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기독교윤리학과 신학

예림의집 2014. 10. 9. 19:48

 

3. 기독교윤리학과 신학


인간의 행동관습(관습화된 행동)만이 윤리학의 반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지만 윤리학에서 공적인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인간의 행동은 대체로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공동된 원리에 따라 행하는 행동 방식을 다룬다. 윤리학은 인간의 행동관습에 대한 반성작업이다.

 

(개혁주의입장에서 본) 기독교윤리학은 신학의 방법론과 그 틀 안에서 성격이 결정되기에 기독교윤리학과 신학의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학과 기독교 윤리

기독교윤리 = 인간의 행위 + 규범 = 人間學

신학 = 하나님의 본성 +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통일되고 일관성 있는 체계 안에

논리적으로 서술한 학문 ➜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이 어떻게 피조세계에 영향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해...

 

?

그렇다면, 신학이 학문으로 지지될 수 있는가?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증명이 가능한 지식을 science라고 한다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반면 어떤 지식이 철학적 사유나 역사적 문헌 연구, 직관적인 관찰(인식), 계시에 의해 주어진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얻어진 지식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타당한 지식으로 인식될 때 이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여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면 학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e.g.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임상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치료에 효과가 있다면 의학계에서 이를 치료를 사용하고

그 치료의 방법을 인정하고 있다.

신학과 기독교 윤리의 차이점

ⅰ) 진술의 성격

- 倫理學 = 당위 = imperative = explicitly normative statement

: 윤리학의 진술은 당위적인 진술이다. 따라서 명령형의 진술이 많으며 명시적으로 규범적인 진술이다.

- 新學 = descriptive = indicative statement

: 신학의 진술은 대상이 하나님이시기에 서술적인 진술일 수밖에 없다. 기술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진술한다.

 

⇨ but 이 기술적인 진술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기술적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신학의 진술은 기술적인 진술이지만 암시적/간접적으로 규범적인 진술을 갖는다.

 

e.g.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객관적인 진술이지만 그 진술를 읽고 듣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많음을 우리는 안다.

이는 그 기술적인 진술들을 접할 때 간접적으로 규범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3:16의 구원론적 진술이 “해는 동쪽에서 뜬다”는 진술과 같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수는 없다.

so 신학의 모든 진술이 규범적이며 강력한 규범적 호소력을 갖는다.

ⅱ) 자료의 근원

- 신학 : 성경 + 일반은총의 영역(역사, 자연, 문화...)을 자료로 한다.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지식은 성경을 primary source로 하고 이를 해석하고 서술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 있어

성경의 빛 아래 일반계시의 영역으로부터 얻은 secondary source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신학이라 한다. c.f. 성경의 자료만을 취급; 근본주의, 일반계시에 우선을 두어 취급; 자유주의

?

그렇다면, 왜 일반은총의 자료는 보조적인 자료로 주자료의 비판적인 검토를 받아야만 하는가?

① 일반은총의 영역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로 오염되었기에 신학을 바로 세울 수 없다.

② 일반은총의 영역은 타락의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구원의 지식)을 제시하지 못한다.

③ 일반은총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cf. so, 결코 자연신학(현대의 폴틸리히의 철학신학)은 바른 길로 갈 수 없는 것이다.

 

- 기독교윤리학 : 성경의 주규범 + 일반은총의 영역의 부규범(철학적 윤리학적 탐구, 윤리적 준칙들) 을 자료로 한다. 이러므로 기독교윤리학은 신학이라는 지평을 떠나서는 논의될 수 없 다. 기독교윤리학과 신학은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은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고유한 영역을 가진다.

󰋼 J. Calvin said,

신학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신지식(구원에 이르는 지식,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어두어졌으나

일반은총의 영역은 어느 정도 그대로 남아 있도록 허용하셨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심겨진 도덕법이 있다. (롬2:14,15)

 

?

그렇다면, 성경의 주규범은 무엇인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마태복음22:37-40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강령 / 성경에 있는 율법(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①의식법, ②도덕법, ③시민법)을 오늘날의 현실과 상황 속에서 적용하기 위해서는

주경신학의 방법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의식법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성취,완성하셨기에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의식법에 관련된 구절들을 읽어야 하며, 도덕법은 모세의 시대나 오늘의 시대에도 동일한 적용을 갖는다.

so, 개혁주의적 관점은 십계명을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규범으로 본다.

시민법은 당시의 민법과 형법, 상법과 같은 실정법이므로 형량을 자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시 민법의 정신과 철학(도덕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적용되지만 그 시민법의 실제적 내용(형량, 처벌)은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cf. 시민법까지도 적용해야 한다! - Greg Balnsen

이 모세의 율법의 도덕법의 핵심이 바로 사랑의 대강령이었다.

사랑의 대강령이 전 율법의 핵심임을 예수님께서 보이셨다!

이 사랑의 대강령의 마지노선이 바로 십계명이었다.

ⅲ) 신학과 기독교윤리학의 관계

윤리학이 신학의 지평 안에 있다.

- 윤리학이라는 학문은 어떤 종교적 지평 안에 들어 있으냐 어떤 세계관의 지평 안에 들어 있으냐

어떤 인간관/사회관의 지평 안에 들어 있으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기독교윤리학이라 할지라도 어떤 (로마카톨릭,자유주의,개혁주의의) 틀 안에 들어 있느냐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할 수 있다. *지평(地平; horizon)

- 철학적 윤리학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타당한 윤리관을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20세기 이후 이러한 이상은 허구임을 자각하였고 더 이상 보편 타당한 윤리학이 불가함이 흐름이다.

- 신학이 삶의 전 영역(체계)에 대해서(이러한 지평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는 신념체계라는

점에서 윤리학은 항상 보편타당한 윤리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e.g. “살인하지 말라”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 규범, 그러나 이 보편적 규범이 해석되는 방식은 종교적 지평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 어떤 종교관/세계관/인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윤리적 문제에 대한 평가와 실천방식과 반성이

달리질 수 있다.

윤리학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학문이 아니다.

 

?

그렇다면, 윤리적 행동의 동기를 어디에서 얻는가?

➜ 신학은 윤리적 반성과 실천의 동기, 목적, 이유, 그리고 실천의 동력을 제공한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그리스도인들로 윤리적 삶을 살아가는 동력이 된다.

e.g. <마18:21-35의 달란트와 데나리온을 빚진 자의 비유>

일만달란트에 해당되는 불가변적 부채를 탕감한 조건 없는 은혜 때문에 일백데나리온 정도에

해당하는 형제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사역의 적용으로서의 성령의 임재는 윤리적 반성과 실천의

동력을 제공한다. 속사람에 내주하여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은 겉사람의 차원에까지 역사하기

원하신다. 겉사람의 차원이 조직신학에서의 성화의 영역이다. 성령의 empowerment가 필요!

③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삶임을 깨닫게 되어질 때

④ 종말론적인 전망을 잃지 않을 때 심판에 대한 삶의 준비로서 윤리적 삶을 살게 될 것임

* 적극적인 의미에서 신학이 윤리의 지평이 되는 경우 ➜ 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 ② 성령의 empowerment

* 소극적인 의미에서 신학이 윤리의 지평이 되는 경우 ➜ ③ 하나님의 편재, ④ 종말론적 전망

?

그렇다면, 윤리적 행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규범들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자아실현이나 행복이나 자기 의의 근거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데 있다.(롬12:1-2;15:1-3;빌1:19-20)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마태복음 5:16

 

- “윤리학이 신학의 지평 안에 있다” But,

➜ 윤리학과 신학은 긴밀한 상관관계 안에 있으나 범신론적으로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윤리학과 신학은 그 역할과 고유의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학은 하나님의 본성과 사역에 대한 영역을 견지하고 윤리학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반성에 대한

영역을 견지하여야 한다. 신학과 윤리의 긴밀한 상관성만 강조한 나머지 신학과 윤리가 동일시되어

정치신학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범신론과 우상숭배의 위험에 빠지게 된다.

e.g. “유한열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재죽음이다. 또한 이로 인한 정의를 위한 변혁운동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부활이다”는 정치신학적 견해는 결국 범신론적 경향을 띄게 된다.

현대신학 안에는 신학과 윤리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e.g.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드로엘취와 같은 구자유주의 신학,

본회퍼, 로빈슨, 하비 콕스, 알타이저로 대표되는 비종교화/세속화/사신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죌레의 여성신학, 한국의 민중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