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3:1-8
1.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에 이르기까지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6.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1. He that is wounded in the stones, or hath his privy member cut off, shall not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2. A bastard shall not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even to his tenth generation shall he not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3. An Ammonite or Moabite shall not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even to their tenth generation shall they not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for ever:
4. Because they met you not with bread and with water in the way, when ye came forth out of Egypt; and because they hired against thee Balaam the son of Beor of Pethor of Mesopotamia, to curse thee.
5. Nevertheless the LORD thy God would not hearken unto Balaam; but the LORD thy God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unto thee, because the LORD thy God loved thee.
6. Thou shalt not seek their peace nor their prosperity all thy days for ever.
7. Thou shalt not abhor an Edomite; for he [is] thy brother: thou shalt not abhor an Egyptian; because thou wast a stranger in his land.
8. The children that are begotten of them shall enter into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in their third generation.
-표면적,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모압 사람들은 영원히 총회에 들어오지 모한다는 말을 펙트로 반박하는 인물은 “룻”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는 과정에 어떠한 저항이 없다.
-룻: 다윗,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방편이 된다.
-다윗 룻의 4대 손
-라합: 가나안 사람
-헤렘: 하나님께 온전히 받쳐진 것(진멸, 멸절)에 속하였으나 결정 하나로 성회에 들어옴
-아간: 유다지파 사람,
-불순종으로 헤렘의 물건을 탐함으로서 라합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짊어짐
-신구약이 이 점에 있어서 차이가 전혀 안 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고넬료(이방인):하나님을 경외함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보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사야 56:3-8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6.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8.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시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본질의 문제는 내가 여호와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창 17: 10-14 할례 언약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
-출 12:43-48
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 거류인과 타국 품꾼은 먹지 못하리라
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 너희와 함께 거류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 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구약은 처음부터 혈통 위주가 아니었다.
-민 11:4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중다한 잡종에 대한 비난(X)
-원인이 됐던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성경적 진실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혈통 계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냐가 결정적인 관심사다.
-구약의 율법의 엄청난 유연성을 파악하라.
-잡혼: 잡혼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
-성경 자체가 원론적으로 잡혼을 막는 것은 아니다.
-잡혼: 이방인과의 결호, 안 믿는 사람과의 결혼
☆성경을 읽으면서 본질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현실 문제의 모든 답은 성경에 있다.
제 4 강 창세기
A. 창세기의 구조와 톨레돗문구(Toledoth Formula)
-대부분의 학자들은 톨레도트(twdlt)가 창세기의 구조의 뼈대라고 생각한다(총 11번).
-톨레돗이란? 구별의 첫 구절에 톨레돗이란 단어가 나온다.
-내력, 계보, 족보
-얄라드(낳다)->엘레드(아이)->톨레도트
-창세기에서 11번 나옴
-톨레돗을 각 섹션의 서론으로 삼음
*1:1-2:3 서막
1) 2:4-4:26 하늘과 땅의 역사
2) 5:1-6:8 아담의 가족사
3) 6:9-9:29 노아의 가족사
4) 10:1-11:9 노아 아들들의 가족사
5) 11:10-26 셈의 가족사
6) 11:27-25:11 데라의 가족사
7) 25:12-18 이스마엘의 가족사
8) 25:19-35:29 이삭의 가족사
9) 36:1-37:1 에서의 가족사
36:1,9에 각각 “톨레돗” 문구가 사용되고 있음.
10) 37:2-50:26 야곱의 가족사
* 이 구조는 놀랍게도 설득력이 없다.
1)이것이 과연 하늘의 땅의 역사인가?
à 이 점은 물론 2:4a가 1:1-2:3의 결론이라고 하면 해결되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우 다음의 톨레돗 문구들을 해석할 때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 2:4-4:26는 아담의 가족사가 되고, 5:1-6:8은 노아의 가족사가 되어야 한다. à 톨레돗 문구를 앞으로 올려 읽는 것도, 뒤의 서론으로 읽는 것도 일관되게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2) 6-9는 노아의 가족사인가?
9.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6)이 과연 데라의 가족사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인가?
-주인공은 아브라함
8)이 이삭의 가족사라고 불리울 수 있을 만큼 이삭이 전면에 두드러진 인물인가?
9)에서와 관련해서는 “톨레돗”이 두 번 사용된다(36:1, 9). 에서가 이 표현을 두 번 받을 만큼 중요한 인물인가?
-에서는 성경상 변두리 인물이다.
(* 참고로 이 구조는 창세기의 전체 구조를 P문서의 톨레돗 구조가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
* 그러나 톨레돗은 어떤 식으로든 창세기의 내용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1) 나는 이 문구는 그 앞뒤의 본문에 대한 서론이나 결론이 아니라 상당히 느슨히 사용된 문구라고 생각한다.
(2) 또한 이 문구는 11:27-32의 “데라의 족보”나 36:1,9 등의 에서의 족보들(36:1-5; 36:9-14 혹은 36:9-19)에서 보듯이 많은 경우는 해당 가계 목록의 서론일 뿐이지 그 뒤이어 나오는 내러티브 부분까지를 포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3) 2:4와 37:2의 경우는 어쩌면 이 톨레돗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느슨하게, 그리고 의미의 일관성 없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à 그러므로 톨레도트에 대한 논술이 거의 모든 창세기 주석의 서론에 나옴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별로 신경쓸 거리가 아니다. 이것이 창세기 이해에 정말 눈을 열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는 듯하다.
à 19세기 말에 Bernard Duhm이 이사야서의 소위 “종의 노래”가 독립된 문헌들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이 이론은 한 때 상당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지금도 이 용어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이 “종의 노래”가 결코 주변 문맥과 분리될 수 없다는 지적들에 의해 크게 신뢰성을 상실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이론에 회의를 품고 있다. 또한 T. N. F. Mettinger라는 학자는 A Farewell to the Servant Songs란 책을 써서 Duhm의 이론에 도전했다. 나는 Mettinger의 책 제목을 흉내내어 A Farewell to the Toledoth Formulas가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톨레돗 포뮬라 없이 창세기의 구조를 분석해 볼 때 창세기는 크게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창 1-11장: 원역사
창 12-50장: 족장사
-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원역사와 족장사(그리고 성경의 내러티브)는 결코 두부 모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경우에서도 창세기의 이 두 부분은 11:27-32의 데라의 족보를 통해서 연결된다.
1-11 (11:27-32) 12-50
- 이런 연결고리들을 통한 연결은 다른 경우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1) 창 6-9장의 노아 홍수와 그 앞의 문맥은 5:28-32의 라멕의 노아 출산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
(2) 창 10장의 노아의 후손의 족보는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란 반복구들을 담고 있다(10:5, 20, 31). 이 반복구들은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서론격인 11:1과 얽힌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10장의 족보는 11장의 바벨탑 사건의 이후의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 창 12-50장의 족장사 역시 두부 모 자르듯이 구조를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창 11:27-50:26까지의 본문을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 각 인물의 등장과 죽음을 기준으로 해서 나누어보면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창 11:27-25:11 아브라함(Abraham Cycle)
창 21:1-35:29 이삭(Isaac Cycle)
창 25:19-49:14 야곱(Abraham Cycle)
창 37:1-50:26 요셉(Jacob Cycle)
이 구조를 조금만 유의해서 살펴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각 인물들의 이야기에는 본문상으로, 그리고 연대기상으로 서로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일례로 아브라함의 죽음은 25:1-11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 이삭의 21:1-7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인물의 기록은 21:1-25:11에는 겹쳐서 나타난다. 또한 이삭의 죽음은 35:27-29에 기록되어 있고, 그의 아들 야곱의 탄생은 25:19-26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25:19-35:29의 방대한 분량은 두 사람의 삶이 겹치는 부분이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중첩 부분들에서 동시대를 살아간 두 사람이 같은 정도로 활약을 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중첩 부분에서 이삭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22장의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이야기 정도가 그나마 그가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도 많은 설교들이 제시하는 바와는 달리 그의 역할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찬가지로 야곱의 생애와 겹치는 부분에서도 그의 역할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가 유일하게 독자적인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26장과 축복 문제를 다루는 27장에서만 그는 등장인물로 활동하며 야곱의 나머지 인생에서 그의 역할은 거의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창세기의 진짜 주인공은 야곱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들의 구조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들 속에서 두드러진 인물은 아브라함과 야곱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야곱이 아브라함보다 더 중요성을 띤다. 반면 이삭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과 자기 아들 야곱 사이에 끼여서 존재감이 상당히 작다. 요셉의 경우 그가 등장하는 본문은 이삭보다 상대적으로 길기는 하지만 사실상 그의 삶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삶과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겹친다. 이 그림이 보여주는 관찰사항들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아브라함의 죽음(25:1-18)은 야곱의 탄생(25:19-26)과 아예 맞닿아 있다. 이삭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삭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본문은 26장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의 본문 구성상으로는 이 26장은 25:19-34의 야곱의 탄생과 팥죽 사건 이후에 배열되어 있다. 이런 배열의 결과 이삭이 독자적인 인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는 기회는 최소한 내러티브상으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둘 째, 야곱과 요셉의 경우 37-50장에서 이 둘의 활약상은 상당 부분 겹친다. 사실 요셉만이 무대 위에서 독자적인 주인공으로 활동하는 것은 38-41장 정도이다. 나머지 장들에서는 거의 모든 경우 야곱이 항상 무대 위에 존재한다. 그는 42장에서 재등장한 이후 창세기 50장 전반부까지, 즉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까지 거의 계속해서 등장한다. 즉 야곱은 창세기 25-50장까지 절반이 넘는 장들 속에서 계속 주인공, 혹은 중요인물로서 등장한다.
셋 째, 창세기 37-50장의 소위 요셉 이야기 속에서도 언뜻 보면 주인공이 요셉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좀 더 깊이 살펴 보면 요셉은 야곱과 열두 아들들이 애굽 고센에 안착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데 있어서 도구로 사용되는 존재일 뿐이다. 요셉은 이 아들들 중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더 큰 것 뿐이다. 이 점은 요셉이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39-41장을 제외하고는 야곱과 열두 아들들이 계속적으로 거의 전 장면에 요셉과 함께 존재한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셉의 독자적인 활동 장면 역시 야곱과 열두 아들의 애굽 정착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써 그러한 것이다. 이 점은 45:5-8과 50:19-21에서 요셉 스스로가 언급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따라서 37-50장은 사실은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 가족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또한 창세기 38장의 존재 역시 37-50장을 요셉 이야기로 읽기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이 본문에는 야곱의 가족 중 오직 유다만 독자적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거의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 장은 요셉의 이야기와 더블플롯으로 맞물리는데, 이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요셉 이야기와 연관을 맺도록 되어 있는 것은 유다와 요셉이 이스라엘의 나중의 역사에서 주인공이 될 북왕국과 남왕국의 지배적인 지파들의 조상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에서 유다와 요셉이 어떻게 얽히든지는 상관없이 이 38장의 유다에 대한 에피소드 역시 37-50장을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 가족의 이야기로 읽어야 함을 잘 보여준다.
넷 째, 플롯적인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창세기 이후의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사람은 야곱이다. 그가 낳은 열두 명의 아들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수장들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의 플롯의 방향은 어떻게 아브라함을 통해 시작된 구속의 역사가 야곱을 통해서 열두 지파를 이루었으며, 이들이 어떻게 애굽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 째, 요셉이라는 인물이 독자적인 중요성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 야곱의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종속된 인물이라는 점은 그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죽음 기사를 통해서 확인된다. 야곱의 죽음과 그에 따른 후속조치에 대한 내용은 창 50:1-21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어 요셉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창 50:22-26에 나온다. 창 50:22에 따르면 요셉은 110세를 향유했다. 이 숫자가 실제의 연대기적인 숫자가 아니라 창세기의 족장들의 이상적인 삶을 나타내는 상징적 숫자일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내러티브의 흐름상 요셉이 야곱의 죽음 후 바로 죽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냥 실제 숫자로 보고 계산을 해도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 사이에는 23년의 공백이 있다. 하지만 이 23년의 기간을 내레이터는 완전히 간과하고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을 바로 이어서 배열하고 있다. 이것을 볼 때 창세기의 중심에는 사실상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가장 직접적인 조상인 야곱이 서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야곱 탄생 이전의 이야기들은 야곱으로 흘러 들어가며, 야곱이 죽는 것과 더불어 창세기는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여섯 째, 창세기에서 그 중요성에 있어서 야곱에게 유일하게 필적할 수 있는 인물은 아브라함이다. 그는 11장 마지막에 등장해서 25장 초두에 끝을 맺음으로써 거의 15장에 이르는 분량에 등장한다. 하지만 야곱은 25장 중반에 등장해서 50장의 거의 끝 부분까지의 본문을 차지함으로써 아브라함보다 거의 두 배의 본문에 등장하고 있다. 이 점 역시 창세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야곱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처럼 위의 모든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분량이나 존재감에 있어서 창세기의 주인공은 야곱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탄생과 죽음은 창세기의 절반이 넘는 본문에 등장하고 있으며, 그의 죽음은 곧 창세기의 끝과 동일시된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는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야곱의 몸을 통해 탄생하였으며, 애굽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다루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핵심적인 내용의 중심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단일 조상으로서의 야곱이라는 인물이 서 있다.
* 이처럼 성경 내러티브의 내용들은 각 부분이 서로 아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B. 창 1-11장의 해설
* 이에 대해서는 교재들을 참고하라.
*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창 1:28의 “창조 명령”과 이것의 서론격인 “축복”이라는 주제(“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이르시되”가 이 단순히 1-11장의 원역사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12-50장의 족장사의 핵심을 관통한다는 점이다.
-축복이라는 말이 핵심이다.
-창조의 명령은 족장사를 관통한다.
-출 1:7로 성취됨으로 시작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구약은 좁은 혈통 계념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창 1:1).
1) 복주다(바라크 $rb)
창 1:22, 28;2:3;5:2;9:1,26;12:2-3(아브라함); 14:19 (멜기세덱의 기도 중); 17:16 (사라), 20 (이스마엘); 18:18; 22:17-18; 24:1,35; 25:11; 26:3-4,12,24,29 (이삭); 27:27,29; 28:3,14 (야곱); 30:27,30; 32:1, 27, 30 (31:55; 32:26,29); 35:9; 39:5 (요셉); 48:3
2) 번성하다(라바, hbr)
(이스마엘); 17:2,20 (이스마엘); 22:17;26:4,24(이삭); 28:3; 35:11 (야곱); 47:27 (내레이터); 48:4; (참고) 출 1:7, 10, 12, 20.
-많다. be many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네 씨로 크게 성하여(hB,Ûr>a; hB'’r>h;w> ^ªk.r,b'a] %rEåb')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강조를 나타내는 절대부정사가 두 경우 전부 쓰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절정. “하늘의 별/바닷가의 모래” 등의 주제와 연결되어 있음.
3) 생육하다(파라, hrp)
창 1:22,28;8:17;9:1,7;17:6,20(아브라함); 26:22 (이삭); 28:3 (이삭à야곱); 35:11 (야곱); 41:52; 47:27 (내레이터); 48:4; 49:22; 출 1:7; 23:30.
이스라엘의 사명은 먼저 자신이 가나안의 원주민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야 할 의무가 있는 듯. 시내산은 오경의 총 187장 중 59장(출 19-민 10)의 무대가 된다. 이것은 오경의 중심이 어디 있는 지를 보여줌.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었다. “대략”(창 2:4; 36:1,9); “…자손의 계보”(5:1); “사적”(事績) (6:9); “후예”(10:1; 11:10,27; 25:12,19); “약전”(略傳) (37:2).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Duane Garrett, RethinkingGenesis(GrandRapids:BakerBookHouse,1991),91-106을 보라.
통상적으로 이 장들은 요셉 이야기란 칭호로 불려진다.
예를들어G.W.Coats,FromCanaantoEgypt:StructuralandTheologicalContextfortheJosephStory(CBQMS4;Washington:CatholicBiblicalAssociation,1976);R.E.Longacre,Joseph:AStoryofDivineProvidence(WinonaLake,IN;Eisenbrauns,1989)등은 아예 요셉 이야기를 그 책 제목으로 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런 난점 때문에 Coats는 바로 앞의 각주에 언급된 37-50장의 연구서에서 아예 이 38장을 완전히 배제해버리기까지 했다.
C. J. Labuschane, “The Life Span of the Patriarchs,” OTS25(1989),121-27;J.G.Williams,“NumberSymbolismandJosephasSymbolofCompletion”,JBL98(1979),86-87등. 이에 대한 최근의 연구들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는 Victor P. Hamilton, TheBookofGenesis:Chapter18-50(NICOT;GrandRapids:Eerdmans,1995),709-710을 보라. 이들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숫자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따르고 있다:
아브라함: 175 = 7 x 52
이삭: 180 = 5 x 62
야곱: 147 = 3 x 72
요셉: 110 = 1 x (52+62+72)
이 도표에서 보듯이 족장들은 나이를 인수분해한 바에 따르면 7,5,3,1의 내림차순으로 숫자가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곱해지는 제곱수는 5,6,7로 올림차순으로 되어 있다. 요셉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세 사람의 나이의 숫자를 종합한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맞을 경우 요셉은 세 족장의 모든 이야기들을 종결 짓는 역할을 한다. 그의 죽음으로 창세기가 끝이 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할 수가 없다.
박철현, 야곱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용인: 킹덤북스, 2010)의 부록 I: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들” (271-276).
C. 창 12-50장의 족장사의 해설
* 11:27-32의 데라의 족보를 통해 도입된 족장사의 첫 본문이자 아브라함의 소명에 대한 본문인 창 12:1-3은 구속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소명의 목적은 그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는” 것에 있다.
à 그의 부르심은 처음부터 선교적이다.
* 그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관련된 자들은 어떻게든지 복을 누린다.
*창 12:1-3 제일 중요한 본문
-아브라함에 축복 보다는 2절 너로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가 주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 이후로 불행해진 사람이 없는가?
-하갈, 이스마엘, 에서 또한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잘못된 시각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축복을 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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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갈
실제로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 하갈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직접 받는다. 우선 하갈은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누린다(해밀튼, 오경개론¸ 115).
(가) 그녀는 성경에서 주의 사자를 만나는 첫 번째 인물이다(16:11).
(나) 그녀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주시는 첫 번째 인물이다(16:11-12).
(다) 그녀는 하나님께 새로운 이름을 지어드리는 첫 번째 인물이다. 16:13에 따르면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즉 엘 로이라고 부른다. 그녀가 하나님께 바친 이 이름으로 볼 때 그녀는 하나님이 자기를 돌아보시고 계셨다는 사실에 깊은 감화를 받은 듯 하다.
(라) 그녀와 하나님의 만남을 기념하여 그 장소의 이름이 브엘라해로이, 즉 “살피시는 산 자를 위한 우물”이라고 붙여졌는데(16:14), 한 여인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런 식으로 기념된 것은 성경에서 이것이 유일하다. 족장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체험과 관련하여 장소의 이름이 새롭게 붙여지는 경우는 오직 족장들에게 국한되어 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창세기의 내레이터는 하갈을 여자 족장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하다.
(마) 하갈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녀가 창 21:8-21에서도 이 16장의 사건과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진실로 그녀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의 안위에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à 이처럼 하갈은 창세기의 여인들 중에서 하나님과의 밀접한 체험을 가장 많이 가진 여인이다. 그 이유는 아마 그녀가 아브라함의 직계에 들지 못하는 대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아브라함과 비슷한 방식으로 대접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녀는 비록 창세기의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의 방계인 이스마엘 족속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이스마엘
이스마엘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린다.
(가) 창 16장에서 하갈이 도망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의 말씀은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는 것이었다(16:10). 이것은 분명히 창 13:16; 15:5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상기시킨다. 참고로 이것은 또한 32:12의 야곱에게 준 약속과도 상응한다.
(나) 창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할례의 언약을 세우시면서 이스마엘에 대한 내용을 빠뜨리지 않으신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여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 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17:20). 이 약속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신다.
(2) 이스마엘이 매우 크게 생육하게 하신다(파라, hrp) (1:22,28; 8:17; 9:1,7; 17:6, 20; 26:22; 28:3; 35:11; 41:52; 47:27; 48:4; 49:22;).
(3) 번성케 하신다(라바, hbr) (1:22, 28; 8:17; 9:1,7; 16:10; 17:2,20; 22:17; 26:4,24; 28:3; 35:11; 47:27; 48:4).
(4) “크게”: 비므오드 므오드(daom. daom.Bi). 영어로 치면 very 정도에 해당하는 수식어를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어구는 창세기 내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17:2,6에서 아브라함에게 주는 축복 속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이 표현이 같은 장의 이스마엘에 대한 축복 속에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이스마엘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씨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축복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5) “열두 두령”: 이 것은 25:16에 그 성취가 언급되어 있다. 이 열두 두령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상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 역시 이스마엘이 받은 축복이 결코 아브라함의 적통 계열에 못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이스마엘은 창세기의 축복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브라함의 적통 후손들이 누리는 축복의 말씀을 상당 부분 그대로 받고 있으며, 위의 (4)번 사항에서 보듯이 상당히 강조된 형태로 받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한 (4),(5)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듯이 이스마엘의 축복은 결코 이삭에 뒤지지 않는다.
(다) 21:23에서 하나님은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결코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을 내팽개치신 것이 아니다.
à 이스마엘의 정리
(가) 이삭이 택함을 받았다고 해서 이스마엘이 버림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구속사의 경륜을 펼치시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의 계보를 활용하신 것뿐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계보를 활용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과정에 생겨난 보조적인 계보들를 결코 무시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다 품어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스마엘의 경우를 통해 알 수가 있다.
(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들도 결국은 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축복을 받게 될 “땅의 모든 족속”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브라함의 우산 아래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이처럼 구속사가 시작되는 첫 순간부터 만민이 구원을 얻을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의 목적은 아브라함에게만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얻는 사람들의 첫 번째 샘플인 것이다.
* 창 12:1-3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위의 Rodas의 글처럼 선교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구약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구약의 선교적인 목적성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깊다.
D.
D.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읽는 관점
*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사항
(1) 반복
- 창세기의 본문에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경향이 있음.
(예)
a. 사라, 리브가, 라헬: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족장의 아내들(창 11:30; 25:21; 29:31):
아카라(hrq[)란 히브리어 단어, 창세기에 세 번 사용. 이 여인들에게만.
이 여인들의 비슷함의 또 하나의 반복적 연결고리: 미모(사라, 창 12:11; 리브가, 24:16; 26:7; 라헬, 29:17-18).
b. 거짓말 이야기(창 12; 20; 26장): 아내의 미모로 인해 촉발된 위험한 상황과 족장들의 대처(Type Scene). (박철현, 야곱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 [용인: 킹덤북스, 2010]에서 창세기 26장의 거짓말 이야기를 다룬 부분을 참고할 것)
* 웬함(Gordon J. Wenham): “유형론적 원칙”(the principle of typology).
고든 웬함, 창세기: 16-50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1), 571.
* Robert Alter): “내러티브 유비”(narrative analogy).
R. Alter, “A Literary Approach to the Bible”, Commentary60(1975),70-77; “Biblical Narrative”, Commentary61(1976):61-67.
(2) 불가항력적 축복: 창세기의 중심주제.
1-2장의 창조기사(창 1:22,28; 2:1-3).
12:1-3의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 및 이후의 모든 축복들.
* 이 불가항력적 축복이란 주제는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받은 축복, 28장에서 야곱이 받은 축복 등을 이해하게 해준다.
(3) 인과응보
* 불가항력적 축복의 반대편. 축복이 빛이라면, 인과응보는 그림자.
- 인과응보의 주제는 하나님의 “숨은 공의”를 보여준다.
-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은혜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 사이의 변주곡(참고, 출애굽기 34:6-7). 창세기의 모든 이야기들 역시 마찬가지.
(예) 염소.
- 야곱이 이삭을 속일 때 사용된 재료가 바로 염소 새끼(창 27:9,16-17).
-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팔아 치운 후 그가 죽은 것으로 가장해서 야곱을 속일 때 다시 한 번 등장(창 37장). 숫염소의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야곱에게 가져감으로써 야곱이 스스로 속임수에 넘어가게 만듦.
- 야곱을 속인 아들들 중의 중요인물인 유다와 며느리 다말(창 38장; “염소 새끼”, 38:17).
è 인과응보의 연쇄 현상을 이어주는 끈.
(인과응보의 추가점들)
* 거짓말은 이 집안의 전통(아브라함부터 거짓말 이야기)
* 야곱의 거짓말에 대한 인과응보의 심판자들 중 중요한 사람은 라반이다.
- 라반의 속임수에 대해 인과응보를 하는 사람은 누굴까? 야곱 자신이다. 당하고 살 사람이 아니다.
* 거짓말에는 요셉까지 참여한다. 그 역시 형제들을 떠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다행히 유다의 적극적이고 진실하고,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는 대응이 이 집안의 끝없는 거짓말의 행진을 멈추게 한다(창 44:18-34).
참고, M. Daniel Carroll Rodas, “La misión integral: ser bendición. Un aporte desde el Antiguo Testamento”, Kairos36(2005),25-38;________,"BlessingtheNationsTowardaBiblicalTheologyofMissionfromGenesis",BulletinofBiblicalResearch10(2000)17-34및 앞의 소논문의 각주 7번의 추가적인 문헌들.
이스마엘(창 21:12-21)
이삭(창 22장)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배제를 명하심(21:12-13)
하나님이 이삭의 희생을 명하심(22:2)
“아이”란 용어(21:12,17-19)
“아이”란 용어(22:5,12)
아침에 일찍이 일어남(21:14)
아침에 일찍이 일어남(22:3)
음식과 물을 취함(21:14)
번제의 재료를 취함(22:3)
여행(21:14)
여행(22:4-8)
죽기 직전의 이스마엘(21:16)
죽기 직전의 이삭(22:10)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부름(21:17)
하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부름(22:11)
“두려워 말라”(21:17)
“하나님을 경외하다”(22:12)
“하나님이 들으셨다”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22:18)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8)
“네 씨로 별과 모래 같게 하리라” 등(22:17)
하나님이 그녀의 눈을 열어 우물을 보게 하심(21:19)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숫양을 봄(22:13)
그녀가 아이에게 물을 마시게 함(21:19)
그는 아들 대신에 숫양을 제물로 바침(22:14)
아직 학자들의 제대로 된 연구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21:12-21의 하갈 이야기와 22-24장의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평행성은 흥미를 자아낸다. 이 두 본문의 평행적인 요소들은 이 두 인물들의 상승성에 대한 내레이터의 의도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는 21장의 하갈 이야기와 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간의 상응성에 대한 웬함, 창세기 16-50, 219-220의 통찰에서 출발하였다. 이 두 본문 속에서의 두 인물간의 상응성을 웬함은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이 두 인물간의 상응성이 웬함이 제시한 본문을 넘어서서 21-24장 전반에 걸쳐서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까지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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