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교육의 역사: 중세로부터
*중세의 시작
-신학적: 어거스틴(3세기)
-정치, 군사적: 콘스탄틴(5세기)
-제도적: 그레고리 1세(6세기)
1. 중세와 교육
*초대 교회가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분위기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중세 기독교 교육에 지배적인 상황은 무엇인가? 고대를 통과하면서 교회는 체계화 되었다. 어거스틴의 조직신학과 역사 이해는 실의에 빠진 로마와 그 주변지역을 구원할 만한 내용을 가진 것이었고, 어거스틴으로부터 백년 이상이 지나 그레고리 1세가 진정한 제도적 교황이 되었던 것은 체계화 조직화된 중세교회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점차 야만족들이 개종하게 되겠거니와 그들의 군사력은 가졌으나 문화적으로는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칼 대제 등은 이름은 화려하지만 실은 아주 무식한 군인이었다.
*교회는 그 시대 모든 계급을 지도할 인적 종교적 제도적 장치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중세는 실로 교회가 야만인들을 가르치는 형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아주 낮은 단계의 공부에서부터 차츰 발전하여야 했다. 수도원 학교와 성당학교는 그런 기본을 감당해 내는 기관이었고, 거기서 가르치는 자유 7과는 낮은 반의 문장교육과 높은 반의 수학 과학적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이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통과하며 대학이 세워지는 단계를 거치면서 학문과 교육과정은 보다 높은 단계인 신학 철학 의학 법학에까지 이르렀고, 대학들은 이런 고급 학문 분야 가우데 자신들의 특성화 과목을 취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이태리의 볼로냐 대학은 법학과 함께 수사학이 발전하였고, 파리 대학은 신학과 함께 변증법 논리학이 발전하였다.
*피터 바레라르는 말하자면 인기 있는 파리 대학 교수였다. 그는 오늘의 자유주의자와 같았는데, 당시 마침내 교황에 오르고 성인품을 받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특히 아벨라르가 젊은이들을 부패시킨다고 노골적으로 혐오를 표했다. 마침 아벨라르는 명문가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고, 그녀의 숙부는 아벨라를 잡아가서 거세를 하였다. 아이도 생겼으나 죽었다. 이 두 사람의 연서는 중세 최고의 로맨스였다. 아직도 그들의 편지글은(아벨라르오 엘로이즈 서한) 역사적인 로망으로 남아 있고 한글로도 번역된 바 있다. 이 두 남녀는 한 번 헤어진 이후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다. 애틋하게 여긴 사람들이 옆자리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바로 이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이 중세적 상황을 모두 보여준다.
*사람들은 정말 인간 이성가 정서에 부합하는 학문을 기다렸으며, 아벨라르는 대표적인 유명론자로서 그 당시로서는 자유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결코 바람에 날리는 낭만주의자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유명론 논증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보편자가 절대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이해라고 보았다. 또한 이 개념은 한편으로는 실재성에 손상을 입히지만, 감각되지 않는 것까지 사유하게 하는 유용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강하게 개념을 이름일 뿐이라 하여 유명론자로 불리지만 그 실재 내용은 이른바 온건실재론을 펼친 토마스 아퀴나스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 중요한 점은 아벨라르는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되기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였으며, 플라톤 철학에 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결코 덜 기독교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적 이해에 크게 도달하지 못한 베르나르는 확연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아벨라르를 이교도로 몰았지만, 아벨라르는 실재로 억울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중세의 암흑이다.
*보편자
-교회의 보편성(단일성)
-절대적인 존재(실재론자).
-개념/이름(유명론자)
-실재적으로 눈에 보이는 많은 교회가 있을지라도 성도들의 단 하나의 단일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그 교회는 실제로 존재한다.
*실제의 중세는 이런 고담준론이 아니다. 중세를 나는 7•7•7로 나타낼 수 있다고 본다. 그래도 학문 좀 한다는 사람들의 기본은 자유 7과였다. 그리고 아주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인간의 덕성은 7주덕에 있었다. 그리고 악행을 금한다는 면에서 금하여야 되는 악이 있는데 그것은 7대죄이다. 자유 7과와 7주덕 그리고 7대죄(교만, 시기, 탐식, 음욕…)는 대체적 중세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그리 많지 않고, 신앙도 아주 깊은 것이 아니며, 공부 좀 한다는 사람들도 수도원학교 성당학교 등에서 자유7과를 중심으로 공부하였다. 자유 7과는 낮은 단계에서는 문법, 수사학, 변증법이 있었고 높은 단계에서는 산술, 음악, 기학, 천문학이 있었다. 7주덕은 플라톤의 정의 개념과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을 합친 것이다. 플라톤은 지혜라는 마부가 용기와 절제라는 두 마리의 말을 적절히 잘 몰아가는 것이 정의로운 상태라고 하였다. 그것을 그래도 취한 것이다. 거기다가 믿음 소망 사랑을 합치면 7개의 덕이 된다. 7대죄는 수도원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아마도 민간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녔을 것이다. 이것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아마도 나중에 마녀 사냥을 할 때는 칼과 같이 사람을 공격하기도 했을 것이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생욕이 그것이다. 이 악덕은 구체적으로 마귀들의 이름과 결부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 교육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고 살면서 7주덕을 지키고 7대죄는 피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갔던 세상을 느낄 수 있다. 그 자체로는 소박한 세상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인간적으로 계명된 교회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면서 중세의 비극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니 실상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을 차츰 받아들여 교리의 핵심으로 살기는 했다 하지만, 이 조차 진정한 의미의 교육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발전의 궤적은 인정된다.
*7주덕: 성경으로부터 오는 믿음, 소망 사랑+플라톤의 정의, 지혜, 용기, 절제
2. 종교개혁기의 교육
*종교 개혁기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몽매함을 그대로 버려두고 기득권을 누리던 중세가 끝나고 진정한 의미의 이성적 해방을 몰고 왔다는 것이다. 많은 개혁가들이 출발점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인문주의는 말하자면 평신도 복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성을 중세의 어둠에서 해방시키려 하였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 그 자체가 무엇인지 알고자 하였다. 종교개혁은 그 출발에서부터 자유주의적 경향을 배태하고 있다. 바티칸이 평신도들에게 성경 읽기를 금하는 해괴한 시대는 깨뜨려져야 했다. 놀랍게도 이런 신앙적 해방은 성직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 학자들에 의하여 도래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르네상스로 인해 기름 뿌려진 마당에 불씨를 던지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종교개혁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했고, 루터는 그것이 폭발하도록 하였다. 루터이 대소 요리문답이 문답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읽혀야 한다. 그것은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이 일단은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실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리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실제로 이해하도록 이끄는 것이었다. 문답법은 단순한 방법이지만 오늘까지도 교육의 마당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루터는 그런 방법을 사용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을 사용하는 정신은 복음도 교리도 가르침도 실제화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중세의 가장 큰 문제는 대단한 것을 하고 있는 듯이 모양만 잔뜩 내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문답법을 적극적으로 사용
*코메니우스가 ‘들판의 아이들을 학교로’보내야 한다고 외쳤던 것은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누구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중세적 어둠을 넘어서 그래서 이것은 최초의 제도적 교육의 외침이 되었다. 그래서 배움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실제적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도 그런 관점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제도권 교육의 주장은 상황을 많이 달라지게 하였다. 교회는 교육 일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개혁을 해 가는 마당이라 당연히 생동감을 가지고 역동적 교육을 하려고 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역사적 교훈이다. 교육은 늘 자신의 시대에 어떻게 역동성을 불러 넣을 것인지 고민하여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열었다면 오늘 교회도 인문학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담는 교육적 체계에 대하여 고민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것도 고민거리다.
-최초의 제도적 교육
*그리고 실은 가톨릭도 이 부분에 자극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늘 모든 것을 형식적으로만 하던 로마 교회에 교육적 새 바람을 일으킨 사람은 단연 이냐시오 로욜라이다. 아냐시오는 칼빈과 동시대 사람으로 칼빈이 잠깐 거쳐 갔던 몽테규 대학에 그의 후배로 입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만레사 동굴의 경험을 기초로 후예들을 철저히 무장시켜 전 세계로 내보냈으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예수회는 전 세계에 대학을 창립하여 그 숫자가 무수하다. 이것은 당장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 로마 교회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장구한 역사적 터치이다. 그래서 우리도 신학교 기독교 학교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으면 여기 저기 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정신이 거듭난 전인의 것이 되도록 깨어 있는 지도자가 계속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중세의 폐해와 관련된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르네상스 시기의 완전히 새로운 상황도 이야기하여야 하겠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과하기 발전해 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합리론의 대가인 데카르트 조차도 실험을 중시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단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태양 중심 우주론은 그 자체가 천체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지구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태양 중심 우주론은 지구가 둥글어야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제는 항해에 대하여도 관심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3. 근세에서 현대까지
-근세의 핵심은 자유주의의 등장, 이성주의 학문의 발호
-현대는 이러한 이성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함
-전통주의, 신비주의, 계몽주의
*근세의 특징을 말하자면 일단 학문 방법론으로는 프란시스 베이컨이 귀납법을 내 놓았다. 신앙 세계의 기준을 말하자면 1648년 베르트탈렌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종교개혁이 세계를 뒤흔들던 시대는 일단 끝났다. 그리고 개신교 교회에는 피할 수 없이 스콜라 주의적 정통주의가 나타났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더 신비적인 방향을 주장하는 경건주의와 오히려 더 이성적인 방향으로 경도하여 나가자는 계몽주의가 일어났다. 그러니까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계몽주의가 함께 겨루며 나가는 형세가 되었다 . 이런 판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삶으로 우리는 18세기의 사람 칸트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는 일단 학문에서 신을 제쳐 내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은 오늘날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법칙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학문에서 신을 제쳐 내는 이 방식이 오히려 신학에서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리츨의 윤리신학이다.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는 모양을 갖추어 갔다. 그러니까 18세기에 칸트는 신학적 자유주의가 토대를 둘 만한 순수 이성에 대한 연구를 탄탄하게 갖추었고, 학문적 방법이래야 여전히 스콜라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정통주의와 그것으로 안 되겠다는 경건주의가 있었다. 그 학문적 견고성을 말할 때 실로 칸트의 방법이 더 탄탄해 보였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보아도 19세기는 자유주의 시대였다. 그리하여 단지 윤리학만이 아니라 성경 비평학 등의 분야들도 이성적인 방법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것이 이른 바 분석적 비평 양상이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누가 더 건전한지, 어떤 것이 더 쓸모가 있는지 살펴볼 수 있지만, 19세기는 어떻든 신학에서 자유주의가 크게 소리치는 시대였다. 놀랍게도 자유주의자들은 종말론까지도 천년기 후 예수 재림설을 취하여 인간의 이성과 자유가 천년 왕국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한 것 같다. 바로 그런 면에서 자유주의는 확실히 도달할 수 없다는 큰 벼락같은 것을 맞았는데, 자유주의는 다시 그것을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로 돌려놓았던 것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은 여전히 그런 것이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며, 그 가운데 역동성 있게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기본 태도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란 무엇이든 인간의 이성으로 갈 데까지 가져가 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순전히 이성적인 분과 학문의 주장을 가지고 들어와서 신학을 거기다 맞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자유주의라 부른다. 각설하고, 그러나 자유주위를 포기함으로 우리의 이성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개발하거나 건설한 학문 방법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개혁주의를 견지하여 가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가버렸다. 멋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유주의 신학을 가지고 한껏 멋을 부리기도 하지만, 칼바르트의 신 정통주의나 본회퍼의 윤리학 등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자유주의를 비판하였다. 다시는 이 땅에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다. 그러나 그렇다 고해서 우리가 이성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도 마찬가지다. 슈페너나 프랑케 같은 경건주이 교육학자는 단계적으로 현대에 도움이 될 만한 교육학을 발전시켰다. 슈페너는 요리문답의 성경 구절들을 실질적으로 결부시키는 일에 깊이 관심을 가졌고, 프랑케는 여기에 아이들의 성장 단계를 고려하여 교육하는 것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발전 후에 백작 진젠도르프는 아이의 내적 경험을 다시 강조하였다. 현대적 교육학의 성장을 앞당겨보는 것 같은 방향이다. 성경을 계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도 물론이다. 경건주의는 그냥 보통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단 경건주의는 과도한 신비주의로 동방교회의 신인 혼융 영성신학 등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대개 그런 관점을 가지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관점을 함께 지닌다. 이런 것을 피한다면 경건주의는 또한 우리에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미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기도회니 성경공부니 하는 것은 정통 개혁교회의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경건주의의 것이다.
*근세에 우리가 교육학적인 의미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주일학교 교육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주일학교와 미국의 주일학교는 연관성을 갖는다. 이 근세의 교육으로서의 영국 주일학교는 미국에 전달되고, 그것은 미국 현대 기독교교육에 획을 긋는 흐름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자유주의적 관점이 나타나지만, 이에 마주서는 신정통주의적 기독교교육도 나타났고, 이 양자 사이의 대항 관계에 깊이 관여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개혁교회적인 흐름도 미국에서 분명히 나타났다.
*1789년으로부터 영국에서 주일학교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로버트 레이크스이다. 그는 기본을 신앙보다는 일종의 문맹퇴치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나 그 방법으로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을 가르치는 방법에서 찾았기 때문에 절로 신앙교육이 되게 되었다. 여기에도 의도하지 않은 하나의 종합 교육의 모습이 나타난다. 노동을 착취당하는 도시의 아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사회사상적 분위기가 이미 들어 있고, 문맹 퇴치를 하는 인문학적 관점을 가지며, 거기다 신앙을 가르치는 관점이 함께 들어 있다. 코메니우스가 교육의 열매로 말하는 지성, 덕성, 신앙이라는 세 축과 대략 일치한다.
*미국과 영국을 오갔던 웨슬리도 주일학교 문화를 미국에 전하였고, 19세기 중반 호레이스 부쉬넬 목사는 주일학교 교육을 교회의 활동으로 받아들였다. 은준관 교수는 그를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교육을 출발시킨 사람으로 평가하지만, 그것은 기본이 난센스다. 비록 부쉬넬은 훌륭한 목사이지만 말이다. 부쉬넬은 자유주의적으로 이미 성장한 사회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교회 교육이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에 대하여 부쉬넬은 반대하고, 아이들의 성장과 인격을 중시하는 교회 교육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그냥 보면 실은 로버트 레이크스의 영국에서의 주일학교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도 아이들의 신앙교육이라기 보다는 문명퇴치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중시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어쨌든 미국에서는 부쉬넬의 이런 관점이 결국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미국 사회의 장점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이리하여 다소간 진보적 성격을 가진 자유주의적 진영과 교회교육학파라 불리는 신 정통 기도교교육학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기독교교육이 진행되어 왔으며, 이것은 오늘날도 그 기본은 존재하는 흐름이라고 하겠다. 로버트 파즈미노는 논쟁적 상황과 관련 없이 20세기의 개혁주의 혹은 복음주의적 교육학자들의 이름을 들고 있다. 요점은 영국과 미국의 주일학교 운동은 실제 근대와 현대 기독교교육에 획을 그었다는 것이다. 프랭크, 개블린, 로이스 르바, 진 게츠, 로렌스 리차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성경과 계시 사상에서 출발하는 교육이 현대적으로도 의미 있는 교육적 터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혁주의 교육학의 신학적 변화(신학지남 교수님 글)
*논쟁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든, 이 움직임은 긍정적으로 보인다. 코메니우스에게서 이미 던져진 지덕경이라는 전인적 과제를 가지고 교회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미국인들이 코메니우스에 대한 의식이 없이 그랬다 할지라도 우리는 코메니우스와 오늘 미국의 기독교교육을 견주어 봄직하다.
*신 정통에서 포스트모더니티로 넘어가는 어간에 세속화 신학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정통의 일종의 이원론적 경향에 대한 반발이었고, 그 기본 흐름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한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더니즘도 무르익었지만, 여전히 정치 경제학적 분위기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대변하는 슬로베니아의 스라보예 지제크가 2013년 경희대학교 석좌교수로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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