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차 방법론(the Cross-Section Method)
금세기의 구약신학에서 이 방법론을 주창한 사람은 이이크롯트이다. 그는 1930년도에 “교차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언약을 구약의 중심으로 설정함으로써 구약 사상의 세계를 관통할 수 있었다. 이 방법론을 통하여 그는 후일에 멘덴홀이 불을 새롭게 지필 언약에 대한 관심을 이미 예시하였다. 사실 이 주제는 최근에도 격렬한 논쟁 가운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사람들도 교차 방법론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대한 독자적인 신학을 시도하도록 고무하였다. 최근에는 아이크롯트와 폰 라드의 구약신학을 상세하게 비교 연구한 스프릭스가 이 방법론을 옹호하고 있다.
아이크롯트는 이미 1920년대부터 구약신학의 방법론에 급격한 재구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바우어로부터 카우치에 이르기까지, 구약신학은 역사주의의 영향을 방아 하나님-인간-구원이 하나의 체계로 굳어졌으며 이제는 파국을 맞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구상이 필요함을 그는 역설하였다.
아이크롯트는 모든 분야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잘 지적하였다. 역사가들은 역사적 연구라고 부를 수 있는 연구 영역 속에 주관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을 심각하게 알게 되었다. 실증주의자들은 객관성을 세우기 위하여 개인적인 철학관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이미 잘못되었다. 우리가 역사철학을 무시하고서는 참된 역사가 될 수 없다. 역사가는 분명히 주관적인 작업이 되는 선별의 원리를 따라 항상 일하며 그의 작업에 관점을 주는 목표를 따라 일한다. 이 목표 역시 주관적이다. 아이크롯트는 역사가 어떤 것이 진실하다거나 혹은 거짓되다거나 정당하다거나 혹은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궁극적인 선언을 할 수 없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구약 신학자가 실존적으로 판단하여 그가 제시한 구약 종교에 주관적 요소를 드러낸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구약신학이 그 성격에 있어서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이크롯트의 신학은 아주 견고하게 역사적이고 서술적인 작업으로 남아 있다. 그는 구약신학자가 선택의 원리(principle of selection)와 동질의 원리(principle of congeniality)를 따라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시도하는 거대한 구조적 작업은 역사적 과정을 관통하여 종교의 내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만들어진다. 그의 목표는 “구약 신앙의 영역을 그 구조적인 통일성 속에서 이해하며… 그 심오한 뜻을 찾아내는 데 있다.” “역사주의의 폭력”이 무너져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왕권이 돌입되며 여기에서 수립되어야 하는 것”이 “구약과 신약성경의 두 영역을 불가분하게 묶어주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구약에서 신약성경으로 넘어가는 이 역사적 운동 외에도 “신약에서 구약으로 되돌아 흘러가는 삶이 있다.” 아이크롯트의 신학에서 선별의 원리는 언약개념으로 나타나며, 관점을 주는 목적지는 신약에서 발견된다.
교의학자들로부터 다시 성경 신학자들이 물려받은 전통적인 하나님-인간-구원의 배열을 단번에 깨뜨려 버린 공로는 아이크롯트가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가 구약 사상의 영역을 다룰 때, “역사적 원리(historical principle)가 체계적인 원리(systematic principle)와 함께 상호보충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아이롯트에 따르면 체계적인 원리는 언약 개념 속에 있다. 그는 자신의 구약신학을 총체적으로 통일시키는 범주를 바로 여기에서 찾는다. 역사적 원리와 언약 원리를 합성하여 만든 세 가지 범주, 즉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따라 아이롯트는 그의 대작(magnum opus)의 구조적 틀을 짜고 있다. 그의 체계적인 교차 방법론은 그의 체계 안에서 사상과 제도가 발전하고 있음을 드러내도록 짜여졌다. 구약성경은 아이크롯트가 제시한 것처럼 그렇게 쉽게 체계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크롯트가 언약 개념을 사용하여 통일성을 만든 교차 방법론은 상당히 인위적이다.
아이크롯트의 교차법고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리가 그의 글을 볼 때 구약사상의 종교적-역사적 관점이 드러나는 “역사적 발전”은 찾을 수 있지만 신약의 관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상이의 양면 관계”가 있으며 이 관계가 없이 “우리는 구약신학의 문제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 현상은 놀랍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이전의 종교사학파의 접근으로부터 새롭게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아이크롯트의 체계적 원리인 언약 개념은 구약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교차법의 문제가 있다. 언약 개념이나 혹은 프리젠의 공동체 개념이나 혹은 그 어떤 단순 개념으로 구약 사상의 모든 다양성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좀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성경은 이런 식으로 체계화될 수 있는 하나의 사상 혹은 믿음의 세계를 제시해 주는가? 혹은 하나의 공통분모 아래에서 하나의 주제를 따라 구획화시킴으로써, 종합적인 역사의 전망을 읽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나의 연구 도구로서 교차방법론이 근본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종합과 신학적인 지향점 사이에 갈드잉 생기는 것은 아닌가?
유명한 화란 학자, 프리젠은 전반적으로 교차법을 따르며 그것에 단호한 고백적인 관심을 섞는다. 방법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프리젠은 아이스펠트와 아이크롯트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는 1920년대에 아이스펠트와 아이크롯트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에서 제기된 다양한 방법론들의 몇 가지 점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프리젠이 주장하는 바 “그 목적과 방법론에 있어서 구약신학은 기독교 신학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그의 근본 입장은 아이스펠트에게 배운 것이다. 그러나 프리젠은 “교통 개념을 모든 해석의 중심으로 설정하려고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아이크롯트이ㅡ 길을 따르고 있다. 프리젠에 따르면 이것은 “구약성경 신학의 가장 좋은 출발점이며… 그것은 이런 관점 속에서 배열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중심도 없고 따라서 통일서옫 없다고 주장하는 폰 라드로 시작된 통시적 전승사 방법론에 대한 반작용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프리젠과 그를 뒤따른 여러 사람들은 교통 개념의 도움으로 “전체의 동일성을 보다 확고하게 강조하기 위해” 그의 모든 구약신학을 재구성하였다. 폰 라드가 구약성경에 개념적인 통일성이 있음을 부인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은 더욱 고무되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제기해야겠다. 구약성경의 다양한 자료들을 통일하고 그것들을 구약신학의 일관성 있는 구조로 배열하기 위해, 구약의 중심이 될 만한 하나의 주제나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카이저는 자세한 논증을 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확고하고 긍정적인 답을 제시한다. 그는 “귀납적으로 만들어진 주제, 열쇠 혹은 구조적 패턴이 있어, 각 시대를 잇는 구약성경의 저자들이 이것을 인식하였고, 나아가 구약 본문의 점진적 계시 속에 의식적으로 덧붙여 갔다”고 주장한다. 그는 “구약신학의 참되고 유일한 중심(Mitte)”은 “약속의 주제”라고 논증한다. 1978년에 쓴 그의 책 『구약신학을 향하여』는 이 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는 여기에서 “중심”이 “통일성을 이루나 발전하는 개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힘 있게 논증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 속에 “약속, 맹세, 축복, 안식, 씨와 같은 단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며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는 삼중적 말씀 형식이나 구속적인 자기주장 형식(redemptive self-assertion formula)인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주 너희 하나님이라”는 형식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역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우주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카이저는 “각 저자에게 의식적으로 부여된 내적 중심 혹은 계획”을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주제”라고 본다. 카이저에게 있어서 “축복-약속”의 주제는 성경의 넓은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그가 설명하고 있듯이 일반적으로 언약과 언약신학으로 여겨지는 것도 포함한다. “약속”은 모든 “다양한 관점들”과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들(longitudinal themes)을 다 조화시킬 수 있는 총괄적인 우산은 아니라 하더라도 아주 넓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구약신학의 구조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카이저는 “성경이 그 자체의 구조적 열쇠”로 하나님의 약속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구성의 형태는 역사적인 시대의 흐름을 따라 수평적으로 이어지고 있다(longitudinal sequence).고 본다. 이 역사적인 시대를 따라 각 장이 쓰여져 모두 11장이 되고 각 장은 약속의 준비들, 백성, 장소, 왕, 생명, 날, 종, 갱신, 왕국 그리고 승리라는 주제 아래 “축복-약속”이 자라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카이저는 넓게 정의된 “축복-약속”의 개념으로 구약을 관통하는 신학을 구성한 것 같다. 이것은 주어진 주제를 따라 새롭게 구약성경의 통일성을 제시한 작업이다. 그는 구약신학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축복-약속”의 주제를 핵으로 사용한 첫 학자이다. 이것은 구약신학을 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축복-약속”의 주제를 통하여 신약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약을 전부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하였는가?
카이저 자신은 이 기본적인 주제가 “선택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며, 구약 중 “종교적 역사나 관습”을 다루는 부분들은 “다른 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의식과 관습은 구약신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한다. 어떤 근거 위에서 구약성경의 어떤 부분이나 관점이 “다른 신학의 분야로 넘어가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을까? 만약 이것이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면, 이 결정은 소위 모든 것을 포괄하려는 구약의 중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주제”가 모두 “다양한 관점”과 “역사를 관통하는 주제들”을 다 포함할 수 있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는가? 예를 들자면, 구약성경에 있는 창조신학은 카이저의 구약신학에 빠져 있다. 슈미트는 창조신학,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수많은 질서로 유지하신다는 믿음은 성경신학에서 끄트머리에 있는 주제가 아니요 기본 주제”임을 강하게 논증하였다. 여기에서 문제의 핵심은 카이저나 슈미트나 혹은 다른 사람 중 누가 성경신학의 기본 주제에 대해 올바른 파악을 했느냐는 문제뿐 아니라,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주제를 소외시킬 수박에 없다는데 있다. 예배 의식은 구약성경에서 결코 가장자리에 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카이저는 구약신학에서 그것이 가장자리에 걸쳐 잇는 것까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중심인 “축복-약속”의 구도 속에 들어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저가 언약을 다루는 것도 특이하다. 아이크롯트는 언약을 중심으로 설정하면서 지나칠 정도로 시내산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카이저는 중심 성격이 약속에 있기보다는 의무에 있는 시내산 언약과 대조가 되는 아브라함-다윗 언약의 “약속”에 치우치고 있다. 선지자들의 신학을 다룰 때에도 그는 약속과 구원과 소망을 중심으로 엮어가기 때문에, 결국 재앙과 멸망과 심판의 주제는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구약 사상 중 이런 것들을 구약신학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신학에서 다룰 수 있겠는가? “축복-약속”의 주제 혹은 중심을 따라 구약을 분석하는 카이저의 교차법은 풍부한 구약 주제와 자료를 하나로 묶는 것 같지 않다.
프리젠과 카이저를 비교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몇 가지 공통점이 이 둘 사이에 있다. 둘 다 자신이 설정한 주제가 신약을 위한 예비적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선택한 주제나 중심은 구약 전체와 신약에도 해당된다. 전체를 살펴보면 프리젠의 접근은 카아저보다 더욱 폭넓다. 둘 다 설정한 중심은 필연적으로 선택의 원리를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모든 “중심을 찾는” 접근법들처럼, 교차법은 이런 약점을 피할 수 없다. 구약의 통일성은 오직 하나의 중심에서만 찾을 수 있는가? 혹은 구약의 통일성은 유일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 않는가? 그분의 말씀과 행위, 창조와 재창조, 심판과 구원에 나타난 다양한 자기 계시는 단 하나의 주제나 여러 개를 묶어놓은 주제에서 찾을 수 없지 않을까? 하나님은 구약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다양하고 풍부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과 열국과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우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지 않는가?
마티올리의 구약신학은 1981년 이탈리아어로 처음 출판된 작품이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여기에 소개하고 있지만, 그는 교리적인 방법과 교차 방법을 섞어서 구조를 짜고 있다. 제 1부는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이란 제목으로 소개된다. 여기에서 그는 족장시대부터 후대 이스라엘 종교에 이르기까지 유일 신앙이 유전적으로 발전한 것을 다루는 주제들에 여러 장을 할애하고 있다. 제 2부는 “악의 기원과 종교적인 역할”로 소개된다. 제 3부는 “가장 중요한 야웨의 구원 선물”이란 제목으로 소개되며,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구약의 메시아 대망 사상을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소망과 미래를 향한 참된 영성”,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계시에 대한 영감 있는 증거로서의 거룩한 글” 등을 포함하고 있다. “거룩한 글”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는 구약정경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티올리에 따르면 구약의 정경은 여전히 잠니아 회의(주후 90년)에서 결정되었다고 생각하나, 이 견해는 이미 폐기 된지 오래되었다. 계속하여 그는 “사후의 생명에 대한 소망”을 다루면서 외경과 쿰란 문헌에 나오는 사후 생활관을 다룬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참된 야웨 종교: 해방과 평화를 향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며 히브리 의식과 개종과 용서를 여러 장에 걸쳐 다룬다.
마티올리는 “성경에 담겨 있는 주된 종교 사상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의 구약신학은 이 “사상들”, 즉 하나님과 사람에 관한 사상에 근거하여 구성되었다. 이 사상은 레벤트로우의 말을 빌리자면 “교리적 원리(dogmatic principle)를 따른 것이다. 마티올리는 작품의 주된 부분들은 이런 원리를 따라 쓰여진 것 같지만 각 장은 교차법을 따라 쓰여지고 있다. 이는 구약에서 발췌된 여러 제목들과 주제들이 다소 구약에서 그것들을 지지하는 것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생에 대한 장은 발생학적 방법(genetic presentation)을 따라 쓴 것같은 인상을 준다. 따라서 마티올리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뒤섞은 것 같다.
골딩게이는 자신의 논문을 다듬어서 Theological Diversity and the Authority of the OT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 전에 구약신학에 대한 여러 개의 논문과 한 권의 책을 이미 썼다. 구약 해석에 대한 그의 첫 책에서 그는 구약신학을 할 때 서술적 방법과 규범적 방법을 양자택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관계가 구약 신앙의 중간지점(중심?)이 되며 여기에서 다른 모든 관점들을 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구약신학을 위한 올바른 구조를 찾는 작업과, 구약 신앙을 전체로 보는 중심 개념을 찾으려는 작업은 그동안 열매가 없었거나 혹은 너무 결실이 많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즉시 경고한다. 그는 “다양한 방법들이 다양한 통찰들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그는 “성경의 양면성”, 즉 인간의 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 구약 해석에 도전을 준다”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언어를 연구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골딩게이의 최근 논문, “신학적 다양성과 구약의 권위”는 자신의 이전 글들을 보충한 것으로서, 구약의 다양성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학자들과 신학자들이 구약신학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포기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작품은 최근 성경의 권위에 대해 글을 쓴 바아의 입장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골딩게이는 구약신학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종합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통합적 혹은 건설적인 접근법”이라는 제목으로 이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구약신학을 만들 수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질문을 대단히 적절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여러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구약신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를 인정하고 있지만, 구약성경을 다양하고 다채로운 신학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골딩게이의 구약신학을 위하 제언은 아이크롯트의 교차법과, 아이크롯트를 섭렵하고 한걸음 더 넘어가려는 스프릭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스프릭스를 소화하고 넘어가면서, 최근에는 구약신학의 기초가 되는 단 하나의 중심을 없다고까지 말한다. “구약 전체의 풍경을 드러낼 수 있는 많은 출발점과 구조들과 초점들이 있다. 다양한 방법론들은 다양한 통찰을 줄 것이다.” 따라서 골딩게이는 “건설적인 방법론”을 선호한다. “구약신학은 불가피하게 재건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건설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구약신학이 순수하게 서술적인 학문이 되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비현실적이며, 성경의 자료를 우리 시대에 비추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골딩게이는 여기에서 구약신학을 서술적인 작업으로만 제한시키는 자들을 떠나 서술적 작업을 신학적 작업과 묶으려는 클레멘츠와 다른 학자들 편에 선다. 바로 이 점에서 골딩게이는 이면 스텐달이 제시하는 구도인 “원래의 의미(구약신학, 성경신학)”와 “현재의 의미(조직신학)”의 이분법을 떠나며, 또 다른 면으로 1930년대에 있었던 아이스펠트와 아이크롯트의 논쟁에 대해 아이스펠트에게 점수를 더 준다.
최근에 들어 그 어떤 학자도 자신의 믿음 공동체나 전통을 완전히 떠나서 일할 수 없다는 인식이 점점 더 깊어져 가고 있다. 골딩게이는 “사실 기독교인은 신약을 떠나 신학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구약신학은 신약의 빛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골딩게이의 수정되고 확대된 “교차법”은 “통시적 접근”에 근거한 “신학적 작업”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교차법”과 “통시적 방법”이 서로 도우며 함께 움직일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 두 방법이 급격한 변화를 거쳐 새로 정의되어서 뭔가 새롭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제시되어야, 비로소 아이크롯트와 그를 따르는 자들, 혹은 폰 라드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설정한 그 갈등 관계가 완전히 바뀌어질 수 있을 것이다. 골딩게이는 강도 높은 신학적 제언과 그의 실천으로 구약신학의 구도에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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