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스코틀랜드 선교
패트릭이 아일랜드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 영국 기독교도 북쪽으로 스코틀랜드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 선교를 이끈 인물이 성 니니안이었다(St. Ninian, Nynia).
영국의 수도원들 가운데 아일랜드 전승을 특징지은 학문에 대한 사랑이 여러 수도원 학교들에서 보존 및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것으로 추측되는 학교는 노섬브리아의 웨어마우스와 재로우(Jarrow)학교였다. 재로우 출신의 비드(Bede, 672-735)는 <영국 교회사>에서 그가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교육을 받은 브리튼 주민이었다고 전한다. codex amiatinus는 비드가 있던 Jarrow 수도원의 산물이다.
A. 신학자 베데(the Venerable Bede, 674-735)
재로우 수도
codex amiatinus
"codex amiatinus: 세계에서 가장 큰 책 가운데 하나, 이 책은 송아지 가죽으로 된 1030장 2060 페이지의 책으로 각 장이 한 마리의 송아지로 만들어 졌으며, 가로 세로가 27.5, 20,5 인치에 달한다. 두께가 10인치에 무게는 75,5파운드이고 책 표지는 약 90 파운드이다.
<- 이 책은 비드의 생전에 체올프리드 감독 아래 재로우(Jarrow)에 있는 필사실에서 만들어졌던 세 권의 책 가운데 하나 남은 것으로, 대재앙 이후 수도원에서 동일한 시기에 만들어졌던 것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다.
<- 이 책은 제롬의 라틴어 번역인 히브리어 법전의 현존하는 최고본이기 때문이며, 성경연구에서는 여전히 결정적인 성경본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i) 비드가 속한 수도원이 숙련된 필사자들을 갖추고 있는 대단히 부유한 수도원이었으며,
ii) 이 수도원은 성경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곳이었고, 교회 내에서 학문적 용도로 사용될 보기 쉬운 세 권의 책으로 구성된 최상의 본문을 만들어 내는 데 시간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iii) 그와 같은 기획은 자신의 자료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한 위대한 학자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라틴어 읽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이 사도신조와 주기도문을 잘 알고 있겠지만, 학식이 없는 사람들, 즉 자기 나라 말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의 언어로 이것을 말하고 정성스럽게 노래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일이다. 이것은 평신도들, 곧 대중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만 이루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에 능한 성직자와 수도사들에게서도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그럼으로써 믿는 자들의 전 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신앙의 힘 안에서 악한 영들의 공격에 맞서 어떻게 그들 자신을 무장하고 방어해야만 하는지를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탄원하는 자들이 한 목소리로 부르는 합창이 무슨 내용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빈번하게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의 영역을 제안했던 것이다.“
<영국 교회사 중에서>
III. 영국의 선교
북쪽에서 아이단과 그의 후계자들의 선교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교황 그레고리1세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이미 영국 남동부에 도착하여 켄트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교황이 솔선하여 그곳에 선교사들을 파송한 것은 켄트의 왕이자 험버 이남 색슨족의 상황인 에텔버트(Ethelbert)와 기독교도인 프랑크족 공주 베르타(bertha)간의 결혼을 이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선교사들은 원래 로마에 있는 그레고리 자신의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탁발수사 어거스틴(Augustine)과 서른 명의 수사들, 라우렌티우스라는 사제를 발탁하고 그들에게 프랑크 왕들과 갈리아 주교들에게 보내는 추천장들과 도서들을 준 뒤 잉글랜드로 파송했다. 이들은 그들의 기치로서 은 십자가를 들고,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린 판자를 들고 왔다.
왕은 멀지만 강성한 로마에서 온 새 종교의 의식적이고 웅변적인 외양에 감동을 받았다.
"여러분의 말과 약속이 무척 훌륭하군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불확실하므로 잉글랜드 전체 백성과 함께 오랫동안 모셔온 종교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여러분이 먼 데서 오셨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싶어 하시므로 지내시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해 드릴 것이며, 전도를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여러분의 종교로 귀의 시키든지 금하지도 개의치도 않을 것입니다."
왕은 선교사 일행이 켄터베리 시에 체류하도록 허락했다(596년).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는 대 그레고리우스의 기원
“... 앵글족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당신의 형제애에서 나온 노력으로 말미암아 오류를 떨쳐내고 거룩한 믿음의 빛으로 감싸게 되었기 때문에 여기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왔는지 누가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요5,17)라고 말씀하신 분의 역사가 아니라면 이것이 누구의 역사이겠습니까? 세상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그분의 능력으로 회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과거에) 배우지 못한 선포자들을 선택하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지금도 그분은 앵글족 중에서 약한 자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려 하심으로 같은 일을 행하시고 있습니다 ...”.
왕 에델베르트에게 보낸 대 그레고리우스의 편지
“... 영예로운 아들이시여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조신한 마음으로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을 당신을 섬기는 백성들 가운데 펼치는 일에 매진하십시오. 당신의 정직함의 열심을 회심하는 일에 몰두시키면서, 그것을 키워나가십시오. 우상숭배를 몰아내시고, 이방인들의 신전을 파괴하시고 견책, 엄포, 달램, 처벌, 선한 행실에서의 당신의 본을 통해서 당신 신하들이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게끔 하십시오. ... 당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분의 영광을 찾고 보존하려 하시는 바로 그분이 바로 당신의 명예로운 이름도 후손들 가운데에 더욱 명예롭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극도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도 로마제국이 거짓 신 숭배를 버리도록 만들었고, 이 나라를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능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게 하셨으며, ... 이 덕분에 그의 칭송이 과거 황제들보다 월등하고 ... 그의 명예가 그의 앞에 있던 자들보다 훨씬 빛나는 것이다. ...”
약 1년 뒤인 597년 어거스틴은 에텔버트를 개종시키는 데 성공한 뒤 601년 부활절에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레고리의 계획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런던에 수도대주교좌를 제우고, 자신의 휘하에 12개의 주교구를 두게끔 되어 있었다. 또한 서부의 켈트교회에 대해서도 관할권을 갖게 하고, 기회가 주어질 경우 요크에 영국 북부를 책임질 두 번째 수도대주교좌를 세우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교황의 이러한 낙천적인 계획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어거스틴은 런던이 아닌 켄터베리에 수도대주교좌를 두었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으며, 근처에 수도원을 지었다. 604년까지 로체스터와 런던에 주교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그가 죽고 왕 에텔버트가 죽은 뒤(616), 이교의 반발이 일어나 교회가 켄트 바깥 지역에 내린 뿌리가 얼마나 얕았는지를 드러낸다.
영국이 사실상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에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한편으로는 켈트족과 아일랜드 전승을 물려받은 서부와 북부 기독교인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출현한 남부의 색슨족 기독교인들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색슨족 교회는 유럽식을 본떠 지역 주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로마와 교황청에 충성하였다.
-이 갈등은 부분적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브리튼(켈트)족 기독교인들과 이교 침략자들 간의 해묵은 무력 투쟁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서부 브리튼족으로는 대대로 원수지간이었던 앵글족과 색슨족을 동료 기독교인들로 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의 뿌리는 교회 문제들에도 있었다. 켈트족 기독교의 기풍과 조직은 로마교회의 선교로 설립된 기독교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더 좋아했다.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교회사> 25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통에 속해 있는 자들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노섬브리아 왕국의 상태는 심각했다. 왜냐하면 국왕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전통을 따랐고, 왕후는 로마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특히 부활절 날짜가 서로 달랐으므로 한편에서 금식하고 있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잔치를 벌였다.”
-어거스틴은 이런 문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브리튼족 성직자들을 설득하였으나, 이들은 민중이 동의하지 않는 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관습을 포기할 수 없다고 버텼고, 교회회의를 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브리튼의 성직자들은 이 로마에서 온 고위 성직자의 권위적인 태도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것이다(cf. 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4, 47
-668년 교황 비탈리아누스(Vitalian)는 소아시아 타르수스(다소) 출신 테오도루스(Theodore, 620/-690)를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테오도루스는 영국 전역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그 대주교구에 맨 처음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관할 지역의 모든 교회들을 체계적으로 방문함으로써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찰 결과를 토대로 기존 교구들을 재조직하고 새 교구들을 신설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허트퍼드 교회회의(673)를 주재하여 교회정치 기본법을 제정하고 정치권력이 여전히 분열되어 있던 상황에서 교회를 전국적인 조직체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켈트 수도원의 비밀고해와 사면 관행을 받아들이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폈고, 아일랜드의 관습에 따라 비밀고해와 사면을 수도원에 속하지 않은 평신도들에게 연례 의무로 부과하였다.
-테오도루스의 조직력과 목회력은 무엇보다도 색슨족이나 켈트족 어느 한쪽을 편애하지 않고 두 전승이 서로 보완하고 살찌우는 단일체로 융합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영국의 갈등 해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으로서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Oswy)를 들 수 있다. 그는 자기 왕국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양 진영의 주장을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 주교가 주깨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받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대표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그는 결단을 내려 영국 전체를 로마에 충성하도록 만들었으며, 종교개혁까지 영국교회는 교황의 가장 충실한 신자였다.
“잉글랜드의 개종은 지적이고 도덕적이었다기보다 명목적이고 의식적이었다. 교육이 성직자들과 수사들에게 한정되었고, 교육 내용은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약간의 라틴어가 전부였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는 가르치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은 브리튼 성직자들에 비해 아주 근소하게 나은 정도였다. 로마가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 원인은 주로 우수한 조직, 사도로부터의 직접적 계승, 로마 제국의 명성 때문이었다.”(필립 샤프, 교회사 전집 4, 52)
기독교와 프랑크 왕국
*이민족의 이동
I. 메로빙거 왕조와 클로비스
-세금으로부터의 자유
-세력이 있는 사람들을 프랑크라 불렀고 그들의 연합을 프랑크족이라 불렀다.
-496년 클로비스(Clovis)가 가톨릭 기독교로 개종한 일은 장차 유럽 대륙의 정치와 종교 모두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클로비스와 그 아들들의 통치하에 프랑크 족은 과거에 로마 제국이 차지하였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영토들을 정복한 뒤 '레그눔 프랑코룸'(Regnum Francorum)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원래 영토인 라인 강과 솜 강 사이의 지역에서 이동하여 과거에 지방 주둔군 사령관 스바아그리우스(Syagrius)가 통치하던 지역 -대강 솜 강과 로르 강 사이지역-을 처음에는 약탈하다가 결국 점령하였다.
-그 뒤 클로비스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라인 강을 따라 남부와 동부에 왕국을 세운 알라마넨 족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로르 강을 건너 아퀸텐(Aquitaine)을 점령하였으며, 507년 그곳의 부일(보글라덴시스)에서 서고트족을 물리치고 피레네 산맥까지 뻗어있는 갈리아 남서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클로비스의 계승자들은 꾸준히 프랑크 왕국의 주도권을 넓혀갔다. 튀링엔을 합병하였고, 결국 532년 이후에는 론 계곡과 스위스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부르군트 왕국마저 합병하였다.
*클로비스의 확장
*클로비스와 클로틸데(기독교 공주와 야만인의 결혼)
1. 클로드비히의 개종
-498년 클로드비히는 정치적인 동기와 개인적인 동기로 개종을 하게 된다. 493년에 이들의 왕인 클로드비히가 그리스도인 공주의 부르군트의 클로딜데(Chrodechildis of Burgundy)와 결혼하였다. 이 공주는 남편의 개종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성공치 못하였다. 그 와중에 496/7년 프랑크족의 라이벌에 해당하는 알레마넨(Alemannien)과의 전투에서 클로드비히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었다:
-왕비는 그에게 쉬지 않고(non cessabat praedicare)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우상(idola) 숭배를 거부하도록 하였다. 알레만인들과의 전쟁에 휘말려들 때까지 헌신을 하도록 자신을 내맡길 수 없었다: 양쪽 군대의 충돌이 무시무시한 피비린내 가운데 끝이 나고 클로드비히의 군대는 완전한 전멸 직전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 처해서 그는 자기 눈을 하늘로 치켜 올리고, 마음속에서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을 받으며,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가지고 아뢰었다.
-"예수 그리스도여, 클로딜데(Chrodechildis)가 말하기를 당신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laborantibus) 도움을 주시며 당신에게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승리는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filius Dei vivi)이라고 하였나이다; 내가 간절히 부복하여(devotus efflagito) 당신의 영광으로 가득한 도우심을 간구하나이다: 나의 대적을 이김을 나에게 허락하셔서 나로 당신 이름으로 성별 된 백성들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그 능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그래서 내가 당신을 믿으며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 받게 하소서."
-전투에 승리한 클로드비히는 498/9년 랭스(Reims)의 레미기우스(Remigius)를 초청하여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먼저 왕이 주교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따라서) 제 2의 콘스탄티누스(novus Constantinus)인 그가 세례반(lavacrum)으로 가서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되고 깨끗한 가운데에서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더러운 얼룩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 그런데 거룩한 주교 레미기우스는 ... 그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실베스터의 기적과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 그러니까 왕은 삼위일체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시와 함께 성유부음을 받았다. 그의 군인 3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레미기우스는 세례에서 매우 유명한 말을 남긴다: "당신이 불태웠던 것들을 경배하고, (이전에) 당신이 경배했던 것들을 불사르라"(adora quod incendisti, incende quod adorasti)
*프랑크족의 로마가톨릭으로의 개종은 장기적으로 보아 두 가지의 결과를 낳았다.
-첫째는 고트족 통치에서의 프랑크 족의 정복자들과 갈리아(Gall) 지역의 백성들 사이의 정치적인 대립이 공동의 종교를 통하여 순화되어, 하나의 교회라는 토양 위에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쉽게 하였다.
-둘째는 이교적인 제사법(Sakralrechts)에 기초하여 일반적인 게르만 관행에서 그리고 로마의 황제권의 행사와 상응하여 클로드비히와 그의 후계자들은 교회에서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들은 이 종교적 권위를 국가의 확장(Landesausbau)과 통치권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교회에 대한 종주권의 일환으로서 클로드비히는 약 100여개에 이르는 주교좌(Bistümer)에 대한 재량권(Verführungsgewalt)을 요구하였고, 주교좌의 지속은 프랑크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국가적"(staatlicher) 사회구조를 담보하였다.
-프랑크의 귀족 출신의 주교들이 점차 증가하였고 이들은 교회적 삶의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이들과 더불어 수도원 역시 교회의 삶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
-클로드비히는 511년 오르레앙(Orleans)에서 골-프랑크 지역의 감독들을 제국회의(Reichssynode)로 소집하고, 교회의 재조직과 계속해서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2. 왜 크로비스는 개종하였을까?
①정치적 이해에서이다. 즉 클로비스는 통치권의 확보를 위해 갈로-로마 주교들 및 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겸손>을 가진 자로서 주교들에게 경의를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함으로서 칭송을 받음과 동시에 알라만족을 패배시키고 남부 갈리아로 진격했다. 그 당시 남부 갈리아 지방에서는 대부분의 가톨릭인들이 아리우스파인 서고트족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이들 가톨릭인들과 더불어 주교들이 가톨릭 교파의 왕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그에게 협조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②갈로-로마인 주교들의 승리다. 아비투스는 그의 편지에서 “당신의 신앙, 그것은 우리들의 승리다”라고 기술하였는데, 이것은 곧 갈로-로마인 주교들의 승리를 말한다. 갈로-로마인 주교들과 귀족들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행정력이 사라진 이후부터 유일하게 사회의 권한을 점유한 자들이었다.
*프랑크 왕국, 즉, 프랑크의 메로빙조는 6세기 중반까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과거 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지역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 영토는 아버지의 재산을 생존해 있는 모든 아들에게 나눠주도록 한 프랑크족의 관습 때문에 여러 왕들 사이에 빈번히 분할되었다. 그 부분적인 결과로 제국 내에서도 반(半) 정치적이고 반(半) 부족적인 성격을 지닌 지역 분할들이 발생하였다.
-분활 상속제
-왕의 힘이 점점 약해짐
-왕 보다 힘이 센 대영주의 등장
*그 중 첫 번째는 오스타라시아(Austrasia)로서, 튀링엔뿐만 아니라 라인강 저지대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족의 고토에 자리잡았다. 두 번째는 뉴스트라리아(Neustria)로서, 일찍이 클로드비히가 자신의 수도로 삼은 파리를 중심으로 로르 강 남부와 솜 강 북부까지 뻗어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크족의 정치사에서 비교적 중요성이 덜한 아퀴텐과 부르고뉴(부르군트) 남부 지역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할에도 불구하고 프랑크 왕국은 단일 유산으로 이해되었으며, 실제로 클로비스의 아들 로타르 1세(Lotar I, 561 죽음)의 말년과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의 재위기간(623-639) 대부분은 단일 군주가 전 지역을 다스렸다.
3. 메로빙거 시대의 사회와 교회
*메로빙조 때의 교회와 사회는 갈수록 쇠퇴와 심지어 해체의 징조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서 깊은 도시들의 몰락과 상업 및 정보의 쇠퇴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삶의 실제 중심지는 농촌의 장원-생활필수품들에 관한 자급자족을 지향하였고, 또 실제로 자급자족을 실현한 사유지 -으로 옮겨갔다.
-유력한 인물이거나 왕 자신인 경우도 있었던 영주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다스린 이 사유지들은 지주와 농노들 또는 소작인들 모두에게 경제적이고 신체적인 안전을 주었다. 동시에 이 장원 제도는 권위의 분산을 촉진하였고, 토지 보유자에게 재산과 권력을 함께 보장해 주었다.
-왜냐하면 장원은 음식과 옷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프랑크 사회를 얼룩지게 만든 끊임없는 전쟁에 필요한 장정들과 무기들까지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권력이 분산되고 불안전한 시대에 교회의 전통 체제와 운영 방식이 지닌 영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장원의 등장과 관련성을 지닌 것으로 추측되는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발전은 '개인 소유 교회들', 즉 영주가 자기 영토에 개인 비용을 들여 건축한 뒤 사제의 급료를 지불함으로써 운영하던 교회들이 훨씬 더 많이 생긴 점이다. 이러한 발전에서는 훗날의 교회구 체계 뿐 아니라, 평신도의 성직 서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많은 논쟁들의 시작 단계를 볼 수 있다.
-새로운 왕국의 주교들은 공동 문제들을 조정하기 위해 공의회를 개최하던 옛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그 횟수는 많지 않았고 정기적이지도 않았다. 초기의 프랑크 교회는 심지어 교황 권으로부터도 갈수록 고립되어 간 듯하다.
"프랑크 왕국 자체 문제에서는 교회가 핵심적이고도 본질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들과 영주들, 그리고 농민들은 한결같이 무질서한 세상에 질서와 정의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성인들의 보호 및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기독교 주교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옛 로마 체제의 전통의 비위도 맞춰줘야 하는 동시에 공의와 자비를 요구하는 기독교 하나님의 까다로운 취향도 맞춰줘야 했던 주교는 고급 정치인이기도 했고, 성인이기도 했으며, 예언자이기도 했다. 글을 깨우쳐 주고 교육을 시키는 일은 주로 성직자들의 몫이었다. 학교와 비슷한 곳은 오직 수도원들과 성직자 훈련소 역할을 하는 주교 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워커, 261)
*그러므로 교회들과 수도원들은 그들이 내놓는 명백한 봉사의 대가로 점차 토지를 수여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이것은 메로빙조 왕들이 크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들을 주교들이 좌우하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따라서 왕들은 민중이 주교를 선출하던 옛 관습을 폐기해 버리는 대신 자기들이 주교 임명권을 가졌으며, 결국에는 이 권한을 충성스런 신하들에게 성직록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주교죄를 비워놓고 그 동안 세입을 가로채는 경향도 빈발하였다.
-그레고리 교황 때로부터 계속해서 교황들은 메로빙조 왕들의 의식을 바꾸려고 노력하였으나 번번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II. 카로링거 왕조와 보니파키우스
-프랑크 교회의 개혁과 문예부흥은 결국 메로빙조가 대체되면서 찾아왔다. 그것은 639년 다고베르트 1세(Dagobert I)가 죽은 뒤부터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에 점진적으로 발생한 일이엇다. 그가 죽은 뒤부터 메로빙조는 쇠퇴한 반면 뉴스트리아, 오스트라시아, 부르군트에서 이른바 '대재상들'(왕의 주요 고문들과 대신들)의 권력이 커짐으로써 결국에는 새로운 정치 판도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오스타라시아의 대재상들, 즉 주교 아눌프(Arnulf of Metz, 641 죽음)와 피핀(Pepin, 639 죽음)의 자손들은 경쟁자들을 눌렀고, 피핀 2세(715년 죽음)와 그의 서자 샤를(Charles, 그는 '망치'라는 뜻을 지닌 '마르텔'(Martel)이라 부름)을 통해서 몇 대에 걸친 메로빙조 왕들의 막후에서 실질상의 군주로서 프랑크 왕국을 다스렸다.
-마르켈은 망치라는 뜻.
*프랑크 왕국
1. 카알 마르텔
*투르-포아티에전투(732)
-기병전을 사용함. 돈이 만이 듬.
-샤를은 포아티에 근처에서 사라센 군대와 싸워 거둔 승리(732)로 역사와 전설 모두에서 유명하게 되었다. 이 승리는 단지 프랑크 왕국을 보존하는데 그치지 않고, 곧 유럽이라 불리게 될 지역의 미래를 보장해 주었던 바, 프랑크 왕국이 차지한 자리는 유럽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르눌프 가(家)는 초기에 이렇게 군사적인 사업에 몰두해 있는 동안 교화와의 관계가 모호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피핀과 샤를은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교회 재산을 징발하였다(이 점에서 샤를이 한층 더 심했다). 그들로서는 메로빙조의 영토가 증여와 성직록으로 잠식당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두 지도자는 접경지대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북동부 지역들을 대상으로 영국 선교사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하였다. 이 사업으로 그들은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미래를 위한 중요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었다.
-전쟁 후 기병들을 본인의 기병으로 흡수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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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니파키우스(680-755/6)의 선교
-보니파키우스(Boniface, 680-754)로 알려진 독일의 사도(Apostel der Deutschen) 크레디톤의 윈프리드(Winfried)이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한 나그네'(peregrinatio propter Christum)됨이라고 하는 금욕적 정신을 통해서 선교에의 동기를 갖게 되었다. 우선 그는 윌리브로드(Willibrord, 658-739)의 프리지아(Friesia,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선교에 동참한다(715/6년).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마감한다. 그리고는 낙심하여 귀국길에 로마에 이르게 된다(718). 여기서 보니파키우스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 II)의 격려로 독일 지역으로 가서 수도원을 건립하고 선교에 힘쓴다.
-722년 보니파키우스는 프랑크의 요새인 아메네부르크(Amöneburg)의 보호아래 선교의 거점이 될 첫 번째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곧 보니파키우스는 722년 11월 30일 로마에 소환되어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로부터 고정된 교구도 없는 독일 변경지의 선교감독(Missionsbischof)에 임명됨으로써 자신의 일생에 최대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에 보니파키우스는 로마의 이웃 교구들의 감독들이 했던 것처럼, 교황에 대하여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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