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

예림의집 2014. 10. 15. 20:44

 

슐라이어마허(F. Schleiermacher, 1768-1834)

 

흔히들 슐라이어마허를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는 모라비안 경건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목사인 아버지를 두었다. 따라서 그도 경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어려서부터 정통 교리에 대해 많은 회의를 품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칸트 철학과 계몽주의에 심취되었고, 1790년 목사 안수 받은 후 당시 새로운 운동인 낭만주의에 매료되었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 상상력, 직관(intuition) 등을 강조하였다. 그가 처음 의도했던 바는 지식층에게 기독교를 좀 더 믿을 만한 종교로 만들어 보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단순히 신학을 철학적인 것에서 추론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칸트처럼 기독교를 단순히 도덕적인 것으로 추락시키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교리와 고백에도 관심을 가졌고, 기독론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 역사적 정통적 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하였다.

 

종교의 핵심으로서의 ‘절대 의존 감정(Feeling of Absolute Dependence)

정통 신학을 ‘위로부터’ 신학이라 한다면 당시 계몽주의적 신학을 ‘아래로부터’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정통 신학은 권위적이고 인간의 창의력과 자유를 질식시키고 교회의 교리와 하나님을 혼동케 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정통신학을 거부한 계몽주의는 옳았지만, 자연신론(deism)은 메마른 자연주의적 신앙으로 인도하여 일종의 종교철학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두 가지 전통에서 그는 신학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의 인간적 성찰로 간주하며 새로운 신학의 길을 개척했다. 교리가 아닌 종교적 경험이 신학의 진정한 근거가 되었다. 그 종교적 경험이란 바로 ‘느낌’ 혹은 ‘감정(feeling)’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감정’(Gefühl)이란 단순히 우리가 느끼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심오한 의식을 의미한다. 즉 어떤 사색이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것이다‘고 한다. 이 감정은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지만 이성이나 양심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성은 과학을 낳고 양심은 도덕을 낳고 감정은 종교를 낳는다고 말한다.

칸트의 신학(혹은 철학)은 “주체(subject)로 돌아가라”였다고 하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믿는 주체(believing subject)로 돌아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외적 계시나 교리보다는 믿는 주관적 경험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한편 어떤 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정신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교리의 형태는 어떤 특정의 시기에 국한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영속적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건 살아 있는 종교적 의식의 함의를 비판적 성찰에 의거하여 새로이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적 계시를 부정하고 주관적 체험을 우선시한데서 오는 오류이다. 개인적 체험은 영속성이 없고 권위와 신빙성이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체험(예를 들어, 하나님)은 영속적 가치가 있고 권위와 신빙성이 있다. 그 다음 개인적 신앙 체험을 교리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모든 종교가 이러한 ‘절대 의존 감정’을 각기 다른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거짓된 종교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가장 발전된 최고의 종교라고 하며 기독교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앙으로 정의되는 ‘의존’의 종교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 의식이 바로 그 ‘절대 의존 감정’이라는 것이다.

 

계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경험 혹은 감정이 신학의 궁극적 기준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계시의 형태이다. 계시란 어떤 개념 혹은 문장으로 주어질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개념을 초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계시는 직접 받을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받는 자에 의해 한 번 걸러야 하는 것이 계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한 계시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우리에게 내적으로 받아지지 않는 것은 결코 나에게 계시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외부적이고 초월적 개념을 거부한다. 이런 차원에서 슐라이어마허는 성경을 종교(기독교)의 감정을 말로 표현한 인간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있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 신학은 성경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한다.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 고백서를 받아들이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의미하는 바는 자율적으로 해석되는 ‘종교적 감정(Gefühl)’이다. 다른 것은(성경, 고백) 그 감정을 해석하는데 사용되는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언어)맹목주의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언어이다.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는 구분할 수 없듯이 말씀도 그러하다.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종교다원주의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은 상대적 가치만 있다고 생각함(바울의… 모세의… 베드로의…)

 

하나님

슐라이어마허에게 하나님은 단지 인간과 같이 종교적 감정을 정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실재(reality)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에 대해 그 이상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범신론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이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며 우리의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정수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관한 것이 된다. 삼위일체란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과의 여러 다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은 삼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이라고 한다. 또한 슐라이어마허는 어떤 초자연적인 것을(기적, 하늘나라, 천사, 등등) 부정한다. 즉 초자연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 세계가 상호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한 것은 계몽주의, 과학주의 시대에 맞춰 주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범신론적, 양태론적 신관

 

인간

슐라이어마허에게 죄란 역사 속에서 어떤 특정한 명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대신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죄요, 종교적 감정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영생이나 영벌이 한 사람의 한 순간의 결정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 단계에서는 영적으로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생물학적 지적인 발달이 영적 도덕적 발달보다 빠르다고 한다. 이런 차이에서 죄가 생긴다고 한다. 그는 죄란 선을 사유화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죄가 존재해도 인간의 근본적 선은 계속 존재한다고 한다.

-진화론적 발상

 

그리스도

①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는 남 다른 ‘종교적 감정(Gefühl)’을 가졌었다고 한다. 비록 십자가상의 죽음, 부활, 승천, 재림은 성경의 교리에 중요하기는 해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는 데는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해도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속이란 그러한 역사적, 외형적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②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단지 모델 일뿐 아니라 사람이 필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모습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인간 안에 내재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리스도는 인간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는 데는 실질적으로 죄가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역사적 결론으로 그리스도가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적 감정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죄가 없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은 그가 우리의 불완전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 우리의 죄가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구속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God-consciousness)’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이분법을 주장한다.

-예수라는 청년이 남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라 칭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쟁이, 사기꾼, 미치광이가 아니면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은혜

구원의 섭리는 창조의 섭리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한다. 왜냐면 창조의 섭리로부터 종교적 의식(감정)이 가능함에서 현실로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은혜란 단지 인간의 가능성의 발전이요 인간이 거절할 수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베푸는 구속은 그리스도 가진 하나님-의식(God-consciousness)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평가

①이성적 자율성의 원리: 비록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자율적 이성에 근거를 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시를 부정하는 그의 신학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의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 인간이 지식을 얻는 방법은 외부적인 것 아니면 내부적인 것이다. 인간을 떠난 외부적인 방법이란 결국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다른 인격적인 존재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떤 지식의 소통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한다면 결국 인간 내부적 자율적 이성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슐라이어마허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반이성적 감정을 강조한 그에게 이성적 근거가 숨어 있다.

-잘못된 이원론

-하나님은 알 수 없지만 게풀의 대상으로 본다.

-나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찾으려 함.

②비슷한 내용으로 슐라이어마허는 기독교를 어떤 절대적 의존 감정에 근거를 두지만 그것은 인간의 자율적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즉 계시를 떠나 인간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여기 인간 스스로가 인지한다는 것은 이성이 작동하는 이성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감정이라는 것 자체는 이성과 상관없는 작동이다. 반이성적 감정을 추구하는 슐라이어마허 신학 체계에 이렇게 이성적인 것이 동시에 들어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 하겠다.

③비록 그는 성경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성경이란 단지 기독교 초창기 문서로서(전통)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굳이 성경을 논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발상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인간의 권위로 낮추려는 것뿐이다.

④그의 신학은 잘못된 하나님/인간, 초월적/내재적 이원론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란 우리가 정하는 어떤 존재라기보다는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나타나는 감정(Gefühl)에 발견된다고 한다. 이것은 범신론적 개념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추구하는 신비적 체험 개념이 슐라이어마허의 감정 개념에도 발견된다. 신 혹은 하나님이란 인간이 체험하는 실재(reality)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⑤그의 신학에도 칸트의 철학처럼 주체/객체의 이원론이 나타난다. 그는 주관주의자(subjectivist)이다. 즉 그는 진리 자체 혹은 우리를 떠나서 나타나는 진리를 부정한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변화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주관주의자임을 말해준다. 어떤 객관적, 역사적 사건은 자신에게 체험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나오는 것이 된다. 자신과 관계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구원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를 비롯해서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이러한 자율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신앙에 불필요한 것 혹은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자신과 관계되어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칸트의 현상적/본체적 세계의 이원론에 기인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본체적 세계는 우리가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관계되는 한도에서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이나 초월적 세계는 인간의 종교적 세계가 무의미에 빠지지 않도록 만든 주관적 세계이다.

⑥그의 그리스도는 인간 성품에 내재해 있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이러한 개념은 칸트에게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윤리적 가능성이 신적 의미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개념은 인간 자율성을 장식하고 확인하는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⑦슐라이어마허의 구속사는 단순히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옮겨감을 느끼는 종교적 감정의 발전 과정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 과정으로는 죽음이나 심한 고뇌를 극복할 수 없고, 고뇌나 고독 등을 극복하는 것 같아도 잠정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그칠 것이다.

⑧그의 신학은 우리(인간)를 떠나서는 하나님도 없고 진리도 없다고 가르친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나 인간의 능력은 다를 바가 없다. 지적한대로 그의 신학은 단지 인간이 표출(postulate)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⑨그렌츠와 올슨은 슐라이어마허의 신관은 만유재신론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세상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