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계시이다.
계시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자기 계시이다. 모든 지식을 사람이 만드는 것이지만 계시는 만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는 없다. 계시는 완전하게 충족되었다. 성경의 완전성이라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수준이다.
베드로가 근심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 속에 하나님을 가두다가 이제 내가 하나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안에 속하는 것이다. 근심하며 하나님 속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신학은 하나님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욥이 눈으로 본다는 표현도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은 본래 이 계시를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주셨다.
일반계시: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 , 일반은혜 comman grace
양심, 질서, 씨뿌리면 열매를 맺는 것을 아는 것, 일반 계시
이 계시만으로도 하나님을 알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은총을 은총으로 받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되(일반계시) 그를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예배하지도 않고 (롬1:21).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남아있는 사람.
특별계시: 구원받은 백성에게만 알려주시는 지식, 특별은총은 구원이다. 특별계시는 구원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과정(수납)
성령의 영감(inspiratio)으로 기록되었다.
성령의 조명(illuminatio)으로 받는다.
성령의 감화(dersuasio)수납이라는 말은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 겸손의 신학 → 알면 예배를 드리게 된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지식이 있다. 성령 = 진리 = 존재의 변화에 이른다.=예배
칭의의 진리를 수납하면 의롭게되고
성령의 진리를 수납하면 거룩하게 된다.
존재의 변화는 순종에서 일어난다.
신학이란 이런 질서가 내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오직 성령으로 영감된 하나님을 말씀을 성령의 조명으로 감화된 심령으로 믿음으로써 수납된다.
감화된 심령 =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 (notitia vera Dei)
예배의 초대라는 말은 초대란 주는 것을 받는 것이다. 예배는 빛이다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해해서 믿는 것이아니라 믿어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감화된 심령으로 받는 것이 믿음이다.
거룩하게 된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다. 이것이 신비이다. 이것을 깊이 깨닫는 것. 100%하나님의 일이고 100%나의 일이기에 100%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만 답변해라.
신학의 절정(culmen)이 로고스의 성육신이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신 모든 것이 다 복음이다. 율법을 순종한 것도 복음이다. 우리도 그 로고스를 드러내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것이 예배이다. 아벨의 예배이다.
로고스가 성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드러내심이 절정이고, 우리에게 이제 그것을 이루신다.
수사학적 맞추심: 하나님은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해 아버지로 오시고 의사로도 오시고 교사로도 나타나신다. 우리가 알게금 나타내신다. 유모가 옹알이를 하듯이... 삼위일체 교리가 옹알이다. 우리의 적의 적으로 나타나신다.
신학적 맞추심: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원이다. 불안전하지만 우리의 행위와 인격을 받아서 의롭다 하신다. 우리가 완전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이유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불완전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받아주셔서 완전한 행위가 나가게 하신다.
겸손 세상의 겸손을 가지고 있는 자는 하나님의 겸손을 모르는 자이다.
principium (원리) (아래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원리’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존재의 원리 (p- essendi; principle of being) 하나님의 자기계시 스스로 존재한다.
인식의 원리 (p- cognoscendi; principle of Knowog)
외적(externom) : 성경, 말씀
내적(internum) : 성령(믿음으로 수납)
word and spirit : 말씀이 있는 곳에 영이 있고 영이 있는 곳에 말씀이 있다.
원형계식(revelatio archetypa) : 하나님의 자기들간의 지식, 성부가 성자를 알고 성자가 성령을 아는 지식
모형계시(revelatio ectypa) : 우리에게 알려 주신 지식,
원형계시가 모형계시로 오는것 이것이 하나님의 맞추심이다.
성경은 계시의 준비이고 성경이 나에게 와야 계시가 된다.
생명이 된다가 아니라 있다이다.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데카르트
불교와 다를 바 없다. 신을 생각한다.
헤겔
자기뿐만 아니라 존재도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생각이 완성되면 신이 존재한다. 하나님은 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로크
경험되지 않은 것은 없다. 개념이라는 것은 감각의 표상이다.
흄
그냥 존재하는 하나님은 없다. 모든 사람이 각자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슐라이엘마허
주관주의 (나로부터 올라가는 신앙)
배경: 기독교 사상 사회에서 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 진다. 그에따라 교회는 과학화 되고 냉소적이 된다. 슐라이엘마허는 이를 지적하고 형식적 되는 것을 비판하여 신은 객관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바라봐야한다. 믿음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의식해야 한다고 하여 믿음의 성향이라는 개념을 강조. 객관적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아니라 내속에 있는 것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의 감정이 있고 노력하면 신에게로 나아 갈 수 있다.
변증학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존 감정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엘마허는 전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하나님은 전체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향이 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있다 종교는 자리는 부분이 전체를 느끼는 느낌 혹은 의존하는 감정에 있다.
기적관 : 내가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기적이다. .
계시 : 부분이 전체를 느끼는 그 순간의 이끌어 가는 것, 진행형 계시, 완결되지 않은 계시,
우리가 우리의 기원이 되는 것
만약 말씀이 의미가 있다면 교리는 하나님의 관한 감정이다.
리쯜
슐라이엘마허의 주관주의 비판하고 이어 받는다. 공동체의식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진리 = 주관의 합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주관주의를 포장한다. 슐라이엘마허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끼리 대체로 맞으면 진리라고 착각한다.
신학: 신앙은 계시의 학문이나 그는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 신앙으로 신학을 세워가는 것이라고 함. 계시를 받아들인 신앙으로 학문을 세우는 것이 신학이나 리쯜은 계시를 제외한 개개인의 맘의 신앙을 세우는 학문이라 한다. 하나님의 말씀 객관을 따르지 않으며 우리를 주장하고 공동체를 주장하면 하나님과 멀어진다.
칼 바르트
신앙의 전제로서 성경이 있다. 성경은 신앙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 곧 성경은 계시의 객관적 준비이고 신앙은 계시의 주관적 준비 이 둘이 만나면 (계시의 사건) 계시가 된다.
신앙은 행위이다.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행위이다. 행위를 전제로 말씀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믿음은 선물이다. 자신은 객관이라고 말하나 슐라이마허의 계열에 계속 있다. 곧 나에게 부터나오는 상승신학이다.
“신학이라는 것은 신학적 훈련이다.”“교회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대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이 신학이다. ”
칼빈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우리를 아는 지식’으로 나눈다. 하나님의 손 = 하나님의 섭리
보이는 손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보이지 않는 손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자신의 무지, 무익, 가난, 연약, 타락과 부패를 느끼지 않고는 아무도 참다운 지혜의 빛, 구원의 능력, 모든 일에 부요한 자비, 순결한 의가 주님께만 속한다는 것을 알 수 가 없다.”,“자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진지하게 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존재아는 것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을 돌리는 지를 아는 것
어떻게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지를 아는 것
신앙은 맹목적 기쁨이다.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 : 땅보다 인간이 뛰어나고 인간보다 천사고 .. 올라가는 것은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 위에서 내려오는 신앙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먼저 두려움과 경배를 가르치고 우리의 안내자요 선생이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모든 자비를 구하게끔 하고, 그 자비를 얻으며 그 공로를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게 한다.”
상대성에는 판단이 있고 절대성에는 은혜가 있다.
비교를 초월해야 판단에서 자유롭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는 자리가 필요하다. 절대성을 놓치면 소망이 사라진다.
theologia reformata est
Theology ... shond be always being ...
개혁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져 가고 있는 신학이다.
우리의 경건은 하나님과의 존재의 통보나 신화를 통한 자질의 변화에 주안점을 두기 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강조한다.
계시 예배
그리스도와 연합
의의 전가 -교제: 칭의 - 칭의의 의가 전가
-교통: 성화 - 성화의 의의가 전가
주입이란 단어는 캐톨릭 단어이다. 자질의 주입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가이다.
내가 영성이 있어 목사가 된 것이 아니다. 영성이라는 개념보다 경건이라는 말이 더욱 합당하다.
영성은 캐톨릭의 자질의 개념이다. ‘영성이 있다, 없다’는 비판이 된다.
하나님의 뜻은 은사의 전가이고 은사를 맘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것을 빚어가길 원하신다.
노력해서 은사를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원어로는 단수이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색이 다를 뿐 하나의 열매이다.
j. Gresham Machen “처음부터 기독교는 증인 되기 운동었다. ”
신학 학문의 출발
‘가르치는 순서’
성경론- 신론(창조주 하나님)- 인간론(인죄론)- 율법- 기독론(구속주 하나님)- 구원론(성령론)- 교회론(성례론 포함)- 시민국가
어거스틴은 신학을 설교, 교의, 교리라 한다.
변증학: 하나님의 지식을 얻는 방법
주경신학:
역사신학: 교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하는 가
실천신학: 진리를 어떻게 확산시키는 가
조직신학: 유기적인 전체 신학
변증학
워필드의 변증학 분류
철학적 변증학
심리학적 변증학 : 인간의 구조를 바탕으로 말씀을 변증해 가는것
초자연적 변증학 : 기적을 통해 말씀을 변증하는 것
역사적 변증학: 역사의 인물의 행위를 통해 말씀을 변증하는 것
성경적 변증학: 성경은 틀림이 없고 오류가 없다는 것으로 말씀을 변증해 가는 것
슐라이엘마허
그는 지식과 감정과
바르트.
하나님의 행동은 곧 자신의 계시행위이기 때
칼빈
1)율법의 이중적 사역
* 율법의 본질 - 정죄적 율법: (루터)
- 규범적 율법: (칼빈)경건하고 올바르게 사는 법
■ 칼빈은 율법을 하나님의 뜻의 계시로서 삶의 규범으로 파악하고, 본래 이 율법은 선했으나 인간의 우연한 타락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 율법의 기능 : 교훈적, 권고적
■ 율법은: 거룩(1~4계명)하고 올바른 삶(5~10계명)의 규범
죄를 지으면 법이 저주이고, 경찰관이 편하다.
■ 율법의 이중적 사역 : 1) 정죄적 기능, 죄를 깨닫게 한다. 2)규범적 율법
->율법의 본질은 규범적인 기능을 한다.
■ 율법은 폐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부족해서 그렇다. 율법의 저주가 폐지된 것이다. 중보자 영인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킬 수 있다.
■ 죄사함과 의의 전가는 함께 동반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와 교통함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거듭남의 비밀이 없다는 것은 일반 도덕 선생과 교회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 칼빈의 율법의 용법
①신학적 용법(칭의) ②정치적 용법 ③규범적용법(성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의 의지까지 새롭게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로 말미 암아 )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유, 사랑 자유자의 멍에 이 멍에는 새의 날개이다. 주의 멍에를 매야만 멍에
* 루터는 신학적 용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
성화, 칭의, 유기의 단계가 있다면 성도는 성화와 칭의의 단계로 오간다. 그러나 유기의 단계까지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곤고는 성화와 칭의 사이에서 갈등함을 말한다. 세례는 공로가 아니다. 율법의 두기능은 명령과 약속이 있다. 복음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칼빈은 명령과 약속을 함께 얘기하고 루터는 명령만 얘기한다.
원수를 내몸과 같이 사랑해 너는 할수 없어 그리스도는 할수 있어 -칼빈-
원수를 내몸과 같이 사랑해 안그러면 벌받아 -루터-
율법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해야 할 것으로 나아간다.
믿는 것이 아는 것이다.
방법론
(1)사색적 방법
이성, 나로부터 나가는 것. 내속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헤아리는 것
1)이신론적이며 합리주의적인 방법론
하나님
2)교리적이며 합리적인 방법론(카톨릭)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어야하는 계시만 수용한다. 카톨릭은 계급이고 단계이고 형식이다. 이는 공로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higher reason, human reason.단계가 있다.
“나는 믿기위해서 알기를 구하지 않고 알기위해서 믿는다. (p25)”
3)독단주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 진리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우연히 우리의 이성과 합쳐질때 진리가 된다.
(2)신비적 방법
내속에 자질이 있어 하나님과 교통한다면 그것이 신비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교통한다.
1)스피노자
하나님은 지으신 것 안에 계신다. 지으신 것이 지은것 안에 있다.
Extra nos 우리 밖에 초월하신 하나님 (스피노자는 이점을 말하지 않는다. )
in nobis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초월적이며 내재적이시다.
2)신플라톤주의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됬다. 유출은 본질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용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만들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을 때어 주신 것이 안다. 우리안에는 신성이 없다. 그러나 신플라톤은 영은 선하고 육체 악하다. 육체에 메어있는 것은 혼이고 육체를 초월한것은 영이라한다.
(3)귀납적 방법
워필드 찰스 하찌, 성경은 자명한 진리이다. 성경은 스스로 증거한다. 내 이성으로 최대 공약수를 찾아내는 귀납법은 잘못이다. 성령의 내적인 가르침은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 영향까지 조명한다.
■ 인격의 정도에 따라 우리는 수치를 당한다. 신이 수치를 당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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