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윤리 한국및 동양윤리
변화하는 시대의 기독교 윤리학
우리는 모두 윤리학자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과 늘 마주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윤리적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다. 윤리 문제에 제대로 대답하는 것은 항상 쉽지만은 않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도전들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사람들은 윤리적인 문제들과 부단히 씨름해 왔다. 사실 어떤 문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된다. 인간이 된다는 것 자체가 윤리적인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우리만이 겪는 독특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은 일면 우리 시대의 특징에 기인한다. 계몽주의의 기치 아래 근대 과학이 우리 손에 쥐어 준 능력은, 새로운 골칫거리까지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윤리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의학적 자료가 제공하는 정보에 따라 문제 있는 아이의 출산을 금지하고,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에게 더 이상 생존할 권리를 박탈하는 시대가 속히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오늘날의 윤리적 도전이 심각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문제가 우리 조상들은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독특성은 대체로 과학 기술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시대의 독특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우리는 도덕적 위기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윤리 문제들이 도전해오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마치 윤리의 정박소를 잃은 듯이 보인다. 계몽시대 이후 서구 사회는 한번도 윤리 문제에서 만장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과거의 일치된 입장이 사라지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또 다른 현상은, 서구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리적인 면에서든 윤리적인 면에서든, 기독교는 더 이상 사회의 자기 이해 혹은 사회의 목표 설정에서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더욱 광범위한 문화 변화를 겪고 있는 듯하다. 하나의 보편적인 윤리를 추구하던 근대를 떠나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도덕적 닻줄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사회에서 지금껏 인간사회가 겪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고 큰 파장을 미칠 윤리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삶의 윤리적 기초를 다시 갈구하기 시작했다는 표지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선호하시는 삶의 방식이 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현재뿐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인 삶을 추구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도전이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삶의 방식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윤리학은 신학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신학은 윤리학의 기초자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윤리적 삶이란, 각각의 삶의 정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공유한 근본적인 신앙에 따라 우리의 발걸음을 조정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굳게 믿는 바를 실행하는 것, 다시 말해서 매일의 삶 속에서 믿는대로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헌신은 신학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기독교 윤리 입문 1. 기독교 윤리학의 정의
(다우마 13-44)
1. 도덕과 윤리-"윤리"라는 용어는 헬라어 ethos로부터 나왔는데 신약성경에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습관'을 쫓아(헬라어: kata ta ethos, 눅 22:29) 감람산에 올라가셨다. 사도행전 기자는 로마인들이 고소한 사람과 대면할 기회도 주지 않고 피고인들을 넘기는 '관습'(ethos)을 가지지 않았다고 언급한다(행 16:21). 관습 혹은 습관이라는 의미 외에도 ethos는 영어복수형 mores(풍속, 사회적 관습)를 의미하기도 했다. 빌립보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로마인들이 받아들이거나 따를 수 없는 비합법적인 풍속(mores, ethe)을 가르친다고 고소하였다. 한 서신에서 바울은 "악한 동료들이 선한 '행실'(ethe)을 부패시킨다"는 이교도 시인 매난더(Menander)의 격언을 인용하고 있다(고전 15:33).
"도덕"은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관습으로 이루어져 있고, "윤리"는 그러한 관습들에 대한 반성이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행동을 하는데(도덕), 과연 그렇게 행하는 것이 정당한가(윤리)? 도덕과 윤리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우리가 "혼자만의 윤리"(solo-ethics)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윤리에 관한 지침서를 개별적으로 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도덕은 항상 집단의 도덕으로 존재한다.
2. 윤리학의 분류
① 서술 윤리학(descriptive ethics)-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문화들에서 나타나는 관습과 도덕들을 서술하는 것이다. 특히 문화 인류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이 분과와 관련이 있다. 만약 윤리가 도덕에 대한 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러한 반성은 항상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도덕을 서술할 때에는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도덕은 항상 사실을 보고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평가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확히 말해서 "서술 윤리학"이라는 용어는 정확하지 않다.
②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규범 윤리학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지시하는 기준 혹은 척도가 되는 규범을 다루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도덕이 어떠한가가 아니라(서술 윤리학), 도덕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유념해서 살펴봐야 한다.
③ 특수 윤리학(special ethics)-특수 윤리학은 규범 윤리학 안에서 좀 더 세분화된 것이다. 오늘날 어느 누구도 윤리학의 전 분야를 완전히 섭렵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의료 윤리, 다른 이는 환경 윤리, 또 다른 사람은 비즈니스 윤리, 또 어떤 사람은 성 윤리를 전공한다. 사회의 노동자, 간호사, 법률가, 저널리스트와 같은 전문인 윤리를 공부할 수도 있고, 각각의 직업에 확립된 윤리 규약을 연구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규범 윤리학의 분과이다.
④ 메타 윤리학(meta-ethics)-메타 윤리학은 윤리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다룬다. 선, 악, 의무, 규범과 같은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의 행동은 자유로운가 아니면 결정되었는가? 도덕적 행동은 상대적이기에 특정 시간이나 특정 장소에서는 선했다가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서는 악할 수 있는가? 메타 윤리학은 언어 분석 철학 안에서 폭넓게 논의되어 왔다. 그 중 중요한 문제는 윤리적 언설(ethical assertion)의 성격이다. 메타 윤리학은 항상 규범 윤리학의 배경 역할을 담당한다.
3. 기독교 윤리학의 정의-다우마가 제시하는 기독교 윤리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윤리학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관점의 조명을 통해서 도덕적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다." 고유하게 윤리적 반성에 속한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지적하기 위해 다우마는 7가지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① 도덕은 인간의 행위라는 것이다. 비록 사람은 동물을 향해 잘못 행동할 수 있지만, 모든 동물들은 사람에 대해서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② 도덕적 행위는 규범적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규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본능이나 강요에 의해,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행동들은 모두 "must"(도저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must"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식으로 행동할 수 없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도덕은 "ought"(해야 하는)의 성격(즉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어야만 하는"[should] 것)을 가진 행동들을 다룬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책임질 수 있는 선택에서 나온 행동을 다룬다(responsible conduct).
자유 없이는 도덕을 생각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 관계 안에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의 정도에 대해서 거의 생각을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결정론(determinsm)과 비결정론(indeterminism)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 견해가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비현실적인 양극단이다. 한계와 자유는 항상 공존한다. 사람들은 생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강하게 조건화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안에서 선택할 수 없으며(비결정론), 단지 실질적이며 성취 가능한 몇 가지의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드 흐라프).
③ 도덕은 선과 악의 측면에 따라 조망되는 행위이다. 도덕은 어떤 면에서 규범적인 행위이다. 그러나 모든 규범적인 행동이 도덕적 행동인 것은 아니다.
④ 도덕적 행위는 적절한 동기에 의한 행위여야 한다.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도덕의 본질로 사람의 "의향"(disposition)을 지적했다. 동기는 윤리학에서 본질적인 요소이다. 두 사람이 객관적으로는 동일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완전히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⑤ 행위를 볼 때 우리는 쉽게 선과 악의 구별과 관련지어 이해한다. 동기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의지를 포함시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선한 도덕적 행동에는 그 행동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감정적 관심도 포함되어야 한다. 칸트가 의향에 대해서 지적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는 의도에서 감정이나 열정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지 제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칸트의 윤리학은 지적(인식적) 경향이 너무 강하다. 그의 견해는 지식적, 합리적 동기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행동하는 사람의 감정과 연관되지 않은 도덕적 행동은 상상하기 어렵다.
⑥ 윤리학은 우리가 덕(virtue)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룬다. 동기가 인간 행위의 깊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춘다면, 덕은 인간행위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덕을 주목할 때, 우리는 인간이 도덕적으로 되는 것이 단 한번의 행동 그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프의 줄을 당긴다고 하프 연주자가 아니다. 하프 연주자는 하프를 연주하는데 "익숙한"(good) 사람이다. 이와 동일하게, "선한"(good) 혹은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덕을 행하고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천년의 교회사 속에서 자주 제기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로 바뀌었다.
⑦ 우리는 늘 "우리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관심이 있는데, 그 질문은 "무슨 목적으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가?"라는 의미이다. 사실 이 물음을 통해 우리는 도덕의 외적 한계를 다루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자체로는 도덕적 본질에 속하지 않는 문제들을 종종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통해 다루기 때문이다.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주목하지 않고서 도덕의 문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규범과 가치는 서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할 때, 왜 그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4. 공리주의적 윤리와 의무론적 윤리
우리는 행위 자체 뿐 아니라 그 행동의 이면에 있는 동기 또한 살펴야 한다. 우리는 행위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마 7:21-27). 이전의 윤리학은 최근의 윤리학보다 행위에 대해서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다. 행위를 적절하게 분석하기 위해서 행위 그 자체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윤리적 행동을 적절하게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의향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의향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할 때 태도 윤리(attitudinal ethics)만이 남는다. 칸트에 의하면 결과에 기초한 행동은 잘못된 행동이다. 그가 보기에 올바른 윤리학은 오직 의도의 윤리학 뿐이었다.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정의를 행하라"(fiat justitia, pereat mundus)는 뜻을 가진 라틴 격언이 있다. 지조 있게 들릴 수 있지만, 행동의 규칙으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하다. 선한 의도를 가진 나의 행동이 별로 영양가가 없는 결과가 나온다고 예측한다면, 나는 그러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나의 행위는 단순히 선한 의도에서 수행될 뿐만 아니라, 정확한 목표물을 맞추어야 한다. 의도, 행위, 결과는 우리가 고려해야 할 세 가지 본질적 요소이다. 우리가 그 세 가지를 구분할 수는 있지만 절대 분리할 수는 없다.
공리주의자들은 어떤 행위가 가져다 주는 이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서, 행동의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과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사회적인 성격의 공리주의를 옹호했다. 그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관심을 기울였다.
의무론자들은 다르게 접근한다. 헬라어 deon은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의미이다. 의무론자들에게는 의무가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무론자들은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규범적인 원리와 의도를 주목하는데, 규범적인 원리와 의도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결정하는 지침을 제공한다. 만약 규범이 언제든지 참말을 하라고 요구한다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하더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법은 법이고 규칙은 규칙이다!
우리의 행위는 의무론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결코 일방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처럼, 유익에 대해서 늘 주의를 기울이고 가늠질 한다.
5. 기독교 윤리-윤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무엇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동기를 부여받는지, 어떤 덕과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가를 질문할 때, 우리는 엄청난 차이에 직면하게 된다. 분명히 사람들은 윤리적 문제를 아주 다르게 바라본다. 모든 윤리적 반성의 체계는 세계관 안에 포함되어 있다. "나의 세계관은 성경의 조명에 기초해있다.... 따라서 나에게 윤리란 도덕적 행위를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관점의 조명 아래 반성하는 기독교 윤리학이다."
6. 성경 윤리학 혹은 기독교 윤리학-성경(biblical) 윤리학이라는 제목은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성경이 윤리를 위한 기본 재료는 제공하지만, 단순히 성경 자체가 우리가 간단히 우리 것으로 채택할 수 있는 윤리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오늘날 행동의 인도자로 소개하려하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에 등장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고 어떻게 하지 않았는가를 이끌어 낼 수는 없다. 만약 아브라함, 다윗, 바울의 시대에 사람들이 추구했던 도덕과 같은 것들을 서술한다면, 기독교 윤리학은 "서술" 윤리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규범적 윤리에 관심이 있다. 윤리를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잠언과 같은 책은 인간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잠언조차도 윤리 그 자체로 채택할 수 없다. 우리는 고대나 근대가 처한 문제들과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신학적(theological) 윤리학이라는 말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의료 윤리가 의료 전문가들을 위한 윤리인 반면, 신학적 윤리는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윤리이다. 의료 윤리는 직업 윤리(professional ethics)에 속하였지만, 신학 윤리는 적어도 신학자라는 직업에 속하였거나, 편파적으로 말씀의 사역자의 직무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신학자들이 오늘날 주목하고 있는 윤리는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러 저러한 방법으로 다루고 있는 윤리보다 더 폭넓다거나 좁은 것이 아니다. 요컨데, 우리는 더 이상 신학적으로 고립되어 윤리적 반성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똑같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비신학자들과 협력해서 다루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기독교 윤리 입문 2. 기독교 윤리학의 범위
(다우마 45-100)
1.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는 실재(reality)를 15가지의 양상(aspect)으로 구분하면서, 도덕적 양상을 법적 양상과 신앙적 양상 사이에 분류하고 있다. 양상이라는 계층적인 잣대로 실재를 바라 볼 때, 도덕적 양상은 다른 양상들의 가운데 위치해 있다. 도덕적 양상의 바로 아래에는 법적 양상이 있다. 법적 양상은 도덕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도덕과 동일하지는 않다. 도덕적 양상의 바로 위에 있는 것이 바로 종교적(혹은 신앙적) 양상이다.
2. 도덕은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뿐 아니라 인간과 뒤엉켜 있는 모든 만물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도 연관되어 있다. 환경과 자연은 인간과 동등하게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이웃 뿐 아니라 자연을 향해서도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윤리학에서 이웃과 나 자신은 모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 도덕적 행위를 반성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들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이다.
3. 교의학과 윤리학-교의학은 성격상 신학분과에 속하지만 윤리학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초창기에 윤리학은 교의학과 마찬가지로 신학분과에 속했다. 그 때에는 거의 신학자들만이 윤리학을 가르쳤다. 종종 교의학과 윤리학을 동일한 사람이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윤리적 문제의 범위가 늘어나면서 이 두 분야를 함께 다루는 것이 더 이상 힘들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분리는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분업의 문제이다. 어느 누구나 윤리를 다루기 때문에 윤리학은 오히려 교의학보다 더 인기가 있게 되었다.
교의학이 교회의 교의(dogma)를 다룬다면, 윤리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다. 우리는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이 처음부터 끝까지 교리와 함께 삶을 다루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한 윤리학자는 교의학과 윤리학의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 둘을 동전의 양면에 비유했다. 앞면(교의학)은 동전의 법적 자질을 가리키고, 뒷면(윤리학)은 실생활에서 동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규정한다. 교의학과 윤리학은 똑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한다. 교의학은 '올바른 믿음'(correct faith)을 강조하고 윤리학은 '지도된 믿음'(directed faith)을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 윤리학을 극단적인 근대정신(modernity)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진정으로 그 본질을 되찾으려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항상 돌아가서 교의학적 문제들과 부딪혀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윤리학에만 제한시킨다면, 아브라함 카이퍼의 표현을 빌자면, 나무의 뿌리가 병들어 가는데 나무 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넓고 깊은 계시를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서 전체 가운데 한 부분만을 따로 떼어서 이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결과로부터 진리를 도출하는 실용주의적 태도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다.
윤리학 없는 교의학은 공허하고 교의학 없는 윤리학은 맹목적이다. 삶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을 때 교의학은 무미건조한 스콜라주의가 된다. 반대로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사역과는 동떨어진 행동으로 윤리학이 조명된다면 그것은 도덕주의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4. 기독교 윤리학과 철학적 윤리학-기독교적이든 비기독교적이든 모든 윤리학은 어떤 가정들에서 시작한다. 칸트가 말한 "순수" 이성 같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 견해와 같이 서로 갈라질 수 있는 상층부와는 달리, 윤리학이나 정치학과 같은 영역처럼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하층부가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견해는 로마 카톨릭 신학에서 철학적 윤리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들은 철학적 윤리학은 보편적 일치가 가능한 일종의 하층부와 같은 반면, 기독교 윤리학은 그 자체로 유효한 상층부에 속한 것으로 본다. 사람들 사이에서 이성은 보편적이지만, 신앙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윤리학과 철학적 윤리학은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결론들을 기록한다. 윤리학은 인간학의 문제와도 마주친다. 기독교 인간학과 그 결과로 생겨난 기독교 윤리학은 근대적 인간학에서 도출된 윤리학을 뛰어 넘는다. 분명한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철학과 기독교적이고 주관적인 종교와 윤리 사이에 완벽한 분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세계관의 영역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5. 철학적 윤리학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적 확신으로 출발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많은 공통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 윤리학 안에서 오로지 기독교적인 논변만 고집하는 방식에 제한되어 보편적 논변만을 사용하는 철학적 윤리학에 맞서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논변과 보편적인 논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들으라 그것이 전부이다"라고 말하는 일종의 의무론자들이 아니다.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공리주의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그러면 당신에게 진짜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보편적인 논변도 우리에게 유효하다. 그러나 보편적 논변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보편적 논변과 기독교적 논변 모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보편적 논변을 사용할 때 철학적 윤리학(기독교적이건 비기독교적이건)으로부터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결국 기독교 윤리학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조언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다. 기독교 윤리학은 널리 알려진 일반적 도덕을 분석하고, 이러한 도덕을 승인하거나 비판함으로 공공 사회를 섬기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편적 논변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하며, 단지 기독교적 논변만을 사용함으로 최후방위선으로 후퇴해서는 안된다. 자주 이러한 보편적 논변들은 일반 사람들의 도덕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유익한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6. 기독교 윤리학에서 성경을 사용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우리는 기독교 윤리학을 위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에 호소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성경에 호소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극단적인 모순되는 입장들이 모두 성경에 호소했고, 지금도 성경에 호소하면서 옹호되고 있다. 비록 성경이 수많은 방식들로 오용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오용이 올바른 성경의 사용을 무효화시키지 못한다. 비록 많은 손들이 성경을 더럽히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 어려움은 성경의 역사적 특징에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진전됨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전에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들이 오늘날 모두 유효하지는 않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시대에 효력이 있었던 모든 것들이 지금 신약 시대에 유효한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우리가 직면하는 어려움은 바로 현대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많은 윤리적 문제들이 성경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7. 해석학-어느 누구도 전통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성경해석의 전통도 마찬가지이다. 전통에 큰 가치가 담겨져 있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그랬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전통주의가 되어서는 안된다. 이전 세대가 우리에게 제공했던 해석학의 통찰력에 감사해야 하겠지만, 언제나 우리는 때때로 옛 전통을 보충하고 때로는 교정하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근대의 해석학은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근대 해석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이다. 만약 동성애를 지지하는 특정한 도덕적 확신이 만연되면, 결혼과 성에 관한 성경의 모든 자료들은 이런 현대의 주장을 극복할 능력이 결여된다. 그러한 해석학에서 성경은 더 이상 현대인에게 비판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경험뿐이라는 확신이다. 그러한 종교적 경험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그 경험에 따라 성경에서 수용할 수 있는 우리의 견해도 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접근하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해석하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문제는 만약 성경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선이해를 굴복시키려고 하는가 아니면 궁극적으로 성경을 지배하기 위해 우리의 선이해(Vorverstandnis)를 고집하는가이다.
8. 성경문자주의(Biblicism, 성서주의)-성경문자주의는 성경 본문을 그것 자체만 고립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을 그것이 위치한 문맥으로부터 떼어 버리는 것이다. 성경문자주의는 주어진 본문의 분위기와 새깔을 제공하고 있는 시대와 상황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성경문자주의는 그때의 행위와 지금의 행위를 너무 쉽게 동일한 것으로 본다. 이런 방법으로 보면 성경은 그저 다양한 사례들을 모아놓은 책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 사례들은 그때 그들이 그렇게 행했던 오늘날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일종의 도식 안에서 적용된다.
성경문자주의의 실례-하루 8시간제 노동이 낮이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요 9:4)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에서 낮이 12시간이라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요 11:9). 주 5일 노동제 역시 6일동안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계명과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출 20:9).
9. 구원이 유대인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만국의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을 때, 사회적 경제적 규례를 포함하는 구약은 법률로서 그 효력이 상실되었음이 분명해 졌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에서 구약은 신약과 함께 권위가 존속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강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구약의 법과 적용할 수 없는 구약의 법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었다. 요컨대,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 이렇게 세 종류로 구분된 것이다.
의식법은 성전 사역, 결례의 문제, 제물과 같은 문제에 관한 것이다. 시민법은 가나안 땅에서의 언약백성의 삶에서 유래되었는데, 다른 땅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 마지막으로 십계명이 그 핵심인 도덕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있다. 도덕법에서 우리는 옛언약에서 뿐 아니라 새언약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가지고 남아있는 불변하는 원리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인위적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법에서 오늘날 여전히 효력이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 의식법과 시민법 역시 기독교 윤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법과 시민법이 담고 있는 핵심, 본질을 찾을 필요가 있다.
10. 분명히 성경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한 두 구절에만 호소할 수 있지만, 다른 문제들은 그렇지 못하다. 성경은 4가지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① 안내자(guide)로서의 성경
② 보호자 혹은 파수꾼(guard)으로서의 성경
③ 나침반(compass)으로서의 성경
④ 모범의 원천(source of examples)으로서의 성경
11.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에게 성경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도 명백해 졌다. 우리는 여러 문제에 대한 지식을 성경 외의 다른 것들을 통해서도 얻는다. 의학 혹은 정치적 문제와 같은 이슈에 대해 반성하는 사람이라면 의학 혹은 정치적 사건에 대한 지식을 소유해야만 한다. 당연히 그러한 지식을 성경으로부터 얻을 수는 없다. 성경이 기독교 윤리에 필수적이지만, 성경이 우리 지식의 유일한 근원은 아니다.
칼빈은 이성을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ratio ingenita(태어나면서 받았던 이성), 인간 타락으로부터 생겨난 ratio vitiosa(죄로 인해 올바르게 기능할 수 없는 오류가 있는 이성)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의 지도를 받는 tertia ratio(제 3의 이성)를 구분했다. 이러한 구분을 사용한다면, tertia ratio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호자와 나침반으로 사용하도록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윤리적 반성이 필요한 일에 "일상적" 지식을 사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직면한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에 이끌림을 받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각 나라는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법을 만들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장 유일한 조건은 그 어디에나 사랑의 원리가 그 기초에 놓여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칼빈이 그 다음에 언급한 것을 주목하면 참으로 흥미롭다. 칼빈은 모든 법에서 우리가 교훈(precept, constitutio)과 형평성(equity, aequitas)이라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은 시대, 장소, 사람의 상황에 적합해야만 한다. 칼빈은 때에 따라서는 다른 법들이 모세의 율법보다 더 낫다고까지 말하고 있다(『기독교 강요』, IV.20.15-16).
새로운 반성의 통로는 항상 열려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문제들을 직면하게 하는 발전들을 회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명백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계명을 우리가 처한 환경과 시대 속에서 순종해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성경 뿐 아니라 이성이 필요하다. 물론 여기서 이성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사람이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파악하는 그런 자율적인 이성이 아니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진심으로 지키리이다"라는 시편 11:34절에서 말하는 의미로서의 이성이다.
12. 우리는 단순히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라"라는 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오히려 이런 방식의 사랑은 성경구절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것과 함께 그 분은 사랑이 무엇을 추구해야만 하는가를 명확하게 규정하셨다. 우리는 고립된 성경구절에 우리의 결정을 묶으려 하는 갖가지 형태의 성경문자주의를 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말씀과 동떨어진 주지(motif)도 피해야 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우리는 성경을 유효한 방법으로 사용하도록 구비될 것이다. 각 사람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것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이다. 성령은 우리를 서로 묶으시고 비록 우리의 통찰력이 다를 때에라도 서로 존중하기를 원하신다(롬 14-15장; 고전 8-11장).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우리는 흩어지는 모래가 아니라 한 몸의 지체들이다. 성숙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기꺼이 설명해야 한다. 성숙함은 개인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자유 안에서 결정을 하며, 종이 아닌 자유자로서 살아갈 것이다(갈 5:1 이하).
기독교 윤리 입문 3. 십계명
(다우마 101-138)
1.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책임있는 행위에 관해 성찰할 때, 성경의 어느 부분이 가장 많이 거론되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대답은 십계명이다. 종교개혁 훨씬 이전부터 교회의 가르침은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에 집중되어 있었다. 루터의 대소 요리 문답(1529)에서는 십계명 해설이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보다 먼저 논의된다.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칼빈은 제일 먼저 사도신경, 그 다음은 십계명,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다루었다. 칼빈은 특히 십계명이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는 것으로 다루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런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십계명 해설을 담고 있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은 수세기 동안 확실하게 개혁파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의 중추를 이루었다. 기독교 윤리학은 성경 전체를 모두 중요하게 취급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논의를 십계명에만 제한시킬 수는 없다. 기독교 윤리학을 다룰 때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 많은 부분들도 참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 5-7장 산상 수훈, 고전 13장의 사랑의 송가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2.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적 삶의 핵심 명령을 십계명에서 찾을 수 있는가? 뢰트리스베르거에 따르면 십계명을 가르치는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회는 시내산에서 죄초되었으며 신약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십계명은 신약의 도덕적 가르침에서 더 이상 중심적인 위치가 아닌가? 뢰트리스베르거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롬 10:4), 십계명은 도덕적 가르침을 위한 출발점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율법의 마침"이 십계명에 대한 무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했던 바울이 동일하게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7:12, 14). 율법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러나 이제 그 율법의 요구는 육체를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성취되었다. 율법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변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고후 5:17)은 율법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린다. 신자들은 이제 율법과 갱신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구약의 위대한 구속사건(출애굽) 이후에 십계명이 주어졌고, 마찬가지로 신약의 위대한 구속 사건(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감사의 삶이 뒤따른다.
3. 그러므로 교회는 여전히 시내산에 가만히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윤리가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면 결코 교회는 기독교 윤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십계명으로 되돌어가지만 말이다.
3.1.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명의 진정한 속 뜻을 가르쳐 주셨다. 그 분은 특별히 산상수훈에서 계명의 진정한 속뜻을 지적해 주셨다(마 5:17-48). 우리는 단순히 금지조항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봐야 한다. 금지된 무언가가 있다면 명령된 것은 무엇인가?
3.2.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완성으로서 사랑을 지적하심으로 율법의 통일성을 강조하셨다. 자비를 생략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지켜서는 안된다. 십계명은 분명히 인간의 마음을 요구하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3.3. "모세"를 통해 명령하거나 금지한 모든 행동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격을 지닌다.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사고,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에 속하였음을 지적한다 (고후 5:17; 갈 6:15; 엡 2:10).
이러한 우리 행위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격은 왜 교회가 제 4계명("안식일을 기억하라")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과 연결시켰는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이 시번에서 안식을 깨뜨리는 것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제 4계명은 기독교회에서 다른 계명들과 함께 여전히 유효하다.
4. 율법의 세가지 역할-율법의 용법(usus legis)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항상 동일한 순서로 언급된 것은 아니지만, 문헌상 세 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① 율법의 제 1용법(usus legis primus)는 공공적, 정치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율법의 제 1용법은 정치적 용법(usus politicus) 혹은 시민적 용법(usus civilis)이라 칭하기도 한다.
② 율법의 제 2용법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 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율법의 제 2용법은 교육적 용법(usus paedagogicus) 혹은 경책적 또는 고소적 용법(usus elenchticus)이라고도 한다.
③ 율법의 제 3용법(usus legis tertius)은 감사를 표현하는 규칙으로서의 율법의 의미를 지적한다. 율법의 제 3용법은 교훈적 용법(usus didacticus) 혹은 규범적 용법(usus normativus)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구분을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 있다.
① 율법은 인간을 보호하는 방화벽과 같은 역할을 한다.
② 율법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보게 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③ 율법은 인간이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척도의 역할을 한다.
5.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된 사이에 있는 서로 다른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믿는다. 단순히 정의상으로 어떤 사람이 기독교적 믿음이 있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행위를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일이 어떻게 되어서는 안되는지를 설명함으로 비판적인 기여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인간 사회를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에 뿌리를 박고 악영향을 미치는 편견들에 대해서 경고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서로 다른 도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6. 우리가 불신 이웃들과 똑같이 많은 일을 행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우리 행동의 대부분을 비그리스도인들도 인정할 수 있다는 가정을 명백히 진술하기 때문이다. 엡 6장와 골 3장에 나오는 가정에 대한 기독교적 원리와, 갈 5:22와 골 3:12에 요약되어 있는 기독교적 덕목은 겉으로 보기에 이방인들의 도덕에서도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교도들이 자신들의 가슴 속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를 가질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롬 2:15).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많은 것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위치에 있음을 묘사한다. 롬 13장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사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그런 일상성을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일일이 성경구절을 찾을 필요가 없다.
만약 이 정도 수준에서 우리의 논의를 끝내 버린다면, 그야말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갖가지 행위를 비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행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치자.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행위의 전체 그림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는 행위는 여전히 비그리스도인의 행위와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맥락은 비그리스도인이 행동하는 맥락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것 사이에서 진행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백성들을 정결케 하시는데, 그 백성은 선한 일에 열심을 품는 백성이다(딛2:14).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른다는 것"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따르는 것'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다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적어도 다음 세가지의 특징이 있다.
①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소명을 완수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른다.
② 우리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른다.
③ 우리는 그분이 고난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리스도를 따른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태도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 외적으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배웠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다르다"라고 바울이 말할 때, 그는 계속해서 "완전히 다른 것"을 어떻게 외적으로 표현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만의 도시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상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생소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헬라나 헬라 지역 외의 어느 도시에 살든 상관없이, 의복이나 음식, 일상의 다른 문제들에 관하여 그 땅의 관습을 따른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삶의 양식'(lifestyle)으로 보편적인 인정을 받았다(p. 134, 디오게네투스의 편지 참조).
7. 기독교적 삶의 양식은 우리가 처한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면 왜 기독교 도덕 대신에 기독교적 삶의 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가? 도덕은 항상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가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삶의 양식은 항상 공통적이고 집단적인 기획이다.
비록 금주가 좋은 관습이지만, 우리는 그 규칙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되면, 기독교적 자유가 훼손된다. 강요된 기독교 도덕은 항상 율법주의와 손잡고 있다. 우리는 그런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 기독교 도덕 안에서 아주 큰 다양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해서 우리는 하나의 단일한 기독교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기독교적 형식(관습, 도덕)은 다양할 수 있지만, 기독교적 삶의 양식은 동일하다.
기독교 윤리 입문 4. 사랑과 양심
(다우마 139-190)
1. 계명에 요청된 통일성은 사랑 안에서 성취된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떤 계명도 실제로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주제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어거스틴은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조셉 플레처는 어거스틴의 원문을 "바램을 가지고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려 사랑하라 그 다음에 당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화된 형태의 상황윤리에서는 오직 사랑만이 유일한 필수적 규범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상황윤리를 전적으로 상황을 기초로 해서 우리의 도덕적 행위를 분류하는 윤리 체계로 이해한다. 상황 윤리는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은 제약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이며, 항상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한다.
플레처는 오직 하나의 내재적인 가치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내재적인 가치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규범은 필레처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연 혹은 성경으로부터 얻어야 한다고 느끼는 어떤 법칙이나 규범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들이 외재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사랑을 제외하고 그 어떤 것도 내재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상황에 따라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 상황 윤리-사랑 만이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기능한다는 주장에 대한 세 가지 반론
첫째로, 인간 사회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만이 유일한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들이 선하고 그들의 행위가 사랑의 동기로 행해졌다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교통 규칙과 상거래의 규칙이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둘째로, 우리가 새롭게 대면하는 상황이 각각 예외적이기에, 새로운 유형의 행동마다 새로운 분석이 필요하다는 말은 얼핏 보면 그럴듯하지만 사실 옳지 않다. 우리가 상황윤리를 받아들여 그것이 제시하는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간다면, 법정이 존재할 수 없다. 세 번째로, 비록 사랑이 위대한 계명이고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하더라도(고전 13:1-13), 그것이 사랑과 다른 계명들과 별개인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다른 계명들 또는 덕목들과 함께 나열되고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랑은 계명과 상치되지 않는다. "사랑은 율법을 성취하지만, 율법을 대치할 수는 없다"(Schrage)
만약 사랑이 유일한 계명이 아니고 또한 사랑이 다른 계명들과 동떨어진 채 제 역할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 어떤 다른 계명들도 사랑과 동떨어진 채 올바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롬13:10). 이 말은 확실히 사랑이 없이는 진정한 순종도, 온전한 순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 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율법주의, 명목주의, 형식주의에 빠진다.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정하려면 지도와 나침반이 필요하다. 지도를 계명에 비유한다면, 사랑은 나침반과 같다. 다른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사랑과 율법은 누룩과 반죽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다. 좋은 빵을 얻기 위해서는 누룩이 반죽에 퍼져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말한 사랑의 의미, 즉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라는 것을 인식한다(고전 13:5). 악은 악으로 남는다. 그러나 사랑의 계명은 어떤 다른 계명도 할 수 없는 그러한 것, 즉 악을 덮어주고 비난하지 않는 것 까지도 할 수 있게 한다.
3. 황금률-마 7:12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우연하게도 황금률은 "율법과 선지자"와의 연결만 제외하고는 고대 인도, 중국, 그리스에서도 알져져 있었다. 그것 자체만 취급하면 황금율은 다양한 방식으로 오용될 수 있다. 우리는 황금률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가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가를 상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어떤 자비도 베풀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이것 때문에 칸트는 황금률을 폐기해 버렸다. 우리는 황금률을 '남들이 당신에게 해주기를 원하는 것을 남들에게 해주면, 그들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 줄 것이다'라는 의미로, 공리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가치론적(axiologically) 해석함으로 좀 더 친근한 방법으로 황금률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남을 부당하게 대할 때 보다, 남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대할 때 더욱 현저하게 악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로 자기 자신의 행위를 평가할 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4. 자기 사랑(self-love)-마 22:37-40의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은 자기 사랑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 생활 양식을 서술한 것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황금률에서도 구현되어 있다. 황금률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네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의 삶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계명은 자기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요 12:25)!
어거스틴, 클레르보의 버나드, 토마스 아퀴나스, 그 외 다른 탁월한 신앙의 인물들이 실제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를 다루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옹호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 사랑은 성경에서 명령하고 있지는 않지만 동시에 금하고 있지도 않다. 바울은 누구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보양하고 가꾸라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이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존감이나 자기 사랑을 거절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과 이웃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세 번째 사랑의 명령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사람은 타고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필요없이도 우리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5. 교부 제롬(c. 347-419)은 자신의 에스겔서 주석에서 에스겔 1장에 등장하는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 라는 네 가지의 살아있는 생물에 관하여 쓴 바 있다. 제롬은 이러한 네가지 생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인간학, 즉 인간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을 정립한다. 인간, 사자, 황소는 각각 인간의 지성, 의지, 욕망을 가리킨다. 반면 그것들 위에 맴도는 독수리는 지성, 의지, 욕망을 교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조명을 받는 양심이다. "synteresis"라는 단어는 "보존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 synterein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synteresis는 인간의 삶에서 신적인 명령을 보존하는 자 혹은 보호자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그런 고상한 능력을 구비했음에도 여전히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했을까? 그 결함은 synteresis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에 synteresis를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양심의 '알멩이'는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synteresis이다. 그러나 '적용'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conscientia이다. 중세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인간의 synteresis를 오류를 범할 수 없는 양심의 핵으로 계속 믿었다.
6. "양심"이란 사람 안에 있는 권위인데, 그 권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내린 과거나 미래의 결정 앞에 서게 하고, 또한 그러한 결정들을 용인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를 평결한다. 구약에는 "양심"이란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양심의 기능이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우리가 "양심"이라 부르는 것을 구약에서는 "마음"이라 부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우리는 양심에 해당되는 단어인 suneidesis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도 여전히 양심은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주 다양하게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양심으로 나의 잘못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를 의롭게 하지는 못한다. 양심은 상대적인 것이고, 항상 하나님의 평가에 복종하는 것이다. 신약이 연약한 양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 변할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확언해 준다. 확실히 우리는 양심을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성한 능력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양심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성전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suneidesis"와 "conscentia"의 문자적 의미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지식"(knowing with God)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종종 우리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심지어 존 칼빈 마저도 양심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확실한 매개체"라 부른다(『기독교 강요』 3.19.15). 그러나 "함께 하는"(with)이라는 단어는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지식"(knowing with oneself)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의식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이해이다.
7. 그렇다면 우리는 '깨끗한 양심' 혹은 '떳떳하지 못한 양심'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인간의 양심을 성경말씀과 긴밀하게 연결시킬 때에만 그렇다. 깨끗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해서 깨끗한 양심이다. 바울에게 있어 선한 양심은 신실 한 믿음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간다(딤전 1:5; 1:19과 3:9도 참조). 우리는 단지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양심' 때문에"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롬 13:5). 이 말은 곧 우리가 정부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깨끗한 양심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함께 간다. 이 모든 것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결코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양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어야 한다.
8. 종종 양심에 호소하는 것으로 인해 심각한 결과들이 나온다. 정부가 병역 의무를 위해 사람들을 징집할 때 군복무를 반대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 가운데에는 양심적으로 군복무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확신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있어왔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때문에 그들은 군에 들어가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인간을 향해 무기를 잡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동일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공정하게 양심적인 반대가 일관적이 되도록 기대해야 한다. 오늘 거절한 것을 내일 허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깨끗한 양심을 불완전한 기억력 탓으로 돌린다!
9. 우리는 성경의 큰 틀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활용하여 결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예가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이다. 아디아포라(adiaphora)란 사람들이 선하다고 할 수도, 악하다고 할 수 없는 사물이나 행동을 말한다. 아디아포라는 "도덕적으로 중립"을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되며, 선과 악 사이에, 절대적인 명령과 절대적인 금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아디아포라는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이다. 그 영역 안에서 거기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어떤 행동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디아포라가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입장은 이렇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일도 별 의식없이 일상적으로 행한다. 만약 삶의 매순간마다 모든 부분에서 일일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면, 사는 것 자체가 너무 곤욕스럽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우리가 일단 아디아포라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렇게 내디딘 첫걸음이 미끄러운 경사면에 발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결국은 점점 미끄러져 밑으로 굴러 떨어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결정들을 개인적인 선호에 일임함으로 결국 전체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은 뒷전으로 밀려 버린다는 것이다. 그들은 만약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순간은 한 시라도 한순간이라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경건주의자들에게는 "일상적인 것"은 없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맛을 내어야 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은총이란 자연을 치유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연을 뒤엎은 것이고 흡수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온종일 의식적으로 하나님만 묵상하고 동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이 삶을 속박했을 때, 그들은 '...로 부터의 자유'로 알려진 그리스도의 자유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영역이고 어떤 중립적인 영역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이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거부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들의 유일한 문제는 그 자유가 담고 있는 내용을 잘못 지적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여받은 성숙함을 가지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하는 아주 폭넓은 영역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그 용어를 사용함으로 옹호하려 했던 그리스도인의 자유마저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리에 있게 하며, 모든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기독교 윤리 입문 5. 경우론
(다우마 191-226)
1. '의무들 간의 충돌'(collisio officiorum)-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은 한 가지 이상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한 가지는 행하지만 다른 한 가지는 무시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우리는 이웃의 생명을 보호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약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지 않다. '절대적인 계명'이란 다른 계명에 상관없이 각각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계명이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과 세 번째 계명이 바로 그런 계명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라는 명령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 의무의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서로 상충하는 의무들 앞에 세웠다고 느끼게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인해 생겨난다. 이웃을 구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봉사의 거짓말'(mendacium officiosum)이라고 부른다. 즉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짓말이라는 의미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거짓말이 이웃이나 우리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9계명은 우리가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의도되지 않았다. 긴급상황에서 거짓말을 한 예는 성경에서도 등장한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알려줌으로 우리가 이웃의 생명을 구할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정확한 정보를 알려줌으로 이웃에게 심각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형식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진실만을 진술하는 것으로 제 9계명과 조화를 이룰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진실"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을 말함으로 어느 누군가가 파멸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3.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명확하게 이해할 때에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항상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부족한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충(compromise)이란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해서 누군가가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조금 덜 만족스러운 것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한 절충을 피할 수 없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해서 우리가 추구해야만 하는 수준보다 '덜 만족스러운 것'을 수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관용하고 추구해야할 수용가능한 절충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첫째, 상충하는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이 있어야 한다. 절충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라고 다 윤리적인 차원과 윤리적인 의미의 절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대의 승용차는 속도와 안락함의 요구 사이에 적절하게 절충을 하고 있다. 진정한 윤리적 갈등은 단순한 견해에 관한 것이 아니라 비중 있는 신념에 관한 것이다. 둘째, 필연성의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진정한 절충은 회피할 다른 길이 없을 때에 이루어진다. 절충을 거부함으로 당하는 손해가 절충을 받아들임으로 생기는 것보다 더 커야 한다. 하나님이 이혼 증서를 주라는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들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죄를 짓도록 하기 위함도, 죄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함도 아니라, 악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올바른 절충에는 인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 오래 참으시며 따라서 우리의 태도 역시 그분의 태도를 반영해야 한다. 절충없는 극단주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사랑으로 오래 참으며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망각시킨다(고전 13:4). 넷째, 개인적인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절충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윤리적 절충은 불행이다. 그러나 절충은 결코 명확한 해법이 아니다. 절충을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최대한의 것에 도달할 수 없지만, 최소한의 것에 만족해서도 안된다.
4. 절충에도 넘어서서는 안되는 경계가 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분명한 신앙고백에 손상을 주는 그런 절충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어쩌면 하나님보다 사람에게 순종함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아무리 가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해가 되는 것과 죄를 짓는 것에는 차이가 잇다.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절충은 해로운 것을 포함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해서 조금 덜 만족스러운 결정을 해야 한다. 거기에 해로운 것이 포함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임무를 주시는 한,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조금 덜 만족스러운 것을 수용해야 하는 요셉과 다니엘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5. 우리는 여러 상황 가운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직접적으로 지시해주는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성경에 직접적인 대답이 없는 여러 가지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운다. 종종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기 좋아한다. 어쩌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관하여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우론'(casuitry, 決疑論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은 일반적인 법칙을 특수한 경우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종종 '양심의 경우'(casus conscientiae)에 대해서 말한다. '양심의 경우'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없는 다양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다.
6. 상황윤리에서는 경우론이 들어 설 자리가 아예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어떤 일반적인 규칙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황 윤리에서는 부정한다. 사랑하면서 행동한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 상황 윤리에서는 계명이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들이 보기에 각각의 상황이 독특하기 때문에 다양한 여러 경우들 가운데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7. 상황 윤리를 지지하지 않는 윤리학자들 가운데서도 경우론에 회의적인 학자들이 많다. 과거의 경우론은 전적으로 명령과 금지로만 엮어져 있었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개인의 자유와 책임을 위한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이점은 613개의 명령과 금지들을 가졌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613개의 숫자는 십계명에 사용된 히브리어 문자의 개수에 대응된다). 로마 카톨릭의 도덕 신학자들이 주장한 경우론은 교회의 신앙고백 지침서에 부분적으로 포함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죄를 가장 큰 것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서열을 매기고, 분석하고, 평가한다. 17-18세기에 로마 카톨릭의 도덕신학은 경우론에서 개연론의 문제 주변을 맴돌았다. 개연론은 그 당시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경쟁하던 많은 도덕 체계 중 하나였다. 모든 도덕 체계가 법과 자유 사이의 갈등이라는 문제를 풀기 원했다. 율법의 분명한 요구가 없을 때, 어디까지 자신이 가진 행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 네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① 교본론(tutorianism)
② 비교개연론(probabiliorism)
③ 개연론(probabilism)
④ 방종론(laxism)
여러 가지 형태로 확장되어 발전된 경우론에 대해 수 많은 반발이 생겼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경우론을 반대한 유명한 사람 중에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 있다. 경우론은 교훈 위의 교훈이나 규칙 위의 규칙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순종을 아주 세밀하게 분류하는 폐쇄된 체계로 전락할 수 있다.
8. 분명히 바리새인이나 로마 카톨릭 교회와는 다른 방식으로 경우론이 실현될 수 있다. 경우론은 강제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산산조각 내어 버리며 항상 윤리적 원자론으로 결말이 나는가? 더욱이 경우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확하게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일종의 전문가에게만 의존하게 하지 않는가? 이러한 반대 의견들은 충분히 고려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 대해 다우머는 세 가지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특수화시키는 것과 산산조각을 내는 것은 다르다. 건전한 형태의 경우론에서는 특수화된 조항이 개인적인 상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세부적인 것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둘째로, 비록 경우론이 율법주의로 갈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큰 공헌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셋째로, 우리가 처한 삶의 상황이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독특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우리 모두가 비슷한 삶의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다우머는 경우론이라는 말이 좋지 않은 어감을 가지고 있다며 "도덕적 조언"(moral counsel)이라는 말을 제안한다. 도덕적 조언을 통해 우리는 이웃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삶이 발전되도록 기여할 수 있다.
우리는 마치 "경우"가 윤리를 비인격적인 것으로 만들고 "상황"이 우리의 삶의 독특성을 실제로 보여준다는 식으로, "상황"에 비해 "경우"를 평가절하 시켜서는 안된다. 수 많은 상황들은 일상적이다. 비록 그 상황이 독특하다고 하더라도, 오직 한 사람이 그 상황에 연관되어 있을만큼 항상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다. 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래서 이것이 결국 일반적인 조언이 가능한 경우들이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경우를 일반화한다고 해서 각 사람의 삶에서 나타나는 특별한 것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삶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동일한 하나님의 계명 아래 함께 서 있고, 우리가 처한 여러 특별한 상황에서 동일한 결정들 앞에 우리가 서 있게 되었다는 또 다른 사실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
기독교 윤리 입문 6. 영성
(다우마 227-234)
1. 윤리학은 기도, 성경공부, 묵상, 교회 생활, 공예배와 같은 경험들처럼,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주제들은 기독교 윤리에서 광범위하게 다루는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주제들은 기독교 윤리를 위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영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우리가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성찰하는 것이다.
윤리와 영성의 관계는 두 개의 돌판을 가진 십계명을 생각할 때 너무나 분명해진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며 두 번째 돌판은 이웃과의 관계를 다룬다. 만약 우리가 첫 번째 돌판을 무시한 채 두 번째 돌판을 다룬다면 기독교 윤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덕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데 덕이란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보다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물음과 더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존재'의 원천으로부터 우리의 행위가 공급된다. 그러므로 영성(삼위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행위와 윤리적 반성을 위해 영양분을 공급해준다.
2. 20세기 초반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여전히 경우론과 수련, 이 두 가지 주제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련이라는 주제는 우리의 관심에서 아예 사라졌다. 다우마는 윤리학의 분야에서 기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수련"(ascetics)이라는 용어는 "자신을 훈련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동사 askein과 연관되어 있다. 수련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금욕이 재빨리 연상될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명사 askesis의 일차적인 의미는 "연습" 혹은 "훈련"을 뜻한다. 따라서 수련은 금욕의 의미인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연습의 의미에 가까운 긍정적인 것이다.
수련이라는 신학과목이 폐지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작용하였다. 첫째로, 경건의 훈련이 사람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삶을 부정적으로 보는 방식으로 강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쉽게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요구한 것을 행하는데 만족하는 사람과 요구된 것을 더 넘어서서 행하는 사람을 접할 수 있다. 계명은 각 사람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지적하지만, 조언은 더 거룩한 삶을 위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적"이라는 말은 "자연적"이라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받게 되었다. 때때로 수련이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기도 했는데, 그러나 이런 식의 수련이 결코 개혁파 계통에서 번창할 수 없었던 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신비주의는 경건 훈련을 영적인 곡예로 바꾸었다. 둘째로, 우리는 수련에서도 경우론과 비슷한 발전을 볼 수 있다. 즉, 모든 것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도식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어떤 여지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의 영역에서도 자유의 공간이 필요하다. 셋째로, 우리들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너무 바빠서, 우리가 하는 활동으로부터 스스로를 떼어 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정말 어렵다.
3. 수련이 가지는 부정적인 인상은 우리가 수련이라 부르지 않고 영성이라고 부를 때 사라진다. 모든 위대한 종교는 영성과 수련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이란 용어는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성찰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다우마는 영성을 사도신경과 연관지어 논하고 있다. 사도신경에는 삼위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간단하게 요약되어 있다. 기독교 윤리는 이러한 영적인 맥락과 상관 없이 별개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바르트(1886-1968)는 『교회 교의학』에서 교의학과 윤리학을 서로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그는 교의학과 윤리학을 분리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 책에서 그는 먼저 교의적 측면을 다루고, 나중에 윤리적 측면을 다루었다. 구제적인 윤리적 주제들을 다루면서 그는 주일 성수,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신앙고백, 기도 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조망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윤리학은 답답하고 편협한 정신을 피하는 진지한 노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윤리학이 선한 영성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는 한에서 그러하다. 선한 영성은 기도를 하든지 성경공부를 하든지 일요일이든지 집에 있든지,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경건의 훈련으로 가야만 한다. 영성은 장식이 아니라 책임있는 행위(responsible conduct)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 윤리 입문 7. 성경 윤리학
(그렌츠 114-154)
구약 성경 윤리
참으로 성경의 주된 목표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윤리적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기독교 윤리학의 토대가 된다. 최근 몇 년간 다양한 입장의 학자들은 성경이 어쨋든 간에 이야기(narrative)라는 점을 진술했다. 이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 있는 하나의 이야기(story)를 말한다. 성경에 나타난 법규에 보편적인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그 이야기(story)에서 법규들을 추출해 내는 대신, 이 사상가들은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은 그 이야기(narrative) 속에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성경 이야기(story)라는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기독교 윤리학자들은 성경 이야기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확신한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경우 성경적 관점에서 본 윤리란 신앙공동체에 부과된 삶의 방식에 대한 것으로서,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관한 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 성경 윤리'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월터 카이저가 말했듯이 "구약에는 '윤리'라는 현대적 용어에 해당하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구약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히브리 성경에 산재되어 있는 영속적인 행동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고대 히브리적 이해를 형성한 구약 성경의 이야기의 핵심주제를 요약하는 것이다.
히브리 성경 기자가 소위 윤리적 삶에 관해 말하는 모든 내용의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언약이라는 주제다. 언약 사상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언약은 물론 일방 통행적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신적 은혜의 수혜자로서 언약의 파트너가 된 이스라엘에게도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러한 자각과 깨달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의 윤리는 옛 언약이 규정하고 승인한 삶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카이저 박사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룩한 삶은 가정 생활과 상거래를 포함한, 인간관계의 모든 차원에까지 적용되었다. 그리고 거룩함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요구했고, 원수 갚음의 한계를 매겼으며(신 25:3), 심지어 동물에 대한 적절한 보호까지도 요구했다(신 22:1-4).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상대자가 되는 것은 성전 예배와 일상적인 삶의 분립을 불허했다. '흠 없고 의로운 삶'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표현되어야 했다. 거룩함은 외부에서 부과된 그 자체가 목적인 법 조항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보다는 선물로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내포된 책임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라 철학자들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은 도덕적 삶을 우리 인간의 도덕적 능력이나 탁월성과 관련하여 논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거부했다. 그 대신 히브리인들은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선에 대한 이해를 이끌어냈다.
참된 목표는 언약을 맺어 주신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적 파트너가 되는 것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언약이 하나님(예를 들어, 십계명의 처음 네 계명)과 이웃(나머지 여섯 계명)에 대한 책임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 낼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
고대 하나님의 백성은 월터 카이저의 용어대로 '집합적 연대성'이라는 특징을 지녔다. "도덕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총체성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도덕적 건전성으로부터 따로 떼어 낼 수 없다"(Thomas Ogletree). 구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집단의 구성원일뿐만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은 개인적으로 져야 한다. 개인의 책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반역한 민족 안에 존재하는 의로운 남은 자라는 개념을 낳았다. 남은 자 개념은 무죄한 자의 자발적 고난이 민족을 개심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낳게 하였고, 화이트는 그것을 '구약 윤리의 정점'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삼고 행하신 사역이야말로 구약 성경 윤리의 기초가 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과거에 끝난 것이 아니다. 고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미래 지향적 관점을 발전시켜 왔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영광스런 일을 다시 행하시리라고 기대했다. 메시야의 오심에 초점을 둔 이 대망이 윤리학에 종말론적 시각을 제공했다. 종말론적 시각은 선지자들의 거듭되는 외침 속에 분명히 드러나는데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미래에 하실 일에 대한 약속에 기초해서 현재를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종말론적 대망이 커 가면서, 하나님이 의로운 자에게 주시는 복과 악한 자에게 내리시는 심판이 이생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신약 성경 윤리
종말론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약성경의 윤리는 희망찬 말로 끝을 맺는다.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써 이 기대에 응답하셨다고 선포했다.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과 승천 기사는 성경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동시에 이 기사는 성경 윤리의 핵심을 이룬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의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사는 삶의 의미에 대해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르게 이해하시고 행동하셨던 예수님의 사역과 행동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예수님과 그분의 적들은 언약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위해 히브리 성경이 제시해 놓은 율법의 근본적인 중요성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히브리 성경이 함축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의 본성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의의 성격,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율법 자체의 적합한 해석에 관한 청중의 생각을 고쳐 주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공로에 따라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된다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대적자들과 충돌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이해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마음에 대해 강조하고 가르치신 것은 악의 원천이 인간의 인격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선포가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막1:14). "예수님의 모든 윤리적 가르침은 단지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I. H. Marshall). 그분의 가르침은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 하에 살게 될 때에 필연적으로 행해야 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예수님은 왕의 뜻을 이중적인 사랑의 명령으로 요약했다. 하나님 나라의 중심적인 윤리 원칙은 전심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외 그렌츠는 예수님의 윤리를 하나님의 가족을 위한 윤리, 본받음의 윤리 등으로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이 신선하고 고갈되지 않는 새로운 도덕적 영감의 샘으로서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와 경험이라는 깊은 지하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면, 사도들의 윤리는 그 새로운 물줄기가 넓은 들로 흘러가는 수로에 해당된다" (화이트). 그렌츠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소위 윤리 혹은 도덕적 삶-에 대한 바울의 이해의 기독론적 초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구원: 도덕적 삶의 기초.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강력한 행동은 근본적으로 구원론적이었다. 구원은 바울의 사상 속에서 위대한 '직설법'(Indicative)을 형성한다. 이 위대한 직설법은 그것과 불가분의 연결상태에 있는 '명령법'(Imperative)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스도를 닮음: 도덕적 삶의 목적. 바울에게 도덕적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예를 들어 롬 15:7; 고후 10:1; 엡 5:25) 혹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하나님을 본받는 것(엡 4:32-5:2)이다.
영적 전투: 도덕적 삶의 맥락. 기독교적 삶은 영적 갈등과 전투를 수반한다. 이 전투는 '육체'에 대한 '성령'의 싸움이다. '육체'라 함은 인간이 연약하여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며 쉽사리 죄에 사로잡히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악에게 쉽게 주도권을 내어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인간의 성향을 가리킨다.
사랑: 도덕적 삶의 방식. 율법은 경계선이 어디인지에 대해 알려 줄 수 있지만, 이 경계선을 넘는 것을 막는데는 무용지물이다. 바울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성령만이 생명을 주신다고 단호히 선언했다(롬8:1-4).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생명은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바울은 이웃 사랑이 윤리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되풀이했다. 구약과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을 좇아 바울은 사랑이 하나님을 특징짓기 때문에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더욱이 바울은 신앙공동체가 신자로서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맥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이 윤리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또한 사랑의 송가에서 다른 모든 기독교적 실재는 언젠가는 사라질 테지만, 사랑만은 새 시대까지 존속되기에 사랑을 강조한다.
자기 수련: 도덕적 삶에 이르는 수단. 바울은 율법이 도덕적 삶을 창출한다는 주장에 반대하면서도, '율법'을 결여한 삶을 옹호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윤리적 삶은 근면함과 자기 수련을 포함한다.
성령: 도덕적 삶의 수행자.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기독교 윤리를 성취할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성령은 직설법과 명령법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성령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방법'까지 안내해 주는 인도자시다. 사실 바울의 성령론은 그의 기독론의 급진적인 확장이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윤리는 지극히 신학적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구원론적이다. 그 결과 지극히 기독론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지극히 성령론적이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윤리를, 그와 동시에 신약 전체의 윤리를,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진정한 자신이 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 입문 8. 구약의 윤리 1
(라이트 9-124)
1. 구약을 윤리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길은 외견상 적절하게 보이는 것이면 무엇에나 몰두하고 그것을 붙잡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이스라엘의 입장에 놓아보고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체험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공동체로서의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신학과 윤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리고 왜 그들이 그런 식으로 살았는가를 설명하려면 어떻게 그리고 왜 그들이 믿은 바를 믿었는가를 반드시 살펴보아야만 한다. 구약 윤리는 하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물리적 환경-곧 그들의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에 기초하여 세워져 있다. 이것들은 신학과 윤리의 세 가지 주요한 요소들이다. 곧 각각 다른 두 가지 요소에 영향을 끼치는 삼각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땅이라는 세 요소이다.
2. 신학적 각도-구약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신학적이다. 즉 그것은 모든 점에서 하나님-그 분의 성품, 그 분의 뜻, 그 분의 행동, 그 분의 목적-과 관계되어 있다. 이것을 라이트는 네 가지 방법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구약 윤리는 그 기원과 역사와 내용과 동기 면에서 하나님 중심적이다.
2.1. 하나님 중심의 기원-하나님은 먼저 행동하시고 사람들이 그에 반응하도록 요청하신다. 이것은 구약의 도덕적 교훈의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구속 행위에서 주도권을 쥐시고는, 그 다음에 그에 비추어 그 분의 도덕적 요구를 하신다. 그렇다면 윤리는 단지 맹종의 문제가 아니라 반응과 감사의 문제가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하도록 된 것 이었다. 십계명 자체도 첫 번째 계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서문이 붙어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2). 이스라엘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율법을 잘 준수하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에 신실하고 충성된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2.2. 하나님 중심의 역사-구약 윤리에는 역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이 갖고 있는 생명력에 어울리게 생생한 적실성을 갖고 있다. 그러한 생명력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역사에 입각해 있으며, 또 유지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나님께서 사건들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이러한 확신이 그들을 숙명론으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그것이 인간의 윤리적 자유와 책임을 제해 버린다고 하는 기계론적인 견해를 갖고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의 윤리적 자유와 책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또한 모든 것이 절대적이거나 선행되는 원리 없이 즉각적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 처럼 생각하는 상대주의로 이끌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 감각에 있어 가장 심오한 윤리적 중요성을 지닌 두 가지 차원은 구속적인 차원과 종말론적인 차원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믿음에 있어 이 두 극점의 결합으로 인해 현재는 윤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과 그 분이 미래에 하실 일 때문에 중요하다.
2.3. 하나님 중심의 내용-이스라엘의 순종은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하는가? 그들의 윤리적 행동의 내용과 특징은 무엇이어야 했는가? 이 점에서도 역시 그 대답은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곧 바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일종의 윤리적 '복사부'(copy-book)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신이 종들과 사회 내의 다른 약자들을 대할 때 하나님의 그와 같은 정의와 자비가 반영되어야만 한다.
2.4. 하나님 중심의 동기-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체험은 일관된 윤리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동인으로 변화된다. 구약 윤리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것에 의해 동기가 유발된다.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로 이는 우리에게 첫 번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왜냐하면 '다른 신'은 다른 윤리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뿐만 아니라 더 적절하게는 두 번째 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적인데 반해 그것이 물질적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반해 그것들이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며 말씀하시는 분이신데 반해 그것들은 생명이 없고 무력하며, (특별히)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허용된' 단 하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이 고안하고 창조하신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자신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견해는 또한 윤리의 중심 토대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직 살아계신 역사의 하나님만이 그의 백성의 도덕적 삶을 창시하시고, 형성하시며, 그 동기를 부여하실 수 있다.
둘째로 그것은 우리에게 윤리적 교훈을 구약 전체로부터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율법이 항상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치 않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율법들이 작용하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그 국가의 삶에 구현되었는가를 알기 위해 후기 설화들, 선지서, 시편, 지혜 문학들 등이 필요하다.
3. 사회적 각도-구약은 단지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도덕적 교훈 일람표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약이 개인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고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십계명을 포함한 많은 구약의 율법들이 개인을 지칭하며 2인칭 단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공동체의 일부로서의 개인에게 보내어지는 것이며, 그 목적은 단지 개인의 정결만이 아니라 그 전체 공동체의 도덕적 영적 건강이다. '사회적 각도'의 적실성은 우리가 구약 본문을 윤리적으로 해석하려 할 때 '이것이 내게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구약 이스라엘 자체의 사회적 배경 내에서 연구해야만 한다.
라이트는 '파라다임'을 구약 자체를 윤리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한 유용한 개념으로 간주하고 있다. 파라다임이란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기본 원리는 변치 않는 여러 경우들에 대한 기준 또는 보기로서 사용되는 어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의 사회적 생활, 제도, 율법을 보는 것은 두 가지 상반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을 문자적으로 모방한다는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 이스라엘의 사회제도를 역사적 이스라엘이라는 경계 내에서만 적절한 것으로, 따라서 기독 교회에도 나머지 인류에게도 적용할 수 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이 파라다임적 접근이야말로 구약을 기독교 사회 윤리의 자원으로서 가장 효과적으로 열어주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4. 경제적 각도-구약이 말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되는 대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집어낸 구절들이거나, 어떤 한 시각과 이러저러한 조직신학의 전문적 용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모세 오경의 위대한 역사로부터 여호수아와 사사기를 거쳐 다윗 왕국에서 땅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체에 걸친 주제는 땅에 대한 약속과 소유라는 것이 한눈에 매우 분명해 진다. 땅은 모든 차원에서-약속, 정복, 공유함, 이용과 악용, 잃어버림과 되찾음-근본적으로 신학적 실재(theological entity)이다. 구약 윤리는 구약 신학에 불가분리하게 의존하고 있으므로, 땅과 같이 구약의 신학에 매우 중요한 것은 분명 그 윤리에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셨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종속에 대한 선언이었다. 둘째로 땅을 선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선포이다. 셋째로 위의 두 가지 점이 결합해서 땅을 선물로 받은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에 대한 증거의 역할을 한다. 넷째로 이스라엘 내에서 사유재산권을 생겨나게 한 것은 땅을 선물로 받는 전통이었다. 다섯째로, 나봇 사건의 결과 선지자들이 경제적 착취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해 준다.
그것은 철저히 영적인 문제였다. 어떤 가족의 경제적 생존 능력을 위협하거나 그들을 그들 몫으로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는 토지로부터 몰아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가족이 언약 백성이라는 확실한 보증에 대한 위협이었다. 어떤 사람이 땅을 잃는 것은 경제적 재난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관계 자체에 타격을 가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땅을 선물로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최종적인 소유권을 보유하고 계시며,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가에 대한 도덕적 권위에 있어 최종적 권리도 보유하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땅의 소유자의 역할을 맡으셨고, 이스라엘은 그 분께 의존하는 우거자가 되게 하셨다. 왕마저도 하나님의 땅 안에서는 단지 우거하는 자에 불과하다! 아합은 나봇의 동료 우거인일 뿐이다. 따라서 한편으로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개념이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강력한 일련의 권리들을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한 편으로 땅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권 하에 있다는 개념은 광범위한 책임을 낳는다.
그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한가를 나타내는 척도는, 그들이 종교적인 영역에서뿐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에서도 그 분의 주권적 관점을 어느 정도 만큼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구약에는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경제적 순종이 쉽다는 착각은 나와 있지 않다. 과거의 역사에 나타난 승리의 하나님을 경축하는 것과, 미래의 추수를 거두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땅이라는 기본틀을 가지고 언약적이고 정경적이며, 포괄적인 방법으로 구약 윤리를 연구할 수 있다.
5. 경제와 땅
창조의 관점에서-한편으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며 최종적인 소유자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장하는 경제적 소유권은 2차적인 것이며 그것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소유권에 종속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인간을 그 분의 형상으로 만드신 목적에 암시되어 있는 것 중 일부는, 그가 창조 질서계에 있는 나머지 피조물에 대해서 지배권을 위탁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창 1:26).
1. 자원의 공유-창조 기사는 사유화나 개인 소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땅은 인류 전체에게 위탁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재산권이 비록 합법적일 때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땅의 자원을 쉽게 손에 넣어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권리가 항상 우선한다. 모든 사람이 사용할 권한은 어떤 사람이 소유할 권한 보다 우선한다.
2. 일해야 할 책임-일 자체는 타락의 산물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타락에 의해 분명 영향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것도 역시 인간에게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 일부이다. 왜냐하면 창조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자신이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3. 성장에 대한 기대-교환과 매매는 인간 성장의 모든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경제 활동과 관계는 창조 명령이라는 배경 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도덕적으로 상세히 검토하신다.
4. 소산의 공유-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료 그대로' 주신 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 처럼, 우리가 생산한 것을 갖고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
타락의 본질은 인간이 교만하게 자율성을 바란 것, 창조주의 권위와 자비에 반항한 것이었다. 타락으로 인하여 위의 네 가지 원리들은 부패되고 침해를 받아 인간 자신에게 피해를 끼쳤다. 첫째로, 땅의 자원을 함께 이용하고 책임감 있게 관리하는 대신 땅과 자원이 인간들 간에 가장 커다란 불화와 전쟁의 원인이 되어 왔다. 둘째로, 일이 타락되었다. 일은 탐욕의 노예, 압제의 도구, 하나님을 자신의 야망으로 대신하는 수단이 되며 심지어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우상이 된다. 전도서에는 인간의 일의 역설적 본질에 대해 구약이 제공하는 가장 날카로운 통찰들이 얼마간 담겨 있다(p. 86 참조). 셋째로, 경제적 성장은 병적으로 강박 관념을 일으키게 된다. 넷째로, 경제 과정의 최종 산물 역시 부당하게 조작된다. 개인의 소유권을 주장하게 되고 그런 주장이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그런 주장을 뛰어넘는 의식 곧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 의식은 전혀 없다.
구속의 관점에서-1. 이 세상의 땅과 천연 자원을 함께 공유하고 이용하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땅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가족이 경제적으로 생존해 나갈 만큼 충분히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2. 일의 특권과 책임. 일은 새로운 창조라는 종말론적 환상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땅에 대한 저주가 제시되고 인간의 악함이 폐지된다고 해서 인류가 낙원에서 빈둥거리며 있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지자들은 구속받은 인간을 일하는 인간으로 상상했다.
3. 경제적 성장. 한편으로 물질적 번영과 재산의 증가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언급하는 구절들을, 실제로 모든 형태의 사기업과 자본주의적 성장 지향 경제에 대한 사실상의 전권 위임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나치거나 불의한 재산 축적을 율법적이고 예언자적으로 혐오하는 나머지 모든 형태의 사유 재산이나 재화의 창조까지도 저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견해 모두 잘못된 것이며, 구약의 균형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구약 경제의 지배적인 윤리성(ethos)은 열 번째 계명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탐내지 말지니라." 2인칭 단수를 사용하여 개인에게 주어져 있고, 그 구체적 대상으로 이웃의 경제적 재산들을 포함하고 있는 이 기본적 명령은, 모든 죄에 물든 경제 성장 형태들의 기원은 그것이 진정 발원한 곳-인간 개개인의 마음 속에 있는 탐심-에 있다고 본다. "우상 숭배적인 탐욕"(골 3:5)에 대한 해결책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문맥에서 구약 곳곳에 개인의 부를 증대시키는 것을 막거나 제한하기 위해 고안된 몇몇 명령들을 열거하고 있다(p. 101이하 참조).
4. 우리는 또한 경제적 과정에 의해 생산한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 청지기이다. '내가 그것을 만들었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다'라는 주장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룻의 이야기와 그 배후에 있는 관습을 다루면서 라이트는 그러한 이야기는 구속받은 공동체의 경제 윤리는 단순한 나눔의 영역을 넘어 희생의 영역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물론 구속이 희생을 요구한다는 개념을 잘 알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이 있다. 곧 그것은 우리의 '근족-구속자'(Kinsman-Redeemer)로서 우리를 위해 모든 사리(私利)를 버리신 하나님의 희생이다.
기독교 윤리에서의 땅-라이트는 구약을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파라다임적 해석과 종말론적 해석이다. 여기에다가 신약적 관점에서 본 세 번째 해석 방식, 곧 예표적 방식을 라이트는 추가한다.
1. 파라다임적 해석-이 접근법은 하나님과 자신들의 땅 안에 있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그 분과 이 땅에 있는 인류와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반영한 것,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세상에서 그 분의 창조 목적이 깨어진 데 대한 구속적 반응이라는 믿음에 의거하고 있다. 경제적 영역에 있어서의 구약 파라다임들은 고대 이스라엘의 관습들을 현대 사회에 문자적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에게 목표를 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파라다임적 접근법은 우리가 적용하고자 애쓰고 있는 모델들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 본문 자체와 진지하게 씨름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 종말론적 해석-이 접근법은 신구약에 모두 깊이 기초하고 있는 확신, 곧 이스라엘과 그들의 땅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변혁되고 완전한 새 창조 안에서 모든 민족과 이 땅 전체를 포괄한 것이라는 확신에 의거하고 있다. 구약은 민족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분의 통치하에 평화롭게 살아 갈 것을 고대할 뿐 만 아니라, 또한 자연계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에 의해 변혁될 것을 고대한다. 구약의 소망에는 심각한 '세속성'(earthiness)이 존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세상을 그저 버리지 않고 그것을 구속하실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땅은 그 구속받은 세상의 원형 역할을 했다. 이 세상이 위협과 심판의 세계였던 데 반해 그것은 약속의 땅이다. 거기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아니라(창 3:18),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출 3:8 등). 땅과 같은 구약의 주제들에 대한 종말론적 해석은 현세에 윤리적 추진력을 부여한다.
3. 예표적 해석-유대 팔레스타인이라는 물리적 영토는 신약 어디에서도 어떤 신학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다. 거룩한 장소로서의 땅은 적실성을 상실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는 신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느 장소나 신성하게 만든다. 땅의 거룩함이 그리스도께 전가되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지리적 땅은 하나님의 백성의 궁극적 미래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에서 아무런 위치도 갖고 있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구약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했던 그 땅의 사회-경제적 차원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모두 단지 영적으로 해석되고 잊혀져 버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구약의 특징이며, 동시에 신약의 특징이기도 한, 바로 그 공동 분배와 공동 책임의 영역을 자극한다. 땅에 대한 예표적 해석-땅을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인격 및 사역과 관련시키는-은 예수님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구약 윤리의 사회 경제적 의미를 새 이스라엘인 메시아적 공동체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들에 대한 신약 윤리에까지 연장시킨다.
이 삼중적 해석 구조-예표적, 파라다임적, 종말론적-는 구약 윤리의 잠재력과 권능을 기독교적 관심사의 전 영역-교회에 대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양자의 궁극적 미래에 대한-에 확대시킨다. 라이트는 이 삼중적 해석 방법이라는 프리즘으로 희년과 관련된 안식 규정들을 해석하고 있다(p. 122 이하 참조).
기독교 윤리 입문 9. 구약의 윤리 2
(라이트 125-260)
1. 정치와 열방의 세계
서로 다른 인간 집단들이 평등하고 질서있는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 상호 간의 책임인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책임의 일부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회 정치적 조직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것과 관련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사회적'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을 창조하고자 하는 결정은 갑자기 앞부분과는 대조적으로 복수로 바뀌어 나오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첫 번째 사항은 조화(unity) 속에서 서로 보완되는 이중성인 성별(性別; sexuality)이다.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나머지 사회적 특성인 결혼, 부모됨, 가정, 친족, 그리고 보다 넓은 범위의 외부에 있는 것들이 생겨난다. 물론 창 1:26의 인간 저자는 우리가 전체 성경 계시를 광범위하게 받은 후에 삼위일체의 교리라고 이름 붙인 것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다 더 폭넓은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는 그가 사용한 복수형태에서 저자가 의식하고 있던 의미(a sensus plenior)를 능가하는 보다 깊은 의미가 있음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개인적으로 평등한 조화 속에서, 그러나 기능적인 권위의 구조를 요구하는 사회 조직 내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렇다면 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사회적 관계들과 구조들을 정하는 것은 우리 창조주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심사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정치의 요소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치'와 '종교' 간의 부자연스러운 구분은 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을 규정하지도 않는다. 둘 다 인간의 본질적 차원이다.
그러나 타락은 인간 삶의 모든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도 그 악한 대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창세기 기사는 인간 삶이 구성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부패되는 것을 급속히 보여 준다. 결혼 관계의 근본적 구조가 왜곡된다. 거기서 파생된 모든 관계들도 따라서 질투와 분노, 폭력과 복수의 소용돌이에 의해 천박해지며(창 4장), 마침내 전체 인류가 악하고 사악한 특징을 지니게 된다(창6:5). 국가적 영역에 미친 타락의 영향은 바벨탑 이야기로 요약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소외와 상호 이질적이라는 느낌-온 지면에 흩어진 것으로 요약되는-의 배후 뿐만 아니라, 언어의 혼잡으로 요약되는 인간 간의 분열, 장벽, 오해의 배후에도 이중적인 원인이 있음을 보게 된다.
창세기의 처음 몇 장들은 이처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국제 관계의 영역에서부터 요단 계곡에 있는 조그만 왕국들의 국부적 정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정치 생활에 열렬한 관심을 갖고 계시며, 때로는 직접 관여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제시해 준다. 구약에는 국가의 제도와 '권화'(權化; personification), 정치 권력의 압도적인 힘, 서로 다른 사회 제도들의 독특한 '특성' 배후에 놓여 있는 영적이고 비가시적인 '인격적'(私的; personal) 세계가 있음을 알고 있다는 암시가 나와 있다.
라이트는 '백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선택된 인종'이라는 구절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제안한다. 구약에 나오는 선택의 개념은 단지 하나님께서 독단적으로 여럿 중에서 한 국가나 인종을 뽑아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분은 여러 국가들 가운데 살면서 자신의 목적을 수행할 사람들의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이스라엘은 인종적 의미에서 특별히 '순종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구약은 순수한 한 인종을 선택했다는 이론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나머지 인류를 희생시켜 가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속되고 하나의 국가로 형성되도록 만든 사건들은, 그 사건들이 예시한 그리스도의 죽음 및 교회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국제 정치의 무대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국제 정치에서 이끌어낸 용어와 형태-즉, 언약-를 사용해서 자기 백성과 그 분의 관계를 확립하셨다. 여호와께서 전체 국가 위에 무한한 주권을 가지심을 인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국가 내에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적 권위 구조들이 지니는 상대적 중요성을 크게 감소시켰다. 하나님께 그 분이 마땅히 차지하셔야할 권위 있는 위치를 부여하면, 모든 인간적 권위는 그들에게 적절한 종속적 위치로 축소된다. 구속의 목표는 자유이다. 이스라엘 경우에, 그것은 애굽의 사회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제사장 나라', '열방의 빛'이 되기 위한 자유였다.
군주제의 커다란 역설은 비록 그것이 인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고, 배교와 부패로 향하는 경향에 의해 그 개념 자체가 오염되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취하셔서 그의 구속적 목적의 핵심에 바로 집어 넣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함'이 무엇을 의미하건 간에 거기에는 나머지 세상 사람들과 분리되어 속세를 초월한 채 살아가는 것은 포함되지 않았다. 국가들을 위해 국가들 중에서 선택된 그 국가는 자신의 역사 전체에 걸쳐 주변에 있는 국제 정세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 그에 깊이 관여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활동 범위는 아주 초창기부터 국제적인 것이었다. 라이트는 그 실례로 아모스를 들고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국가들에 대한 놀랄만큼 포괄적인 일련의 신탁의 말씀들로 시작하고 있는데(암1:1-2:5), 이는 유대 농부인 아모스가 주변 국가들에 대한 견문이 얼마나 넓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 국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보편적인 인간적 타당성이라는 도덕적 기준에 기초해서 비난을 받는다. 그 국가들은 단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범한 사악한 행동으로 인해서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행한 악들로 인해 심판을 받는다.
구약에는 단 하나의 '국가에 대한 교리'는 없으며, 계속해서 변하는 인간적 제도에 대한 다양한 반응들이 있을 뿐이다. 외적 정치 권력은 존중해야 하며, 합법적으로 섬길 수 있다. 하지만 요셉과 다니엘은 타협이 불가능한 한계들이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자신을 그런 존재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그런 인간적 권세에 정치적으로 봉직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구약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에 포함되리라는 궁극적 환상을 갖고 있다. 종말에 모두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곧 다양한 국가의 정체성을 없애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미래의 통치가 지니는 영광은 모든 백성의 풍부한 다양성을 도입함으로 절정에 이를 것이다.
2. 의와 정의
이스라엘의 세세한 율법들의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관한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윤리적 진리가 놓여 있다-그것은 곧 그의 정의이다. 구약의 사상에서 의와 정의는 추상적 개념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고도로 개인적이고 관계적인 용어들이다. 라이트는 하나님께서 일반 섭리에서 그의 의와 정의를 시행하는 것과, 구속에서 그것을 시행하시는 것 간에 개념적 구분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적 통치는 그 분이 자신을 능가하고 자신의 위에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정의의 법칙들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일하고 계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그 분이시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다른 식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특별히 연약한 자와 억눌린 자를 위해서 그의 정의를 베푸신다는 사실은, 그가 피조물 전체를 섭리적으로 돌보신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나라들이 있는 세상에서 그의 섭리로 일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독특한 언약 관계를 힘주어 상기시킨다 (암3:2). 하나님의 구속적 의의 구체적 시행은 그의 의로운 섭리의 전세계적 통치라는 보다 광범위한 영역 내에서 수행된다. 이러한 구분을 함으로써 우리는 어느 정도 정의를 담고 있는 현재의 모든 사건들을 당연히 하나의 구속 행위로 간주하는 것을 피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건들의 신학적 윤리적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탁월한 의의 행동이었다. 십계명은 출애굽으로 얻은 권리와 자유들을 보존하기 위해-그 권리와 자유들을 책임들로 바꾸어 놓음으로-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십계명을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자유를 보존하고 누리는데 필요한 책임의 형태로 표현된 인간적이고 신적인 일종의 '권리장전'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함으로 '정의를 시행하는' 것은 의를 이루기 위해서이거나 그것을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진' 의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의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사회적 기초가 된다. 선지자들은 과격한 혁신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철저한 개혁자들이었다. 예언서에 나오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본문들은 매우 광범위하다(p. 178 참조). 하나님은 모든 의와 정의의 원천이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정의의 시행보다 앞선다. 선지자들이 가난한 자, 약한 자, 억압받는 자, 빼앗긴 자, 희생당한 자 편에 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고치기 원하시는 고질적인 불의의 상황에서, '학대받는' 편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뜻이 행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한 정의가 시행되어야 한다.
3. 율법과 법률제도
라이트는 율법을 두 가지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분류하고 있다. 첫째는 주된 율법인데 거기에서 라이트는 십계명(출 20:2-17; 신 5:6-21), 언약서(출 20:22-23:32), 레위기의 모음, 신명기의 모음을 다루고 있다. '신명기'라는 말은 '두 번째 율법'을 뜻하는 헬라어 구문이다. 그것이 의도하고 있는 의미는, 그것이 새로운 율법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율법을 되풀이하고 확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서에 나오는 많은 율법들이 신명기에 다시 나타나는데, 종종 약간 변화되고 확장되거나, 추가로 동기가 부여되고 있다.
둘째로 라이트는 여러 가지 종류의 율법들이라는 항목에서 형법, 민법, 가족법, 의식법, 자선법 등을 다루고 있다. 라이트는 '민법'이나 '의식법'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도덕법'이라는 독특한 범주를 드러내려는 전통적인 소망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그런 구분은 율법 전체가 갖는 윤리적 적실성을 발견하는데 별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분류를 통해 '어떤 율법들이 여전히 우리와 관련되어 있고 어떤 율법들이 그렇지 않은가?'하는 질문에 대답하기 보다는 오히려 원래 문맥에서 율법 전체가 갖는 도덕적 적실성을 풀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십계명은 본래 우리가 생각했던 의미에서 '형법전'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상세한 법령이나 명기된 형벌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약의 경계와 의무들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중대한 범죄가 될 만한 것의 본질과 범위를 규정한다. 구약 율법에서 법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모든 범죄는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십계명 중 특정한 어떤 것과 관련지을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른 한편, 비록 사형에 해당하는 모든 죄는 십계명과 연결시킬 수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계명이 사형에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열번째 계명(탐내는 것을 금하는)은 그 본질상 사형은 물론이고 어떤 사법적 형벌도 받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노예법이 대세에 역행하는 것은 그 나라가 역사적으로 체험한 신적 영향의 결과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나라가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 나라를 위해 취하신 하나님의 행동으로 인해, 노예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당시의 관습 및 장차 발달할노예 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심지어 십계명에서도 노예제를 규탄하는 '도덕법' 부분을 차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주제에 관한 다른 구약 본문들(예를 들어 레25:42; 느5:1-12; 욥31:15; 렘34장; 암2:6)과 나란히 놓았을 때, 그 제도 전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민법 내에 작용하는 도덕적 원리가 존재한다.
오래된 '도덕법/민법/의식법'의 구조에 비추어 보면 모든 가족법은 아마도 '민법'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 가족법들을 상세히 조사해보면 '가정의 신성함'이라는 주제에 '3차원적' 풍요함을 더할 수 있는데, 그 주제는 보통 다섯 번째 계명에만 고정되어 있다.
구약의 의식법-도덕 원리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는 듯이 보이는-부분에서 우리는 성경 윤리에 온통 퍼져 있는 기본적인 도덕적 원리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인간 상호 간에 돌보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한데 결합되어 있다는 원리를 보게 된다.
자선법은 사법적 의미에서는 전혀 법률로 간주할 수 없는 범주이다. 이 범주의 율법에 망라되어 있는 상황이 매우 폭넓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심지어 가축과 야생 동물들, 그리고 과일 나무들에 대한 배려까지도 포함한다. 다시 한번, 이러한 자료들이 지닌 따스함을 느껴 볼 수 있다(p. 193 각주 6 참조). 이러한 자료들의 실제적 결과는 인도주의적이다. 하지만 그 기원과 동기는 신학적인 것이며, 이것은 바로 윤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며, 하나님의 언약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격적인 언약 관계 내에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사실상 '삶'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분명 더 이상 '율법 아래'(롬3:19; 6:14), 즉 옛 언약의 율법에 메어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율법이 그에게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율법 없이'(고전9:21) 살지 않는다. 오히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영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완성시키는"(롬8:4)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성령의 으뜸 가는 열매는 사랑으로서, 이것은 율법, 특히 십계명을 이행하는 것이다(롬13:8-10). 십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내적 생각으로 끝난다. 어떤 의미에서 열 번째 계명과 첫 번째 계명은 서로 부합한다. 탐욕은 본질 상 하나님이 차지하셔야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먼저 놓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신명기 21:18-21에 나오는 반항적인 아들을 돌로 쳐죽이도록 규정한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형벌을 보면 그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언약에 대한 범죄, 곧 다섯 번째 계명에 대한 범죄였으며, 따라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범죄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정 공동체 전체에 심판을 가져오는 위협적 존재였으며, 따라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런 죄가 더 이상 세속 국가에서 어떤 처벌을 내릴 만한 이론적 근거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사형에 처하라는 요구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앞서 묘사한 죄의 본질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상기시키고, 심각한 청소년 범죄에 율법이 엄격하고 가혹하게 반응하는 것을 지지할 근거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 처벌은 명백히 그런 죄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나와 있다.
율법의 한계에 대해 라이트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정의로운 법이 불의하게 사용되거나 그저 무시될 수 잇다. 둘째로, 법이 곡해되거나 교묘히 얼버무려질 수 있는 곳에서는,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한 법령을 시행할 수 있었다. 셋째로, 일단 사회에 불의가 깊이 뿌리내리고, 구조적으로 깊이 배여 들고 '길들여' 졌으면, 단지 법을 바꾸거나 옛 법에 호소하는 것은 부적절한 치료법이다. 대부분은 선지자들은 사람들 앞에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다. 부패하고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사회에 하나님이 직접 심판을 내리거나, 아니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마음의 영적 변화를 가져오거나 하는 것이다 (겔18:31; 36:26 이하 참고).
4. 사회와 문화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되도록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흠 없는 완전한 나라'는 아니었다. 그들은 나머지 인류들로부터 완전히 밀폐되어 고립 상태로 살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열방들이 있는 세계 안에 존재하던 고대 백성들로서,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강에 이미 고대 문명이 꽃핀 곳의 지리적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문명들이 끼치는 영향의 물결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내내 성쇠를 되풀이했다.
당시의 문화적 관습 중에는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 이스라엘에게 금지되어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가나안 종교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것들이 본래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상 숭배 및 '다른 신들'의 함정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금지되었다. 가나안 종교의 도구를 채택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단호하고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투쟁은 이스라엘이 그 땅의 옛 신들에 대한 우상 숭배를 막아내기가 매우 어려웠으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고대 세계에서 흔하게 시행되었던 어떤 관습들은 명확한 하나님의 명령이나 재가 없이-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고한 기준에는 못미치는 것으로 간주하는 신학적 비평의 발전과 함께-이스라엘 내에서 묵인되었다. 그런 관습들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최악의 결과들을 유화시키거나 제거하는 방식으로 법적 안전 장치를 두어 통제되었다. 이런 관습들의 범주에는 일부다처제, 이혼, 노예제 등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혼은 일부다처제의 경우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일부다처제가 하나님의 의도하신 일부일처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종의 결혼 의식의 '확대'임에 반해, 이혼은 그것을 절단시키는 파괴였기 때문인 듯하다. 일부다처제는 하나님이 단 하나의 관계를 맺도록 의도하신 곳에서 여러 관계를 맺어나간다. 하지만 이혼은 그 관계를 파괴시키거나, 그 파괴를 전제한다.
노예제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학적 법적 태도에 첫 번째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요소는 그 나라 자신의 역사이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국가적 기원이 해방된 노예라는 하층민의 신분으로 시작되었던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두 번째로, 이 역사적인 체험으로 인해 생겨난 태도는 특정한 법령으로 바뀌었는데 그 법령은 이스라엘 종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전례가 없는 정도의 지위와 권리와 보호장치를 부여했다. 종들도 공동체의 종교생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할례를 받을 수 있었으며,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의 업무에 비추어 적실한 것은 남종이나 여종이나 매주 안식일에 휴식하도록 하라는 명령이었을 것이다(출20:10). 출애굽기 23:12을 보면 실로 그것은 그들과 일하는 짐승들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라이트는 구약에 나오는 그 당시의 사회 문화적 측면에 대한 구약의 접근을 통해 우리들이 현대의 사회와 문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로, 구약을 볼 때 우리는 타락한 인간 사회 안에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으로서 거부해야만 하는 몇몇 측면들이 있으리라고 예상하게 된다. 대체로 이스라엘에게 사회적으로 금지되었던 범주들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포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상숭배적인 것, 배교적인 것, 사람에게 해로운 것, 가난한 자들에게 무감각한 것 등이다. 둘째로, 구약 이스라엘이 경험한 바를 볼 때 우리는 사회가 타락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셋째로 구약은 인간의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제측면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어받아서 적극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보여 준다.
가정에 대한 구약의 가르침은 윤리적으로 두 방향으로 적용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보통 세속 사회에서의 가정과 관련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특히 지역교회와 관련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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