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스크랩] 초대교회사 요약

예림의집 2016. 10. 15. 03:07

초대교회사 요약


제1장 서론

교회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주전 4세기부터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황제가 폐위되어 로마제국이 멸망하던 476년까지로 잡는다. 내면적인 교회 역사를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 할때부터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제1세기는 사도시대이며, 제2세기의 전반은 속사도시대, 중엽은 변증가들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레니우스를 기점으로 교부시대가 시작된다. 제3세기는 기독교 사상의 확립기라고 할수 있다. 제4-5기는 기독교 역사의 분깃점이다.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정통사상의 형성기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교회가 세속화로 달려가는 전환점이기도 하다. 또한 정통 신학이 확립되는 시기 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가 정교의 밀착으로 세속화되는 시기이다.

초대교회사의 최대의 주제는 로고스이다. 로고스는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중심 열쇠이다. 교회가 태동되기 전 후 수세기 동안 초대교회사의 중심주제는 로고스였다.



제2장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

그레코-로만, 유대주의, 헬라적 배경, 로마적 배경, 유대적 배경 등 교회가 발전했던 세계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은 초대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그레코-로만 주전 330년에서 주후 330년 즉 알렉산더 대제부터 콘스탄틴 대제까지의 660년간을 대상으로 한다. 1기는 알렉산더부터 주전 30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까지, 2기는 아우구스투스에서 콘스탄틴대제까지이다. 1기에 알렉산더 대제로 인해 헬라문화가 뿌리는 내리게 된다. 그의 영향으로 해외진출, 헬라문화의 확장, 하나의 통화정책, 헬라어의 확산, 헬라 사상체계 수용, 고등교육, 헬라신 확산, 철학과 삶의 융합, 개인주의 발흥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 하였다. 로마의영향은 2세기의 최고 정점에 달하다가 2세기 이후 바바리안 족이 침입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로마제국: 지리적 및 정치적 환경

정치적으로 기독교는 영국에서 페르시아, 사하라 사막에서 북서부 독일에 이르기까지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국가, 로마제국에서 태동하였다. 로마제국의 지리적 배경인 지중해는 페르시아, 헬라, 마케도니아를 거쳐 이제는 로마가 그 주인이 되었다. 당시 지중해는 오늘날과 같이 지중해 연안을 많은 국가들이 공유하는 공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로마제국의 사방을 잇는 거대한 내륙 수로였다.

로마의 평화는 모든 방면에서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켜 문학, 건축 그리고 조각 등에서 위대한 업적을 낳았고, 법률연구가 대단히 발달했으며 경제가 번영했다.


2)헬라적 배경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 헬라가 지중해를 지배하였다. 헬라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데, 전기는 다시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탈레스부터 파르메니데스, 2. 소크라테스, 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제1기의 관심은 세계의 본질이고, 2기의 관심은 인간, 그리고 3기의 관심은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을 한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후기는 스토아 주의, 에피큐리안 주의, 신피타고리안주의, 회의주의 그리고 중기 플라톤주의를 포함한다.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발 후기이다.


(1)초기의 헬라철학

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 고민하였다. 탈레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에서 발생한다고 하였다. 클리투스는 우주의 근본요소는 불이며, 불에서 만물이 발생한다고 하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은 마음, 즉 그가 말하는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했다.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상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믿었다. 그에게 존재하는 것 한가지는 존재 그 자체였고 우리가 경험하고 관찰하는 모든 변화는 단지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2)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아 헬라 사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한가지는 인간 자신이며,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곧 참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며 이 지식은 적당한 교육에 의해 획득되어질 수 있다. 사람은 교육을 통해 자신을 도덕적으로 선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단순한 이론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었다.


(3)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와서 철학체계로 열매를 맺는다. 플라톤은 두 개의 세계, 즉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데아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한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는 우리가 “아이디어”라고 칭하는 바 사상, 의견을 의미하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본질적인 실체로서 사물의 참된 본질이다. 이데아의 개념은 초월적인 개념으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지니며,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하는 영적 실체들을 이데아로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세상과 개별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육체와 영혼이 상호 연계성을 가지며, 영혼과 육체가 단지 개념상 구분 될 뿐 실제로 구분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은 감각에 의해 개체를 이해한다. 때문에 감각은 지식의 출발이나 기초를 제공하게 된다. 지성은 모든 개체로부터 공통적인 요소들을 취함으로써 보편을 발견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수천년동안 기독교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4)중기 플라톤주의

주전 1세기에 다시 발흥하였다. 플루타크, 아풀레이우스, 막시무스, 알비누스등이 사상가이며, 이들은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신 플라톤주의에로의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우주와 신의 문제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조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지존자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먼저, 영적인 영역과 물질적인 영역에 속하며 인간은 양 영역을 연결한다. 둘째, 섭리론으로 인간과 절대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셋째, 영혼 불사개념으로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마지막으로, 신개념의 정립을 들수 있다.


3)스토아 주의

플라톤 사상보다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고스는 자연법으로 모든 자연이 운행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로고스는 신적인 존재이며, 창조적인 신적 능력이다. 둘째, 로고스는 도덕법을 의미하며, 이것은 칸트가 “실천이성”이라 부르는 것으로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셋째, 로고스는 실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말하며, 폴 틸리히는 이것을 “순수이성”이라고 불렀다.


(1)스토이즘의 역사 개관

초기는 대체적으로 주전 300-200년 까지의 기간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노, 크린테스, 크리시푸스등이다. 중기는 기원전 150년부터 기독교가 시작되던 시기까지를 말하며 대표적인 인물은 파나에티우스, 포시도니우스를 들 수 있다. 후기는 네로 시대에 활동하던 관용론의 저자 루시우스 세네카, 로마의 노예 에픽테투스, 그리고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들 수 있다.


(2)스토아의 가르침

초기에는 먼저, 유물론이다. 둘째는, 스토아주의는 범신론이다. 셋째는, 모든 실체가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 형태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일원론자이다.

중기와 후기는 좀 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플라톤 철학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빌려왔다. 또 하나의 특징은 우주의 근원을 불이라고 보는 헤라클리투스의 개념이 포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토아 주의는 하나의 종교 이며, 철학이다. 스토아 주의가 특성상 철학이기 때문에 단지 교육받은 지식층만에만 수용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토아 주의가 요구되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수 없었다. 제국에서 우수한 지식층들이 주로 스토아 철학을 따랐다.


(3)스토아 주의와 기독교

스토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관이다. 스토아주의는 완전히 인격적인 하나님을 갖지 않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은 단지 내재적인 신일 뿐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의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스토아 철학의 범신론이 말하는 신과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우주는 시작과 목적과 끝을 가지나 스토아 철학에에서는 창조와 종말로 이어지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로고스의 성육신의 개념은 찾아보기 힘들며 단지 그들이 말하는 성육신이란 우리 각자가 자기 안에 로고스의 일부를 가졌다는 개념일 뿐이다. 또한 스토아 철학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죄의식이나 죄사함이 없으며 개인적인 불멸도 없다. 사람이 죽으면 그의 신적 부분이 전체로 돌아간다. 창조와 종말이라는 섭리적 역사 전개가 아니라 범신론이라는 굴레 속에서 일원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이웃을 향한 도덕적 의무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 희생과 능동적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중”을 도덕적 원천의 본질로 보는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스토아 주의는 성경이 말하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4)필로

구약과 헬라철학을 결합시키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가 직면한 문제점이 바로 성경의 창조교리와 헬라의 창조관이 부조화였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근원이 되는 물질과 접할 수 없다고 믿었던 필로는 하나님과 세계와의 사이에 중재자를 생각해 냈다. 이 중재자가 로고스였다.

필로는 헬라의 영향을 받아 헬라 사상을 유대주의와, 유대 사상을 헬라화 하려는 독특한 시도를 하였는데 그것은 헬라 사상이 독립적으로 발전 되었다기 보다는 모세에게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결론

로마세계는 외형적 토양으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제공하였으며, 복음전도를 가능하게 하시기 위하여 교통망을 발달 시켰고, 언어를 통일하여 주셨다. 로마세계의 정치적인 통일, 교통의 발달, 언어의 통일, 도덕적인 요인, 종교 및 사회적인 요인이 당시의 기독교를 널리 확산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요인들이다. 반면 헬라세계는 문화적, 교육적 및 철학적 배경을 제공하였고, 유대세계는 긴박한 종교적 배경을 형성한 초대 기독교의 매트릭스를 제공하여주었다.



        2. 유대주의 배경

        유대주의는 기독교의 탄생과 결정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신약의 기독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에 깊이 뿌리내려졌 있다. 초대교회는 완전한 유대인들로 이루어졌고 구세주 역시 유대인이었다.


        1) 다윗에서 알렉산더까지

        다윗은 메시아 희망의 상징이 될 만큼 이스라엘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에스라가 시작한 율법을 회복하려는 운동에서 발생했다. 필레스틴에서의 통치변화는 유대 백성들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2) 마카비

        250년까지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준수했다.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포기하고 헬라 방식을 따르도록 강요했다. 유대종교는 금지되었으며 헬라종교가 강요되었다. 유대의 예식, 할례를 금지하고, 모세의 율법책을 불태운 것이었다.


        3) 회당과 산헤드린

        예배의 중심지는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은 성전을 빼앗긴 후 기도, 성경낭독, 가르침을 목적으로 그들이 본토에서 행하던 것보다 회당을 강조했다. 팔레스틴에서 유대인의 통치기구는 산헤드린이었다. 유대인들은 산헤드린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4) 바리세인과 사두개인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운데서 나왔고 율법사였다. 구습을 선호하고 변화를 싫어한다. 부활과 영생, 천사와 영혼의 불멸의 부정하고 육체와 함께 사멸된다고 믿었다. 내세가 없다고 했으나, 바리새인을 사두개인과 모든 면에서 정반대였다. 바리새인은 평범한 유대인, 율법사, 율법을 새롭게 해석, 지독한 민족주의자로 헬라나 로마 등 어떠한 외세의 영향도 반대하였다.부활, 내세의 삶과 상벌사상도 믿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대립되었다.


        5) 분산된 유대인

        분산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였다.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어 헬라어 사용 세계에서 구약성경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70인역으로 알려짐.


        3. 제국의 종교

        자연종교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산, 호수, 강, 나무, 태양 그리고 달에서 어떤 동물과 사람에서 찾는다. 자연종교는 항상 집합종교이다. 개인적인 요소는 거의 배제된다. 농업, 어업, 목축 사회에서는 그러한 종교가 알맞는 것처럼 보인다. 신비종교는 신과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데 있다. 국가종교는 정치적인 특징을 지니고, 황제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또 신과의 교재, 연합 특별히 구원이 없는 종교이다.



제3장 초대 기독교 박해

고대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박해를 받은 원인이 "무신론과 식인풍습, 근친상간"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믿고 있던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곧 로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는 반 국가적인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로마의 재난이 발생할 때 마다 기독교인은 비난의 대상의 되었으며, 사자들의 밥이 되었다. 이와같은 박해의 시작은 네로 황제때부터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 두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초대 교회 박해는 크게 황제의 고의에 의하여 시작된 1차 박해기간(약 A.D.64-96), 지엽적,국부적으로 진행된 2차 박해기간(약 A.D.98-249)그리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진행된 3차 박해기간 (A.D.250-313)으로 대별할 수 있다.


Ⅰ. 제 1차 박해기간(A.D.64-96)

1. 네로황제 이전

네로 황제 이전 기독교의 박해는 간헐적이고 부분적이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던 시기에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어진 사건 , 글라우디오 황제(A.D.41-54)때에는 행18:2에 언급된 로마인의 추방 사건과 고관 아우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아내인 폼포니아 그래시나라는 한 여인이 외래미신(기독교를 가리킴. henry bettenson ,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이라는 죄목으로 피소되어 재판을 받은 사건등이 있었다.


2. 네로 황제 박해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그가 통치하던 주후 64년 네로는 로마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수에토니우스(syetibius)가 기독교인들이 형벌을 받은 원인을 기술하면서 "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속에서 찾아볼수 있다. 또한 타키투스도 기독교를 가리켜 "매우 위험한 미신 " 표현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를 옳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대화제 사건은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함이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통치권을 확고히 다진 네로가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대적하여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타기투스의 연대 ,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에 보낸 서신 > ,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의 설교를 통해서 네로의 잔학성과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알수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들의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스는 쇼가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하고 본보기적인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에 동정심이 생긴 것은 사실상 그 일이 공중의 선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타기투스의 연대기 중에서)


"우리는 훌륭한 사도들을 면밀히 살펴보시다. 베드로는 한 두 번이 아닌 여러 번의 노력을 통하여 불의를 극복하였으며 따라서 그의 증거는 영광의 자리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열정과 노력으로 바울은 인내의 상을 받았습니다.....바울은 동서에 복음을 전했을 때 그는 자신의 믿음에 합당한 고귀한 명성을 얻었습니다." (로마의 클레멘트 고린도에 보낸 서신 5장 )


"당신은 이처럼 이 권면에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와 고린도에 심어 놓은 번영의 씨앗을 섞어 놓았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순교했다." (고린도의 감독 디오니시우스의 설교중에서)


2. 도미티안 황제 박해

도미티안 황제는 모든 면에서 네로의 전철을 밝았다고 한다. 유세비우스는 네로와 도미티안의 박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는 로마에서 상당히 많은 귀족들과 저명인사들을 부당하게 살해했고.....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적대하는 일에 있어 네로의 후계자가 되었고 " 또한 터툴리안도 도미티안이 네로와 " 동일한 일"을 행하려 했으며 " 잔인성에 있어서 실질적인 네로의 후계자였다"고 말한다. 도미티안 자신의 아내였던 도미틸라를 유배시키는 한편, 그의 집정관이었던 자신의 조카 플라비우스 클렌멘스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사도 요한이 말씀을 증거하였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Ⅱ. 2차 박해 기간 (A.D 98-249)

2차 박해 기간(트리얀 황제 A.D98-117 ,안토니우스 피우스 A.D.138-161)동안에는 박해는 지역에 따라 국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그에게는 신앙을 부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 특징이라고 할수 있다.

1. 트라얀 황제치하의 박해

트리얀의 칙령에서는 네로와 같이 임의적인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칙령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 첫째는 의도적인 색출은 금한다는 것과 둘째는 익명의 고소는 정부가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그리고 셋째는 과거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현재 아니라면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는 정도 완화되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 잡아들이기 " 위한 수색은 금지되었다.


2. 하드리안 통치의 박해

하드리안은 125년경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하드라인의 칙령은 비기독교인들로부터 근거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합당한 법적 절차가 있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며 , 그 재판도 분명한 증인과 증거들이 확보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치하의 박해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투스라는 독실한 청년이 순교했다. 지방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다. 게르마니쿠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이 불의하고 무법한 세대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총독은 그에게 '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라고 재촉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정착되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하니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않는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 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폴리갑에 이어 165년 대표적인 변증가 저스틴도 순교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았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막시미누스 통치 3년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이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 3세기 50년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50년에 데시우스 황제가 들어서면서 3차박해가 시작되었다.



Ⅲ. 3차 박해기간 (A.D.249-313)

제 3차 박해기간 동안에는 부분적으로 일어난 2차 박해와는 달리 제국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전국적인 박해가 발생한 것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중에서 주요한 원인 5가지를 든다면 (1)기독교의 급속한 성장 (2) 제국의 경제 및 도덕의 쇠퇴 (3) 로마제국 창립 1000주년의 임박 (4) 교회는 국가내에 국가이며, 따라서 로마제국의 위협적 존재라는 로마 지도자들의 견해 (5) 로마의 쇠퇴가 로마신들이 기독교의 성장을 싫어했기 때문에 내린벌이라는 견해를 들수 있다.


1.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50년부터 251년 사이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다. 데시우스의 명령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극심한 박해는 다행히 오래가지 못했다. 제국을 통치한 뒤 2년이 못되어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갈루스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데시우스의 전사후 잠시 박해가 중단되었지만 갈루스가 들어서면서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갈루스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2년이 채 못되어 제거되고, 발레리안이 아들 갈리에누스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인에 대한 발레리안의 태도는 이례적일 만큼 우호적이었지만 그의 통치 말엽에 257년부터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 하고 목숨까지도 빼았았다. 발레리안의 박해때에 프리스쿠스, 말쿠스 그리고 알렉산더 세 사람이 사나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순교의 영광을 차지했다.발레리안이 죽은후 그의 갈리에누스가 황위를 승계하였다.그는 말씀의 사역자들이 자유로이 직무를 수행해도 좋다는 칙령을 발표한 후 43년간 평화가 따랐다.이 기간은 전에 찾아 볼 수 없을 만큽 기독교는 성장했으며,아름다운 교회가 건축되었다. 뿐만아니라 영향력있고 교육받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동시에 경제,군대,사회적 조적이 놀랍게 발전했다.


2.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데시우스와 발레리안의 시대가 지난 뒤 이미 권력을 획득하고 있었던 디오클레티안이 황제가 되면서 박해는 또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초기 교회는 매우 급속이 성장하였다. 그러나 시벨레를 섬기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박해를 가해기 시작했다. 전국에 칙령을 내려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의 직책들을 박탈하고, 교회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어떻게 해서든 제물로 드리게 했다. 디오클레티안의 박해는 제 3차 박해 기간 동안 가장 길고 무시한 박해였다. 이 기간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렀다. 그일은 모든사람에게 알려졌으며 "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디오클레니안의 박해는 305년 황제직을 사임한 후 잠시 중단되었으나 곧 재개되어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공인이 있을때까지 계속되었다.


3.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도 박해가 발생하였다.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던 갈레리우스는 8년이 되던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의 중병때문이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다.드디어 갈레리우스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관용의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관용의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인들은 서들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갈레리우스의 황제를 기점으로 박해는 약간 완화되었으나 기독교인들의 박해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콘스탄틴 황제에 와서이다.


Ⅳ. 콘스탄틴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은 A.D2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죽은후 그의 부하들이 콘스탄틴을 후계자로 임명한후 제국에는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은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켰다.312년 콘스탄틴은 "이교적 마술을 의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위해 이탈리아로 행진했다. 밀리안 전투 하루전 대낮에 콘스탄틴은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고 그 위에는 " 이 표지를 정복하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콘스탄틴은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앴다. 다음날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05년 디오크레타안이 막시미안과 함께 퇴위한후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차지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에 그의 친구이자 동료 군인인 리키니우스를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통치할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리키니우스는 정지적인 야심을 갖고 콘스탄틴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틴의 누이를 아내로 맞았다. 313년 콘스탄틴과 리키니우스는 밀란의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표했다. 이 밀란의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표한 최최의 선언이었다. 핍박받으며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기독교가 밀란의 칙령으로 공식적인 자유를 허용받은 셈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밀란의 칙령을 발표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년도에 있었던 밀비안 다리 전튜에서의 승리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인 자유를 보장하였다.아프리카의 총독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그의 공문에는 "도시나 여러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보편교회의 재산으로서 현재 원로원 의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모든 재산을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며 " 명문화 시켰다.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호의는 재산권 보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해 황제는 교회 사역자들의 경비를 보조하기 칼타고 감독 카이실리안에게 3000폴리(약 10000달러)를 하사했다. 콘스탄틴은 "심령이 안정되지 못한 몇 사람들이이 위험하게도 교회를 변조하여 백성들을 거룩한 보편교회로부터 빗나가게"하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재정적인 문제를 넘어 교리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313년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콘스탄틴은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가 멸시를 받을 때 국사가 대한한 위험에 처했고, 반대로 이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켜갈 때 탁월한 축복이 "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예배하며 경배하는 것이 로마의 안녕과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콘스탄틴의 기독교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기독교 공인에서 끝나지 않고 로마의 기독교화라는 인상까지 느낄정도로 광범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틴은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성직저들에게도 면세를 확대해 주었고,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으며,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콘스탄틴이 자신의 정부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그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건축한 수많은 교회들이다. 파손된 이교사원을 수리하거나 다시 건립하는 것을 금지했고, 기독교인들이 이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막았다. 비록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고무되었던 기독교 붐은 아들들에 와서도 계속되어 기독교인이 기아 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로마에서 가장 우대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Ⅴ. 요약 : 교회 생활의 변화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애버리트 퍼거슨이 지적한 것처럼, "순교는 종종 기독교로 관심을 이끌고 선전도 하는 공개적인 광경이었다. 2세기의 기독교 변증가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맞이한 방식은 그들에게 기독교의 진실성을 확신시켰다고 증언했다. 터튤리안의 대담한 선언- "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은 격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교 공인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박해받는 지하종교에서 공인된 종교로 바뀌었고, 그결과 외형적으로 상당히 확산되었다. 새로운 교회 건물이 들어섰고 교회는 국가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자연히 정교의 밀착이 이루어졌고,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하면서 교회에는 세속화 현상이 발생하였다. 예배의 형식이 영적인 성도의 교통에서 외형적인 형식 위주의 예전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니케아 회의를 통하여 정통신학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제4장 속사도

속사도들은 열두 제자 이후로는 초기 기독교 저자들로서 속사도 시대라는 불리는 1세기 말부터 2세기까지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속사도들의 작품을 통하여 신생 교회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의 내적인 분열, 박해, 유대교와 이교도 사상에서 겪는 갈등 등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점들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로마의 클레멘트

        클레멘트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자신의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서신은 교회에서 권위있는 서신으로 받아들여져 보편화되었다. 서신에 나타난 특징은 장로와 감독을 구별하지 않고 상호 동의어로 사용했다. 헬라적인 요소와 소토아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을 만물의 절대적인 지배자라고 보면서도 창조와 관련하여서는 플라톤주의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데미우르게로 묘사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직접적인 창조자가 아니라 창조를 대신할 자 데미우르게를 하나님이 만드셔서 그를 통해서 세상이 지어졌다고 말한다. 헬라주의적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신관을 분명히 삼위일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믿음은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뚜렷한 신앙고백이 있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는 모든 천사보다 탁월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도 모든 천사들의 이름보다 더욱 우월하시다. 클레멘트와 플라톤주의 사상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바울의 신앙이 율법과 질서에 대한 윤리적인 관심을 지닌 기독교 형태로 바뀌어 갔음을 반영하고 있다.


        2. 안디옥 감독 이그나티우스

        안디옥의 제3대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크리스티아노이 즉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린 것은 이 세계적인 도시 안디옥에서였다.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경과 부흥 도상에 있던 보편교회를 연결하는 중요한 고리였다.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데 있어 감독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그 하나됨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감독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편지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순교에 대한 예찬이다. 순교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이르기를 열렬히 갈망하였다. 또 교회의 일치를 강조했다. 감독직에 대한 강조, 이단에 대한 경고, 성만찬 강조, 모든 사람이 교회 권위에 순종할 것을 강조하였다. 지역교회의 직분을 감독직, 장로직, 집사직으로 나누었다. 단일 감독제를 강조하였다. 그는 감독없이는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감독에게 속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못했으며, 감돌의 동의가 없이는 세례와 성찬도 집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성만찬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감독이나 그의 권위를 부여받은 대리자가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이단적인 요소는 기독교의 유대주의화이고, 가현실이다. 성육신을 비롯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무로 돌리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로고스의 성육신은 기독교의 설정 근거였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못마땅히 남을 사랑해야 될 것을 강조한다.


        3. 폴리갑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제자로, 아우렐리우스 황제때 순교하였다. 사도들과

후 사도시대를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 20세에 이미 서머나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그의 교회사

적 중요성은 말시온 발렌티누스 추종자들을 정통주의로 회심시키는 도구로 쓰임받았다. 그리고 클레멘트나 이그나시오보다 공관복음, 사도행전, 바울서신, 히브리서, 목회서신 등 성경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성서적 칭의론을 실천적 인물이었다. 다른 사도들보다 더 풍부한 성경적 지식, 이단에 대한 철저한 비판, 사도의 신앙을 후대에 그대로 전수한 장본인이며, 사도 요한의 제자이다.

        로마의 신비종교, 영지주의, 유대주의가 속사도 신학에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실천적 목회적 관심이 이들 작품 속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행위가 강조되면서 그리스도를 새로운 율법선생으로 이해하였다. 가장 공통적인 것은 순교에 대한 지나친 열정. 신앙의 표준으로 성겨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통의 형성이다.


제5장 기독교 변증가

        이 세상의 어떤 종교보다도 윤리적이며 어떤 철학체계보다도 가장 훌륭하고 진정한 철학임을 변호하면서 기독교를 수호하려는 저술가들이 바로 변증가이다. 변증가들이 유대인을 공격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을 공격한 것은 이들이 기독교의 복음을 이질화시켰기 때문이다. 변증가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믿는 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지으신 전능하신 분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로고스를 보내셨다고 주장했다. 영지주의자들이 신구약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에 반대하여 변증가들은 신구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변증가들은 헬라 철학과 기독교를 연결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였다.


        1.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아테네의 콰드라투스 변증가의 아버지라는 최초의 변증가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이적이 그가 구세주이심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콰드라투스는 박해로 인해 순교한 푸블리우스 감독 후임으로 아테네 감독이 되었다. 아테네 교회 교인들은 박해로 푸블리우스 감독이 순교한 이래 바른 진리에서 벗어나 거의 타락했으나, 그는 교회가 평정을 되찾고 신자들의 믿음이 부흥하게 되었다.


        2. 아리스티테스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성품을 들어 기독교를 변증하고 있다. 진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기독교인들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이 섬김은 그들의 도덕성애 의하여 확증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티네스는 아리스토넬레스의 노선을 따라 하나님을 동자로 보았으며 그가 인간을 위해 만물을 만드셨다고 이해했다. 그는 결국 기독교인들만이 가장 고차원적이며 참 진리를 발견하는 자들이라고 결론지었다. 기독교인드른 가장 탁월한 관습을 가졌으며 서로 서로 사랑한다.  기독교인들의 우월성과 건정성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윤리적인 삶, 信行의 일치에 의하여 입증된다는 사실이다.


        3. 신앙의 변호자 저스틴 마터

        2.3세기 기독교 대변자들로서 변증서를 내어 놓은 변증가들 가운데 최초의 한사람으로 아마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고 자신의 저술을 통하여 신앙을 위해 싸웠다. 저스틴 사상은 당대의 철학과의 만남,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저스틴은 기독교를 변증하는 일에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사용한 학식있는 최초의 이방인이었다. 그는 신약이 구약의 성취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영지주의의 대부 말시온을 상당히 비평했던 것이다. 자신의 변증을 순교로 확증했다. 기독교 안의 보편주의적 요소를 파악하고 전 문명사를 그리스도 안에서 종합, 완성한 사도 바울 이후 최초의 사상가였다. 저스틴은 기독교가 무식한 종교라는 당대의 기독교 바판에 맞서 기독교야말로 진정으로 지성적인 종교하고 변호하고 있다. 영지주의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4. 타티안

        헬라인들에게 고함은 타티안의 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종교의 기원을 야만족들에게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모든 지혜는 로고스에서 기원하며, 신학의 중심이 로고스이다. 이런 로고스의 중심 사상은 그의 스승인 저스틴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로고스는 이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이지만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고, 오직 지존자만이 시작과 끝이 없으신 분이라고 이해하였다.


        5. 기타 헬라 변증가들

        아테나고라스는 삼위일체 하난님에 대한 신앙을 변호하고, 하나님, 우주의 창조자이신 로고스를 믿고 있는 신앙인임을 강조하였다. 로고스는 성부로부터 처음나신 존재라는 사상은 플라톤주의와 유사하지만, 삼위의 뚜렷한 구분은 플라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아테나고라스보다 구체적인 삼위일체 개념을 제시한 변증가는 테오필루스이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였다. 그의 저서 제1권은 하나님, 제2권은 구약성경의 해석과 시인들의 오류, 제3권은 기독교의 도덕적 탁월성을 다루었다. 디오기네투스는 역사에 결정저이라는 역사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신적인 출발을 보였다. 그는 저술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월적 성격에 대한 생생한 상징적 표현이 하나의 신학의 주제로 흐르고 있다. 사르디스 멜리토는 구약의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을 동일시하여 전혀 둘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변증가들은 성육신과 부활신앙으로 기독교의 본지를 조직적으로 제시하여 이를 후대 교부들이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체계화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기독교 조직 신학자로 평가를 받는다..



제6장 이단의 발흥과 발전

        1. 이단의 역사적 배경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은 시대마다 달리하여 왔다.  사도요한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요, 어거스틴은 신앙자체를 해치는 하나님에 관한 잘못된 신앙, 저스틴은 사탄의 교리라고 정의하였다. 교회는 2세기 중엽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와 내부로부터 오는 이단이라는 두가지 도전에 직면하였다. 교회의 태동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벌써 이단은 역사에 등장하여 정통신앙을 침해하고 있었다. 이런 이단세력은 궁극적으로 사탄의 조종을 받는 집단들이라고 이해하였다. 말시온은 신구약을 예리하게 구분이고, 영지주의 이원론을 기독론의 가르침 속에 융합시켰으며, 몬타니즘은 임박한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예언하였다.


        2. 영지주의

영지주의는 영과 정신은 선하고, 물질과 육은 악하다고 하였다. 특징은 실재에 대한 이원론적 해석과 금욕주의적 윤리, 그리스도에 대한 색다른 이해, 죽음의 망각으로부터 구원해주는 능력으로서 지식의 강조하였다. 그리고 유대교와 헬라철학, 동양철학을 합한 혼합종교 사상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단계의 지식과 믿음을 창조하셨으며, 성경외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신 비밀 구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영지주의는 형태를 갖춘 하나의 사상체계는 기독교 이후에 형성되 신학의 조류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영지주의의 종류에는 크게 이집트, 시라아, 폰틱, 유대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바실리데스의 이론은 나지 않으신 아버지가 마음을 처음 낳고, 마음은 이성을 이성은 중용을 중용은 지혜와 권세를 , 지혜와 권세는 미덕 르린스 그리고 천사를 낳았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이집트계 영지주의는 135년~160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발렌티누스이다. 그는 하나님을 단일한 초월자로 그리고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존재로 무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일자에서 기원한 존재로 보았다. 시리아계는 120년경에 활동하던 새투르니누스가 대표적이다. 시리아계 영지주의는 자유 방임주의 삶을 대표하고, 구세주와 유대인의 하나님을 예리하게 구분해 구주는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육체와 형태를 갖고 있지 않으며, 유대인의 하나님이 천사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폰틱계의 대표적인 인물을 말시온이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심지어 전쟁을 즐기는 악마의 협잡이, 일관성이 없이 심판을 일삼는 자기 모순적 존재라고 힐난하였다. 세상을 만든 하나님보다 우월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찬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생략된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을 인정, 반유대주의, 신구약의 구분, 신구약의 불연속성이 특징이며, 구원을 영적인 영혼의 구원만으로 한정하였다. 유대주의계 영지주의는 양자설이며, 예수를 참 선지자로 이해하고 예수와 모세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였다. 에비온파는 할례를 강조하고, 율법에 따르는 관습을 지켰으며, 예루살렘을 숭배하기까지 하였다. 케린투스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나라를 소유할 것이라는 교리도 가지고 있다.

        영지주의 유형의 특징을 요약하면, 새로운 교리를 도출하거나 역사적인 가르침을 일대 수정하여 자신들의 교리를 산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를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새로운 교리를 고안하였다. 이런 교리적인 혁신 때문에 이단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영지주의 평가는 자신들만이 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처럼 과장했다는 사실이다. 발렌티누스는 헬라사상과 동양사상을 합한 것이다. 원래 존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출발하였다. 아카모스는 모든 물질의 어머니는 데미우르게라고 하였다. 데미우르게는 아카모스를 통해 지혜와 연관을 맺고, 영적인 선한 요소가 있는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말시온주의는 기독교의 급진적, 반물질적으로 재편하였으며, 유대주의 요소들을 제거하였다. 정경을 가지고 감독의 조직을 강화하였다. 율법가 선지자들이 선포한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보았다. 신학의 출발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였고, 옛언약과 새언약을 명확히 구분하였다.이들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몸은 물질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로 하였다. 철저한 금욕주의 사상 때문에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결혼은 악한 것으로 인식했다. 이들의 영향은 영육의 분리 사상이다. 즉 이원론을 뿌리내려 내세적인 신앙을 더욱 촉진시켰다.


        3. 몬타니즘

        교회의 신앙을 따라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히폴리투스는 몬타누스를 영적으로 선두에 서고 싶은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몬타누스는 이교 제사장이었던데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후 이교주의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새 종교를 구 종교 관습속에서 이해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징은 독신과 순교에 대해 강조하였고, 영적인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이며, 여인이 교회의 공직을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몬타누스주의자들은 세상과 완전한 분리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엄격한 기독교 생활, 금식, 세상과의 분리, 매일의 삶에서의 그리스도의 고백,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을 것을 강조했다. 또한 극단적인 성령운동은 교회에 무질서를 가져다 주었으며, 교회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몬터나즘은 교리적인 기준이 없는 신앙이 교회에 얼마나 유해한 것인가를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다.





제7장 교회의 응전

        거짓 가르침과 박해가 교회를 위협하자 교회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던 어떤 권위를 요청하게 되었고, 여기에 대한 응전으로 자연히 사도신경을 비롯한 일련의 신경을 발달, 정경의 형성, 감독제도의 발흥이 촉진되었다.


        1. 신경의 발달

        신앙고백은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장사지낸지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당대의 영향력있는 이단들인 가현설을 염두하여 두고 속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이고 역사적인 삶이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신앙고백서는 성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대교회의 가장 집약된 신앙고백은 역시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로마신경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이단의 발흥에 대한 교회의 응전으로 생성된 신조는 이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정착되었다. 터툴리안의 신앙율은 이레니우스의 것과 비교할 때 한층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후대에 발전된 사도신경과 흡사하다. 그의 신앙율의 처음 부분은 요한복음1장과 유사하다. 터툴리안과 이레니우스의 신앙을 초대교부들의 신앙율의 전형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2. 정경의 형성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을 단지 확인했을 뿐이다. 신약성경의 기록과 그것들을 교회에 의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 모두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는 신앙과 가르침의 확실한 기초를 정경에서 찾았다. 성령에 의해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발흥으로 촉진된 정경의 형성은 이단과 이설을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교회에 제공해준 셈이다.


        3. 감독제도의 발달

5세기에 발흥읗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감독제도의 발흥이다. 교회가 내외적으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는 그들의 결집된 힘을 통해 외부의 도전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교회의 성직은 감독, 장로, 집사 셋으로 대별하여 감독이 총괄하였다. 이그나티우스가 교회 감독의 권한을 강조한 것은 감독에 대한 순종이 교회의 하나됨을 달성하는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이레니우스는 로마교회는 사도들의 권위의 계승한 강조한 중요한 인물이다.  베드로와 바울의 사도직을 승계한 정통성있는 교구이다.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인정한 반면 터툴리안은 사도적 권위를 어떠한 교회에서 찾지 않고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사도적 기원을 가진 교회들, 고린도, 빌립보, 에베소, 로마교회에서 찾았다.



제3부 3세기와 기독교 사상의 확립

제8장 이레니우스와 소아시아 신학

        그가 성육신하셔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오랜 족보안에 총괄갱신하신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안에 존재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얻는 것이다라고 Irtnaeus의 말이다. 교회 역사에서 신학은 지역적인 특성을 반영하면서 발달하였다.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는 소아시아의 전통과 로마의 전통을 연합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를 논박함으로써 2세기의 기독교의 교리를 종합시켰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 계획을 역사 신학내에서 진지하게 설정하였으며, 신약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보면서 성경을 총체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다.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이런 통시적인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의 개념은 에피데이키스라고 불리우는 단편작품 사도 설교의 논증에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삼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그것은 아들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이레니우스는 마귀는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전도시키려고 하였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마귀의 종으로 예속되었고, 아담의 후예인 모든 인간은 아담에게 예소된 것이다.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된 셈이다. 그는 타락이란 인간 본래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본래가졌던 자신의 성장을 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총괄갱신 사상이 시작된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사상은 세대주의자들은 모세 율법의 신약적 의의는 그리스도가 재 해석한 범위내에서 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신다는 것은 곧 인류를 회복하는 것이며 인류를 갱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레니우스에게 구속사는 점전적인 교육의 과정이며, 이 역사속에서 하나님은 오랜 과정을 통해 한걸음 인간을 점차 발전시키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하심으로 극치를 이루고 보편적 복음이 교회를 통해 전세계에 전파되도록 하신다는 것이었다. 이레니우스에게 성육신은 구속사의 중심 개념이다. 이레니우스에게 문자적인 부활은 영혼의 구원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육체의 구원을 무시하는 영지주의 이원론을 논박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그의 총괄갱신에서 교회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에서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실체는 물질적인 요소를 평가절하시키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이레니우스가 확신하던 것이다. 그는 사도들의 가르침의 정확성은 그들의 가르침의 통일성에 의하여 확신된다고 믿었다. 사도적 계승은 영지주의 교사들에 대항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교회의 전통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교회의 전통에 호소하는 이유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확히 결정하기 위해서이다. 또 교회 내 예식에서 읽을 수 있는 책과 정통상을 인정받은 책들 간에 명확한 구분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을 육체에서의 영혼의 해방으로 보는 영지주의에 반대해 구원이 역사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구속사는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다는 사실을 강조, 창조와 구원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 것이 그의 역사 해석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이다.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한시대를 여는 역사적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니우스가 이전 사상들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고 있는 인물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이레니우스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매력을 주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제9장 라틴 신학

        아테네와 예루살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단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스토아적 기독교 플라톤주의적, 변증론적 기독교에 대한 모든 계획들을 치워버려라라고 Tertulian이 말했다.


        1. 터툴리안과 서방신학

        그는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평가한다. 그가 몬타니즘에 합류한 것은 이 집단이 터툴리안 자신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욕주의적인 신앙이 터툴리안의 생활 태도와 일치되었고, 교회가 회개의 문제와 관련하여 느슨한 관습을 가지고 있는데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해석된다. 그의 변증론1)은 신앙의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그에게 신앙을 변호하는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가 후기에 철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는 헬라철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영지주의나 발렌티누스 주의 등 이단들과 헬라철학의 연계성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이단들은 성경을 소유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만이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으며, 그런 면에서 이단들은 취득시효를 상실했으며 전통적 교회가 그 권한을 갖는다. 사도들의 전통속에서 정통성의 근거를 설정하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들로부터 전해오는 공통의 신조 전통이야 말로 정통과 이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주장하고 설득하였다. 교회의 전통을 조명하려고 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수한 사도들의 가르침 즉 진리의 전승과 보존을 통해 교회의 전통을 조명하려고 하였다. 그는 본질과 위격이라는 단어를 소개하고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공식용어가 되었다. 삼위 하나님은 본질, 지위 그리고 권능에서 동등하다고 하였다. 그의 작품 저변에는 영혼과 육체 모두가 물질적인 본질이라는 사상이 반영되었다. 영혼에 관한 저술 영혼의 증언에서 스스로 친스토아주의자이고 반플라톤주의자임을 밝혔다. 철학을 혹독하게 비판했으면서도 가끔 철학적 관념들과 체계적 진술들을 저술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종말론 문제에서는 그는 삼위일체의 위격에 따라 역사가 세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는 확고한 세대주의자였다. 그의 세계관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립적인 구조로 이해하고 서로 간에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어떤 작품에는 로고스 시낙, 라틴정신, 금욕주의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몬타니즘에 가담한 이후 몬타니즘에 부정적이며, 종말론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고등성경관을 갖고 있다. 신약성경들을 구약과 같은 권위로 두고 있다. 라틴 신학의 정초를 놓은 셈이다.


        2. 카프리안과 북아프리카 교회

        칼타고 감독을 지냈다. 모든 시민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린 후 이를 준행하였음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소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위협과 투옥과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제사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지켰던 이들은 고백주의자들로 알려졌다. 교회의 통일성을 영적이고 내적인 통일성에만 찾지 않고 오히려 가견적인 교회의 일치 속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하였다. 가견적인 단일체로서의 교회 밖에는 영적 생명이나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변함없는 확신은 감독직의 통일성 이론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교회의 일치를 감독의 일치와 직결시키고 교회가 하나이듯이 감독직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노바투스는 극단적인 분리적 사고는 성찬예식에서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노바투스파들은 신앙을 변절했던 변절자들에 대해 관대한 당시의 기성교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노바티안들에게도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재산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노바티안의 세례을 인정한 것은 노바티안 교회가 범한 죄가 분열이지 사도적 신앙을 부인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단자들의 세례문제를 두고 아프리카와 로마 사이에만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대교회 범 교회적인 논쟁점이었다.



제10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칼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칼타고는 로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세계의 지적, 문화적 중심지였다.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적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는 신학의 정초이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는 저스틴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알렉산드아에 설립했다. 클레멘트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무법주의적인 색욕주의 윤리적 결과를 낳은 영지주의자들을 반대하였다. 클레멘트는 저스틴 마터와 마찬가지로 평교인으로서 독립적인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로고스를 제시하거 참된 구원의 길을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이교들에게.... 이교 문화의 문제점과 오류를 공격하면서 고대 철학자들과 헬라문화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고 있다.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을 완전케하여 참지식에 이르게 하는가를 설명한다. 로고스는 보다 높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되 다만 영적, 도적적, 지적 수련에 정진하는지만이 이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 철학도 진리 탐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하였다. 클레멘트는 기독교와 헬라철학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 연합 가능성은 그의 로고스 신학에 있었다. 로고스 즉 하나님의 사상 또는 이성-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했다. 그는 로고스를 신락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로고스를 통해 헬라철학과 기독교 진리를 연계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저스틴과 클레멘트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신앙과 지성을 구분하고 지식과 신앙의 관계에 있어서 지식이 신앙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은 단순히 권위에 의존하는 기독교인들의 신념으로서 책벌에 대한 두려움과 상급에 대한 소망과 관련된 것이다. 지식과 신앙은 별개의 독립적 존재가 아니며 자식은 신앙에 의해 확정되고 신앙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신적인 것과 상호교류 할 수 있다.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역사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그의 성경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그의 성경해석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삼위일체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한다. 클레멘트가 니케아적 삼위일체 개념과 근접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이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였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난의 역사적 정점이다. 성육신 이후 역사가 다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직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전되어 간다고 보았다. 그는 이레니우스의 구속사관과 헬라의 윤회사관을 조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기독교 사상은 방법론으 오로겐의 신학의 원형이 되었다.


        2. 오르겐

        지성을 통해 정력적이고 창조적이며 끈기 있고 인내심 있는 면모를 보여 주었다.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일상생활에서의 신앙훈련에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했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은 마19:12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고환을 거세하였다는 것이다. 열성적인 금욕 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는 오르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그의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적인 삶은 그의 교육 활동, 설교, 논박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헬라클라스를 세워 초보교육을 맡기고 자신은 좀더 수준있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담하였다. 오르겐은 이방 철학에 대한 관심과 관영을 그에 대한 비판을 더해준 듯 하다. 오르겐은 신빙성 있는 본문을 찾아내기 위한 작업외에도 많은 일을 하였다. 즉 요한복음, 마태복음, 아가서, 로마서 바울서신 등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였다. 성경주석 외에 오르겐의 사상이 가장 함축적이고 체계적으로 담겨있는 것은 페르아르콘2)이라 작품이다. 제1원리에는 고대가 낳은 최초의 조직신학의 교과서이며.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 해석의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영혼의 기원에 관하여는 오르겐이 분명히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성경의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신관은 성부>성자>성령 종속의 의미이다. 만인 구원설(연옥설)을 주장하였다. 삼위 이해는 삼위의 위격을 구분하지만 삼위가 서열상 동등하지 않고 능력에 있어서도 차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자의 성부 종속, 성령의 성부,성자의 종속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처음부터 물질계를 창조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오직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영적존재들만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또 만민 구원론은 가장 큰 비판의 대상인 것이다. 악한 자들과 이단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며 그곳에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재연합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 영혼선재설과 보편 구원론은 교회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그에 대한 정죄를 초래하였다. 세속학문과 철학을 기독교와 연결시키려고 한 시도가 한계가 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세상 학문과 철학이 기독교의 진리를 밝혀주는데 쓰임받을 수 있다는 확신은 매우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금욕적, 지성적 삶은 이단들을 제지하고, 이방 세계로부터 개종자들을 획득하며 장차 일어날 위대한 범교회적 대연합회의의 토대를 제공하고, 수도원 운동이 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3. 오르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오르겐의 구원론은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관심과 병행하여 있었으나, 이후에는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관심을 흡수했다고 보았다. 아다니우스는 성육신이 곧 인간의 가능성을 현시한 것으로 이해했다. 로고스의 성육신은 인간의 구원과 신화를 확보하시 위함이라고 보았다. 육신이 되신 아버지의 본성이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참되고 특유한 로곳스가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신화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아다나시우스는 말했다. 단성론 교회인 콥틱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두 인격으로나 또 양성에 있어서 그가 고백될 것이라 다만 한 하나님, 한주 한본질, 한 왕적인 권능, 하나의 주되신 능력, 한 역사, 한 본체, 한 의지, 성육신하신 하나님-로고스의 한 성으로서 경배하였다.






제4부 4~5세기와 정통의 확림

제11장 삼위일체 논쟁

성부가 한분이고 성자는 또 다른 분이라면 그리고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한 하나님이 아니라 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면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는 사람이어야만 하나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성자가 하나님이고 성부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신성 문제와 관련된 문제는 초대교회 수세기동안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을 삼위일체의 논쟁이라고 부른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삼위일체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나 그리스도의 신선을 학문적으로 좀 더 체계화시킨 변증가들에게 오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저스틴에게 성육신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되시는 분이다. 삼위일체는 종속적과 비슷했다.  이레니우스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는 결코 시작이 없으신 분이다, 하나님과 영원전부터 함께 존재하셨기 때문에 시작이 있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의 인간으로 스스로 총괄갱신하신 것이다. 한 사람이 죄를 통해서 인간이 죽음이 이르듯이 한 사람의 승리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구속사역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성부와 성자가 고유한 대속의 사역을 수행하였음을 제시하고 있다. 로고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은 하나님께 값주고 사신 것이다. 터툴리안은 삼위의 한 본성, 본질 그리고 삼위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신적 본질을 공유한다. 인격에 관한 한 성부와 성자는 분리되고 구분된다. 따라서 한 신적 본성에 두 신적 위격이 존재한다.

서방교회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그 논리가 강했지만, 삼위의 영구한 구별에 대해서는 악하였다. 동방교회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2. 단일신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되  오류들의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단일신론에는 양태곤적 단일신론, 역돋적 단일신론이 있으며,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성부고난설, 사벨리안 주의가 있다. 노에투스와 프락시아스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만을 가진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성자가 성육신하신 성부 자신이며, 성부 자신이 고난받고 죽으셨다고 주장한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자들은 성부고난설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양태론적 단일 신론은 사벨리안주의이다. 사벨리안주의는 하나님의 단잉성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상당히 다른 방법을 사용한다. 그 방법으로 양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삼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삼위를 구분하려고 했지만, 그리스도의신성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역동적 단일신론을 양자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데오도투스 사상은 로고스를 위격으로 보는 터툴리안이나 로고스를 성부와 동질로 보는 오르게의 견해를 동시에 거부한다.261년에 양태곤적 단일신론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단일신론은 소시니안주의 합리주의, 유니테리안니즘, 해방신학을 통하여 현대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

삼위일체는 서방 못지 않게 동방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방에서 진행된 삼위잎에 논쟁은 약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 알렉산더 감독과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 사이에서 발생한 존쟁이 발단되었다.  아리우스는 성부가 유일무이한 신성을 가지고 있고, 성자는 성부에게 영원히 종속한다는 오르겐의 이론을 강조하였다. 즉 그의 주장은 과거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오르겐은 성부와 성자간의 명칭의 차이가 필연절으로 본질의 차이를 함축한다고 보았다. 그는 성자가 사실상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의 장자라고 믿었다.  하나의 존재로서 아들은 천사들보다 높지만, 성부 하나님보다는 낮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고난받으신 구주가 하나님일 수 없다고 추정하였다. 하나님의 단일성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부 혼자만 없으신 분이며, 성부만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보았다.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와 구별된다. 사모사타 바울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완전한 이성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아리우스가 가르친 로고스는 완전한 하나님도 완전한 사람도 아니었다. 영혼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도 완전한 사람도 아니다. 아리우스는 다신론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유일성을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였고, 하나님의 물질계의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헬라 사상을 주저함이 없이 수용했으며, 하나님의 아들 또는 로고스를 신적 존재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 논쟁의 중반 쯤 아다나시우슨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직을 계속하고 니케아 신조의 기초를 세우는데 공헌하였다.


        4. 니케아 회의와 신조

        동방과 서방 두 개로 나뉜 종교적 상황을 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콘스탄틴 대제는 자체 교회 회으를 소집하여 신학적인 문제를 하나로 통일시키기로 했다. 그의 관심은 연합된 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선언한 니케아 신조는 결국 오랜 논쟁의 장본딘인 아리우스의 다음과 같은 사상을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다. 무에서 피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다른 본질이다는 것을 모두 거부한 셈이다. 아리우스파는 정죄를 받았다.


        5. 니케아회의 이루의 아리우스 논쟁

        니케아 회의 이루 서방교회와 아다나시우스를 따른 자들만이 니케아 신조의 동질에 만족했기 때문에 니케아 신조가 교회의 교리로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아다나시우스 대 아리우스 논쟁은 니케아 회의 이후에 진행되었다. 삼위일페는 본체가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형태, 역할), 상호 협의이다.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 아니라명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아리우스의 로고스 피조사상으은 피조물을 경배의대상으로 하는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 창조와 구원을 동일선상에서 보면서 구원과 창조의 근원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아다나시우스에 따르면 구속으로 인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된 인간은 갱신될 수 있는 신화될 수 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로고스가 인간 예수의 정상적인 마음을 대신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다른 평범한 인간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바실과 두 그레거리는 삼위일체를 설?하기 위한 사용방법에 일치를 보았다. 한 본체안에 세위격이라는 용어이다. 히포타시스는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설명하는 표현으로 사용하였다. 삼위일체론의 각 위격의 구분하여 논하였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나시지 않는 신성의 근원이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신 사역을 수행하시는 자이며, 성령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사역을 완성시키는 자이다.  삼위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은 삼위 하나님으로 하나라는 것이다.


        6. 콘스탄티노플 회의

        이 회의를 통하여 아리우스파는 완전히 정되를 받고, 종말이 되었다. 삼위일체의 현대적인 의미로 총체적인 정립, 발전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정립하자 이제는 신성과 인성 양성의 문제로 논쟁의 초점이 옮겨가지 시작하였다. 자연히 삼위일체 논쟁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론 논쟁이 역사에 등장하였다.



제12장 기독론 논쟁(362~680)

칼케돈 신조는 한 분 동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과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지시되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질이기고, 동시에 육신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질이시되 죄는 없으시며, 신성으로는 만세전에 성부에서 나셨으나 인성으로는 우리 임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모(데오토코스) 동정녀 아리아에게서 나시었으나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두 성 신성과 인성이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


        1. 아폴리나리우스 주의

        그리스도라는 한 존재 안에 완전하고 대조적인 두 가지 본지, 즉 신적이고 영원하고 불변하여 완전한 본질과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부패할 수 없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본질이 공존할 수 없다고 느꼈다. 예수가 태어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로고스가 영의 자리를 대신하여 인간적인 몸과 연결되었다고 믿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이성적 기관을 제거시켜 그의 인간적 본성을 회생시키고 그 빈 자리에 말씀을 채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는 니케아 신조의 결정을 거스리는 것이다. 그의 기독론는 로고스-인간의 논리를 제시하기는 했지만 신성을 강조한 나머지 인성이 마치 신적 본성에 흡수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다. 신성을 강조하여 인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신 것이다. 알렉산드라학파와 안디옥 학파로 대표되는 기독론 논쟁은 아폴리나리우스의 정죄로 끝나지 않았다. 논쟁은 두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한 쪽은 양성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로 대표되는 네스토리우스파이고 다른 한쪽은 연합을 강조하는 소위 단성론자들이다. 이 두파는 교회에서 정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 속에 수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양성론

        성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으로 사람이라는 두가지 사실을 강조하였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어떻게 연합되었는가하는 문제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류를 낳고 말았다. 시랄과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원초적인 출발점은 마리아를 데오토코스(성모)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성모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크리스토토코스(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불러야 된다고 보았다. 결국 신성과 인성을 구분하려는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예수를 인성으로서의 예수와 신성으로서의 예수 두 인격으로 말한다는 인상을 남겼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리아에게서 난 인성이 한 인격안에 혼합되었다는 사실을 피하기 위해 둘의 관계를 연합이 아닌 양성의 구분이 뚜렷한 결합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계적인 결합은 유기적인 결합과 달리 속성의 교류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 마리아는 피조물이며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하셨다고 하면서 성육신의 잉태의 행동 주체가 마리아가 아닌 성령님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리아를 데오토코스라고 한다해도 그 때문에 마리아에게 인간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시릴이 알렉산드리아에 회의를 소집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고 인정으로는 우리와 동질이라는 측면에서 양성이 분명히 구분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분리됨이 없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한 인격의 두성 교리를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논쟁

       킬케돈 신조에서 한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두 성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과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고 밝힌다. 유티키스의 가르침은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강조한 나머지 신성과 인성 두 성이 한 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레오의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와 유토키스의 극단인 단성론을 피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다고 가르쳤다. 칼게돈 회의에서 핵심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한 인격안에 혼동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며, 분할없이, 분리됨이 없이 연합되었다는데 있다. 유티키스주의와 단성론 문제를 해결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며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완전한 인간이라는 니케아 전통을 재확인. 기독론의 문제를 정착시켰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안디옥 신학은 기독론의 핵심을 하나님의 뜻과 순종하는 인간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조명하려고 한 반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론의 핵심을 로고스-성육신이라는 틀 속에 이해하려고 했다.


        4. 칼케돈 이후 기독론 논쟁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로마제국의 극동 메소포타미아 방면의 에뎃사를 중심으로 지지기반을 넓혀나갔다. 이 때문에 네스토리안 교회가 페르시안 교회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동양에서는 경교로 알려졌다. 단성론자들은 칼게톤 이후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알렉산들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단성론 논쟁은 단의론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극단적인 단성론자들은 그리스도가 한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이르렀다. 아가토는 680년 로마에서 회의를 소집해 단의론을 정죄하고 그리스도는 두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결정하였다.


        5. 기독론 논쟁 요약

        핵심 논제는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과연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었고 각 회의는 이 문제에 대한 신조를 결정하였던 것이다. 니케아 회의에서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으로 규정하였다.



제5부 초대교회 위대한 인물들

제13장 위대한 지도자들

      340년부터 350년 사이에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들이 역사에 등장하여 교회의 신학적, 교권적, 교리적, 예전적 초석을 놓았다.


        1. 틱월한 행정가 엠브로스

        그는 전재산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바틴 일이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성경과 신학연구 그리고 설교에 온 정열을 기울였다. 금욕적인 삶과 개방된 삶과 사역 그리고 꾸준한 연구는 세속정치에서 차지한 그의 명성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신앙과 삶이 일치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외치며 세속의 압력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정의와 복음을 동시에 외치면서 궁필한 자와 가난한 자, 눌린 자와 함께 암브로스 감독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드렝게 불멸의 실례를 남겨 주었다.


        2. 성경번역의 선구자 재롬

        성경번역과 함께 서방에 수도원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서방교회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구약성경의 경우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 원문을 기초로 삼고 있었다. 재롬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헬비디우스와의 논쟁, 요비니안과의 논쟁에 휩싸였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제롬은 펠라기우스의 제한되 은혜 개념을 비판하고 인간의 원죄를 강력히 피력하였다.

        3. 황금의 입 요한 크리소스톰

        그의 설교는 매우 직설절이고 강렬하며 단슨한 것이 그 특징이다. 교리적이기 보다는 도덕적이고 영적이었다. 안디옥의 전통을 따라 우화적인 해석보다는 문법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을 추구하였다.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설교 사역에 대해 자만하지 않았다. 나의 사역은 흙탕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땅의 한 구획을 깨끗이 청소하려고 하는 사람의 일과 같다.



제14장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두 나라가 서로 섞여 있는 동안은 우리는 또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봉사하여야 한다.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으로 바벨론에서의 자유 해방을 이미 받는다. 그러나 아직도 잠시 바벨론과 함께 순례하여야 한다. 어거스틴은 고대 철학과 기독교의 종합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어거스틴은 서방신학의 대변자, 서방신학이 이야기 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기초가 되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정통주의 신학은 어거스틴이 이룩한 신학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과장되었지만,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해도 과장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회관, 죄의 은총 그리고 기독교 역사철학이 그것이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이단과의 논쟁을 통하여 집대성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의 문제란 존재하는 진리의 길, 다른 철학체계 사이에 적절한 것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키케로처럼 실천적인 관심에서 철학을 발전시켰다. 어거스틴의 사상적 배경은 마니교, 플라톤주의, 기독교로 세단계로 나눌 수 있다.

        마니교는 세상이 빛과 선 그리고 어두움과 악의 영역으로 나뉘었으며, 이 둘이 실재며 본질적이라고 가르쳤다. 그가 마니교에 몰입한 원인은 악의 기원 문제 때문이었다. 악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단지 사건적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인 본체이자 실존적이며 실재적인 어두움의 신이다. 하나님과 악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선한 하나님과 악한 하나님은 끊임없는 대립과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악의 문제를 해결한다. 구원론은 영지주의 이원론과 비슷한데 구원이란 인간안에 있는 빛이라 부르는 영적인 것과 암흑이라 부르는 물질의 두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영혼이 순수한 빛 광명의 영역으로 다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이들은 완전자의 집단인 참으로 선택 받은 자들은 진지한 자기 부정, 금욕주의적 방식, 음식, 협동, 성으로부터 초극을 통해 빛의 세계로 환원될 수 있다. 마니교는 진리체계가 이론적,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면서도 실존적이었다. 악한 원리에 의하여 사로잡힌 선의 요소들을 악한 원리에서 구하는 것이다. 구원체계야말로 참된 구속의 진리이며, 진리란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속에 존재한다는 마니교의 가르침이야 말로 가장 설득력있는 세계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폴라톤주의들은 하나님의 영적 완전성을 밝혔고 내적 명상을 통한 통찰력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악은 하나의 부정적인 성질이며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입장을 따라 감각으로 얻응 수 없은 어떤 것을 마음으로 얻는다고 믿었으며 어거스틴은 이를 합리주의자로 평가된다. 그는 형태가 하나님의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영원한 형태가 하나님의 영원한 사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의 회심 앰부로스 설교에서 기독교가 웅변적일 수 있고, 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다나시우스의 <성 안토니의 전기> 역시 그에게 강한 도전을 주었다. 그러나 그를 완전히 기독교로 전향하도록 한 것은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롬13:13~14이다. 현대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로가 어거스틴의 신학이 계시신학이며 그 계시신학은 기독교 회심을 통해서 발현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의 사상에는 플라톤적인 구조가 나타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회심의 의미에서의 인생, 사상,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어거스틴은 진정한 진리 탐구와 종교적 삶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앞에 헌신한 후에 생겨났다.

      어거스틴의 인식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를 종합했듯이 어거스틴은 플라톤 신플라톤주의 사상과 기독교를 종합한 실례로 평가된다. 나는 깨달았다. 나는 믿는다. 나의 힘이 미치는 한 나는 순종하리라. 나는 그에게 나의 능력을 크게하여 주실 것을 열심히 구할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그가 이성을 강조한 것은 이성이 진리를 밝히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학을 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믿음보다 선행되지 않았다. 그는 플라톤 사상을 따라 어떤 감각없이 이성 그 자체만으로도 영원한 것을 직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진리가 바로 자신이 믿은 하나님 곧 자신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인식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삼위일체론에서도 나타난다. 삼위일체의 영원성, 동등성, 통일성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먼저 믿어야 한다. 그는 죄관은 플라톤에서 말하는 죄관 즉 지고선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회의주의자가 스스로 모순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이 볼 때 의심한다는 것은 사실 자체는 의심의 주체인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의지 중심이 세상적인 것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사랑의 두 개념-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어거스틴의 교회관은 도나티스트와의 논쟁을 통하여 정립되었다. 도나티스트들은 배교자는 물론 그들에 의해 임명된 성직이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배교행위를 한 감독들에 의해 행해진 세례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교자들에 의한 세례가 무효하다는 도나투스파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은 심지어 이단자들에 의해 베풀어진 세례도 교회가 인정하여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베푸는 자의 거룩성에 상관없이 세례는 효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키프리안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성례관은 로마의 전통을 따르고 있던 어거스틴으로서는 이 둘의 전통이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키프리안의전통을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교회의 순수성이 보편적인 교회에만 속했다는 키르리안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거부했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볼 때 교회의순수성은 보편적인 사도족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바티안 그리고 어거스틴 당대의 도나투스파에도 있었다. 도나투스파의 일차적인 문제는 교회의 순수성이 아니라 사랑의 결여였다. 기독교 신앙은 사랑으로 역사할 때만이 가치가 있으며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은 의미가 없다. 어거스틴에게 사랑은 교회 통일성의 기초이며,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신앙의 일치를 외치면서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곧 복음의 본질을 떠난 것이며, 교회의 생명력을 상실할 수 밖에 없다.


        어거스틴의 인간이해는 동방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관계로 논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에 서방에서는 주로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총 문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서방의 인간 이해가 좀더 체계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어거스틴에 와서이다. 어거스틴은 적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그의 은총론을 체계회하기 시작했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출발전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닝들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모든 죄를 인간의 본성에 돌리는데 분개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은 은총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선행조건이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삶이 없고 도덕이 부재된 당대의 기독교을 바라보면서 펠라기우스는탄식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고, 선과 악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이라고 보았으며, 우리의 행위에 따라 선악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유아는 죄없이 무죄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타락 이전의 아담의 상태와 같다. 인간은 태어날 때 원죄를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선행과 악행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인간의 선행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자신이 져야 한다. 어거스틴의 이중예정론은 그의 회심 경험 속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죄인되었던 자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죄인을 부르시는 그 혹자를 영원한 벌로 예정하신 것 역시 하나님은 주권적인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면서도 인간의 경험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구원론적인 은총의 영역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대해 불평하기 보다 오히려 자신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에 와서 어거스틴은 은총론이 재확인되었다, 또한 역사관 역시 중세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정통적인 기독교 사관으로 정착되었다. 어거스틴이 고민했던 역사와 은총의 문제는 적어도 종교개혁시대까지 모두 검증을 받은 셈이다.

        어거스틴의 역사이해는 신의 도성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 신의 도성은 일종의 역사 해석서였다. 인간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모티프를 발전시켰다.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고, 인간의 도성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물질적 소득을 추구하는 이교적 사회이다. 인간의 도성은 큐피디타스가 지배하는 세상이고 하나님의 도성은 카리타스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도성은 서로 대조적이다. 인간의 도성은 탐욕, 이기심,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파당, 질투가 지배하는 세상이나 후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인간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느냐, 이웃의 이익을 추구하느냐이다. 인간의 도성에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서는 기꺼히 연합하지만, 자기의 유익이 붕괴되면 그 연합 역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도성이 하나님의 도성을 섬기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두 도성이 공존할 수밖에 없음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평화를 위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문화참여를 강조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생명을 상실할 때 교회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흩어시고 개혁하셨다. 로마의 멸망은 문화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한 로마 기독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제6부 중세로의 준비

제13장 수도원 제도의 발달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급격히 저하되기 시작하였다. 박해받은 종교에서 군림하는 종교로 탈바꿈했으며, 자연히 종교의 중심도 변천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 금욕주의 운동과 관련된 수도원 제도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1. 최초의 수도승

        안토니(256~356)는 마19:21? 말씀을 듣고 자신의 유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는 인간 사회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져 사회와 완전히 동떨어진 사막에서 마귀와 투쟁하여 금욕주의 삶을 시작했다. 공동체적 성경은 은자적인 성격이 강해 독립적,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면서 수도했다. 기도와 명상을 하고, 금식하면서 고립된 삶을 살았다.  바실 이전의 수도 생활은 금욕적이고 은둔적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2. 파코미우스 수도원

        개인주의적 수도생활에 대한 반동으로 태동된 것이다. 일정한 규칙들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최초의 수도원 공동체로 그 역사는 주후 32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코미우스의 공동체 특징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에 반대하였다. 매일 규칙적으로 단체 기도회, 순결과 청빈한 삶이 수도사들에게 요구하고, 규칙적인 식사, 정기적인 예배, 생계를 위한 일정시간 일을 했다. 앉은 자세로 수면을 취하였다.


        3. 대 바실과 동방수도원

        바실은 고립적인 고행생활보다는 공동체적 수도생활을 강력히 선호했다.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사회적인 목적을 등한시한다면 기독교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빈곤과 순결이 수도 생활의 일차적이었으나, 바실은 순결이 아니라 복종이었다. 그는 수도원 공동체와 기성 교회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려고 했다. 지나친 개인적인 경건을 반대하였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눔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되고 구체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수도원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공공 생활을 연구히 떠나 은거하도록 허요하지 않았다. 그의 수도원 공동체는 동방 수도원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영적인 생명력이 상실되어가는 격변의 시대 속에 교회들엑 영적 각성을 촉진시키고 영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5. 서방 수도원의 발흥

        투어스 마르틴, 제롬, 요한 카싸안에 의해서이다. 서방 수도원 운동이 베네딕트 수도원과 켈트 수도원에 와서 더욱 체계화 되었다. 마르틴은 고립되 은둔 생활에 이끌린 사람들이 그와 합류함에 따라 드디어 드는 말무타이엘에 수도원을 창설하여 프랑스 복음화의 센터로 삼게 된다.

서방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도원 공동체는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베네딕트는 수도생활 규범은 그의 수도생활 초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후에 고레고리 대제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규범은 두 개의 활동 즉 기도와 노동을 강조하며, 엄격하고 절제있는 내핍생활과 학문적 삶에 제한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최초의 이집트에서 발생한 수도생활은 지나치게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수도원 운동이 영적 쇠퇴에 대한 반동이었다.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 수도원 운동은 교회에 적지 않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교회 안에 율법주의가 침투되었다. 수도사의 목적은 자신의 구원에 있었지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도원 공동체는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려는 무리들과 안주하려는 무리 두 종류로 처음부터 대별되었다.


제16장 교황제도의 발달

        교회로서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교회라는 로마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근거로 삼는 것은 마16l17~19의 말씀이다. 로마교구는 초대교회의 여러 교구 가운데 두드러지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구로 등자하였다,. 로마 교회는 신경이 발달하였고, 이단들과 투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제롬은 로마교회의 우월성을 마16장과 연계시켜 교회가 세워질 반석이 곧 베드로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위일체 논쟁이 발생하자 교회의정통성 확립을 위해 일관된 창구가 필요했다. 니케아 회의에서는 가이사랴의 바실은 지금까지 있었던 법들을 한데 모아 일관된 교회 법을 제정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교회는 모든 교구의 대표적인 성격을 띄게 되었고, 로마교회에서 시행되는 예배모범은 다른 교구에서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로마의 영향력을 헬라지역에의 대리인들로 임명하여 이것을 후대에 제도화시켰다. 이것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는 이 제도를 통해 동로마권에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제17장 초대교회 세계선교의 초석들

        지금까지 주저해 왔다. 나의 글이 다른 사람의 글만 못하지 때문에 인간들의 혀의 판단 아래 떨어질까 나는 두려웠다.


        1. 아일랜드 선교사 패트릭

        패트릭은 아일랜드인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지방 분권적 교회를 세웠다. 교회의 핵심은 대 수도원장들이 권력을 쥔 반 은둔적 수도원 제도였다. 감독들은 수도원 성직단에 의해 선출되었고 수도원 성직단에 종속되었다. 근본적인 선교사였다. 그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자신을 통해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결점을 보완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의 개성은 복음 전도적이었고 그의 글은 감사와 믿음으로 충만하다. 그는 세련되 수사학의 부재 자체가 그의 글을 정직하고 직설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2. 스코틀랜드 선교사 콜럼바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해준 콜럼바는 분쟁과 싸움이 얼룩진 사회 속에서 자라났다. 그는 사제와 수도승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전역에 걸친 새 수도원들의 창건자가 되었다. 피니안은 콜럼바에게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헌신과 성경에 대한 조직적 연구, 수도원 생활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아이오나섬을 발견하고 선교의 거점을 삼았다. 절도있는 수도원적 삶, 문제 해결에 대한 탁월함 그리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삶은 콜럼바의 영향력을 더욱 확신시켜 주었다. 콜럼바는 선교를 전하였고 선교를 위해 살았으며 선교를 실천했던 것이다. 그는 노동, 기도, 독서로 이루어진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제18장 결론

        초대 교회가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인 의미는,

1. 시대와의 단절 속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 속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헬라정신을 기독교화하려는 극단적인 모습과 라틴 정신을 기독교화시키려는 극단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2. 초대교회의 역사에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도전과 응전의 대결구도 속에서 신학이 발전되어 왔다느 사실이다. 전통신앙을 떠나 기독교를 변질시키려는 이단을 대항하여 전통신앙을 수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역사속에서 계속될 것이다.

3. 초대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주제는 그리스도 또는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린다면 로고스라고 할 수 있다. 박해를 받은 가장 중요한 요인은 황제를 신으로 부르지 않고 오직 로고스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4.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정통신앙을 정립시켜 교회의 틀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드셨다는 사실이다.

5. 알렉산드리아 전통, 라틴전통, 소아시아 전통이 어거스틴에게 와서 종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플라톤의 정신과 헬라의 정신을 기독교에 끌어들여 용해시키려한 알렉산드리아 전통과 법적인 틀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규명하려는 라틴의 사상, 그리고 구속사적인 틀 속에서 신구약을 통시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이레니우스 전통이 어거스틴에 와서 하나로 종합된 것이다. 어거스틴은 고대 정신의 집약이자, 초대교회 사상의 종합이며 중세로의 준비였다.

6. 종말론의 변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7.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여 오셨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입하신 그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개입하실 것을 믿는다.

출처 : 예림의집
글쓴이 : 김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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