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실천신학

타락한 인간의 본성

예림의집 2014. 5. 5. 13:43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에 관한 논의

 

 

타락한 인간의 본성 : 인간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흠없이 창조되었으므로, 그 죄의 책임을 창조주께 전가시킬 수 없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작품 중에서도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선함을 보여주는 가장 고상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그것은 우리가 처음 창조될 때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아는 것과, 아담의 타락 이후 우리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에서 부패하고 기형(奇形)이 된 우리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당분간 우리의 원래 고결한 본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인간이 현재 처해 있는 비참한 상태를 논의하기 전에, 그가 처음 어떤 상태로 창조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가치 있음은 확실하다. 지금 우리는 인간의 자연적인 악들을 본성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위하여 그러한 악들만을 추출해 내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신앙은 어떠한 결점을 지니고 있든지 그것이 어떤 점에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 있으면, 이러한 변명으로써 충분한 변호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신앙은 비난받으면, 하나님과 싸우고 자기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잘못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신성을 더 경건하게 언급하는 듯이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까지도 그들의 부패를 고의로 본성의 탓으로 돌리고, 비록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이 온갖 구실을 다 찾아 그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데에 전가시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악한 의도에 부지런히 대항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제거하고 모든 비난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기 위해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나중에 적당한 곳에서 우리는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순결한 상태로부터 인간이 얼마나 멀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3 먼저 우리는 인간이 흙과 진흙에서 만들어졌을 때(창 2:7; 18:27) 인간의 교만이 굴레씌워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즉 "흙 집에 살고 있을"(욥 4:19) 뿐만 아니라 흙과 먼지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 자기가 잘 났다고 뽐낸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질그릇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불멸의 영의 거처로 삼기를 원하셨으므로, 아담은 마땅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하심을 자랑할 수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점

 

더욱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영혼"(soul)이란 불멸하지만 창조된 본질이며, 인간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다. 때로 그것은 "영"(spirit)으로 불린다. 이 두 용어가 짝지어졌을 때, 그것은 의미가 서로 다르다. '영'이란 낱말이 그것만으로 사용될 때는, 영혼(soul)과 같은 의미이다. 이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할 때,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7)고 한 것과 같다.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셨고(눅 23:46), 스데반이 그의 영을 그리스도께 부탁했을 때(행 7:59), 그것은 영혼(soul)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실 것임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영혼"이 "영"이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것이 호흡, 곧 하나님께서 육체 속에 불어넣은 힘이지만 그러나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가 불합리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은 그 사실 자체와 성경 전체가 말하여 준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땅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우둔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진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약 1:17)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암흑으로 눈이 어두워졌으며, 그리하여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빛이 어두움 속에서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그들 자신의 불멸성에 대한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응답하는데, 이 양심은 불멸하는 영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즉, 실체가 없는 움직임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에까지 통찰할 수 있으며, 자신의 죄 때문에 스스로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즉 육체는 영혼에만 임하는 영적 형벌의 두려움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를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자체는 이 세상을 초월하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주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원천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의 마음에 부여된 수많은 탁월한 은사들은 신적인 것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의 실체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본래 소유하고 있는 감각은 육체를 초월할 수가 없거나, 적어도 그 앞에 놓인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은 명민하기에,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력과 기억력으로 모든 시대를 파악하되, 각각의 사항을 그 고유한 순서대로 정돈하며 과거로부터 미래 사건들을 추론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인간 속에서는 육체와 분리된 무엇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4 우리는 우리의 지성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인식하는데, 이것은 육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올바르고 정의롭고 존귀한 것들을 이해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영(靈)은 이러한 지성의 좌소(座所)임에 틀림없다. 참으로 인간을 무감각하게 하고 인간으로부터 생명을 빼앗아버리는 듯이 보이는 수면(睡眠) 그 자체는 불멸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그 이유는 수면은 이전에 결코 일어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생각들 뿐만 아니라 장래의 예감(豫感)까지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세속 저자들이 미사여구로 극구 칭송하고 묘사한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다.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간단한 언급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본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19) 죽을 때 육신의 장막을 떠나고, 최후의 날에 우리 각자가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보상을 받기 위하여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고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절들과 또 반복적으로 나오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육체와 영혼을 분명하게 구별할 뿐만 아니라, 영혼에 "사람"이란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영혼이 우리의 주요한 부분인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 바울이 신자들에게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고 권고할 때, 그는 죄의 더러움이 깃드는 두 부분을 지적한다. 또한 베드로도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이라고 부를 때, 만약 그 임무를 수행하실 대상인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는 잘못 말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그 자체의 고유한 실재를 갖지 않았다면, "영혼의 구원"(벧전 1:9)에 관한 베드로의 말이나 영혼을 깨끗하게 하자는 그의 권고, 또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벧전 2:11)이라는 증거도 전혀 근거없는 말이 될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목사들이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17)고 한 진술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23)라고 말한 사실도 동일한 결론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만일 형벌에 대한 책임이 영혼에게 없다면,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눅 12:5)고 명하신 말씀에서 훨씬 더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또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구분할 때(히 12:9), 영혼의 실재성을 이보다 더 명백히 주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의 영혼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복락을 누리는 반면 부자의 영혼은 무서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신 말씀도 역시 모순일 것이다(눅 16:22,23). 바울도 이 사실을 확신하여, 우리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지만" 몸을 떠나면 주와 함께 거한다고 가르친다(고후 5:6, 8). 별로 난해하지도 않은 문제를 너무 오래 다루지 않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다만 누가의 말만은 덧붙이고 싶다. 즉 누가는 사두개인들이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오류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행 23:8).

 

3.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또한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27). 그것은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 형상의 본래의 좌소는 영혼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인간의 외형도 그것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시켜 준다는 점에서 우리를 하나님과 더 밀접하게 관련지어 준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 만일 누군가가 "다른 짐승들은 몸을 아래로 구부려 땅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인간은 얼굴을 위로 들어올릴 수 있고 하늘을 쳐다보며 별들을 향하여 낯을 들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시키고 싶어 한다면, 이러한 외적 특징들로 보이거나 나타나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이라는 사실을 확고한 원리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나는 지나친 논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시안더(Osiander)는 그의 글에서 무익한 것을 창작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입증했는데,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분별하게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하늘과 땅을 뒤섞었던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 속에 두셨다고 했는데, 이는 비록 아담이 완전한 상태를 고수했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를 위해 예정된 육체는 그때 형성된 육체적 모습의 표본이요 전형(典型)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에서 찾아낼 것인가? 나는 중보자의 위격(位格)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분명히 빛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영원한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리울 수 있겠는가? 요컨대, 만일 성령이 성자를 자신의 형상이라고 칭한다면, 성자와 성령 사이의 구별은 없어지고 만다. 게다가 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도 어떻게 성령과 닮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징이나 용모로써 그의 모습을 나타내는지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라고 한 말이 성자의 위격에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므로, 결국 그는 그 자신의 형상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이것은 전혀 논리에 모순되는 것이다. 이 외에, 오시안더의 허구를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표본과 모형에 따라서만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아담이 취한 원형(原型)은,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인 그리스도와 닮은 모양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해석하는 자들의 영민함이 한층 돋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또한 "형상"(image)이란 말과 "모양"(likeness)이란 말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모양"이란 말이 설명을 위해 첨가된 사실을 제외하면,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해석가들이 있지도 않은 차이점을 찾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첫째, 히브리어에는 반복법이 흔한데, 이를테면 한 가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두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이 하나님과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운다는 사실 자체에는 전혀 모호한 점이 없다. 따라서 이 두 낱말을 놓고 보다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따지는 자들은 어리석은 것 같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특성에 적용시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끌어들인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셨을 때, 자기 형상대로란 표현이 좀 모호한 까닭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 모양대로"란 문구를 덧붙여 되풀이하신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 속에 새겨 놓은 특징에 의하여, 형상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씀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동일한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을 두 번 반복하지만 "모양"이란 말은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일부분―곧 타고난 재능을 지닌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컫는 것이 아니라, 흙에서 취함을 입어 이름 붙여진 아담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컫는다고 한 오시안더의 반론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건실한 독자라면 누구나 그러한 반론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에 의해 영혼은 죽음에 종속되어 있지 않으며, 또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칭한다고 해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바로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인간을 그 영혼과 관련시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설사 내가 조금 전에 말한 원칙을 고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생물들보다 훨씬 뛰어난 인간 본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그 완전성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그때에 아담은 올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감정을 이성에게 종속시켰고, 일체의 감각을 올바로 통제하였으며, 그리고 진실로 그의 탁월성이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은사들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座所)가 마음과 가슴, 또는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가 얼마만큼이라도 빛나지 않은 곳은 없었다. 심지어 세계의 어느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이 어느 정도 비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 자리할 때, 인간을 다른 일체의 피조물 위에 두는, 말하자면 인간을 일반 피조물들로부터 구별시키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진실로 우리는 천사들 역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해선 안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바와 같이, 우리의 최고 완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별한 칭호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높이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별히 그는 인간을 눈에 보이는 피조물들과만 비교했던 것이다.

 

4. 하나님 형상의 참 성질은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떤 점에서 탁월하며, 어떤 것을 하나님 영광의 반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를 보다 명백히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형상"이란 말의 정의를 아직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이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회복에 관한 언급에서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아담이 그의 본래 상태로부터 타락하였을 때, 이러한 이탈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서 완전히 소멸되거나 파괴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부패가 너무 심하여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나 무서우리만큼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 회복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순결한 상태로 회복하여 주는 분이기에 둘째 아담이라고도 일컬어진다.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 받았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면서(고전 15:45), 중생의 더 풍성한 은혜를 찬양하였지만, 그러나 그가 중생의 목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다는 원칙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가르친다. 이와 일치하여,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하였다.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러한 갱신에 대해 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먼저 그는 지식을 두었으며, 그 다음에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두었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 그리고 모든 부분의 건전성에서 명백히 알아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적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이러한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서도 최고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로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18).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가를 안다. 만일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된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과 의와 순결과 지성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 사실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남자만이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7)이고 여자는 이러한 영예로운 지위에서 제외된다고 한 바울의 진술은 문맥상 정치적 질서에 제한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언급한 '형상'이 영적이고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것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본다. 요한은 이와 동일한 사실을 다른 말로 확언하는데, 그는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속에 있었던 "빛"이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선언한다(요 1:4).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생물보다 뛰어나게 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찬미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지성의 빛에 참여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다른 피조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아담 안에 빛났던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성이지만, 후에 몹시 손상되고 거의 소멸되어서 혼란되고 훼손되고 부패된 것만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이제 선택된 자들에게서 부분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들이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하늘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형상이 어떤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영혼의 여러 기능들을 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 이해력과 의지력과 기억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생각은 결코 건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 부여된 지배권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는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확정되었다는 이러한 특징에 있어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은 마땅히 인간 외부에서가 아니라 인간 내부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에, 진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5. 영혼의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마니교도의 망상에 맞설 필요가 있다. 세르베투스는 이 망상을 이 시대에 한번 더 소개하려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창 2:7), 그들은 마치 무한한 신성(神性)의 일부가 인간 속으로 흘러들어오기나 한 것처럼, 영혼을 하나님의 본체의 파생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적 오류가 어떤 조잡하고 추한 부조리를 이어서 끌어들이는지를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의 본성은 변화와 격정 뿐만 아니라 무지와 사악한 욕망, 연약함 및 모든 형태의 죄악에 종속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변덕스러운 존재는 없다. 대립되는 움직임들은 인간의 영혼을 휘젖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시킨다. 인간은 무지로 인하여 거듭 길을 잃는다. 인간은 지극히 사소한 유혹에도 굴복하고 압도당한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모든 종류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시궁창이요 잠복처임을 안다. 만일 우리가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라거나 또는 신성의 은밀한 유입(流入)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모든 불결한 것을 하나님의 본성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괴한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자 그 누구이겠는가? 실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행 17:28)이라고 한 아라투스의 말을 실지로 인용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적 은사들로 단장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특성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말이지, 본질에 있어 그러하다는 말은 아니다. 한편, 각 사람이 창조주의 본질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도록 그것을 여러 갈래로 찢는 것은 완전히 무모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새겨져 있을지라도, 이 영혼이 천사들이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란 유입이 아니라, 무(無)로부터의 본질의 시작이다. 사실, 비록 영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육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참조, 전 12:7),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일부를 찢어낸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서도 오시안더는 그 자신의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불경스런 오류 속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 의(義)와 별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본체를 우리에게 부어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써 우리를 그 자신과 같은 모양으로 만드실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가 이러한 속임수들을 아무리 위장하려 할지라도, 건전한 독자들이 마니교의 오류의 기미를 발견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또 바울이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관해 논할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인간이 본체의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에 의해서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졌음을 분명히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말한다. 이 성령은 확실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지만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들지는 않는다.

 

아담의 타락에 비추어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 영혼과 그 기능들

 

철학자들에게서 "영혼"의 정의를 얻어내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플라톤을 제외하고 영혼의 불멸적 실체를 올바로 단언한 철학자는 거의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다른 제자들도 이 문제를 다뤘지만, 아무도 자기가 확신 못한 것을 명백하게 가르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견해는 더 타당했으니, 그는 영혼 속에 하나님 형상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영혼의 능력과 기능을 현세 생활에 너무 고착시켜, 육체 밖에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영혼이 무형의 실체임을 이미 배웠다. 이제 우리는 다음 사항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즉 영혼이 본질상 공간적으로 제한받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육체 속에 있고, 육체를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한다. 그것은 영혼이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주고 육체의 기관이 활동하는 데 알맞게 하고 유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지상 생활의 의무를 이행하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비록 이 마지막 특징이 인간의 타락 때문에 명백히 인지되지는 않지만, 어떤 흔적은 여전히 바로 인간의 악 속에 새겨져 남아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 자신의 명성에 대한 관심은 수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가? 명예로운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의 시작과 원인은, 그들이 의를 계발하도록 태어났음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종교의 씨앗은 이 의(義)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천상 생활을 묵상하며 살도록 지음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 대한 지식도 그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도 논쟁의 여지없이 분명하다. 그리고 만일 사람이 행복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는 사실상 인간 이해력의 주된 용도를 잃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주요 활동은 그것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가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더욱 입증되는 법이다.

인간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 즉 감각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이 있다고 단언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의 논리는 어느 정도 그럴듯한 것처럼 보이지만 확고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중요치 않고 무익한 문제들로 고민하지 않으려면 이들의 주장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신체 기관의 활동과 영혼의 이성적 부분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이성 자체는 그 자체와는 전혀 충돌이 없고, 전쟁중의 군대처럼 그 자체와 상반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본성의 부패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기능들이 서로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이 둘이 있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영혼의 기능에 관한 정밀한 토론은 철학자들에게 맡겨두기로 하겠다. 그 이유는 경건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간단하게 정의를 내리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바가 참되며, 배우기에 즐거울 뿐만 아니라 유익하기도 하며 그들에 의해 잘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연구하려는 학문적 욕구를 금할 마음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오감(五感)이 있음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이것을 기관(器官)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으며, 이 기관이 모든 대상을 일종의 그릇처럼 공통 감각에 전달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공통 감각에 의해 파악된 것들을 식별하는 상상력이 있고, 그 다음에는 보편적 판단을 채택하는 이성이 있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산만하게 생각해 낸 것을 침착하고 열렬한 연구에 의해 숙고하는 오성(悟性)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성과 이성과 상상력(영혼의 세 가지 인식 기능)에 상응(相應)하는 세 가지 욕구 기능이 있다. 즉, 첫째는 의지인데, 오성과 이성이 제시해 주는 것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기능이다. 둘째는 분노이고, 이성과 상상력이 제공한 것을 포착하는 기능이다. 셋째는 무절제한 욕망이며, 상상력과 감각이 제시해 주는 것을 파악하는 기능이다.

이러한 견해들이 참이거나 적어도 참일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자체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우리를 충동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것들을 건너뛰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누군가 영혼의 능력들을 어떤 다른 방법으로 분류하기 원한다 해도 강력하게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은 하나는 욕구적이라 일컫고, 다른 하나는 지적이라 일컫는다. 전자는 이성(理性)과는 상관이 없지만 다른 것의 지시를 받으면 이성에 순응하고, 후자는 본질상 이성에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 행동 원리, 즉 감각과 오성과 욕구라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하는 견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구분을 채택하기로 하자. 이 구분은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훌륭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아주 단순하게 말하기를 원하면서도 영혼을 욕구와 오성으로 구분하지만, 그 둘을 모두 이중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성이 때때로 관조적(觀照的)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식만으로 만족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키케로가 "타고난 재능"좰genius좱이란 용어로 나타낸 것이다). 때로 오성을 실천적이라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과 악을 이해함으로써 여러 방향으로 의지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에는 잘사는 법과 바르게 사는 법에 대한 지식이 포함된다. 그들은 또한 전자(前者) 즉 욕구를 의지와 강한 욕망으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bouvlhsi?불레시스)라고 부르는 욕구가 이성에 순종할 때, 그것을 oJrmhv(호르메,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욕구가 이성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무절제로 돌진할 때, 그것은 pavqo?파도스, 격정)가 된다. 이리하여 그들은 언제나 그것에 의해 자기를 올바르게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인 이성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7. 참된 근본적 기능으로서 오성과 의지

 

우리는 이런 식의 가르침에서 어느 정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에서 비롯된 본성의 부패에 대해 무지하므로 아주 판이한 인간의 두 상태를 혼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이 두 기능, 즉 오성과 의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로 하자. 사실은 이 구분이 현재 우리의 의도에 알맞는 것이다. 게다가 오성이 하는 일은 대상을 구별하는 것, 즉 각 대상이 승인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 반면,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하다고 선언하는 것을 채택하여 따르지만 오성이 반대하는 것을 거부하고 피하는 것이라고 하자. 우리는 여기서 마음 그 자체만으로는 활동이 없고 선택에 의해 움직인다는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하찮은 견해로 인해 지체하지는 맙시다. 그는 이 선택을 욕구적 오성이라고 부른다. 무익한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성은 말하자면 영혼을 인도하고 주관하는 자이며, 의지는 오성의 명령에 항상 유의하며 그 자체의 욕망에 있어서 오성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러한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동일한 것을 진심으로 가르치는데, 즉 욕구에 있어서의 회피나 추구는 정신에 있어서의 긍정이나 부정에 상응한다고 가르친다. 실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오성이 의지의 방향을 어떻게 확고하게 통제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만, 이 구성 요소 중 어느 하나와도 적당하게 관련 없는 힘을 영혼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점만 말하고 싶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감각(sense)을 오성에 포함시킨다. 다른 한편, 철학자들은 이렇게 구별한다. 즉 감각은 쾌락으로 기울어지지만, 오성은 선(善)을 따른다고 구별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인 욕구는 무절제한 욕망과 정욕이 되고, 오성의 경향은 의지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그 반면,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욕구"란 말 대신에 보다 일반적인 용어인 "의지"라는 말을 사용한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셔서, 그것으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간하도록 하셨고, 그리고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삼아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하는 부분을 to; hJgemonivkon(토 헤게모니콘, '지도력')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는 이것에 의지를 결합시키셨는데, 선택은 이 의지의 통제 아래에 있다. 처음 상태 의 인간은 이러한 탁월한 은사들로 인하여 뛰어난 존재였고, 따라서 그의 이성, 오성, 분별력, 그리고 판단력은 지상 생활을 지도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에까지 찾아 올라갔던 것이다. 그 다음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지도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통제하며, 그리하여 의지가 이성의 안내에 완전히 순종하도록 했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이 원하기만 했더라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여기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지에 의해 타락했다는 점으로 보아, 만일 그가 원했더라면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방향으로나 기울어질 수 있었고 지속적인 불변성이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도 쉽게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악에 대한 선택은 자유로웠고, 그것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 최고의 정직이 있었으며, 모든 유기적 부분들은 순종하도록 바르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파멸시켜서 그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까지였다.

그 결과 철학자들은 심한 모호성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폐허 속에서 건물을, 흩어진 조각들 속에서 짜임새 있는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이 선악에 대한 자유 선택권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계획을 따라 자기 생활을 규제하지 않았다면 덕과 악덕간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꽤 논리적이었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들에게 숨기워졌으니, 그들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공연히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칭하는 자들이, 철학자들의 견해와 하늘의 가르침 사이를 절충하는데 이런 식으로는 하늘이나 땅에 손도 대지 못하며, 그들이 잃은 바 되고 영적 파멸 속에 떨어진 인간 속에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을 때,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적절한 부분에서 다루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인간은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의 모든 후손과 전혀 달랐고, 그 후손들은 타락한 상태의 인간에게 기원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유전적인 부패성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인간 영혼의 각 부분들은 고결하게 형성되었고, 그 마음은 건전했으며, 그 의지는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의 의지력이 연약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인간의 신분은 그 어떠한 변명이라도 제거하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전혀 죄를 지을 수도 없거나 혹은 죄짓기를 원치 않는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하나님께서 제한을 받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사실, 그러한 본성이 더 탁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명확한 문제로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즉 마치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러한 본성을 부여하셔야만 정당했던 것처럼 불평하는 것은 아주 사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기뻐하신는 것을 그의 선택에 따라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내의 힘으로써 인간을 붙들어 주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자제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사실 인간이 그 의지를 행사했더라면 능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지 행사에는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인간이 그토록 많은 것을 받고도 자발적으로 파멸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낼 기회를 얻기 위해 인간에게 평범하고 심지어 변하기 쉬운 의지가 아닌 다른 것을 억지로 주실 필요가 없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