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욥기와 목회상담

예림의집 2014. 10. 6. 16:14

 

욥기와 목회상담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분은 무엇을 하시는가?

①놀라운 사역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5:9).”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

-목회상담 과정에서 내담자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 시선을 돌릴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릴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고, 하고 계시며, 하실 것인지에 대한 “산지식”은 내담자의 삶의 문제와 인간 이해를 교정할 수 있도록 하는 “안경”이다.

-하나님의 소중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

-환경을 볼 것인가? 위기를 볼 것인가? 그 넘어 세계를 볼 것인가?

-보이는 현상보다 더 킨 보이지 않는 현상이 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도 성령님도 현상적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큰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내담자에게 확신시켜야 한다. 인간의 지혜와 상상을 넘어서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담자는 절망하지 않으며 소망을 갖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Hopeless, Helpless).

-성경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대한 내러티브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다니엘의 세 친구).

-이 내러티브들과 내담자의 삶의 내러티브를 연결시킬 때 내담자에게 통찰이 생기며 새로운 인식이 열릴 수 있다. 상담사는 내담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셨던 이야기들을 기억하게 하며 살려내어 현재의 이야기와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상담의 기본은 연결 짓기 구별 짓기 이다(요셉 이야기).

-내담자에게 통찰이 생김(자기, 하나님에 대한 이해)

-본문에서 동사는 분사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을 강조한 다고 볼 수 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은 그의 종이 직면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역, 즉 그가 창조하시어 사용하셨던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점을 상담자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창조에서부터, 부활과, 심판까지).

-고후1장 위로붜 오는 능력으로 위로한다고 바울은 고백함.

-더 나아가, 목회상담사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크신 일을 여러 번 체험한 경험이 있을 때 내담자에게 확신 있게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연결시킬 수 있다.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체험한 것은 비록 아픔과 고난 속에서 겪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기본 적인 신뢰를 쌓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이다.

-그러나 조심할 부분은 내담자의 고통이 충분히 공감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자의 경험을 연결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미숙한 상담자의 자기개방은 내담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너무 급하게 진행하지 말고 일단 내담자의 상황을 공감한 후에 천천히 진행하여야 한다.

-내담자의 고통을 통감해야 한다.

-슬픔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기다려야 한다.

 

②내담자를 높이심/슬퍼하는 자를 회복하심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5:11).”

-엘리바스는 욥이 낮아진 상황과 애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회개한다면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회복적인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욥이 무엇인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회개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여서 적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진단상의 문제가 있다.

-다 맞는 말인데 진단을 못하면 소화를 못시킨다.

-내담자의 상태에 맞게 진단을 제대로 해야 거기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달할 수 있다.

-그의 태도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을 상담에 접목할 때에 정확한 인간이해와 진단이 선행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효과적인 처방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에 대해서 정확한 진단을 하려면 인간을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인간의 심리, 상황, 한계성들을 공부해야 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책을 진지하게 많이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바스가 이해한 하나님의 사역 자체는 상담 과정에서 내담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높은 자를 낮추시기도 하신다.

-때가 되면 그 머리를 들게 하심(요나, 느부간네살 왕).

-섰다고 생각하는 자마다 넘어질까 조심하라(평생 명심).

-내담자가 이 사실을 확신할 때 낮은 위치에 처했을지라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그의 머리를 들게 하시며 높이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좌절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낮아진 상황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시며 때가 되면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담사는 그들에게 믿음의 눈으로 보게 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용기를 얻고 낮은 자의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대로 목회상담사는 내담자가 높은 위치에 있는 경우에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경계시켜야 한다. 세상의 재물과 지위와 건강과 명예는 모두 “잠정적인”것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내담자가 높은 위치에서 “목이 곧은” 자세를 취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낮은 위치에 처하게 하실 것이라는 점을 경고해야 한다. 인간은 죄성이 있어서 조금 형편이 좋아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만감과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갖게 될 위험성이 있다.

-Lifed to safety

-대부분의 상담 케이스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은 슬픔(분노, 우울)이다.

-내담자의 슬픔을 탐색해야 한다(충격->분노->타협->우울, 슬픔->수용, 자살).

-반듯이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반응이 늦어지는 경우).

-애통하는 것 자체가 치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울 수 있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치료적인 공간이 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애통은 역설적이다. 애통을 통하여 회복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것을 억압하거나 연기하는 것은 진정한 치유와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 5:4). 믿음은 안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분이시다(시 147: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시 34:18)” 분이시다.

-사람들은 마음이 깨진 사람, 상처 입은 사람,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접근하기를 두려워한다.

-어떻게 다가서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부담스럽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이 슬픈 자, 우울한 자, 상심한 자에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특히 성령은 그 사람의 마음에 내주하시며 “세미한 음성으로”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슬픔을 겪는 자에게 가까이 오셔서 그 과정에 동행해주시는 분이시다(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슬픔을 당한 내담자를 위해 대신 간구하시는 “보혜사”가 되신다(롬 8:26)

-그는 상담자이자 위로자이시다.

-욥의 경우에 그가 애통하는 동안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셨음을 깨닫고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폭풍 속에서 닻을 내릴 수 없어서 이리 저리 방황하며 위기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복된 “안전지대(Hopeless)”에 도달할 수 있었다(에스더).

③하나님의 no는 하나님의 yes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5:18)

-엘리바스의 충고이다.

-욥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가 상처입고 모든 것을 상실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직접적으로 야기한 것은 아니지만 사단을 통해서 그런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섭리 속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허용하신다.

-인간은 그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며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분이심을 믿는 것은 신앙인들의 몫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때, 특히 이유 없이 적대감을 갖는 이들이 일어나 원수처럼 행할 때, 그 모든 환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때 오히려 위로를 얻을 수 있다.

-원수조차도 하나님이 허용하셔서 자신에게 대적한다고 볼 때 그 원수조차 덜 미워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다(다윗과 시므이).

-재구성 재해석

-하나님은 복과 화를 주시는 분이시다.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화는 화가 목적이 아니라 복이 목적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복과 화 모두가 궁극적으로 복을 목적을 한 것이다.

-특히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화, 위기, 재난, 고통 등은 현상적으로 볼 때에는 마이너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플러스가 될 것이다. 이것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이 있다.

-상담을 할 때 쉽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내담자의 수용력 상태와 치유 단계를 잘 평가하여 민감성 있게 연결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내담자 스스로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한다면 이 사실은 내담자의 “통찰”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상처를 입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시며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때로는 징계 받을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징계 같이 여겨지는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 내담자로 하여금 “목적이 이끄는 삶”을 염두에 두도록 돕는다면 내담자는 그 고통의 기간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의 기간을 통해서 성품이 발달하며 영적으로 성숙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여기에서 연단은 성품을 의미한다.

-환난은 내담자의 성품이 빚어지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목적을 알기에 고통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욥기의 마지막은 이 사실을 응변하고 있다. 욥은 놀랍게도 …

④재난에서 구원하심

“여섯가지 환란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5:19)”

-많은 환란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

- “제앙이 오지 않을 것이다.”는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심방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안 좋은 일을 잘못된 믿음의 결과라는 식의 말.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들을 책임지지만, 그것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앟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는 그 신비를 알 수 없다.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기적적인 탈옥.

-하나님의 주권

-이렇게도 반응하시고, 저렇게도 반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⑤신묘악측하심

⑥무소부재와성과 전지성

⑦생태학적 관심과 돌봄

⑧전능성과 불가성

 

*목회상담의 독특성

①하나님의 주권성을 인정함

-욥 2:10

-롬 11:36

-우리 신앙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②생명성을 경험함

③잠정적 대상을 내려놓게 함

④메타내러티브와 연결지음

 

*목회상담사의 자질

①인품과 정직성 및 신앙

②공감 능력

③교훈하며 격려하는 능력

④인간성과 안정성

⑤긍휼심

 

*인간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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