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의 시대적 구분
*구약성경 시대
*신약성경 시대
*초대교회 시대(120~150)
*고대교회 시대(
-기독교적 문헌이 나오기 시작
-기독교가 점차 규모를 갖추어 가는 시대
*중세교회 시대(
-정치적으로는 콘스탄틴 대제가 국교를 공인한 뒤(4세기 초반)
-신학적으로는 어거스틴이 분기점이 된다.(4-5세기)
-모든 면에서 자리를 잡은 시대
-정치, 신학, 문화, 제도적(그레고리 1세 600년 전후)
*종교개혁 시대(1229년-1648년)
-바티칸에서 평신도들에게 성경 읽는 것을 금지시킴
-왈도파
-베스트팔렌 조약: 칼빈파가 정식 교회로 받아들여지는 해, 30년 전쟁으 끝내는 조약
*근세 시대
*현대
*현대 이후
-포스트 모던 시대
507p 교과서
*예수님-사도들-교회공동체
-교회의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연대기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기본
-역사란 중대한 사건들 중심으로 사가의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
*발전사
-한편 발전하는 역사가 분명하면서도 결정적으로 퇴보하는 역사도 있다.
-중세 교회 내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됨(중세교회의 후퇴)
-모든 면에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변천사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좋음
역사 이야기
-역사를 중심으로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교육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
-시간에 대한 관심이 어디에나 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양 문명에는 두 게의 큰 줄기가 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희랍의 학문에 대해서는 인류의 기적이라고 한다.
-데모크리토스: 원자론(실험과 관찰 업이)
-헬레리즘이 발전과 진보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연대기에 대한 관심은 있었다.
-연대가 있고 사건이 있을 뿐 시간과 사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사관)이 발견하기가 어렵다.
-신통기 또한 연대기적 특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구약시대 사람들의 지성은 시간적이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았다.
*신명기 역사서(선지자적 관점)와 역대기 역사(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성전 관점)를 구분한다.
-역사에 관한 이해는 구약성경의 수준이 높았다.
*어거스틴 신국론: 시간에 대한 이해를 보임
-헬레니즘의 시간은 시계를 따라 흘러가는, 점점이 있는 과학적인 시간
-어거스틴의 시간은 어느 한 지점은 과거의 어느 시점(기억)을 현재로 가지고 있고 미래로 흘러갈 시간(예지)를 미리 가지고 와서, 서 있는 지점은 점과 같지만 기억과 예측 가운데 나의 존재를 세운다.
-의식류로서의 시간: 현대 철학과 문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간을 사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체적으로 관여한다.
*구약시대의 교육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시기여서 시간에 대한 많은 의식이 있음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방향성을 주는 것이 약하였다.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헬라의 학문이 공간적인 것에 중심한다고 한다면, 구약시대 사람은 시간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들어오셔서 말씀하시고 영향을 끼치신다고 보았다. 헬레니즘보다 더 우위에서 와TEk.
-신약시대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시간에 대한 다른 의미를 부여하심(예배: 때)
-크로스(의식류)---> 카이로스(의식류)
-신성사(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속사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의 시간)와 세속사
-시간과 역사 중심의 전개
*교육의 형태
-가정교육
-유목 생활
-성인식(식수, 할례, 장자대속예식, 젖을 때는 예식, 13세 성인식)
-13세는 정신적으로 개념이 생겨서 스스로 이성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나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자라는 시간에 따라서
-매주자(문설주): 상자(쉐마), 이마, 손목, 팔뚝에 테풀림 -> 공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늘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 구약시대의 교육의 기본을 삼았다.
*쉐마에 나타난 신앙교육
-유일신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양식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 정체성
-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창세기에서 배웠다.
-신앙 전승의 교육방식(아무 때든지 강론하라, 대를 물려가면서)
-삶의 교육
-마음에 세기라, 부지런히 가르치고 언제든지 강론하라
-직관과 감각을 이용해서 하라.
*요즘은 쉐마 교육이 힘들다.
-교육의 역현상
-부모, 선생의 권위가 무너짐
-교훈할 수 있는 시간이 잘 생기지 않는다.
*직관과 감각
-시청각 교육
*토라
-법(율법)
-하나님의 거룩한 뜻,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
-사회 질서를 잡는 것(사회법)
-예배법
*회당
-회당에서 예배와 가르침
-회당에 먼저 대학의 수준에 해당한 교육 수준.
-학교와 교회가 모여 있는 모델을 보여주었다.
-중세의 교회 교육은 피라밋 구조를 이루어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함.
-초등교육은 체계집, 중등학교는 하 미드라쉬, 대학 아카데미
*신약시대 교육-예수 그리스도(예수 쇼크)
-예수님 오시기 이전에 통치해 왔던 헬라, 로마 제국이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문명적으로 발전이 있었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디에다가 마음을 두고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시대에 예수님 탄생을 전후로 해서 사람들이 그런 것에 대한 절대적인 관심을 가지고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스토아학파, 영지주의, 쾌락주의)
-영지주의: 고대적인 의미의 종교적 실존주의
-로마의 세네카(스토아학파)
-이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감.
-롬 7:24-25의 신존적인 문제를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었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구원교육이 중심
-새 언약에 근거
*교회를 통한 교육
-영지주의는 신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갈망은 강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이 갈망을 가지고 비전주의를 도구로 했지 때문에 아는 사람만 아는 교육이 되었다(함석헌이 신학).
-정치적으로 보자면 헬라나 로마 시대가 시간이란 문제를 두고 인간과 신과의 만남을 접어두고 하지 않았던 것(학문과 법에 전념)을 영지주의가 종교적으로 발흥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이끄는 주류가 되었다.
*예수님의 구원교육
-따로 공부함
*하나님의 나라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도록 하는 것
-영지주의는 이 땅을 가장으로 봄.
-본헤퍼 “하나님은 이 땅에 풀 한포기도 포기하지 않으셨다.”
*산상설교
-따로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로이드존스의 산상설교 설교집을 읽어보라.
-예수님이 보여준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회 구성으로서의 역할
-이 땅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비유
-예수님은 이야기꾼
-주변 사항을 고려해서 지어낸 일
-탕자의 비유(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지)
-우리도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능력과 연습.
*사도들의 신앙교육
-교회의 신앙교육의 역사는 신약성경의 신앙 교육보다 앞선다.
-산문보다 운문에 가까운 시가들이 성경에 반영됨.
-교회 교육의 역사는 성경 기록의 역사보다 더 빠르다.
-교리적인 내용 ->요리문담(기독교 세계관)으로 발전됨.
-기독교 교육의 첫 출발은 교리교육 이었다.
-기독교에서 학교의 효시는 교리문답 학교이다.
-교회적이었다.
*초보단계와 성숙단계
-예배가 초신자들의 예배(설교 중심)와 신자(세례)들의 예배(미사 중심)이 있었다.
-현대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체계의 기초
*고대 교회의 신앙 교육
-초대교회의 교육은 역동성인 반면 고대 교회의 교육은 형식화 조직화를 가지게 된다.
-영지주의와 도세티즘(가현설)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교리들을 세워가야 하기 때문이다.
-세례문답교육(3년간)-교리문답
*고대기독교사상. 한철하 참고할 것
-고대 교회사
-이레니우스(총괄갱신): 첫 조직신학자
코메니우스 전인교육론과 우리의 교회 교육
안영혁(총신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육의 필요는 원래 단적으로 전인성에서 비롯한다. 그 어떤 분야에서보다 교육에서 우리는 전인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그 기초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묻게 되고, 기초를 물을 때는 피할 수 없이 교육에 대하여 묻게 된다. 인간 및 공동체의 어떤 근본적 문제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할 때, 교육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교회 사역에서도 교육은 전체를 되돌아볼 때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교육에서 전인성을 말하는 것은 첫 번째이자, 일면 전체적이며, 마침내는 결론적 부분이다.
*똑 같은 이유로 우리는 오늘도 교회교육의 전인성을 고민하게 되었다.
1. 수없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필자는 먼저 현재 전인교육이 요청되는 현상에 대하여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가 타개해야 하는 현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2. 그 다음으로는 바로 코메니우스의 전인성 개념을 도식으로 제시할 것이다. 도식은 형식화의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이해에는 필수적이다. 이 도식만 보아도 우리는 기독교적 전인이 무엇인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3. 도식이 그야말로 도식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도식에 들어 있는 요소들을 간략히 해설할 것이다. 이로 하여 우리는 기독교적 전인의 세부에 대하여 얼마간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4. 필자는 보다 더 교회다운 방향으로 기독교교육의 전인성을 해명하기 위해 ‘거듭남 교육’이라는 주지의 개념을 전인성 논의에 결부시킬 것이다. 구원 사건이 모든 교육의 핵심이면서도 많은 교육적 주제 속에 희석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어 왔는데, 필자는 인간 성장과 거듭남이 함께 거론되는 교육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5. 앞서의 내용들로 교육학적, 신학적, 기반이 놓였다고 본다면 이제 그것이 실제 교육 활동으로 어떻게 펼쳐져야 하는지도 보여야 한다. 그래서 전인성과 관련된 기독교교육과정과, 6. 기독교교육 교수학에 대하여 논할 것이다. 7. 마지막으로 이 전인성이 바로 기독교교육의 목적임을 확인하고, 그것은 또한 교회 사역의 목적임도 확인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곁다리로 교육목회에 대한 주장도 잠깐 펼치고자 한다. 코메니우스가 궁극적으로 교회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교육학에서 교육목회학의 필요와 가능성과 용이성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필자는 아래의 순서에 따라 코메니우스 교육학이 지향하는 전인성에 대한 기술을 하려 한다.
1.전인교육 요청의 현상
2.코메니우스의 전인성 제시
3.전인성의 각요소
4.인간발달과 거듭남의 능력
5.전인적 기독교교육과정
6.전인적 기독교교육 교수학
결어-기독교교육의 목적의식과 사역의 방향
1.전인교육 요청의 현상
근래에 우리는 개신교 교회의 성장 정체에 대하여 수없이 말하여 왔다. 필자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개신교교회가 스스로의 시야와 활동폭을 위축시킨 까닭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전인적이지 못한 목회와 교육을 해왔다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 그 이상의 교육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개인과 교회의 발전 그 이상에 대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며, 모든 사회적 변화에 대하여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개발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현재 개신교 교회의 어려움은 스스로 사회와 격리되는 이분법적 의식에 기초한다고 본다. 바로 이런 면에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시야와 성장세대를 전인적으로 키울 전망에 대한 필요를 느낀다.
한편 사실이든 아니든 대형교회들은 교육에 있어 교단의 교육 역량에 부족을 느끼고 자체 교육 과정을 개발하고 있다. 또한 이른바 교육 선교회들도 그 나름의 교육과정들을 제안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전인성의 반영이라고 본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또 좀 다른 곳에 있다. 손에 꼽히는 대형교회들이 사회의 지탄을 받고, 그럼에도 그 규모를 유지하는 이면에는 시골 지역이나 도시 작은 교회들의 성장 정체가 있다. 대형교회들은 이미 규모를 갖추고 그 규모를 유지할 힘이 있지만, 오히려 시골 지역 교회들과 작은 교회들은 그런 능력을 갖지 못하여 주로 대형교회에서 비롯한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대형교회들의 상징적 잘못에서 비롯한 문제가 결국은 작은 교회들의 활발한 성장을 막고, 마침내는 이것이 개신교 교회의 성장정체로 결론 지워지는 현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또한 교단이든, 대형교회든, 또 얼마간 발전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교육선교회든 진정한 전인성에 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교육의 전인성에는 단지 내용적 전인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공동체(교단, 교회)의 전인성도 함께 있는 것이다.
1990년을 전후하여 이머징처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우리나라에는 주로 은사 집회를 중심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게 실제적 관심을 보인 건강한 교회 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시대의 낙오자들을 향한 아름다운 운동이었는데, 현재는 이 교회들조차 일반 교회와 다를 바 없는 교회로 변모되었다. 그들은 현재 전인성을 향한 모색을 하고 있다고 본다. 이 교회들이 초기에 사회적 소외자들에게 보냈던 따스한 관심은 오늘 전인적 교육을 형성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그러나 이머징처치 자체가 전인성의 모델은 아니다. 이머징처치의 주된 의식은 소외의 극복이었지 전인성 회복 같은 것은 아니었다.
사회도 전인성과 관련한 문제를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강남에는 대화방들이 있는데, 쓸쓸한 남성이 찾아가면 일정시간 동안 한 여성이 대화를 해준다고 한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자녀와 아내를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중국 동남아 등으로 떠나 보낸 기러기 아빠라고 한다. 그만큼 조기유학 열풍은 아직 진행 중이다.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취임 이후 서울 교육청은 체벌을 전면 금지시키기에 이르렀지만, 아이들에게 가장 가까운 교사들이 정치적 터치에 의해 체벌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교육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허탈하기 짝이 없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비인격적 언사와 체벌에 시달려 왔다. 모든 것이 상대적인지라 심약한 교사들은 오히려 독해진 학생들에게 시달리기도 했다. 아무리 선한 교육을 해도 악한 사람은 나오게 마련이지만, 교사와 학생간의 이런 불행도 교육의 전인성 부재에서 온다.
한편 자라는 세대들에게 사회는 너무나 불안하다. 청년 실업은 몇 년 안 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병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1992년에 서태지가 있었다면, 오늘은 장기하가 있다고들 말한다. 장기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엘리트이지만 청년들의 사회적 고민을 그의 노래들에서 잘 풀어 내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여기 나오는, 완전 낭패는 아니지만 어정쩡한 모든 말들은 바로 청년들의 상징이다. 오늘의 청년들은 어린 시절에는 자존심 짱짱하게 자란 사람들이다. 그래서 장기하는 이런 노래도 했다. “별일 없이 산다”. 이 말은 청년들이 바야흐로 고난의 행군 시절로 들어 섰다고 생각하고, 현재의 기성 세대가 자신들을 안됐다는 듯이 보고 있는 것이 싫다는 자존심의 표시인 것 같다. 싸구려 커피처럼 볼품 없어졌지만, 자존심만은 짱짱한 이들에 대하여 사회는 사실 적절한 대안을 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전인성은 아무런 실제적인 대답이 아닌 것 같지만, 이 문제에 대하여도 어떤 전인성의 관점을 견지해야 내야 한다.
이런 판국에 하나의 해프닝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바 있다. 행정 고시의 특채비율을 50%까지 높이겠다는 발표였다. 고시는 신분상승을 위해서는 가장 좋은 도구이다. 그런데 이걸 줄인다는 것이었다. 마침 외교부 장관이 사고를 일으켜주는 바람에 이 일은 찻잔 속 태풍이 되고 말았지만, 청년들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현재도 행시 특채율은 이미 37%로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긴 시간의 유보기를 거치면서 로스쿨은 정착되어 가고 있다. 사법고시를 위해 로스쿨에 가야 한다는 것은 그만한 학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법조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청년들은 늘 그런 위협, 모멸감, 빛나지는 못하는 자존심 이런 것들을 심중에 지닌 채 살고 있다.
이런 많은 문제들에 대하여 서민들이 답하는 방법이란 별로 없다. 국가에서 어떻게 잘 해주기를 바라야 하고, 사회가 통째로 인간다워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작지만 아직도 우리가 애써볼 수 있는 영역이 어쨌든 교육이고, 특히나 사회가 복잡하다고 판단하는 가운데, 어쩌면 좀더 통전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우리는 교육이 전인적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롬7:24-25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많은 것 중에 한 가지만 건지고자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째로 건지고자 하신 것이기 때문에 끝내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 우리는 많은 어려움이 이미 내 안으로 파고 들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더 전인적이 될 것인지 늘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 하나가 나는 이미 전인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교회까지도 스스로 전인적이 되기를 포기한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새삼 전인성을 다시 다지거나 혹은 새로이 해야겠다는 자각을 한다. 예수께서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눅12:42) 하고 물으신다. 우리는, 저희가 전인적 교육 가운데 깨어 있겠습니다, 라고 대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2.3.코메니우스의 전인성 제시
이제 전인성을 논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에 필자는 전인성에 관하여 말하려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교회가 전인성을 구현해 내어야 하는데, 그 골격은 이런 것이다. 교회가 어떻게 전인성을 얻어올 것인가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의지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교육에서이다. 그렇다면 교육에서 전인성을 얻어오자면 우리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우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전인적 인간형을 형성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성장 세대들도 마찬가지로 전인적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런 한편에 요청되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면 교회가 혹은 교단이 이 문제를 큰 틀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알고 보면 이런 전인성에 대한 보다 적절한 깨우침을 형성시키는 것도 교단이 크게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1)세권의 책
먼저 전인적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전인적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 안에 움츠려 있으면서 독불장군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에게는 오늘 우리를 이 땅에 존재하게 하시고 구원을 베푸신 삼위하나님이 계시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전인성을 얻기 위하여 그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된다. 그랬을 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3권의 책이다. 하나는 성경이요, 그 다음은 이성적 인간 자신의 정신이며,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창조 하신 자연 세계이다.이 말은 갑자기 우리를 어떤 사상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상식적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하는 성경과 이성의 활동인 정신과 창조 세계가 아니고 무엇에서 배우겠는가? 코메니우스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면, 이것이 아주 명확하게 교육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희랍 철학자들은 세계는 신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세 존재자의 합이라고 존재론적 정리를 한 바가 있다. 코메니우스의 3권의 책 이론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세계 위에 계셔서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고려할 존재자는 분명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지존으로 계시고 우리가 공부하는 책은 하나님 자신으로가 아니라 성경으로 표현되었다. 즉 하나님은 지존이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성경과 이성과 자연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 철학과 기독교 세계관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론이다. 그렇게 우리는 성경과 인간 자신과 자연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게 되어 있으며, 그 지식에 있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은 바른 진리를 얻는 데 있어서 첫 걸음이다. 이 세 방향에 균형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코메니우스가 말하는 전인성의 첫 걸음이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이 세 방향의 지식에 대하여 상징성을 가진 학문의 이름을 결부시켰다. 성경과 관련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신학이 결부된다. 인간과 관련해서는 결국은 도덕성이 문제라 보고 윤리학과 정치학을 결부시킨다. 세계와 관련해서는 지식의 철저함을 염두에 두면서 과학과 철학을 결부시켰다.코메니우스는 적어도 청소년기에 들면 개념이 생기기 때문에 이 때부터는 맹아적 형태의 신학, 정치학, 철학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말하자면 교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전인적 교육의 가장 기본적 통찰이다. 이것을 풀면 경건과 도덕과 지성이 된다.
3)3가지 인식 기능
코메니우스는 그냥 세상에는 그렇게 세 가지 책이 있다고 말하고 그치지 않았다.우리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바로 그 진리의 원천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식을 얻어 오는가? 이것을 위하여는 말하자면 그 진리들을 알아차리는 인식의 기능이 있어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세 가지 빛이라고 하였다.저 3권의 책과 느슨한 일대일 대응 방식으로 말하자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하여는 신앙이라는 인식의 기능이 있고,인간 정신의 책에 대해서는 이성이 있다. 이성이란 엄밀히 말해서 인간의 판단에 대한 인식을 하는 기능이다. 그리고 자연의 책과 관련해서는 감각이 있다. 자연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판단할 것이 없이 우리 안으로 인식되는데, 이것은 감각 기관에서 일어난다. 물론 인간은 이 감각을 통해 들어온 사실들을 엮어 내면서 판단을 하게 되고, 여기에는 이성이 작용하게 된다. 요컨대 성경과 인간과 자연이라는 세 책에 대하여 인간은 신앙과 이성과 감각이라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나가서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통찰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전인성을 다시 한 번 말할 수 있다. 전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 3가지 인식이 잘 작동해야 한다. 오늘 사회는 우리 교회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는 듯하다, “당신들의 그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대체 이성을 가지고 덕성스럽게 세상을 살피는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세상이 이런 말로 우리를 평가할 전인성에 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런 눈총을 받고 있는 만큼 전인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기본 3가지 인식에 유념하여야 한다. 창조과학회는 기독교의 진리를 과학적으로 잘 사수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말할 수 없이 성경과 기독교를 폭이 좁은 지적 전통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필자는 그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고, 진정으로 신앙과 이성과 감각을 균형적으로 잘 써서 그 논의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3)인격의 3요소
그렇다면 이 인식의 기능들이 바로 인간 자체인가? 그렇지는 않다. 인간 성장의 기초인 인식의 기능이 자라는 것과 병행하여 “나”라는 인격이 자란다. 자라는 것은 인식 기능인데도 그것을 통전하는 인격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가 교육학자인 필자에게는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인간은 인식기능을 넘어 인격적 존재로 자란다. 인간의 인격의 요소는 늘 지정의로 정의되어 왔다. 인간은 어떻게 지정의라는 요소로 규정될까? 필자는 그것은 역사적 귀납이라 본다. 역사 내내 보아온 인간의 인격은 바로 지정의로 된다는 것이다.우선 저 인식기능은 무엇보다 ‘지’와 연관되어 있다. ‘정’을 따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지’와는 무관하게 인간의 의미를 결정짓는 요소로 늘 드러났다는 것이다. ‘정’은 말하자면, ‘지’가 인간을 결정적으로 규정짓듯이 그렇게 인간을 규정짓는 것이다. 코메니우스만 하더라도 이 감정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하나의 격정 같은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감정보다 좀더 일찍이 인격의 요소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바로 의지이다. 의지는 말하자면 실행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에는 말하자면 그 인격의 미래도 드러나며, 초월의 자리도 드러난다. 중세 말기의 둔스 스코투스나 윌리엄 오캄 등이 주의적(主意的) 사상을 가졌던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주로 지성과 관련하여 존재를 붙들어 놓던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을 때 의지는 매우 중요해 보였다. 그런 면에서 종교 개혁가들은 상당부분 이 주의주의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지정의의 합체인 이 인격은 인식 기능과 깊은 연관성을 가졌다. 인식이 성장하면, 그에 따라 인격성이 고양된다. 그리고 그 고양된 인격성은 다시 인식 기능을 제고시킨다. 그리하여 인식기능과 인격성은 교호적으로 작용하면서 자라간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인식기능과 인격성의 교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뛰어난 교사라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인식과 인격의 교호작용이 잘 일어나도록 돕는 사람이라는 뜻이 될 수 있다.
4)성장의 열매
그렇다면 인식 기능과 인격성은 교호적으로 작용만 하는 하나의 사이클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이클로서 그 열매를 내어 놓는다. 인격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좋은 인격을 가짐으로 하여 지성과 덕성과 경건성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까 아무개가 참 신앙(경건성)이 좋다고 말할 때에는 먼저 신앙과 이성과 감각이 잘 작용하여 지정의를 그 요소로 하는 인격이 잘 자라는 가운데, 그 인격성으로 하여 훌륭한 신앙이라는 열매를 내보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 열매는 지금 예를 든 경건성에만 결부되는 것이 아니라, 덕성과 지성에도 함께 결부된다. 말하자면 인식 기능으로서의 신앙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인격의 열매로서의 지성도 별로 시원찮을 것이고, 또 인식 기능으로서의 이성이 잘 작동하지 않으면 인격의 열매로서의 신앙도 제대로 자라지 못할 것이며, 인식 기능으로서의 감각이 잘 작동하지 못한다면 인격의 열매로서의 지성도 잘 자라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는 신앙과 이성과 감각이 잘 작동하는 데서 인간 성장이 출발하는데, 그것은 다시 지정의의 고른 성장에로 귀결되어야 하고, 이 양자의 교호 작용 가운데서 지성 덕성 경건성이 함께 잘 자라야 한다. 그렇게 자란 사람을 두고 우리는 전인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일정의 무신론적 내지는 반신론적 혹은 신성모독적 표현을 했다고 그에 대해서 백안시 하는 태도가 있지만, 일단은 그런 부정적 사고는 좀 접어두고 그가 펼쳐낸 감정에 대한 이해를 배우는 것도 우리에게는 요청된다. 그의 그 많은 과격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심리학과 상담학과 정신의학에서는 그의 말을 일단 가장 권위 있는 과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끝내 프로이트의 어떤 진술들이 전인적이지 못했다는 진술을 확보하게 되겠지만, 그가 인간 감정의 세계를 알려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오늘에 이르러 이른바 감정코치와 같은 감정교육의 체계도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프로이트가 처음 병리학적 감정을 말할 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감정 연구는 그런 역사적 궤적을 그려왔다. 이런 흐름을 담담하고도 투명한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 전인적 사람을 교육해내야 하는 우리에게 요청된다.
이런 모든 과정을 잘 거친 균형적 인격과 열매를 우리가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는 것이 크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하나 배우고 균형 잡아 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바 기독교적 전인 즉 하나님의 형상이다.
4. 기독교교육학에서 거듭남의 중요성
하나님 형상의 전체적 내용을 말하기 앞서 이야기 해야 할 핵심적 사항은 자연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듭남의 의미이다. 기독교교육의 관점을 끊은 채라면, 지정의라는 인격의 요소를 채운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거듭남의 의미는 없다. 대략 말해서 거기에는 도덕적 인간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거듭남이야말로 기독교교육과 일반교육을 갈라놓는 시금석이다. 그렇다면 이 시금석으로서의 거듭남은 기독교교육에서 어디에 자리해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거듭남으로 인하여 나뉘게 되는 기독교교육학과 일반교육학의 역사적 추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일반교육학과 대비된 기독교교육의 정체성을 파악하려고 할 때 단연 두드러지는 사람이 바로 코메니우스이다. 코메니우스는 17세기 초반 일말의 의심이 없이 기독교교육을 그냥 교육이라 불렀다. 정치적 정황으로 인하여 코메니우스의 교육학 자체가 활발하게 계승되지는 않았지만, 코메니우스가 전개한 그 교육학이 당연히 기독교교육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후대의 학자들 중에는 그 기독교성을 떼어낸 교육학을 하려는 이가 있었다. 결코 비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기독교성 자체를 자신의 철학에서 주제적 관심으로 삼지 않았던 칸트의 영향으로, 그의 교수직을 계승한 헤르바르트는 이른바 일반교육학을 시도하였다.일반교육학은 말하자면 기독교교육학이 아닌 교육학에서 신앙의 부분은 제외한 한 부분에 대한 교육학이었다. 기독교교육학은 원래가 인간의 모든 것에 관련된 통전적 교육학이었고, 일반교육학은 부분적이지만 인간만으로 가능한 교육이 어디까지인지를 탐구하는 교육학이었다. 그래서 일반교육학의 이상은 결국은 도덕적 인간이었다.
도덕적 인간에서 끝나지 않는 기독교적 인간의 특성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그것은 단연 거듭난 삶에 있다. 예수께서는 영생을 묻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요한복음3장), 바울서신의 결정판이라고 할 로마서는 거듭남 해설서와도 같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달라진 것의 핵심은 하나님 은혜로 인하여 거듭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었다.
신학에서 거듭남을 확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도 그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에서는 미묘한 차이들을 드러낸다. 최근 한국개혁신학회에서는 헬무트 틸리케 심포지엄이 있었는데, 헬무트 틸리케는 말하자면 거듭남에 있어서의 그리스도 중심성을 확연히 보이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꼭 같은 중요성에서 견지하려는 신학자였다.이것이 개혁신학의 전체적 폭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거듭남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에 도달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면에 있어서 코메니우스는 철저했다. 코메니우스 교육학은 바로 그런 면에서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에 매우 철저한 신학자요 교육학자였다.그는 창조주 하나님에서 출발하는 세계관적 구조를 명확히 하는 한편에 인간의 부패한 특성은 명확히 그리스도 안에서 치유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피력하였다.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며, 또한 거듭나는 것이다.
교육이 구원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은 교육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다. 교육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무도 부인하지 않지만, 교육은 과연 구원을 가져다 주는가? 그런데 우리는 이 질문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교육은 인간의 도구 가운데 가장 구원을 가져다 줄 것 같은 도구라는 것이다. 그만큼 교육은 구원의 도구로서 탁월하다. 그래서 리차드 오스머는 자신의 책 서론에서 교육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 도구라고, 칼빈의 입을 빌어 말하였다.교육은 구원을 위한 도구이며, 특히 탁월한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에서 거듭남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해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필자의 연구에 있어서는 제임스 로더의 연구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제임스 로더는 이미 작고한 기독교 교육학자이자 상담학자이다(1931-2001). 필자가 볼 때 그의 기여는 첫째는 인문학으로만 보였던 발달이론에 신학을 결부시킨 것이고, 그 둘째는 특히 발달 단계를 거듭남의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는 거듭남의 기독교교육학에서 벽돌 두 개를 놓았거나 혹은 계단 둘을 쌓은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이야기(인문학적 발달이론에 신학을 결부시킨 것)부터 해보자. 삐아제는 칸트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서 인지발달이론을 전개하였다. 0세에서 2세까지는 감각운동기라 하여 아이가 몸으로 배우는 시기를 겪으며(감각운동지능의 시기), 그 이후 유아기(6세 정도까지)에는 감각을 중심으로 세상을 배우고(전조작적 지능의 시기), 아동기에는 구체적인 사실들 가운데서 세계를 이해하고(구체적 조작 지능의 시기), 청소년기가 되면 형식적 조작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단계들을 거쳐서 사람은 개념을 가지고 판단하는 존재로 자란다는 것이다. 도덕성발달이론을 펼친 로렌스 콜버그는 스스로는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지칭하지만 삐아제의 절대적 영향 아래서 관습적 도덕 이전과, 관습적 도덕, 그리고 관습적 도덕을 넘어선 수준으로 인간 발달을 정리한다. 각 수준마다 두 단계가 있어서 여섯 단계가 된다. 제임스파울러는 콜버그의 여섯 단계를 그대로 가져와서 또 신앙발달 여섯 단계를 논하였다. 파울러의 경우는 분명 신앙에 대하여 논하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신학적인 내용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인간성 발달의 이야기로서 인문학의 자리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면서 저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인간 속에 인간을 자라도록 하는 내적 구조가 있다고 하여 구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제임스로더는 그러면 정말 인간은 그렇게 자라는가 하고 묻는다. 로더는 성장하려는 인식이나 감정 혹은 윤리성보다 더 근원적인 발달의 동인은 오히려 우리 속의 영이라는 주장을 편다. 발달의 보다 근원적 원인은 영이며, 그 영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닮았고, 그래서 늘 자라는 사람들 안에서는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성장을 그냥 보고만 계신 것이 아니라면 이보다 더 적절한 설명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제임스 로더는 말하자면 저 구조주의자들의 발달 이론을 그 어느 면에서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구조보다 더 강력한 발달의 동인은 성령이시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로더는 성령의 역사를 그냥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며 끝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상담학적 소양까지 동원하여 실제 각 시기마다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간의 영은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적고 있다. 그리하여 태어날 때에는 태어나기를 거부하는 감정과 그 거북한 세계에서 자신을 맞아준 따뜻한 손길을 함께 이야기한다.또 2세가 되기 전 영아기에는 더 높은 누군가를 신뢰한다는 면에서의 외부적 얼굴과 내부적 거부감이 겹친다고 한다.그리고 로더가 걸음마기라 부르는 2-3세 시기에는 자율성과 수치심 가운데서 영은 오히려 뼛속 깊이 인간 안에 자유 정신을 길러 놓는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진정한 자유 정신은 인간 발달의 구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잇닿아 있는 인간의 영에서 오는 것이다.사실 저들 인문학의 구조주의자들은 발달의 사실에 대해서 기술할 뿐 그 근원적 동인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로더는 참으로 담대하게 그 동인은 바로 인간의 영이며, 더 근본적인 동인은 성령이시자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해명한다.
그런데 제임스 로더가 발견한 것은 단지 이런 두 가지 사실이 아니다. 인간 안에는 늘 긍정과 부정이 팽팽한 긴장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발달이론을 취할 때 의도적으로 에릭에릭슨의 발달이론을 취한다. 그것은. 신뢰대 불신/ 자율성대 수치심/ 주도성대 죄책감/ 근면성대 열등감/ 정체성대 역할혼란/ 친밀감대 고립/ 생산성대 정체/ 자아통합대 절망, 으로 불린다. 로더는 말하자면 이런 긍정과 부정의 긴장은 마치 죄를 가졌으나 은혜를 입은 인간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구원 받는다. 그런데 그 구원받는 것이 연령을 달리하면서 계속하여 구속의 역사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구조는 마치 성육신의 구조와도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인성과 신성을 함께 가지셨다. 인성에는 구원받아야 하는 죄가 결부된다. 마치 그렇듯 긍정과 부정 가운데 있는 인간이 결정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은 원래 있는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라는 것이다. 인간 속에서 신뢰와 불신이 싸우는데, 우선은 그 싸움 자체가 성장을 몰고 오며, 한편 그 싸움이 결정적으로 신뢰 쪽으로 기울어서 더 긍정적인 성장을 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제임스 로더는 이렇게 평생 인간 속에서 거듭남의 구조가 팽팽한 긴장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인간을 교육학적으로 혹은 발달이론적으로 해명한 매우 탁월한 견해이다.
그런데 이런 발달이론의 시초를 이룬 사람이 바로 코메니우스이다.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교육철학서 범교육학에서 실제 교육의 전개 과정으로 연령별 학교 이론을 펼쳤으며, 그것은 태아기에서 죽음의 학교에 이르는 8단계로 형성된다. 코메니우스는 로더와 같이 복잡한 구조를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연령을 달리 하면서 다르게 교육해야 하는 사실에 대해서 명백히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상 첫 진술이다. 로더와 코메니우스의 결합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아이들은 분명히 신체적 정신적으로 자라는데, 그 자라는 동인은 영에 있으며, 영은 하나님의 영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로더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거듭남의 사실은 발달의 각 시기마다 중요한 것이 된다. 그래서 바로 그 거듭남의 교육으로부터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거기에서부터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은 전인성의 출발점이자, 거듭 확인되어야 하는 기독교적 전인성 그 자체이다.
5. 기독교교육 과정
교육학에서 전체를 살핀다는 것은 총체적으로는 교육과정을 살펴보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코메니우스는 또 다시 교육과정론의 훌륭한 선생이다. 앞서 기술한 대로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총체적 과정이 근본적으로 3권에 책에 있다고 보았다. 성경과 인간과 자연, 그것이 바로 코메니우스 교육과정론의 출발이다.
그러나 마치 무슨 선문답처럼 ‘성경과 인간과 자연을 보시오’하고 던져 두지 않았다. 그는 우선 프란시스 베이컨과 백과전서학파의 영향 아래 16-17세기의 신학문에 찬동하면서 그 과학적 방법을 활발하게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코메니우스의 청년기 논문으로 자신이 구상한 백과사전의 서문으로 생각하고 쓴 글로 「만물의 극장」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지식의 영역에 대하여 다음의 7가지를 열거하였다. 1)과학적 지식 2)사람들 사이의 덕성 3)멀리 있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 4)유전하는 사물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배운다 5)미래를 배운다 6)전체성을 가진 복합적 교훈을 얻는다 7)하나님의 직접성이 관여된 기적과 같은 일들에도 도달한다.코메니지우스는 과학적 지식이 신지식의 출발점이라 보고, 그 뒤를 이어 인간 사이의 덕성과 경험, 그리고 가장 높은 지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꼽았다. 아직 자신의 범지혜(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알 때 비로소 지식이 참된 지식으로 역할 한다는 코메니우스의 사상)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는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을 안다는 것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해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침내 코메니우스는 자신의 범교육학에서 그 완결적 형태를 보여준다.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 3장 11항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으로 다음의 12개항을 차례로 열거하였다. 1.존재 2.건강 3.의식 4.명석 5.자유 6.행위 7.소유 8.사용 9.존경의 획득 10.언어 11.호의적 공동체 12.신앙적 지식. 이 12개항은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특성을 기초로 하여 세계를 바라 보았을 때 꼭 알아야 한다고 판단할 범주들의 열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의 범주를 10개로 제시하였고, 코메니우스보다 더 후대에 태어난 칸트는 인식의 범주를 4개 분야 각 3개씩 12개로 정리한 바 있다. 코메니우스는 기독교교육학의 관점에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특성을 중심으로 세계를 이런 12개 범주로 본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말하자면 이 12가지를 다 배우면 그것은 모두를 배우는 것이라 보았다.
교육과정론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코메니우스는 바로 이 12개 범지학적 교육학 범주를 염두에 두면서 연령별 학교를 구상한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모든 것에 대한 기술이 과연 연령별 학교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는 연구해야 할 내용이다. 그 사실여부를 확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오늘의 기독교교육학자로서 그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내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코메니우스의 범교육학은 기본적으로 교육과정론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한편 우리는 코메니우스의 이 교육과정론이 교육과정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 이른바 ‘교수요목’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교수요목이란 이 시기에는 이런 것을 배우면 된다는 것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표하는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건 그 교수요목은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육과정론 자체를 교수요목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교육학을 너무나 오로지 과학으로 만들 뿐이다. 무엇을 가르치면 된다는 교수 과목이나 요목으로 교육과정론이 종결되어서 마침내는 과목의 이름과 배울 대상들만 남는 것이 아니라, 끝내 배움의 주체인 각 연령의 사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과정은 단지 교수요목으로 환원되지 않고, 아직은 다 대답되지 않은 그 무엇으로 남는다. 이 남은 자리를 채우는 사람은 결코 시대마다 나타나는 뛰어난 교육학자가 아니다. 이 남은 자리를 메울 사람은 바로 교사들이며, 또한 학생 자신들이다. 아직 온전히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교사와 학생이 고려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그것은 교육학의 어려움이기도 하고 기쁨이기도 하다. 교육과정 또한 그래서 묘미를 가진 것이다.
실은 교단의 교육과정이 실행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적어도 교수 요목은 아주 선명하게 교단의 모든 교육 담당자들에게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 요목들을 연결 짓는 논리가 무엇인지 밝혀 두어야 한다. 말하자면 교수요목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두고 모든 기독교 교육의 정신을 동원해서 교육과정을 밝혀야 한다. 오늘 우리가 교육에서 전인성을 문제삼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이 교육과정을 통하여 교수요목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기초로 교육적 정신을 철저히 밝혀 낸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 교단이 드러낼 수 있는 전인성의 가장 포괄적인 진술이 될 것이다.
필자의 상식으로는 교육과정을 출판한 기관이나 출판사는 어디에서건 교육과정 설명의 요청이 있으면 거기에 가서 해명을 해 주어야 한다.또 교단과 같이 큰 기관은 이와 관련된 교육과정 해설서를 출판할 의무가 있다. 전인성의 추구란 정말로 어려운 것이지만, 전인성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을 코메니우스 같은 선조가 해준 것이라면, 교회의 앞에 서서 교육과정을 형성시키는 우리로서는 이런 작업을 충실히 함으로써 모든 성도와 어린 학생들 안에 전인성 형성의 기초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6.교회 교육의 교수학
원래 교육학 전반에서 가장 실제적인 자리는 교육과정론과 교수학이다. 서로 다른 학자들의 이야기를 마구 엮을 수는 없지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가 교육학의 가장 실제적인 문제라고 할 때,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교육과정론이라면,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 교수학이다.
교수학은 교육과정론에 비하면 그래도 다소간 접근이 용이하다. 교육과정에 따라 교수법이 정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교수법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가르침의 내용은 그래도 원칙을 따라 방법적 관점에서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교수학에서 꽤 긴 시간 신뢰를 얻고 있는 Sara Little의 교수법 규정을 한 번 이야기하는 것이 교수법 이해에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사는 교수 행위를 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책임을 떠맡게 된다. 즉 자기네들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알고 점차로 그 진리를 적절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할 책임뿐만 아니라, 학술의 구조와 과정을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책임도 떠맡는다. 그리고 이 구조와 방법은 그 자체로서 진리에 대해 증거하며, 또한 학습자들이 수용하는 법, 지식을 축적해 가는 법, 진실하게 다른 사람들과 상호 반응하는 법 및 그들이 발견한 의미에 의해서 변화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인용문 두 번째 문장까지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용할 책임이 교수자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건 상식이다. 한편 바로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하여 학생에게 증거하고, 수용하게 하고, 지식을 축적하게 하고, 그 내용으로 타인과 상호 반응하게 하고, 변화를 이끄는 것까지가 교수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교수법이란 잘 가르치는 방법이다.
바로 이런 교수학적 활동에 있어서도 코메니우스는 단연 선구자이다. 그는 교수학자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한 세대 정도를 먼저 살았던 라트케에게서(1571-1635) 교수학적 통찰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는 교수학을 교육학의 그 어떤 분야보다도 중시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대교수학은 바로 그런 코메니우스의 걸작이다. 이 세상에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코메니우스의 대교수학을 읽지 않고 공부한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이다.
그랬던 코메니우스 교수학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은 또 단연 귀납적 지식 이해의 관점에 있다고 본다. 코메니우스는 대교수학 16장에서 이른바 자연주의 교수학을 다루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를 따라서 가르침을 펼쳐가는 방법인데, 그것이 바로 귀납적 지식 전달 방법이다.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Ⅰ.자연은 적절한 시기에 모든 것을 행한다(귀납의 시작)
¨ Ⅱ.재료준비 (내용으로 시선 돌리기)
¨ Ⅲ.쓸모 있는 재료의 선택 (귀납의 구체적 대상 선택)
¨ Ⅳ.하나에 하나를 이어가기 (귀납에서 유사성 획득)
¨ Ⅴ.모든 것을 내적으로 시작(개념화, 일반화)
¨ Ⅵ.일반에서 특수로(적용의 시작)
¨ Ⅶ.한 걸음 더 나가기(적용의 확장)
¨ Ⅷ.시작한 것 끝 맺기 (지식의 획득)
¨ Ⅸ해로운 것 피하기(패러다임에로의 편입)
귀납법적으로 그의 교수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의 의미를 괄호 속에 표시하였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코메니우스 교수학은 근간에는 귀납법이 자리하고 있다. 4항에서 귀납적 원리를 얻어서 5항에서 일반화를 이룬 다음에 6항에서 특수로 나가는 것은 연역에로 나가는 것인데, 지식 습득의 후반부에서 연역의 단계를 가지는 것은 지식 습득 방법으로서의 귀납법의 한 단계이다. 그렇게 연역을 시행하고 마지막 9항에서는 그 원리의 유익성과 해악성을 가늠하기까지 하고 나면 기존 지식체계에 흡수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리를 늘려갈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지식을 늘려가는 것이다.
2)교사론
필자는 교육학에서 그 어떤 말보다 귀납이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일단 귀납은 지식 습득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연역은 일견 귀납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지만, 귀납적 연구의 말미에는 되돌아서 적용하는 연역의 단계가 함께 있기 때문에, 실상 현대적 학습이론으로서의 귀납적 방법은 연역까지도 포함한다. 교사는 먼저 얻은 지식을 학생에게 전달해 주는데, 지식이 전달되는 방법은 바로 귀납법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되는 데는 귀납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코메니우스는 교사의 자격으로 1.자신이 가르치는 바 그 인격을 가지고 있을 것 2.가르침의 기술을 가지고 있을 것 3.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 그렇게 3가지를 들고 있다.그런데 그 가르침의 기술은 뭘 말할까? 필자는 그 핵심이 귀납의 이해에 있다고 본다. 물론 오늘에 와서 앞서 말한 발달이론이라든지 하는 것이 있지만, 그것이 보다 현대적 개념이라고 본다면 지식 습득과 전달의 방법으로서의 귀납법 이해가 보다 기초적 영역으로서 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면 발달적 변화에 대한 이해도 코메니우스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연령별 학교에 대한 기술을 한 첫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까 잘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좋은 교사가 요청되는데, 그 교사는 인격 및 최선을 다하는 태도와 함께 가르침의 기술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중에 가르침의 기술이라는 말은 무엇보다 귀납적 지식 이해에 대한 이해력을 뜻한다. 그 방법은 앞서 말한 대교수학의 제시로 대변할 수 있으며, 범교육학에서는 교사론에서 비교연결법 혹은 종합비판의 방법이라는 말로 보다 인식론적 설명을 시도하였다.우리는 이런 기본 사항 다음에 사라 리틀이 꼽은 내용들을 덧붙일 수 있다. 그러면 전인을 길러내기 위한 우리의 준비는 아주 기초적인 데부터 꽤 넓은 자리까지 마련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세세한 부분은 역시 교사 자신에게 달렸다. 필자는 코메니우스의 교육학 기술 가운데 “방법은 많다”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본다. 그것은 이미 개발되어 있는 방법이 많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나름의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인성을 위한 교회교육의 교수학은 그렇게 성립한다.
결어-기독교교육의 목적과 사역의 방향
기독교인이 전인적이 된다는 것은 기독교교육이 전인적이 된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기독교교육은 다름이 아니라 전인적 기독교인 양성을 목표로 한다. 그것을 우리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하나님 형상이라고 불러 왔다. 교회의 교사는 교회에 나아온 모든 성도들이 전인적 기독교인 즉 하나님 형상에로 회복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코메니우스는 이것을 교육적으로 돌보는 것이라 하였다.그러니까 교회 교육은 한 성도가 기독교적 전인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말미에서 한 가지 더 들추어 두어야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전인적이 되기 위해서 하는 일이 교육이라면 교회는 온전히 교육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목회학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교육목회학이라는 말은 주로 성인들의 교회 교육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어 왔는데, 일단 그 의미규정은 중요하다고 본다. 성인들도 분명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렇다. 그러나 교육목회가 어떻게 어른에게만 적용되겠는가? 교회 사역이 전체적으로 교육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교회의 인적 조직도 교육목회가 원활하도록 된다면 가장 효율적인 조직이 될 것이다.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사회적인 활동 또한 교육을 통한 변화이다. 그렇다면 그 또한 교육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렇게 교회는 전체적으로 교육적 조직이 되는 것이 21세기 교회의 중대한 방향성이다.
참고문헌
Comenius, Johann Amos, Pampaedia Allerziehung, 정일웅, 범교육학, (서울: 그리심, 2005 수정2판).
- Allweisheit, tran. Franz Hofmann, (Berlin: Luchterhand, 1992).
- Didactica Magna, 정일웅, 대교수학, (서울: 창지사, 2002).
Gottman, John, 정창우, 존 가트맨식 감정코치법, (서울: 인간사랑, 2007).
Dieterich, Veit-Jakobus, Jahann Amos Comenius, 최진경,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서울: 지만지, 2008)
Herbart, Johann Friedrich, Allgemeine Päpagogik, 김영래, 일반교육학 (서울: 학지사, 2006).
Lamprecht, Sterling Power, Our Philosophical Tradition, 김태길, 윤명로, 최명관, 서양철학사, (서울: 을유문화사, 1963, 33판)
Little, Sara, 사미자, 기독교교육 교수방법론,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Loder, James E., Logic of Spirit, 유명복,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인간발달, (서울: CLC, 2006).
Miller, Donald E., Reinventing American Protestantism, 이원규, 왜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는가? (서울: kmc, 2008).
Osmer, Richard R., 사미자, 신앙교육을 위한 교수방법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Richards, Lawrence O. Bredfeldt, Gary J., Creative Bible Teaching, 안영혁, 이순옥, 창조적 성경교수법 (서울: 그리심, 2010).
Walker, Williston, A History of Christian Church(4thed.),송인설, 기독교교회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이들의 장점과 특성에 대한 진지한 연구서로 다음의 책이 있다. Donald E. Miller, Reinventing American Protestantism, 이원규, 왜 그들의 교회는 성장하는가? (서울: kmc, 2008).
Johann Amos Comenius, Pampaedia Allerziehung, 정일웅, 범교육학, (서울: 그리심, 2005 수정2판), 6.2.
이런 면에서 코메니우스는 그의 교육학을 신학적 철학적 상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정일웅, 범교육학, 6장(p.313).
일단 이것이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이라는 것을 알고 가자.
범교육학, 2.17; 4.17. 즉 감각과 이성과 신앙.
신앙이 단지 무슨 기능이기만 하다는 오해는 하지 말자. 그러나 신앙은 분명 인식의 기능을 한다. 알기 위해 믿는다고 했을 때 그 믿는 것은 분명 인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범교육학, 4.16.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인간의 본성에 “지, 의, 행”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감정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해 보이는데, 이것은 아직 감정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역사적 상황을 보여준다. 범교육학 7.1.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다시 “지, 정, 의, 행”이 자라야 한다고 말하면서 4자를 모두 말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인격의 3요소 “지정의”에 “행”을 인격의 실제 표현으로 보면 될 것이다.
범교육학 1.13. 여기서는 바로 감정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무감각한 충동’등의 개념은 잘못된 감정을 가리키고 있다.
Sterling Power Lamprecht, Our Philosophical Tradition, 김태길, 윤명로, 최명관, 서양철학사, (서울: 을유문화사, 1963) 33판, pp.289-297.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Christian Church(4thed.),송인설, 기독교교회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p.403, 408.
교육학적 관점을 더 진진시킨다면, 이것은 관찰과 해석 양자를 다 실행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John Gottman, 정창우, 존 가트맨식 감정코치법, (서울: 인간사랑, 2007).
Johann Friedrich Herbart, Allgemeine Päpagogik, 김영래, 일반교육학 (서울: 학지사, 2006).
칼바르트는 바로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일종의 신화처럼 표현하였다.
그런 면에서 코메니우스는 교육을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한 교육적 돌봄으로 보았다. 범교육학, 서론; 1.1.
범교육학 2.19.
Richard R. Osmer, 사미자, 신앙교육을 위한 교수방법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5), 서론.
James E. Loder, Logic of Spirit, 유명복, 신학적 관점에서 본 인간발달, (서울: CLC, 2006).
상게서, pp.115-118.
상게서, pp.160-164.
상게서, pp.178-183.
Jan Amos Comenius, Allweisheit, tran. Franz Hofmann, (Berlin: Luchterhand, 1992), pp.63-64.
Lawrence O. Richards, Gary J Bredfeldt, Creative Bible Teaching, 안영혁, 이순옥, 창조적 성경교수법 (서울: 그리심, 2010), 258.
그러니까 말하자면 반드시 교육과정이 교수법에 선행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알게 된다.
Sara Little, 사미자, 기독교교육 교수방법론,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88), p.17.
Veit-Jakobus Dieterich, Jahann Amos Comenius, 최진경,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서울: 지만지, 2008), p.24.
Johann Amos Comenius, Didactica Magna, 정일웅, 대교수학, (서울: 창지사, 2002), pp.165-184.
범교육학, 7.3.
또한 발달이론 부분은 교육과정에서 다루는 것이 영역적으로 보다 옳다.
범교육학, 7.16.
범교육학,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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