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반틸의 변증학

예림의집 2014. 4. 19. 10:56

 

1. 서 론

 

미국의 보수 기독교 신학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교의 초대 교수 중 하나이자 기독교 변증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이 저술한 변증학이다.

그는 '철저한 개혁신학', 즉 칼빈주의에 입각한 성서해석과 교리해석을 엄격하게 고수하려 노력한 이였다. 1895년 화란 태생으로 1927-1928년 사이에 미시간 주 스프링 레이크에서 목회하였고, 1929년 이 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를 역임했다.

반틸의 변증학은 흔히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라고 불리운다. 반틸은 말하기를, "성경의 내용을 연구하여 체계적 총전을 조직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의무이다"고 했다. "중립(neutrality)은 없다"라고 했다. 이말은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라는 큰 카테고리로만 나누어 진다”는 것이다. 반틸은 기독교의 합리성은 세상의 합리성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들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하는 디모데후서 3:16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고 ,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에 관한 교리와 죄에 관한 교리 그리고 구속에 관한 교리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 깊은 어두움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상태 속을 헤매었지만 지금은 은혜로 말미암아 택하심을 입어 그러한 상태를 벗어난 사람이 아직도 어두움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전파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이 책을 기록 한다. 제1장에서 은혜의 복음의 중요성을, 그리고 2~4장은 또 다시 복음을 철학적 용어로, 5~6장은 이 복음을 다시‘자연인’의 구원을 목표로 자연인을 대상으로 설명한다. 특히 논쟁거리가 될 만한 것은 마지막 장에 다룬다.

 

2. 기독교 신학의 모든 가르침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죄인들의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인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권위로써 선포한 말씀인 신구약 성경에서 취해져야만 한다고 주장 한다. 기독교를 오로지 사실에 근거한 논쟁을 통하여 역사적 종교로서 변증하려는 노력은 불가능한 것이고 또한 가능하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무덤으로부터 살아나셨다고 전파한다. 이 부활의 사건이 그의 신성의 증거라고 전파 한다. 즉 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진리의 체계 바로 그것을 세상에 전파해야 한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영원한 피조물이라는 진리이다 인간은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영원한 피조물이지 결코 창조주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는 당연한 기초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중요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아담의 범죄와 사탄의 범죄가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죄인가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처럼 되려는 죄가 오늘날 모든 인간에게 사망을 가져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첫째 성경은 완전 영감된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다

둘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이다

셋째 예수그리스도 그분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다

이것은 인간의 철학적 수학적 물리적으로 인간의 그무엇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이것을 받아 드릴뿐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만약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신학은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

로마 천주교회는 교의가 교회의 회의나 전통에서 나온다고 가르치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이 인간의 주관적 신앙이나 종교적 경험에서 나온다고 주장하지만, 역사적 개신교회는 교의가 오직 성경에서 나와야 한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접촉점에 대한 입장

카톨릭은 카톨릭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지성과 의지라는 본성은 손상되지 않았다. 인간의 타락은 조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은혜의 소멸을 의미할 뿐, 인간은 창조 당시 부여받은 지성과 의지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올바른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개신교는 어떤가? 칼빈이 말한 것처럼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타락하였고 손상되었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개신교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였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해석함에 있어서 궁극적인 열쇠를 쥔 궁극적 참조점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이다. 개신교의 원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사물 해석의 궁극적인 참조점이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안에서 발견 된다.인간이 타락하여 죄인이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궁극적인 또는 최종적인 참조점의 위치에 세워 놓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입장은 "인간이 사물을 해석하는 모든 서술에 있어서 궁극적인 참조점이라는 자신에 관한 이 근본적인 전제를 뒤집어엎거나 바꾸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인은 소위 '유신론적 논증들'을 틀림없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자연인 자신이 이러한 논증들을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많은 자연인이 유신론적 논증을 제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서 그들 스스로에게 이러한 방법을 통해 존재가 입증된 신들이란 한결 같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들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변증학자들은 성경이 보여주는 완벽한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을 입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자율성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대로 남겨둘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길 원했다."

반틸은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정면충돌"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방법은 롬1:18-25의 죄인의 근본속성에 대한 바울의 진단에 기초해있다. 이 말씀에 따라 반틸은 인간 누구나 본성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성에 대해 알고있다고 확신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심성에 너무나 깊고도 분명히 박혀있어 그 어떠한 억지와 변명으로도 불신앙을 "핑계할 수 없다." (19절) 불신앙이란 단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짖누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억지이다. 따라서 이 억지를 꺽는 일에는 "정면충돌" 이상 유력한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불신자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창조를 말하고,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부활과 다른 기적의 사실성 증명할 수 있으나 결국 기독교인은 불신자를 향해서 어떤 형태로던 "회개하라"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변증이 추구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의 추구와 제시와 논증은 복음으로 사람을 회심시키기에 불충분하다. 불신앙의 억지스러운 고집으로 맹목이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보다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3. 윤리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선행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하게 될 어떤 기준이나 표준을 그 스스로 설정할 수 없다. 윤리학과 기독교적 인식론은 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인간의 원초적 완전성은 기독교 사상의 전체적 체계의 기초에 깔려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본래 완전한 도덕적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주장한다.② 죄가 사람의 지성을 어둡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죄는 인간의 의지를 부패케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외부적인 계시로서의 성경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인간의 중생치 못한 의식은 그 자체의 본질로부터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들에 전적으로 순종할 수가 없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중생하지 못한 의식 그 자체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울려나오고 있다.③ 중생한 의식은 다시 한번 원칙적으로 그것의 본래적 위치에 복귀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생한 윤리의식은 원칙적으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쉬지 않고 성경에 비추어 그 자신을 검토하는 일에 힘을 써야만 한다. 또한 중생한 의식은 도덕적 문제에 대한 어떠한 해답도 자기 자체 내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지 않는다. 중생하지 못한 의식은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의 도덕적 결정에 성경에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반면에, 중생한 의식은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의 도덕적 결정이 성격에 의하여 검증을 받음이 옳음을 확증한다.④ 로마 카톨릭-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의 의식에 대한 견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과 질료의 구조를 주로 원용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간은 적어도 어떤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로부터 완전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토마스는 만일 인간의 모든 행동들이 그것들의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근거를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의지에 두고 있다면 인간을 책임 있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생각할 수가 없다고 본다. 이와 같이 로마교에는 권위에 대한 참된 성경적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⑤ 복음주의- 루이스는 윤리와 문학과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객관적인 표준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객관성이 여러 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어떤 일반적 객관성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마치 사람들이 그것을 저버린 것이 거의 근대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전혀 근래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비록 그가 높은 인기를 누린 기독교 변증가이지만 그가 사람들을 복음에 돌아오도록 부르는 일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방법을 그토록 대폭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해야 하고 안타까워 할 수밖에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인 합리성이시며 따라서 절대적인 의지이시기도 한다. 이 말이 강하게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선하게 되실 필요가 없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능동성, 수동성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는 영원한 성취가 있을 뿐이다. 윤리학을 다룸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모든 인간 행위의 필수적인 전제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적 윤리는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비기독교적 사상은 인간의 의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도 배경을 갖는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비기독교적 윤리는 궁극적인 행동주의를 표명하고 있다.

 

4. 신자가 불신자에게 기독교적 인생관을 제시할 때에 신자가 그것에 호소하여 불신자의 마음과 생각에 접촉할 수 있는 접점, 즉 공통의 이해가 닿아 있는 영역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즉 신자와 불신자가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의 방법론이 과연 존재느냐 하는 것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 불가능성을 전제해야 한다. 기독교 변증학자가 보통사람에게 기독교를 전함에 있어서 분명히 주의하고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결국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일들과 그 경험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밝히 보여 주는 빛으로서 제구실을 하며 그 자체를 드러내 증거 해야만 한다. 반틸은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기독교적 방법론은 기독교 인간론과 마찬가지로 통일성 있는 전체로서의 기독교적 입장의 한 국면들이다. 개혁주의적 변증학의 방법론은 기독교의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는 개혁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다른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인과의 접점을 자연인의 식역아래 깔려서 자연인에 의해 항상 억누름을 당하고 있는 신 의식에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함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입장의 변증가는 자연인이 건설해 놓은 체계들과 접점을 설정하고자 노력한다.

5. 기독교 변증학 (권위와 이성)

로마카톨릭교의입장은 이성의 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카톨릭의 신학자들이 “성 토마스 (St. Thomas)를 최고의 신학자로 떠받드는 것과 아울러 아리스토텔레스를 최고의 철학자로 여기고 있는 사실을 주지함으로써 그 첫걸음으로써 그 첫 걸음을 띄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질송이 얼마나 영웅적으로 이성의 자율성의 개념을 옹호하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인식, 둘째로,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인간관, 특히 하나님과 연관시켜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알미니안주의적 입장은 개혁주의의 선택 교리가 인간의 책임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는다고 공격하는 점이다. 그러나 개혁주의 선택교리야 말로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알미니아주의자는 개연성이라는 말이 신자들과 자연인들 사이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초자연계시의 개연성을 말하며,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하여 자연인에게 말하고자 할 것이다.

개혁주의적 입장은 자연인이 형상학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사상을, 그리고 인식론적으로는 인간 마음의 자율성의 사상을 전개하기 때문에 개혁주의 변증가는 그가 먼저 이러한 생각들에 도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개혁주의 변증가가 자연인에게 제시하는 사실은 첫째로 하나님은 자존적 존재의 사실이다. 둘째로 만물의 창조와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일이다. 셋째로 우주 안에서 일러나는 모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와 전 포괄적 계획의 사실이다.

 

6. 전제에 입각한 논증

개신교의 변증학은 인간의 창조주이시오, 구속 주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을 밝히 보이신 하나님을 사랑의 순종심으로 청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신자와의 풍성한 대화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기초이다. 인간적 서술이 가능한 것은 단지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세상과 인간이 서로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을 통하여 그들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다른 어떠한 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 구별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란 신성내부에서 상허간의 맺고 있는 관계 속의 삼위를 말한다. 경제적 삼위일체란 피조된 세계와 연관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을 지칭한다. 두 가지 요점을 합쳐서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가 창조하신 세계와 그 자신이 맺고 계신 관계이고, 나는 자족적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내부의 어떠한 종속설도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반박하였다.

하나님의 뜻이 만물을 다스린다. 칼빈은 근접 원인과 원격 원인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고도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결 론

기독교의 변증은 절대적으로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체계를 전제하고 시작해야 한다. 본질을 떼어놓고 그 본질에 대해 변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사역에 있어서도 반틸은 무엇인가 분명한 기준을 그의 전제주의적 방법론을 통해 제시해 주고 있다. 하나님만이 초월과 내제에 자유로우시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사고가 바른 사고가 되려면 하나님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성, 상식, 전통, 체험이 아니다. 타협없이 포기 없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제한 사고가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철저한 전제 주의적 방법을 주장하는 철저한 개혁신학자인 반틸의 변증은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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