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 생활
-청교도 운동과 언약도 운동이 동시대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17세기는 그야말로 영적 가치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의 활동은 영국 전 사회의 얼굴을 바꾸었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종교적 활약상은 가공할 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적인 세파에 좌우되는 아픔도 없자 않아 있었지만 그들이 남긴 영적 유산은 지금가지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한편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도들은 17세기 중반까지는 적어도 잉글랜드 청교도들과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61년 잉글랜드의 왕정 복귀이후와 특히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1648) 이후 언약도들의 지도자들이 세상을 떠남과 내부적인 갈등과 분열이 그 동안 유지해 왔던 일치된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극단적인 노선을 견지한 순수한 언약도들에 의하여 장로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수고와 순교의 피로 인하여 1688년 명예혁명이후 장로회주의가 재형성되면서 스코틀랜드는 오늘날까지 장로교 국가로 남아 있게 되었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에서 언약도들은 장차 견고하게 세워지게 될 장로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들이었고 국가와 정치 및 사회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 역시 막강하였다. 비록 그들에게는 늘 핍박과 죽음의 위협의 문턱을 넘나드는 일들이 있었지만 도리어 혹독한 겨울철에 만발하게 된 그들이 보여준 은혜의 꽃은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도전과 감동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그들의 삶과 그 시대의 교회를 다시 한 번 눈여겨보는 것은 경건한 자가 점점 사라지고 의인을 찾기 힘든 우리 시대에 크나큰 도전이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주일성수 문제
*절대로 주일학교 예배를 따로 만들지 말고 전 가족이 함께 예배드리게 하라.
*시편찬송을 하라
1. 교회
-17세기 스코틀랜드 교회는 성직자가 할 교회 행정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모든 원칙은 지역의 대 지주 혹은 토지 소유자들에 의하여 움직였다. 즉 그들은 주민들에게 집과 제분소 그리고 학교와 교회 및 목사와 목사의 사택과 생활비를 전부 제공하는 자들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극도로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대 지주의 손안에서 움직일 수박에 없었다. 심지어 목사들조차도 이들 후원자들에 의하여 청빙되었고 교회 법안들이 그리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강력하였다. 목사는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와 그 밖의 많은 일들의 조언자가 되었다. 목사는 마을에서 가장 잘 교육을 받은 자였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성도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늘 모범을 보여야 할 자였다. 경건하여야 했으며 양떼들을 세심히 살필 줄 알고 친절한 목사는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목사는 장로들의 조언을 들었고, 장로들은 각 지역에서 산출된 덕망 있고 존경받는 자라야 했다. 장로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심방을 통해서 교구민들을 잘 이해할 줄 알아야 했으며 공평하고 자애롭게 돌아보아야 했었다.
2. 평신도들의 생활
-그 당시에는 주일학교가 없었다.
3. 17세기 목사들
-설교는 목사의 사역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4. 17세기 강단 사역
-17세기 스코틀랜드에 있어서 강단 사역이야말로 가장 두드러진 요소였다.
맺는 말
-헨더슨 교수는 그의 책에서 이 시대의 설교자들에 대하여 결론을 지으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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