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선교학 총론
Ⅵ. 선교 역사 개관
오늘날 선교역사는 역사학자 라토렛과 스티븐 닐에 의해 발전해가고 있다. 라토넷은 가장 이상적인 교회 선교의 모습을 교회병행 선교기구와 제도권적 교회가 서로 연합하고 선교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반해 스티븐 닐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그분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교회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서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자는 라토렛 보다는 스티븐 닐의 입장에 가깝다.
다음은 선교역사를 연구하는 9가지 연구방법이다. 첫째는 환경적 요소이다. 둘째는 신학적 요소이다. 셋째는 영적 원동력이다. 넷째는 선교매체이다. 다섯째는 선교구조이다. 여섯째는 지리적 확장이다. 일곱째는 종족과 종족그룹과 사회계층의 복음화를 살핀다. 여덟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중요 인물들이다. 아홉 번째는 토착화의 과정이다. 필자는 이 아홉 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선교역사를 조망해보려고 한다.
1. 선교 역사관
역사 연구에 있어 크게 세 가지의 방향이 있다.
첫 번째는 순환론의 입장, 두 번째는 직선적인 사관, 세 번째는 절충주의적 역사관이다.
이런 구속사적 관점을 기반으로 선교사관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몽고메리 보이스는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의 시간관념을 소개한다. ①카이로서의 사관으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구속사적 관점에서 의미 있게 진행되어 지는 것으로 오스카 쿨만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심력적이며 원심력적인 사건들이다. 둘째, 눈의 개념의 사관으로 눈의 의미는 복음 선포를 통해서 중생이 일어나며, 실존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으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되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생 이후의 역사를 의미하며 교회 공동체의 역사이다.
2. 각 시대별 선교 역사
1) AD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이 시기는 초대 교회부터 교부 시대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선교역사를 말한다. 헬레니즘 문화와 로마 제국의 등장과 신비주의적인 밀교가 등장하였다. 이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사는 시기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핍박으로 교회가 정화되었고,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는 시기였다. 이때 발흥한 여러 가지 이단들에 대하여 초대 교회는 단호하게 대처했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 핍박으로 인해 복음이 여러 곳으로 전해지고, 순교로 인한 전도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특히 바울의 선교팀으로 인해 복음의 확장이 있었던 시기이다. 이때에 로마 제국 산하의 일반 서민들과 지성인들이 언어로 사용이 되던 그리스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성경적인 토착화의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로마 제국의 라틴 문화권 하에서의 제도적인 토착화도 특징이다.
2) AD 5세기부터 10세기
이때에는 로마 교회가 제도권하의 세속적 특혜를 누림으로 타락하였고, 이슬람이 로마 제국 영토 절반을 점령하였다. 신학적으로는 수도원적 경건주의와 자력적 공덕 신학이 등장하였다. 또한 단성론자, 경교, 아리안주의의 신학적 도전이 계속 되었다. 서구라파의 통상로가 복음 전파의 주요 통로가 되었다. 수도원에서의 영적 자각과 교회 갱생운동 말씀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상적 교회 공동체, 수도원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였다. 이때의 중요 인물로는, 패트릭, 콜롬바, 윌리브로드, 보니페이스, 안스카, 알로펜 등이다.
3) AD 10세기부터 14세기
게르만족의 왕으로서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장하면서 북구라파와 동구라파 지역을 기독교 화하는데 강력한 정치적인 지원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교회론에 있어서 신약 교회의 원형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교회 갱생 운동과 청빈과 기도와 구령의 열정이 살아났다. 수도원 선교운동이 제도권 교회에 의해서 수용이 되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4) AD 14세기부터 16세기
신비주의의 결과로 범신론과 도덕적 기준이 자신이 된 시기이다. 이때 위클리프와 후스의 성경주의와 자국어의 성경 번역은 성경 진리를 깨닫는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상업로가 복음전파의 통로로 쓰였고, 기독교 지역이 이슬람에게 잠식당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존 위클리프, 존 후스, 토마스 아 켐피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5) AD 16세기부터 18세기
이때의 환경적 요소는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회가 생겨났고, 그 영향을 전 구라파에 미쳤다. 화폐 경제가 시작되고 근대적인 의미의 도시가 형성되면서 주식회사가 등장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선교 방법에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의 영향, 특히 만인제사장설로 인해 모든 교인들이 선교에 동참해야 할 당위성을 느끼게 되었던 시기이다. 인쇄술의 발달로 현지어로 된 성경과 개혁 사상이 담긴 서적들이 보급되었다. 일본과 중국지역까지 지리적으로 확장되었다. 중요 인물로는 루터와 칼빈과 리차드 백스터, 휫필드가 있다.
6) AD 18세기부터 19세기
18세기 중엽부터 로마교회의 세력이 꺾여 지고 개신교회가 선교의 새로운 주 세력으로 등장한 것을 의미하는 전환기적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던 때이다. 18세기 초의 구미에서 일어난 복음주의적 각성운동과 대각성운동은, 18세기 말에 미국에서 두 번째 각성운동을 일으켰고, 이것은 교회로 하여금 구령의 열정을 갖게 하여 국내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조직적인 선교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웨슬리 형제와 휫필드가 있고, 독일에서는 경건주의의 선교 운동이 있고, 미국에서는 대각성 운동과 두 번째 각성 운동이 있다. 이들은 칼빈주의 신학이었다. 그러나 위험한 점은 극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경향은, 부흥의 차원을 뛰어넘어 인위적인 소위 부흥 주의를 조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자연신교가 구미의 지성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인문주의와 이신론, 개신교의 영향력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신학적인 요인으로는 이신론과 낭만주의, 범신론으로 인해 선교 무용론이 대두되었다. 서신교류로 인해 복음이 더욱 전파되었고, 이민도 복음 전파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신교회의 지리적인 확장이 활발했고, 윌리암 캐리, 리빙스턴, 모리슨 등이 중요한 인물이다. 토착화의 원리는 원주민 교회의 자급, 자치, 자전이다.
7) AD 19세기부터 20세기 중엽
나폴레옹의 등장과 패배는 로마교회 선교의 일시적인 위축과 개신교 선교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인간의 지정의를 중시하여 인본주의 사상이 팽배하였던 시기이다. 복음주의 운동의 확산으로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가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찰스 피니와 드와이트 무디가 있다. 인쇄매체를 통한 선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성경 판매자들을 통한 복음이 전파되었다. 중요 인물로는 무디와 존 모트, 메이쳔과 네비우스 등이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토착 지도자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훈련을 강화하였다.
Ⅶ. 복음주의 선교 운동의 현주소
복음주의라는 말은 개혁주의보다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개혁주의 선교학은 포괄적인 복음주의 선교학의 한 부분에 들어간다. 이런 복음주의 운동은 리차드 퀘에베데우이쓰에 의하면 그 기원이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영국의 웨슬레 형제들의 부흥운동 및 미국 청교도인들의 대각성 운동에서 비롯된다. 필자는 이 운동의 핵심을 성경관에 있다고 본다. 최근에 ‘역동적 영감설’의 입장을 가진 신복음주의적 유형을 복음주의 운동의 범주에 넣는 신학적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는데 첫째,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지나친 호전성과 폐쇄성 또는 사회에 대한 무책임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건전한 복음주의 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둘째, 복음주의 운동자체를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것으로 보아서 신복음주의를 복음주의 운동의 유형에 놓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선교 운동에 있어서 성경관은 중요하다. 필자는 도날드 맥가브란이나 아더 글라서가 신복음주의적 성경관을 가진 선교학자들을 조정주의자들의 범주에 넣어 세계교회협의회의 입장에 기울어진 것으로 보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1. 근본주의 운동에 나타난 선교학
복음주의 운동은 당대의 진화론에 입각한 진보주의적 발전사관과 성경의 고등 비평을 적극 옹호하는 소위 현대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일종의 복음주의자들의 공세적인 공동전선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다양한 신학 배경을 가진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서로 연합하고 협력했다는 것이다.
2. 복음주의 선교 운동의 발전사
18세기에 일어난 일련의 복음각성운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선교 운동 및 윌리암 캐리를 필두로 한 개신교회 내의 각 선교기구들이 발족되어진 일들과 연관시키고 있다. 19세기에는 이렇게 세워진 선교기구들이 본국에서나 선교현지에서 선교를 위한 협력과 선교지역에서의 불필요한 사역의 중복이나 선교사들 간의 경쟁을 지양하고 선교지역 분할 정책을 채택하기 위하여 연속적인 선교협의회 모임을 본국이나 선교지에서 가져왔다.
⑴1910년 에딘버그 세계선교대회
에딘버그에서 논의된 바는 교회의 본질로서 선교적 사명의 귀중함과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메시지와 선교 지역 분할 정책과 선교지에서의 단일 교회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에딘버그 선교대회는 선교협력으로서 선교지역 분할정책을 채택하였다. 지역주의와 종족중심주의가 강한 세계 2/3지역에서는 교파분열 정신과 개인주의 정신을 고취시킬 위험성도 있는 것이다.
⑵1928년의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
1921년 모홍크에서 국제선교협의회인 IMC가 결성이 되었다. 이 국제선교협의회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탄생하였는데 선교정책은 선교회, 후원교회 선교부, 피선교지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결정하고 교리적인 문제는 되도록 거론 안 하며 IMC 회원 간의 상호교제와 이해 그리고 협력정신의 영으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은사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는 첫 IMC 대회로서 타종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주장하였고 전도와 사회활동에 있어서 두 영역을 동시에 중요하게 보는 입장이 개진되었다.
⑶1938년의 마드라스 국제선교협의회
이 대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라는 인식 속에서 “교회를 발견하자는” 논제를 제기하였고 보편적 교회의식의 중요성과 성육신의 원리가 강조되었다. 또한 존 모트에 의해서 ‘확대전도’ 개념이 제기되었다. 또한 복음을 통한 개인변혁은 곧 사회조직의 선교적 변혁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필자는 복음전도와 사회변화의 관계성 측면에서 마드라스 대회는 적절한 균형 있는 신학적 정의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마드라스 대회는 선교학적 입장이 헨드릭 크레머이 성경적 실재주의로 기울어졌다. 토착교회 설립 시 경제적이고 사회적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선교는 그 나라 경제 수준에 맞게 하되 처음부터 자급측면에서 도와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자치와 자전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⑷1947년의 휘트비 국제선교협의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혼란한 세상 속에서 교회의 위치와 역할의 중요성과 복음전도의 시급성을 논하였다. 특히 호그는 휘트비 대회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으로서 전도를 강조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휘트비는 세상 속에서 부활의 주님이 실제화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구체적인 역사성을 주장하였다.
⑸1948년 암스텔담에서의 세계교회협의회 등장과 복음주의 선교 운동의 전환기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오직 유일한 것으로 보지 않고 상대적인 것으로 보며 하나님은 소위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샬롬’을 위해 일하는 세상 속에서의 제 사회기구나 타종교 안에서도 구원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호켄다이크는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섬김과 봉사의 전위부대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⑹1966년의 휘튼 선교대회
휘튼 대회가 열려지게 된 주요 동기로서 IMC가 신학적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 중에 WCC에 통합되어진 것과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력이 증대되어진 것과 WCC의 급진적인 신학의 좌경화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손상 등을 들고 있다.
⑺1966년의 베를린 세계전도대회
베를린 대회의 선교의 신학적 근거가 너무 단순하게 대위임령에만 국한되었다고 판단한다. 베를린 대회의 분위기는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의 영향으로 복음전도의 시급성과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구령의 열정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⑻1970년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서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은 복음주의 선교의 7가지 명제를 천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규범성, 복음 선포를 통한 선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최종성, 구원은 복음 선포와 교회의 성례를 통해 이루어지고 기독론적 보편주의를 거부하며 선교의 목표로서 메시아적 공동체인 교회를 설립함과 타종교에 대한 어떠한 보편구제설도 거부하며 선교적 대화를 나눌 것과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는 일이다.
⑼1974년 로잔느 세계복음화대회
로잔느 대회는 복음주의 선교운동에 있어서 서구교회 주도의 분위기를 뛰어 넘어서 비서구 지역 교회 지도자들이 절반 정도의 비율로 참석하여 상당한 역량의 지도력을 발휘하였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의 필요성으로 로잔느 대회가 개최되었다고 하였다.
로잔느 대회의 주제는 ①“하나님의 목적”으로서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의 성경 전체를 통한 선교의 성서신학을 아주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②“성경의 권위와 능력”으로서 신구약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천명하고 구원에 있어 성경의 규범성을 분명히 하였다. ③“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으로서 일반계시를 인정하나 그 자체로 구원이 불가능하고, 어떠한 기독론적 보편주의를 전제한 혼합주의나 타종교와의 대화도 거부함을 분명히 하였다. ④“전도의 본질”로서 복음이 전도의 내용이 되며, 전도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복음 선포 그리고 각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우기 위한 설득적 사역이 병행되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⑤“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다. ⑥“교회와 전도”이다. ⑦“전도에 협력”이다. ⑧ “전도적 동반자 관계 속에서의 교회”이다. ⑨ “전도적 과업의 시급성”이다. ⑩“전도와 문화”이다. ⑪ “교육과 지도력”이다. ⑫ “영적인 갈등”이다. ⑬ “자유와 핍박”으로서 각 나라 정부는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며, 간섭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평화, 정의, 자유를 적극 구현해야 하며, 교회는 각 나라 정부의 지도자들과 사상, 양심, 종교 선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⑭“성령의 능력”이다. ⑮“그리스도의 재림”이다. 로잔느 대회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복음주의 교회 진영의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이원화한 경향을 자가 성찰하며 회개의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전도의 우선성을 논하면서도 사회적인 책임을 그리스도인의 문화명령으로서 말씀과 행위의 본질적인 문제로 다룬 것은 로잔느 대회의 공헌인 것이다.
⑽1989년의 로잔느Ⅱ 세계복음화대회
로잔느Ⅱ 대회는 “마닐라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거기서 로잔느 언약을 재확인하는 21개의 확인들을 서두에 하였고,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서 “총체적인 복음”이라는 주제 하에 4개의 소주제를 논했고, 두 번째 범주로는 “전 교회”라는 주제 하에 6개의 소주제를 논했고, 세 번째는 결론 부분으로서 “온 세계”라는 주제 하에 3개의 소주제를 논했다.
로잔느Ⅱ 대회는 크게 다섯 가지의 선교학적 이슈들을 제기하고 있다. ①전도적 명령의 우선성은 기능적으로 보고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전도와 사회 변혁 혹은 전도적인 명령과 문화적 명령은 성교에 있어 동등한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②선교학적 이슈로서 힘의 충돌의 신학이 있다. ③선교학적 이슈로서 영적 전쟁 개념이 나오는데 여기에 암시적으로 지역 악마 개념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은 실질적으로 본과 토론 시간에 ‘영적 추적’이라는 주제로 심도 깊게 논의되어졌다. ④선교학적 이슈로서 도시선교가 등장한다. ⑤선교학적 이슈로서 총체적인 전략 선교를 논하며 구체적인 선교 목표로서 미전도 족속을 복음화 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복음주의 선교 운동의 전망
로잔느Ⅱ 대회에서의 총체적인 선교개념을 경계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선교에 있어 성령의 현재적 능력을 중요시 여겨서 영적 전쟁, 힘의 충돌의 신학을 적극 옹호하며, 총체적인 전략 선교의 다양한 방법들을 개발하며, 소위 루이스 부쉬가 제시한 40/10창 지역에 미전도 족속을 복음화 하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지역에 악마 개념을 내포한 ‘영적 지도 그리기’를 공식대회 석상에서 공공연히 발표하는 것과 이것을 공식 전략으로 채택하는 일이다. 또한 로잔느Ⅱ 대회에서의 균형성을 상실하고 ‘재복음화’의 중요성을 논하지 않고, 미전도 족속 복음화가 마치 선교의 전부인 것처럼 몰아가는 치우친 선교 강조이다. 기독교 21세기 운동에서 나타나는 위험한 현상 중 하나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승리주의의 표출이다. 그러나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초체적인 선교개념의 등장이다. 전도적인 명령의 우선권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문화적인 명령은 구속적인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주재권을 증거할 수 없고 문화적 명령을 바로 수행할 수 없다.
Ⅷ. 에큐메닉 선교학 발전사
1. 에큐메닉 운동의 역사적 기원
1910년의 에딘버그 세계 선교대회를 복음주의 및 에큐메닉 선교운동의 시작으로 보아서 필자의 소고인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현주소”에 에딘버그 선교대회를 고찰하였고, 그 후에 결성되어진 국제 선교협의회를 연대기적으로 추적하여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일련의 선교협의회의 모임들에서의 신학적 변천과 상황적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여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2. 에큐메닉 운동의 발전과정
⑴1948년의 제1차 WCC 대회
1차 WCC 대회의 긍정적인 요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연합의 필요성을 인식하였고, 교회의 협력을 통한 선교사명의 수행을 주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연합이 정확히 무엇인지 교리적인 진술이 명확하지 못함으로 이후에 연합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⑵1954년의 제2차 WCC 대회
2차 WCC 대회의 긍정적인 요소는 기독론적 관점에서의 선교의 성서 신학을 신학적으로 잘 정의하여 교회의 선교사명의 중요성을 논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적 기독론에 의거하여 영혼구원을 내포한 전도개념을 진술하고 있지만, 신학적 비중이 사회변혁과 책임사회 구현에 더 기울어지고 있다.
⑶1961년의 제3차 WCC 대회
제3차 대회가 하나님의 선교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이로 인하여 WCC의 선교학은 급속하게 성경적인 선교와 는 별개의 인본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⑷1963년의 멕시코시에서의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
멕시코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는 WCC의 선교학이 하나님의 선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서 보편구원설을 내재한 현존의 신학이나 우주적 그리스도의 개념을 발전시켜 기독론적 보편구원설의 소위 인류학적 종교 신학으로 발전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⑸1968년의 제4차 WCC 대회
4차 WCC 대회는 부주제들의 내용들을 통해서 나타났듯이 성령의 일반화 역사와 구속적 사역을 구분치 않고 일원화 시켰으며, 기독론에 있어 신학적이고 수직적인 본체론적 신앙고백을 생략한 채 단지 수평주의적이고, 인본주의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인간성의 모델로 규정하였으며,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개념에 입각해 정의 되어졌다.
⑹1973년의 방콕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
방콕대회의 선교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성의 완성에 이르는 이상적인 모델로 보고 교회의 선교란 인간의 완성과 연관된 사회정의, 평등, 자유 등을 위한 투쟁의 행위로 본다. 특히 남미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불의한 구조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하며, 선교의 목표는 해방되어졌으며, 해방을 통해 새로운 인간서이 온전히 회복되어진다고 하였다.
⑺1975년 제5차 WCC 대회
5차 WCC 대회는 복음주의자들의 문제 제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으나 실상은 뉴델리, 웁살라, 멕시코와 방콕에서의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의 신학적 입장과 별반차이가 없다.
⑻1980년 멜버른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
멜버른 대회는 하나님 왕국의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 측면을 다 언급하고 있으나, 현세에서의 삶을 통해 불의한 세상 속에서 왕국구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⑼1983년 제6차 WCC 대회
“선교와 전도” 문서 그리고 6차 WCC대회의 선교학적 입장은 일부 복음주의 진영의 지도자들이 고무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신학적 입장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면서, 궁극적인 방향성은 종래의 하나님의 선교 입장을 고수하며, 보편구원설의 명제를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⑽1989년 산 안토니오(San Antonio) 세계선교와 전도분과 대회
비록 복음주의적 신아고백과 선교적 용어표현이 나오고 있지만, 실상 언외의 숨겨진 내용은 하나님의 선교사상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으며, 기독론적 보편구원설을 전제하고 타종교를 살아있는 신앙체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⑾1991년 제7차 WCC 대회
이 대회의 특이할만한 일은 중국 대륙에서 중국교회를 대변해 중국기독교협회가 신입회원으로 받아들여져서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캔버라 대회에서 논의되어진 바는 성령론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창조의 영과 구속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명확한 신학적 정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3. 에큐메닉 선교학의 주요 주제들
⑴연합과 선교
WCC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인간성의 모델이요, 인간성의 완성자로 보는 것이다. 그의 공생애의 삶 자체가 인간성을 갱생하고 개혁하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모티브는 인간성의 완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성의 의미는 사회구조악으로 상처받고 손상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고귀함이 회복되어지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의 수직적 의미가 신학적으로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다만 수평적인 차원의 모든 인성의 모델로서 동질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은 이런 차원에서 인간성 갱생을 위한 모든 인간들의 활동 배후에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합은 단지 교회나 신자만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나 타종교인과도 이루어진다. 따라서 WCC문서들에서 기독론적 연합을 말하고 세례, 성만찬, 직제를 언급할 때 그 배후의 신학적 의미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이해와 전혀 다른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⑵전도와 사회정의
WCC의 전도는 인본주의적 개념의 기독론과 하나님의 선교개념에 근거하여 사회정의 구현을 통한 인간애의 실천을 바로 선교요 증거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복음선포를 통한 사회정의의 구현이 아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의 전인성과 총체성으로 인한 사회정의구현을 환영하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회정의 구현이 바로 복음이요 회심의 내용이며 전도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전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아래로부터의 인본주의적 윤리변혁의 시도인 것이다.
⑶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사상은 삼위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경적인 의미와는 전혀 별개인 인본주의적 차원의 인간성 개발이나 인간애의 실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사상에 부합되게 논하고 있고 이를 계속해서 발전시키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교회구조를 거부하고 혁신적인 교회구조를 재안하며 타종교와의 교류에 있어 하나님의 선교사상에 입각한 공동사역을 논하며 그것은 보편구원설의 전제를 내포하고 있다.
⑷현존의 선교
이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사상과 연관이 되어서 현존의 의미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그것은 타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성 회복을 위한 모든 시도를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다른 방편으로 이해하여 그것을 구속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WCC는 기독론적 현존개념에서 지금은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현존개념으로 신학화하여 이것을 타종교인들과의 대화의 근거로 보고 또한 그것을 구속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이런 시도야말로 기독교를 표방한 혼합주의적 신학인 것이다.
⑸교회론
WCC의 교회관은 정치신학자인 몰트만에게서 메시아적 정치왕국을 건설하기 위한 개방교회로 표현되었다. 한국의 민중 신학자들에게는 민중교회 내지 현장교회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렇듯이 WCC의 교회관은 하나님의 선교사상을 반영하는 신학화의 과정을 통해서 에큐메닉 진영의 선교학자들에게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이것은 특히 상황화 신학의 지역 교회개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⑹종교 신학
WCC의 종교 신학은 현존개념과 하나님의 선교사상을 타종교인과의 대화근거로 보고 그것을 삼위일체적 보편구원설의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1991년의 7차 WCC 대회는 성령신학적인 보편구원설의 신학을 나타내고 있다.
에큐메닉 선교학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만일 에큐메닉의 역사를 모른다면 오늘날 WCC의 주요 신학적 명제들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혼란이 있게 된다. WCC의 선교학은 대내외적인 변수에 의해서 때론 복음주의자들이 쓰는 용어와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실제적인 내용은 변함이 없고 오히려 더욱 WCC의 색채를 나타내는 신학을 정교히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에큐메닉 신학의 도전 속에서 오히려 복음의 전인성과 총체성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에큐메닉 선교학의 여러 신학적 명제들을 분별하여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선교학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4. 결론
한국의 개혁교회는 에큐메닉 신학의 도전 속에서 오히려 복음의 전인성과 총체성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복음의 이원론적 사고로서 근본주의적 게토의식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의 개혁교회는 에큐메닉 선교학의 여러 신학적 명제들을 분별하여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선교학을 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에큐메닉 선교학은 복음주의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약점을 성찰케 하여 보다 성경적인 선교학을 정립케 하고 세상에 대한 선교 사명을 더욱 충성되고 진실 되게 수행토록 하는 것이다.
서평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 없이 세계 복음화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열방을 향해 가지고 갈 복음도 없고, 정당성도 없으며, 이 사역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도 없으며 어떤 성공에 대한 소망도 없다. 세계 복음화를 위한 명령과 메시지와 모델과 능력도 모두 다 성경이 제공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교는 올바른 성경적 신학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복음에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복음에 능력이 있다고 해서, 선교지에서나 혹은 모든 곳에서 무작정 복음만을 전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복음의 영광이 가려질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선교지의 상황, 특히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들이 어떠한가를 깊이 있게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가지고 연구한 후에 그 상황에 적절한 방법론을 연구하고 자연스럽게 복음을 증거 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방법은 오히려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인 아닌가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지만, 그것은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교지에서 그들이 먼저 원하는 것은 구원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들이 육신적, 정신적인 필요를 먼저 채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복음의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많은 유익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선교를 어떤 기준과 원리로 보아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교 역사를 개관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선교역사는 일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선교가 활발했던 나라와 시대는 어김없이 일반 역사의 부흥기였다. 그러나 선교의 열기가 식고, 구령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면서 그 나라의 역사도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선교역사를 살피는 것은 미래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도구가 된다.
저자는 WCC 운동에 관해 상당한 분량의 지면을 할애해서 에큐메닉 운동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 특히 WCC라는 거대한 몸집의 신학 앞에서 우리 개혁주의 신학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바르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저자를 통해서 올바른 성경관과 교회관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신학의 혼돈과 더불어 물량주의가 판치는 한국교회 속에서, 선교 또한 물량주의로 흐르고 있다. 어느 지역에 몇 명의 선교사를 보냈는가를 자랑하고, 단기선교의 횟수를 자랑하고 있는 현실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열매 맺기까지는, 산모가 아이를 잉태하고 세상에 나오기까지 겪는 고통과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선교에고 이런 자세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교회는 그저 물량주의와 전시행정에 지나지 않는 선교를 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만 저자는 책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시대 신학의 최후의 보루로서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WCC와 같은 신학의 오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파수꾼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저자의 책은 이 시대 선교에 대한 무한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더불어 WCC 한국총회를 앞두고 있는 현 실정에 참으로 時宜適切(시의적절)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선교에 대한 수십 종의 책들이 있지만 저자의 책은 선교를 준비하고 선교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선교에 있어서 교과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교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독자에게 자세히 제공하고 있으며, 독자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성경적이며 올바른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위에서 성경적 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길잡이로서 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적용
선교를 말할 때 꼭 언급해야 하는 것이 있다. 선교를 함에 있어 사람도 필요하고, 재정도 필요하고, 전략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선교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선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선교는 세계 1.2위를 차지할 만큼 넘쳐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선교역사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큰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에큐메닉 신학의 도전이다. 이 에큐메닉의 신학은 큰 포용력이 있어 여러 종교를 끌어안는 힘이 있다. 에큐메닉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바로 일치와 단결이다. WCC 1차대회에서 저들이 표방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연합의 필요성”과 “교회 연합을 통한 선교사명의 수행”이라는 타이틀은 충분한 호소력이 있다. 이 운동은 관용과 포용이라는 미명하에 예수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과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를 주창하므로 타당성 있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 그들은 성도와 교회의 경건과 순결, 구령과 선교보다는 사회, 정치적 이슈와 현안에 주된 관심을 기울이고, 그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사회의 개혁과 변혁을 부르짖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교파간의 교리적 불일치성이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담한 단체들 중에는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를 믿지 않는 단체들도 많다. 행위적 구원을 가르치고, 유일한 구원자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침례 또는 세례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이단적인 교리들을 표방하는 단체들이 함께 가담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교리적 이단성과 상이한 교리적 차이를 무시하고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창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운동은 기독교적 바벨탑을 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의 연합이 정확이 무엇인지 교리적인 진술이 명확하지 못함으로 이후의 연합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현대의 혼탁한 신학 속에서 올바른 선교의 지침을 마련하여 올바른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신학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와 WCC와 같은 혼탁한 기독교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신학만이 올바른 대안이며, 이 땅의 기독교를 바르게 세워주는 길잡이가 된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위에서 선교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이 지상 최대의 위임 명령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외국 땅에서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하고 있다. 21세기의 세계 선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며, 누가 담당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 세계의 이목은 한국 교회를 향하고 있고, 많은 선교 전문가들도 한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큰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을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의 목회와 세계선교 사역에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목회와 세계 선교적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서 우리의 선교 현장에서 현지인들을 예수의 제자, 즉 지도자가 되도록 계발하고, 다시 현지 지도자들을 그들의 족속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며 지도자를 세워서 교회를 개척하여, 그들의 족속을 복음화 할 뿐 아니라 눈을 들어 밭을 보면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세계 선교에도 동참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혼란스러운 영적인 흐름들이 우리의 문화와 삶을 정복해 나가고 있는 이때에, 김성태 교수의 [현대선교학총론]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러한 도도한 영적 흐름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간구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복음에서 소외된 6천 개의 종족과 남은 우리 가족들, 지역의 많은 불신영혼들을 향한 주님의 뜨거운 부르심을 듣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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