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은 소중한 예물.
찬송은 예물이란 말을 들어 보았는가? 혹시 찬송을 예배를 준비하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로 생각하고 있진 않은가? 찬송은 예물이라는 생각을 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도 처음 듣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많은 교회에서는 찬송을 예물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예물이란 헌금이나 성전에 필요한 물건 등 즉, 유형적인 것만 그에 해당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예물은 곧 헌금이라고만 많이 생각해 왔을 것이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했다면 '준비찬송'이라는 말도, 4절까지 있는 찬송을 시간 관계상 '1절과 4절만' 부르는 병패도 없었을 것이다. 헌금하는 지폐(돈)를 가운데를 잘라버리고 양 끝만 드리는 분은 없을 테니까…. 만약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찬송하는 태도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까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신앙인들의 노래? 예배를 돕는 노래? 마음을 여는 노래? 마음에 평안을 주는 노래? 많은 사람들이 찬송은 신앙인들의 정서를 순화시키고 양심을 일깨우는 노래 정도로 생각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찬송이 성도들의 정서에 유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아울러 예배 분위기를 돕고 심령을 평안케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문제는 그런 이유 때문에 찬송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앞에 열거한 그런 현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찬송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부수적인 현상들일 뿐이다. 즉, 하나님을 찬송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지 찬송 자체에서 나오는 어떤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찬송을 너무 많이 왜곡시켜 왔다. 그리고 수많은 교회에서 찬송을 일회용 반창고 보다 더 하찮게 여기고 있다. 필요할 때마다 쓰고 그냥 방치해 둔다. 찬송이 도구로 전락하는 통탄할 순간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선 몇몇 신학교의 통탄할 모습을 보게 된다. 대부분의 학교는 5월 달에 축제가 있습니다. 이 축제의 한 순서가 찬양 경연대회이다. 찬송을 가지고 누가 잘 부르고 누가 더 멋지게 부르는지 판단하고 점수를 매기는 현장입니다. 참가 신청을 받고 참가비도 받는다. 예선과 본선이 있고 심사위원들이 있으며 예선을 통과해야 본선을 나갈 수가 있다. 찬양을 하는데 돈을 지불해야 하고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몇 날 며칠을 연습을 해야 한다. 찬양 경연대회가 축제의 꽃이라고 한다. 찬양 경영대회를 통해 축제의 분위기가 고조 된다고 한다. 여러분! 누가 감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찬양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단 말인가? 찬양이 축제를 돕는 도구로 전락하는 현장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러한 불신앙적인 일을 막고 싶을 따름이다. 힘이 없어서 안타깝게 여기며 기도할 따름이다.
다음으로 흔히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하는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찬송 도취증이라는 것이다. 대개 한 두곡의 찬송을 수 없이 반복하는 것이 특징인데 북을 치고 손뼉을 치면서 성도들을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끌어간다. 물론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런 식의 찬송을 매우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고 은혜를 받은 것 같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저 또한 청년 때에 그런 집회에 많이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그런 식의 집회를 인도하는 강사님에게 굳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물어 보았던 적이 있다. 그 대답은 "네, 찬송을 뜨겁게 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 찬송을 뜨겁게 해야 한다는 말에는 저도 동감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구별 못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을 열고 뜨겁게 찬송 하는 것은 영적인 측면이지 물리적으로 몸에 열을 발산해서 뜨겁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몸이 뜨겁다고 마음이 또한 뜨겁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최면 또는 착각일 뿐이다. 골방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간절하게 묵상하는 사람은 뜨거운 심령인가, 아닌가?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박수를 치고 땀을 흘리고 침을 튀겨야 뜨겁게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인도자의 교만에서 나오는, 대중들의 열렬한 반응에 따른 자기도취에서 나오는, 하나님은 가려지고 인도자 자신을 드러내는 이 모든 현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배역의 길로 흐를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너무나 슬프다. 아직도 이러한 인도자가 많은 교회와 찬양의 현장에서 뜨거운 찬양이라는 명찰을 달고 많은 성도들을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이것은 죄다. 너무나도 큰 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절벽으로 함께 향하는 죄다.
또 한 가지는 일부 선교단이나 부흥사들의 경우 장소에 전혀 걸맞지 않게 필요 이상으로 큰 고성능 앰프 시스템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소리의 크기를 최고로 높이기 때문에 가히 지붕이 들썩들썩할 지경이다. 아마 그들은 찬송의 소리는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그렇게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무지한 발상이다. 인간의 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고통을 느끼고 불쾌감을 느끼고 내용과는 상관없이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찬양에, 예배에 방해가 될 뿐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에 장해물이 될 뿐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많은 단체나 부흥사들이 소리의 크기와 영성을 비례하다고 여기는 못된 생각이다. 우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작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마치 맞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이것은 불신앙의 표본을 보여주는 말이다. 결코 성경에는 소리의 크기로 믿음을 평가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조용히,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을 많이 보여 주셨다. 결코 예수님은 요란한 부흥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주관적으로 행동하다가 결국에는 성도들의 감성을 가지고 장난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찬송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찬송을 그저 찬송일 뿐이요, 때문에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불러야 한다. 사실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하게 찬송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찬송을 많이 하되 그것은 오직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을 끝없이 송축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거듭 강조한다. 그 찬송의 내용이 통회하는 것이든 간구 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 행하심을 높이는 것이든 그 형식에 상관없이 찬송하는 목적만큼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아직 우리 주변에는 흥분 상태와 성령 충만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특히 찬양인도자들, 예배 인도자들, 목사님들, 성가대원들, 지휘자들… 이들이 찬양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갖도록 기도해야 합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찬송이 잘못 이해되는 몇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어떤 교회 장로님은 주일날 성가대원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무슨 심사위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늘 평가해서 말하기를 좋아 한다. 만약 한 곳이라도 틀리는 날에는 성가대원들에게 왜 죽을 쒔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아마 그 장로님은 틀리지 않고 제대로 하는 찬송은 밥이요, 그렇지 않은 경우는 죽이나 누룽지가 되는가보다. 그러나 더욱 문제인 것은 많은 성가대원들 자신이 그 장로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찬송이 끝난 후 성도들이 아멘으로 힘차가 화답한다면 흐뭇해하고, 별 반응이 없으면 속으로 "에이, 오늘도 죽 쑤었구나!"라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서 즉, 성도들을 의식하며 선곡했고 또한 그런 자세로 불렀기 때문이다.
반면, 요즘 젊은이들을 보자. 그들은 대개 찬송을 자신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선택하고 즐기려고 한다. 즉, 찬송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다는 차원에서 선곡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서를 위해 선곡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어떤 찬송을 받고 싶어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내 취향만을 우선하는 경우입니다. 이 역시 찬송이 예물임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 뜻 없이 하는 행동들입니다. 내가 어느 날 어느 모임에서 찬양 인도를 할 때이다. "함께 주님을 찬양합시다. <목마른 사슴이>를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니까 한 청년이 손을 들고 대뜸 말합니다. "전도사님 그 찬양 이제 그만 좀 부릅시다. 너무 불러서 지겹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했다. "자매님, 찬송은 자매님을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약과이다. 심지어 일부 찬양 사역자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에는 경쾌한 곡을 선사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시는 000을 불러 드리겠습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삼류 가수들의 흉내나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부른단 말인가? 이 순간 하나님은 어떠한 표정을 짓고 계실까? 이는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촌극이 아닐 수 없다. 찬송을 예물로 생각하지 않고 신앙인의 정서와 예배 분위기를 위한 보조 수단 정도로 인식해 온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찬송에 대한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올바른 사역자들이 세워져서 올바른 마음으로 찬양을 부르는 곳이 확산됨을 감사드리지만, 아직도 더 많은 곳에서 찬양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다.
"도대체 왜 찬송이 예물이란 것입니까? 왜 침을 튀겨가며 많은 사람들, 리더들을 공격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다음 몇 가지를 저와 함께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우리가 “2. 찬송은 성도의 의무”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찬송의 시작은 하나님의 명령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아울러 그 명령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이 찬송 받기를 기뻐하고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주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찬송이다. 여러분이 동의하든 안하든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며 진실이다. 내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해도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찬송은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가 아니라 주의 보자 앞에 피어나는 향연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자주 떠올리는 "다윗"을 보자. 성경 인물 가운데 다윗은 찬송의 대표주자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지은 시편의 대부분은 찬송이 아닌 것이 없다.
시편 69편 30,31절을 보자.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는 온전한 자신의 찬송이 살아있는 가축을 예물로 드림보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찬송이 예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음을 증거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신약 히브리서 13장 15절을 보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이는 찬송이 예배의 기본이 됨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다.
끝으로 계시록 5장 12절 말씀을 보자.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어린양께서 찬송을 받으시기에, 차송은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물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찬송을 찬송 이외의 목적을 위해 부르지 마시길 바란다. 찬송은 그것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오직 삼위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당한 소중한 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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