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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최근의 “비평적” 구약신학 방법들(Recent "Critical" OT Theology Methods)

예림의집 2014. 10. 20. 20:09

 

8. 최근의 “비평적” 구약신학 방법들(Recent "Critical" OT Theology Methods)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구약신학을 쓰려고 하지 않고 구약신학의 미래를 염려하며 구약신학에 대해 “비평적인”접근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서 잠깐 다루려고 하는 바아와 콜린스는 구약신학이 밝음 미래를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바아는 현대 성경 연구에 대해 섬세하고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중요한 학자 중 한 명이다. 그가 쓴 수많은 글들 중 성경신학의 중심문제들만 다룬 것도 열 편 이상이 된다. 그는 두 대륙(미국, 유럽)에서 가르쳤으며, 몇 개의 구라파 언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해석학, 어휘론, 의미론, 정경론과 성경 권위 등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피력할 수 있었다. 그는 소위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불리는 운동에 대해 혹독한 공격을 하였다. 바아는 역사적인 영감관과 성경의 권위를 버리고 현대 역사비평학의 전통에 굳게 서 있다.

바아는 아직까지 성경신학이나 구약신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포괄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또 그런 것을 쓸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그는 구약신학 혹은 성경신학이 어두운 미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아는 최근에 학자들이 구약신학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또 구약 연구에 대한 새로운 파라다임들인 구조주의(structuralism)나 문학적 접근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신학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유대적 성경신학(jewish Biblical theology)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주제는 이 장의 초반부에서 이미 다루었다.

여러 논문들과 책들이 현대 성경신학의 다양한 측면들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옛 성경신학운동”을 넘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차일즈는 “성경신학 운동(biblical theology movement)”이 1970년대에 몰락하였다고 선언하였으나, 바아는 “옛 성경신학”을 비판하며 “그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복합적 접근(multiple approach)”을 주장한다. 최근에 와서 그는 “신학이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성경 본문을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 신학은 본문 ‘배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에 대해 방대한 공격을 하였으며 폰라드, 게제의 전승사를 지지하고 성경을 “이야기”로 이해하는 문학적 방법을 따른다.

바아의 입장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킬 위험도 있지만, 그가 구약신학의 방향에 대해 최근에 의구심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종합적인 현대 성경신학(synthetic modern biblical theology)”이 무엇인지 그의 여러 글에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①이것은 서술적이어야 하며 규범성을 떠난 신학적 작업이어야 한다. ②이것은 역사비평적 주석의 과정에 근거하고 주석과 조직신학 사이에 서야 한다. ③이것은 현대의 역사비평학계와의 광범위한 연대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④이것은 신화, 전설, 비유, 이야기 등의 범주를 포함하는 역사적-문학적 해석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⑤이것의 자료들은 정경화된 성경과 그 배후에 있는 전통들과 고대 근동 종교 및 문화에서 발굴된 문서들에서 취한다. ⑥이것은 종교사학적, 문학적, 신학적 접근들을 융합한 것이다. ⑦이것은 전승사적 방법에 근거하여 그 자체의 몫을 찾고 다른 연관된 분야들과의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⑧이것은 구약이 기본적으로 “이야기”라는 인식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서의 역사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역사를 담고 있다. ⑨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은 역사 속에 찾아온 하나님의 행동에 있지 않고, 다른 신들과 대치되는 한 하나님에 대한 사상에 있다. ⑩성경신학은 구약(그리고 신약)에 제시된 다양하고 이질적인 신학들을 포함해야 되기 때문에 “복합적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⑪구약은 (폰 라드의 주장처럼) 하나의 “중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여러 개의 “중심”을 갖고 있다. ⑫만약 성경신학이 발전하려면 “신학적 융통성과 자유로운 학문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 ⑬“신학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본문 ‘배후(behind the text)”에 서야 한다.

구약성경에 대한 “종합적인 현대 성경신학”의 미래에 대한 바아의 중심 사상 몇 가지를 이상과 같이 요약해 보아도 그의 방대한 주장들이 어떤 뉘앙스를 갖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웩스는 그의 학위 논문에서 비아가 세련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를 펼치고 있다고 제시하였다. 최근에 나온 또 다른 학위 논문에 따르면 바아는 자신의 관점에 묶여 성경신학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논문은 성경에 근거한 신학은(즉 성경신학) 믿음의 공동체들이 다양하게 성경을 사용하고 있는 현상들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바아는 후자를 성경신학의 일부로 보는 것을 격렬하게 비판해 왔다.

바아는 다양한 방법론과 운동과 학자들의 방향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왔다. 어떤 때 그는 차일즈가 제시한 방향에 대해 동감을 느꼈으나, 최근에 와서는 그에 대해 심한 비판을 하고 있다. 바아는 불란서 구조주의 형태로 발전된 현대 언어학과 문학으로서의 성경 연구, 르쾨르의 해석학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의 강연과 논문에서 바아는 “자연신학”을 성경적 증언의 일부로 보는 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바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생각을 모아 갈는지, 그리고 결국 그가 구약신학을 성경신학으로부터 멀리 격리시키는 작업을 계속 추진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역사비평학에 대한 바아의 헌신은 너무나 깊기 때문에 그의 글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다.

콜린스는 그의 글에서 구약과 신약신학을 “비평적 성경신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전 몇 년간 그를 사로잡은 주제로 되돌아 왔으나 이제는 더욱 강한 열정과 깊은 사색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제언에서 “비평적”이란 형용사가 대단히 중요하게 부각된다. 콜린스가 보기에는 차일즈의 “정경적 접근” 뿐 아니라, 라이트나 폰 라드의 접근까지도 충분히 비평적이지 못하다. 라이트나 폰 라드는 각자 자기 방식대로 “자신이 공인한 역사적 방법을 도려내는 교리적 확신(dogmatic convictions)”을 허용했다고 콜린스는 보고 있다. 따라서 콜린스는 술투마허가 말하는 “용인의 원칙(principle of consent)”이란 제 4의 원리를 한치도 허용하지 않는 철저한 역사비평적 방법 위에 “비평적 성경신학”을 세우고자 한다. 콜린스는 “초월의 언어(language of transcendence)”를 허용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언어는 자신이 강하게 옹호하고 있는 “비평의 원리”가 순수하게 작용하는 것을 억제하거나 수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크렌츠가 말한 바와 같이 “비평의 원리는 오직 개연성만을 만들고 그 결론은 믿음의 확신과 신학의 목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는 사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콜린스는 “사실성(facticity)”과 역사성의 문제를 알더나 스턴버거와 가은 문학 비평가들이 말하는 문학적 “이야기” 개념으로 파라다임을 바꾸어 풀어보려고 한다. 알터는 성경의 거룩한 역사를 “산문 소설(prose fiction)”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스턴버거는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이야기”라는 범주를 성경신학에 도입하는 것은 우리가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접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적인 상상(poetic imagination)이다. 역사로부터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초자연에 대한 주장이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수사학적 기교일 뿐이라는 결론을 초래하게 한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들은 순종을 요구하는 규범적인 진리나 그와 같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콜린스가 생각하는 “비평적 성경신학”의 모델을 핵심으로 간추려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이것은 역사비평적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비평과 유추와 상광원리를 믿는다는 전제 위에 기초해야 한다. ②“비평적 성경시학”에는 그 어떤 고백적 차원도 허용하지 않는다. ③이것은 “역사신학”의 하위 분야로 기여한다. ④달리 보면 이것은 “설화신학”혹은 “상진신학(symbolic theology”의 일부이다. ⑤이것은 “어떤 주장이 있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들은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가?”를 명백히 한다는 점에서 기능신학(functional theology)이라고 볼 수 있다. ⑥“성경이 다른 고대 문헌과 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오직 그 전통 속에서 본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이 비평적 성경신학은 “몇몇 정경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신학에 대한 콜린스의 새로운 모델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왜 이 모든 작업들을 여전히 “성경신학”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왜 “고대의 다른 문서들과의 아무런 질적인 차이도 없는 몇몇 정경”에 호소하면서도 여전히 “성경(biblical)”이란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몇몇 정경”에서 “몇몇”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가톨릭 학자에겐 “정경”이란 로마 교회의 정경이고, 유대인이나 개신고 신자에게 있어서 정경이란 구약성경을 말하며, 또 다른 사람에겐 다른 성경이 있지 않은가? 만약 여러 믿음의 공동체들이 다른 성경 개념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비평적” 성경신학 속에 “고백적” 요소를 허용하며 교리적인 개념을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콜린스가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나아가 왜 “전통 속에서 이 본문들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가? 만약 이 호소를 허용한다면, “고백적”이거나 “교리적인” 측면도 이 작업 속에는 허용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그거 위에서 콜린스가 말하는 “전통”이 예를 들어 “정경”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가? 콜린스의 기능적이고 비평적인 모델은 그 방법론적인 기초와 연관하여 구약 신학도들에게 평가되길 기대하게 된다. 즉 그 방법론은 과격한 형태의 역사비평뿐 아니라 문학적 페러다임들, 그 기능적 의도성(functional intentionality), 그리고 성경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진실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회겐하벤은 또 다른 “비평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구약신학의 동향을 간추리고 있다. 그는 구약을 “고대 근종 아시아 사람들의 민족 문학”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성경은 그것이 속해 있는 고대 근동 아시아 문화의 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문화와의 대조 역시 간과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직 상대적일 뿐이다.” 이 기초 위에서 볼 때 저자는 자신의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중심을 부인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석적인 분석으로는 드러날 수 없는 신학적 중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중심”은 어떤 점에서 기독교 복음이다.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의 ‘의도’이다. 이것 역시 주석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

회겐하벤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성경신학은 규범적이거나 명시적이기보다 역사적이고 서술적 분야이다.” 유대인이건 기독교인이건 간에 자신의 믿음 공동체의 신학을 따라 구약을 요리해서는 안 된다. ②성경신학은 “조직신학보다는 성경 주석에 종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계모주의 이후에 발전된 신학적 전통과 일치하고 있다.” 성경신학은 “성경 주석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그 결론 부분이 되어야 한다.” ③성경신학 혹은 구약신학은 “조직신학이 아니라 역시신학의 영역에 속해야 한다.” 이점은 우리가 방금 앞에서 본 콜린스의 제언과 유사하다. ④“성경신학의 특징은 성경 본문 안에 제시된 주된 종교적 모티프들과 종교 방전의 중심선에 그 관심을 두는 데 있다.” ⑤구약신학은 이런 종류의 성경신학의 일부이며 후자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⑥“‘구약햇학’의 목적은 구약문헌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들과 주제들과 문제들을 요약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상세한 주석을 전제하는 역사적 작업이다. 따라서 이것은 ‘조직적’이거나 동시적(synchronic) 이거나 혹은 교차적(cross-section)인 구조 보다는 ‘역사적’이고, 통시적(diachronic)인 구조를 따른다.” ⑦구약 문헌은 연대적인 순서를 따르지 아니하고 지혜, 시편, 설화, 율법과 예언과 가은 중심 범주로 나누어져야 하며, 양식비평과 전승사 방법으로 연구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회겐하벤은 “역사적인 학문으로서 구약신학은 최근의 역사적이고 주석적인 연구 동향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회겐하벤은 최근 여러 학자들이 과거와 현재의 거리를 메우려는 노력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의 중장은 개블러-브레데-스텐달이 주장한 “원래 의미(성경신학)”와 “현재의 의미(조직신학)”의 구도에 사로잡혀 있으며, 사실상 그것에 대한 최근의 도전과 비판과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실제적으로 부활시키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 시작과 구성에 있어서 역사적이고 서술적이기 때문에 전혀 신학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업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점에서 그가 말하는 것이 구약신학인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또 그가 제시한 것 중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든 간에, 어쨌든 그의 “비평적”제언은 구약신학의 성격과 목적과 기능에 대한 최근의 엇갈린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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