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신학과 그리스도
제 1장 하나님의 계약의 속성
성경에서 말하는 계약이란 무엇인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계약 관계를 수립할 때 주권적으로 삶과 죽음의 약정을 세운다.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주권적으로 이루어지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다.
1. 계약은 약정이다.
가장 본질적인 면에서 계약이란 사람들을 한데 묶는 것이다. 계약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 또는 인간이고 대체적으로 계약을 맺으려면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계약의 결과로 상대성이 결정된다. 또한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 계약의 근본 요소는 구두 선언의 성경을 갖는다. 하나님은 계약을 세우기 위해 말씀하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과 결속하였고 또 창조물과 자신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표명하기 위하여 은혜 가운데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계약은 그 서약이나 표적이 특징을 볼 때, 그 계약이 본질상 약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계약은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을 결속시키는 것이다.
계약에 있어서 서약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첫째로 구두 서약에 있다. 둘째로 그 구두 서약에 상징적인 요소가 첨가되어 선물을 증여한다든가, 음식을 먹는 일, 기념비를 세우는 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는 일, 동물을 잘라 쪼개는 일 등이 있다.
또한 서약과 계약의 형식이 서로 바뀌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서약과 계약 사이에 이러한 긴밀한 계약이 본질적으로는 약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계약에 의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깊이 결속되는 것이다. 계약에 있어서의 표적은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이 사람들을 한데 묶는 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지개의 상징, 할례의 표적, 안식일의 표시 등은 계약의 구속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계약의 표적은 하나님과 백성 간의 영원한 약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2.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피로 맺은 약정” 또는 삶과 죽음의 약정이라는 구절은 계약 관계의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결속의 궁극성을 표현한다. 계약을 체결할 때 하나님은 삶과 죽음의 궁극적인 문제까지 포함시킨다. 구약성경에서 “계약을 체결한다.”라고 번역되는 구절은 문자적으로 “계약을 자른다.”인데, “계약을 자른다.”라는 문구는 성경에 나타난 계약 역사의 한 시점에만 나타나지 않고 반대로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뚜렷이 나타난다. 율법서, 예언서, 시가서 등에서 반복해서 이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문구이 중요성은 세 가지 기본 계약 형태를 취하는데,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과의 계약,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과의 계약,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하나님과 맺는 계약이 그것이다. “자른다.”는 동사 자체가 “계약을 자른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절단”의 개념이 성경의 계약 사상에서 매우 중요하게 관련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약 수립이 시점에서 동물 전단의 의미는 “죽기까지의 서원함”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잘려진 동물은, 서약한 사실을 범할 때 계약자 자신에게 임할 저주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계약을 자른다.”는 성경적 구절은 계약을 수립하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계약 관계를 수립하는 데 표현되는 술어의 전체적인 개념은 삶과 죽음에이 서원이다. 계약이란 “피로 세운 약정” 또는 “삶과 죽음의 약정”인 것이다. “피의 야정”이란 말은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도 없다(히 :22).”는 성경의 강조점과도 잘 부합된다. 성경에 나타난 피의 의미는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피 흘림은 생명에 있어서 심판을 나타낸다.
피 제물의 성경적 이미지는 생명과 피의 상호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경험에 있어서 “계약” 사상이 “마지막 유언” 이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계약의 성경적 개념과 마지막 유언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개념이 “죽음”이라는 관련점에 있어서 서로 혼동될 수도 있지만 두 개념은 그 형식마이 유사할 뿐이지 의미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언적 죽음이 아니라 계약적인 죽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며, 계약 파괴자 즉 우리 인간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대속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하는 데 기본이 된다. 또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 사건이라고 생각되어 왔지만 이 경우 또한, 기념할 만한 계약에 수반된 제의적 식사였음을 알아야 한다. 유월절의 계약이 수반된 제의적 식사와 관련해서 그리스도는 새 계약에 수반된 제의적 식사로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 것이었다. 주님의 의도는 계약의 저주를 자신이 담당하는 유월절 어린양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대속 적이었으며 그의 피는 백성을 위해 흘려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유언적인 것이 아니라 계약의 성취와 수립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언”의 개념은 “구약성경”에서의 “계약”을 대신할 수 없다. 계약은 그 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넘어서까지 계속성을 확인하는 조항이 포함될 수 있다. 계약은 유언이 아니라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결과를 지닌 결속을 포함한다. 계약 수립의 시점에서 당사자들은 피 흘림의 과정을 만들어서 서로를 결속하게 한다. 피흘림은 계약의 결속이 강화됨을 표현한다. 계약에 의해서 양 계약자들은 삶과 죽음에까지 묶여지는 것이다.
3. 계약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오랫동안 상호 조약이나 협정이라는 말로 계약이 연구되어 왔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계약은 절대 주권적인 성격을 띤다. 성경이나 성경 밖의 증거들이 계약 수립의 일방적인 형태를 지적한다. 성경의 하나님 계약에는 흥정이나 교환 또는 교섭이 있을 수 없고, 천지의 절대적인 주가 계약의 말을 명령하는 것이다. 성경의 대부분이 계약들이 약속이나 법적인 면을 강조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점이 계약 행정의 기본적인 성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특정한 계약이 내용이 어떻든 가에, 계약이 이루어지는 형태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계약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의 약정인 것이다.
나의 생각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을 대변하는 “계약”으로 풀어가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새롭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약 신학으로 풀어가는 것이 어떤 것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글을 읽어 나갔다. 저자는 먼저 그리스도에 대해 논하기 전에 “하나님의 계약”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성경의 계약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경 모든 곳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주동적으로 행사하신다. 이는 그가 성경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이다. 그분과 인간이 맺는 계약 또한 그분이 주권 아래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 있어서 어떠한 박탈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극히 불안전하고 악하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결여된 그 어떠한 계약도 온전히 지켜질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완전한 주권으로 계약을 주관하시고 보존하실 때만이 온전한 계약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경이 계약은 피로 맺었다고 한다. 이 피로 맺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계약 시 짐승의 피를 흘려 그 증표를 삼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예표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는 본 책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는데 계약신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피의 언약이 양자 간의 결속을 강화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결속시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모든 계약의 완성을 의미한다.
저자는 계약은 언약으로 표현하였다. 언약이란 반드시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있어서 그것의 파기는 곳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의 대가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셨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아마도 저자는 본 책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과의 계약 속에서 그분의 무한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 앞으로 펼쳐질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파노라마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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