메시아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부활하셨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그들을 다시 가르치셨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고 마침내 따르던 자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초기 교회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에 의해 역사적 예수를 만들었고 복음서를 통해 기록하게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말씀하셨던 것이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성취도어 깨닫게 했던 것이다.

 

6.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헤롯

성경이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약성경은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의 역사나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를 이해함으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였는데 이스라엘만은 다른 정복지역과는 다른 대우를 해주었다. 그중 하나가 로마의 원로원에서 대리 지배자로 보내는 총독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왕을 세워 통치하게 하였는데 처음으로 세운 왕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왕으로 있었던 헤롯 대왕이다.

헤롯 대왕은 헤롯 왕가의 창시자로 10명의 아내를 통해 자식을 낳았는데 그 가계도는 너무나 복잡하다. 그는 25세에 갈릴리의 총독을 역임하고 주전 40년에 로마 황제 아구스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임명되었는데 처음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두매, 사마리아, 갈릴리 지방을 정복하고 주전 3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였다. 성격이 강인하고 또 현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매우 잔인하여 왕위를 지키기 위해 자식과 아내를 주였으며 유대인의 왕으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주변의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살해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마 2:16). 많은 공공사업을 하고 주전 19년에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에 착수하였고 주전 4년에 악질에 걸려 70세로 죽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통치되었는데 유대와 사마리아는 아켈라오가, 갈릴리와 베레아는 헤롯 안디바가, 이두래와 드라고닛은 그 동생 빌립이 통치하였다(눅 3:1).

헤롯 대왕의 아내 말다게에게서 난 장자 아켈라오가 주전 4년에서 주후 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를 통치하였는데(마 2:2) 그의 통치가 너무 억압적이었기에 유대와 사마리아의 귀족층이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위협을 내세워 아켈라오를 숙청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에 아켈라오는 왕좌에서 쫓겨나고 유대는 황제가 임명하느 총도기 다스리는 로마의 속주로 되었다. 유대를 다스리던 총독 중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빌라도는 너무도 유명하다. 갈릴리와 베레아는 말다게에게서 난 헤롯 안디바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투옥하고 그를 처형시켰는데 예수님은 그를 여우라고 칭했고(눅 13:31-32)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신 후 갈릴리 사람이었기에 빌라도가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님을 보내었을 때 심문을 받게 하였다(눅 24:7-12).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예루살렘에 오셔서 관을 당하시는데 목요일 저녁에 잡히신 후 여러 곳으로 끌려 다니시며 심문을 당하신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유대의 총독 빌라도,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에게로 밤새도록 심문당하시다 결국 빌라도에 의해 사형언도를 받게 된다. 이 과정 중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은 하룻밤 사이에 유애를 다스리는 총독 빌라도에게서 갈릴리를 다스리는 헤롯 안디바에게 보내어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기(절기)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를 이해하면 이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심문 받는 시기는 유월절 전날이었기 때문에 갈릴리를 다스리던 헤롯 안디바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상태이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던 중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임을 알고 판결을 내리기를 거부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헤롯 안디바에게로 보내었던 것이다(눅 23:1-7).

누가는 이 심문과정을 기록하던 중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이 원수였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다스렸던 지역을 생각해 보면 된다. 헤롯은 유대인으로 갈릴리를 다스리는데 빌라도는 이방사람으로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를 다스리고 있으니 이로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이 이들을 서로 시기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는 이들이 친구가 되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한편이 되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여 보내신 자를 정확하게 깨닫게 하려 하심에 감사하고 보내신 자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도록 성경상고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지 못하며 반대편의 입장에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인 것임을 헤롯과 빌라도의 관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