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6. “정통 형성”방법(the "Formation-of Tradition" Method)

예림의집 2014. 10. 9. 09:28

 

6. “정통 형성”방법(the "Formation-of Tradition" Method)


폰 라드의 통시적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토론과 자극은 통시적인 전승사 방법이 지닌 한 측면을 발전시키거나 혹은 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폰 라드의 신학을 따르면서 전승사에 의지하여, 구약 학자로서 게제와 신약 신학자로서 스툴마허는 “정통형성” 방법을 가다듬었다. 게제는 구약신학이 “그 본질에 있어서 역사적인 발전 과정(historical process of development)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전통의 형성으로서의 신학”이라고 말하며, “기독교 구약신학이나 유대교 구약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구약의 전통 형성을 통해 실현된 단 하나의 구약신학이 잇을 분이다”고 주장한다.

게제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시작된 전통형서의 결론이므로 “신약은 구약을 불러일으키며… 이리하여 소위 구약을 마무리 짓는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성경신학이 전통 형성 과정의 통일성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혹은 게제가 말한 바대로 인용하자면, 두 성경의 통일성은 “전승사 때문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두 성경 사이의 연속성과 통일성은 각 성경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며 두 성경의 공동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두 성경에 같이 있는 전통 과정에 있다. 신약이란 구약에서 솟아난 전통형성 과정의 연장이므로 “신약성경은 성경 전통의 길에 있어서 목표요 종점이며 지향점(telos)이다.” 게제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오직 전승사만이…성경신학을 설명할 수 있다… 전승사는 역사적 사실들과 종교적 현상들을 넘어 전통을 형성하는 산 과정을 묘사할 수 있다.”

게제는 그의 스승 폰 라드를 따라서 하나의 “중심(Mitte)”을 따라 구성된 성경신학적 접근을 강하게 반대하지만, 스톨마허는 “신약성경신학의 종합”을 위하여 하나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통일된 전통 관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게제와 같이 구약정경이 후대에 발전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맛소라 정경이 주후 135년에 일어난 바르 코크바 반란 직후에 끝맺어졌다고 제시하기조차 한다. 따라서 위의 두 학자가 “중심”의 문제에 있어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들은 “전통 형성” 신학의 근본이 되는 두 가지 사항, 즉 전통형성의 과정이 핵심이라는 사실과 구약정경이 후대에 결정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게제와 스툴마허가 세운 신학의 모델로서 “정통 형성”은 여러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레이져는 스툴마허가 역사비평 방법을 철저하게 따르지 않고 희석시켰다고 비판하며, 린트너와 스투룸과 마이어는 그가 역사비평학을 철저하게 개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쿨마허는 자신의 “종합적인 신학성서신학”이 서술적인 역사적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는 “신약신학이나 구약신학은 단순히 역사적인 학문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구약신학이나 신약신학이 단지 역사적 해석이라는 기본 전제에 대한 비판이 최근에 구약신학의 성격에 대한 논쟁에 뛰어든 여러 학자들의 글에도 나타난다. 오늘날에 와서는 “원래 의미”와 “현재 의미”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던 개블러-브레데-스텐달의 입장은 완전히 침몰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으며 거의 거부되고 있는 상태이다. 클레멘츠는 구약신학이 “구약의 역사비평 분야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며, 독자적인 신학의 분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자기 입장을 전개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게제와 스툴마허가 제시한 두 성경 안과 상호간에 있는 “정통 형성”으로서의 성경신학에 대한 모델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게제가 생각하고 있는 구약신하그이 모델로서 “전통 형성” 방법은 두 성경 사이에 일치하는 전토으이 과정을 통해 두 성경의 “중심” 문제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 모델은 성경신학에서 “중심”을 찾으려는 모든 학자들의 입장을 거스르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게제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론(ontology)에 근거하여 “신학을 전승사의 현상학(a pheonomenology)”으로 변질시키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는 와그너는 전통 형성의 과정이 두 성경에서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통일된 전승 형성 과정이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두 성경을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나이트는 “전승사 방법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본질적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왜냐하면 구약 안에 “이 성장 과정이 여러 다양한 전통의 합성물들과 책들과 큰 작업들로 끝났으며, 결국 이런 형태로 그것들은 정경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세바스 만은 그래도 게제의 접근법을 지지하였다. 그렇지만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으로 넘어가려는 게제의 시도는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이 토론이 결국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그리고 이 새 방법이 새로운 지지자들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시간이 흘러보아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밍의 학위 논문인 “오늘날의 총체적 성경신학: 폰 라드 이후 해석학에서의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상당한 역작이다. 그는 게제가 폰 라드의 사상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이것을 넘어 게제가 헤겔과 후기 하이덱거와 특히 개다며와 같은 철학자들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잇음을 제시하였다. 외밍은 폰 라드와 그가 제시한 통시적 방법론에 대해 우리가 앞에서도 이미 다룬 바와 같이 그로브와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외밍은 게제의 방법을 분석하면서 마지막으로 “게제가 주장한 소위 성경 전통의 통일성은 역사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대담하게 내린다. 이 판단은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소위 이와 같이 지지할 수 없는 역사적 기초를 가지고 구약신학을 하기에 충분한가? 이와 같은 신학이 구약을 넘어 오늘날까지 말해 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가까운 장래 안에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게제와 스툴마허의 주장은 구약정경이 잠니아에서 마무리되었다(스툴마허는 더 후대로 봄)는 이론과 정경화의 과정에서 자료를 방대하게 재편집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정경이 그리스도 시대나 혹은 그 이전에, 혹은 프리드만과 레이만과 차일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훨씬 더 이전에 닫혀졌다면, 게제와 스툴마허의 전승사적 성경신학은 그 핵심적인 주장에서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 더구나 이런 접근이 정말 성경신학인지 혹은 전승 형성의 신학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전승을 형성하는 과정이 그 다양한 재구성의 단계를 가지고 정경적이거나 혹은 성경적인 위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방법론으로 이루어진 신학을 구약 혹은 성경신학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 소위 전승 형성 신학은 차라리 “전승 형성의 역사와 그 신학”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전승 형성 과정의 현상학이 된 성경 혹은 구약신학은 더 이상 동일한 하나님 안에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생명의 과정이라는 어떤 존재론 속에서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