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중세의 개념과 시기
*중세교회사란 “중세에 있었던 교회의 이야기”
- 중세
- 교회
- 이야기(Geschichte)
*중세:
-중세라는 개념은 일차적으로 고대와는 다른 어떤 시대라는 것 때문에 나타난 개념이다.
*고딕:
-"야만적"이라는 뜻이며, 400년전에 중세(media aetas, medium aevum)은 완전히 경멸적인 의미를 지녔다.
-막간 시대(intermezzo)로서 이해하였다.
*파리 근교에 있는 생제르망 묘지에 있는 데카르트의 묘비는 "학문의 근거를 다시 놓은 사람"reconditor doctrinae)이며 인간 이성의 권리들을 옹호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기록한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사 강의』에서 6세기부터 16세기 사이의 천 년을 재빨리 '벗어나기'위해 "한 발짝에 7마일을 걷는 장화를 신고" 싶다고 말한다. 중세 철학을 "해부하듯이 공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나친 요구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중세 철학이 장황하면서도 동시에 빈약하기 때문이고, 끔찍하게 씌어 있으면서 부피만 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 중세는
-“중세” 라는 표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프란체스카 페트라르카(Frencesco Petrarca, 1304-74)가 쓴 편지의 내용에서 등장한다.
-“나는 살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비탄의 시대, 이 정말로 추악한 시기로 추방하듯 내던진 운명에 대해 나는 분노를 금치 못한다. 더 일찍 태어나거나 훨씬 후에 태어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행복했던 시대는 이전에 있었고, 아마도 이후에나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들의 중간시대, 쓰레기인 우리의 추악한 시대를 보고 있다.”-Epistula metrica XXXI <III 33>-
*페트라르카는 자신들의 시대가 가진 추악함에 분노하고 있었으며, 이것과는 다른 두 시대, 즉 그의 앞 시대와 이후 시대를 구분해 놓고 있다.
-인간의 행복을 전제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시대를 행복했던 시기로 규정하고, 이 행복한 시기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페트라르카가 자신들의 시대를 추악하게 본 이유 또한 분명하다. 이들 인문주의자들은 교회나 기독교를 통해서 인간 정신이 말살되고, 인간자체의 고귀함이 천시되며 신이나 교회 또는 신앙이란 이름으로 온갖 탐욕이 자행되어온 시대로서 그들의 시대를 보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의 정신의 부활=르네상스
*주교이자 교황청의 사서였던 조반니 안드레아 데이 부시(1414-75)가 1469년에 니콜라스 쿠사누스(Nicholas of Kues)에 대한 찬가에서
-니콜라스는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라는 새로운 역사적 저작까지 정통한 사람’이라고 묘사하였고, 이를 독일과 프랑스의 저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학에서의 중간시대의 의미는?
-톨레도의 줄리안(Julian of Toledo, 642–690)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두 번째 재림 사이의 시기를 언급하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의미로, ‘중간시대의’(the middle age/in hoc interim saeculo) 또는 ‘시대의 중간기’(tempus mediu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르네상스 이래로 중세라는 용어는 고전의 지적인 영광과 르네상스를 통한 회복과는 분리된 뭔가 흥미 없는 시간을 뜻하는 다소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2. 중세의 역사적 시대 구분
-중세라는 개념이 문학사나 원전 분류의 기준에서 일반 역사의 시대 구분으로 사용된 것은 17세기이다. 처음으로 활용한 사람은 하인리히 카니지우스(Heinrich Canisius, 1610 사망)로 그는 자신의 역사 서술에서 16세기까지를 중세로 분류해 놓고 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후반에 가서는 고대-중세-새 시대라는 역사 분류가 일상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식을 보편적 역사 구분에 사용한 사람은 화란의 역사학자인 게오르그 호른(Georg Horn, 1630-70)이다
-켈라리우스는 중세는 기독교를 공인하여 첫 기독교 황제라고 할 수 있는 콘스탄틴 대제에서 시작해(330년), 그가 기독교 공인의 기념이자 기독교 도시로 세운 콘스탄티노플이 터기 사람들에게 멸망 당한 것(1453년)으로 잡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용병대장인 오도아케르(Odoacar)에게 멸망한 해인 476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W. Bienert, op. cit. 182/이원복, 이탈리아편).
-또는 영·미권에서 나온 교회사 서술에서의 일반적인 방법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590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잡기도 한다.
-헤겔은 “확고하던 이교철학의 외적 지위가 몰학한 해”(526년)
*필립 샤프의 교회사 4
-선교 시기: 그레고리우스 1세부터 힐데브란트 곧 그레고리 7세에 이르는 시기(A.D. 590-1073)
-교황 중심적 신정정치의 전성기: 그레고리우스7세로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에 이르는 시기(A.D. 1073-1294)
-중세 가톨릭 체계의 쇠퇴와 현대 기독교의 예비: 보니파키우스 8세에서부터 종교개혁에 이르는 시기(A.D. 1294-1517)
*5세기, 6세기~종교개혁
II. 중세교회사의 구성 요소
*중세 교회를 구성하는 주인공
신자들 –켈트 족/튜튼 족
교회
신학
영역 -유럽 및 이에 영향을 주고받은 정치, 사회 경제적 제반 요소들이 포함된다.
A. 중세의 세계
-중세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5세기를 고대의 종말로 보고 중세라는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것은 이때를 시작으로 역사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노예 경제를 주축으로 하던 고대 사회의 경제 체제가 반 자유 농민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로 변했고, 정치적으로는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제국이 끝났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가 명실상부한 최고의 가치 개념으로 떠올라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다(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서양중세사>, 이연규 역, 1986, 78)
-중세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기독교를 알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들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가 말하는 중세 교회사를 구성하고 있다.
-중세 교회는 교회 내부적으로는 교황제, 수도원주의, 평신도 경건운동 등이 있으며, 외부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이나 황제제도, 신성로마제국 등을 언급할 수 있다.
-또한 중세 교회사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는 것이 동방 교회사, 즉 비잔틴 제국의 역사이다.
"자기 고유의 터전에서 자란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 왜래 단어들뿐만 아니라 전혀 낯선 다른 종류의 사유 방식까지 배워 익힌다는 것,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놓은 엄청난 양의 내용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킨다는 것-이 모든 것이 실제로 중세 철학이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바로 그 문제"(요셉 피퍼, 중세스콜라철학, 27)
-중세란 기독교를 몰랐던 게르만 사람들이 서유럽 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 받아들인 기독교를 근거로 새로운 기독교 문화, 교황이나 교회의 세속 지배나 또는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독특한 기독교 문화 양식을 만들어 간 과정, 그 시대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중세는 서양 특유의 것이지 이러한 역사 이해가 일반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중세란 서양의 역사 발전 단계, 인문주의 시각에서 보든, 아니면 중세 특유의 문화 창출의 입장에서 보든 이것을, 서양 특히 서유럽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전제로 한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적 황제인 교황이 세상을 지배한 형태, 다시 말하면 종교 지도자가 세속의 정치 지도자들을 지배한 형태는 세계 역사에서 예를 찾아볼 수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W. Biernert, op. cit. 182)
B. 중세의 신학
1. 신앙인
-지금은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학문의 의미로 신학을 하는 사람들
2. 활동무대: 수도원, 주교좌성당학교, 대학
3. 신앙과 이성의 문제-최종적 권위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관계성 문제
-아직도 해결이 안 됨
-중세는 권의에 문제에 있어서 신앙이 먼저임을 100% 인정함
4. 논쟁을 통한 발전
III. 중세 기독교의 일반적 특징
1. 초대교회와의 비교
-기독교는 처음 세상에 전파될 때에는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민족들과 접촉했다. 사도들은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도시들에 교회를 세웠다 ...
-사도 시대와 그 이후의 교회들은 이미 잘 닦아놓은 대로들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고, 가는 곳마다 이미 잘 수립된 사회와 정부를 발견했으며, 따라서 고대 문화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그 문화를 더 숭고한 도덕적 목표에 귀속시키는 것이 교회 앞에 놓인 사명이었다.
*바울의 선교 여행
-PPT 그림 참조
*고대 로마의 도로망
-PPT 그림 참조
*이민족의 로마 침입
-PPT 그림 참조
-로마인들이 “야만족들”(barbarians)을 파괴를 일삼은 약탈자로 여겼으나, 이들은 대부분은 실상 로마 제국 안에 정착하여 멀리서 앙모해 왔던 문명의 혜택을 누리기 원했다.
-407년 라인 강을 건넌 반달족은 프랑스와 스페인 일대를 방랑하다가 429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넜고, 431년에는 카르타고를 함락시켰다. ...
-그러나 암흑시대의 선교사들은 거친 삼림지대와 개간되지 않은 황량한 벌판을 찾아가야 했고, 무지한 민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야 했으며, 사회와 문학과 예술을 위한 토대를 닦아야 했다.
-따라서 기독교는 아직 유아들로 다룰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던 민족들을 훈련시키는 강령한 교육 기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율법주의적이고 위계적이고 의식주의적이고 로맨스적 성격을 띠었던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로마 사회에서 발전했던 성문법을 야만족들은 이해할 능력도 복종할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말로 이루어진 불문법에는 쉽게 감명을 받았으며, 타인의 의지에 자신의 위지를 철저히 굽히는 데서 일종을 매력을 발견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은 그 땅의 법이 되었으며, 모든 사회적.정치적 조직의 토대가 되었다.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4)
2. 중세기독교의 특징
-“보이는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사람들의 정신을 이 시대만큼 강력하게 장악한 시대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교회가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했다. 모든 학문을 독점했으며, 과학과 예술을 시녀로 만들었다. 모든 진보적 운동을 주도했다. 대학교들을 설립했으며, 높은 대성당들을 세웠고, 십자군들을 일으켰으며, 왕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했으며, 모든 민족들에게 복과 저주를 내렸다. 로마에 거점을 둔 중세의 성직 위계제도는 구약 유대인들의 신정 체제를 더 포괄적으로 재현했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를 현세적으로 예기했다고 할 만한 시대였다.”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4, 27)
3. 종교개혁과의 차이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왔지만 그 가지들은 다른 기독교의 서로 구별되는 두 형태를 제시한다:
-가톨릭 교회는 중세의 야만적인 민족들에게 꼭 필요한 훈련의 학교로서 공헌한 법적(legal) 형태의 기독교이다. 개신교는 독립된 성년의 시대에 응답한 복음주의적 형태의 기독교이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 위계제도적, 예전적이며 보수적이다. 개신교는 성서적, 민주적, 영적이며, 진보적이다. 전자는 ‘권위’의 원리에 의해, 후자는 ‘자유’의 원리에 의해 다스려진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두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태어나고, 세례 받고, 견신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며,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교황에게 절대 복종하기로 거룩한 맹세를 하고 사제로서 교회의 제단을 섬기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로마주의와 정통 개신교는 한 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과 한 분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주님과 인류의 구세주를 믿는다. 양자는 공히 성경과 보편적인 신앙을 받아들인다. 양자는 모두 사도신경의 모든 조항들에 동의한다. 양자를 연합시키고 있는 것은 양자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고, 그리고 중요하다.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7, 18 f.)
베드로의 후예들: 교황제도의 형성
I. 초대교회에서 로마 교회의 위치
II. 교황제도의 형성
III. 이민족의 침입과 서로마의 붕괴
IV.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
*주교제의 정착
-가장 낮은 계급은 시골 주교들이었다.
-도시 주교들 가운데는 수도대주교들이 나머지 주교들보다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들은 속주들의 수도들을 관할하는 주교들이었다.
-이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중요한 것은 사도적 어머니 교회들이 다른 교회들과 다른 대접을 받았다는 점이다. 예루살렘,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 로마의 교회들이 그런 교회들이었다.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아누스 시대에 이 교회들은 순결한 교회 전승을 간직한 교회들로 큰 존경을 받았다.
*로마 교회가 수위성을 갖게 된 역사적 요인들
-로마 교회의 깊은 역사(30-40년 사이)
-두 명의 대표적인 사도들인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하고 순교하고 장사된 사실
-로마가 세계의 수도로서 지녔던 정치적 중요성
-로마 교회의 행정적 지혜와 보편적이고 정통적인 본능
I. 초대 교회에서의 로마의 위치
*로마의 클레멘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44,1
-이들은 저들[사도들]로부터 혹은 그들에 이어 세워진 다른 검증된 자들로부터 공동체 전체의 동의를 얻어 임명 받고 그리스도의 양 무리들을 향한 자신들의 봉사를 완전히 숙지한 자들이다: 곧 겸손, 화평, 절대로 편협하지 않고 나아가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오래도록 선한 증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들의 직책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불의한 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희생제물을 흠 없고도 양심적으로 드린 자들에게서 그들의 감독 직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결코 사소한 죄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가 알기로는 너희들이 선한 삶을 꾸린 몇몇을 그들이 흠 없이 보살피고 명예롭게 유지한 직책으로부터 내몰았다.
*리옹의 이레네우스, <이단논박> 3.2-3
-“가장 크고 오래된 교회,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교회, 즉 가장 유명한 베드로와 바울 사도에 의해 로마에 세워져 확립된 교회의 전통을 지적할 것이다. 교회가 사도들로부터 받은 이러한 전통과 이러한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었고, 감독들의 계승을 통해 우리 자신의 시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지도력과 권위가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 즉 모든 곳의 신앙인들은 로마의 교회와 일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로마 교회 안에서 사도적 전통이 지금까지 전 세계 각처의 믿는 사람들에 의해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 <교회의 통일성에 관하여:수위본문>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와 같은 사도였지만 수위권은 베드로에게 수여되며, 교회와 권좌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보이신다. 그리고 모두가 목자들이지만, 한 떼의 양 무리가 지적되며, 모든 사도들이 한결같은 동의 하에 그 양 무리를 먹인다. 만약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이 통일성을 견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과연 신앙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베드로의 권좌를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는 어떤 터에 세워지며, 그는 자기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교회의 가시적 통일에의 열망]
*초대교회에서 아리우스 이단 논쟁을 거치는 동안, 모든 교회는 보다 엄격한 치리와 중앙 집권화 한 통솔의 필요성을 실감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으로 교회내의 질서 확립, 유지하는 방법은 교회법령(canons)을 제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지방회의(provincial synod)를 개최하는 것이었으며,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는 동료 감독들에 대한 각 지역 대감독들의 권위를 높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로마,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칼케돈 회의 에서는 총대주교구의 수를 다섯으로 늘렸다(...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니케아 공의회 법령 6
-“이집트, 리비아, 펜타폴리스와 관련된 옛 관습들은 보존되어야 한다. 그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이 모든 것[속주들] 위에 사법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로마 감독에게도 이런 종류의 관습법이 있다.
-이와 같이 안디옥과 그 밖의 속주들에게도 전래되어 온 우선권이 유지되어야 한다.
-그 외에 만일 그 누군가가 메트로폴리탄의 동의 없이 감독이 된 경우에는 그의 감독 직을 상실한다고 큰 공의회가 분명히 확정하였다.
*칼케돈 공의회 법령 28조
-거룩한 교부들의 법령을 철저히 따르고, 150명의 주교들이 최근에 반포한 조항 (즉, 381년 제 2에큐메니컬 공의회 법령 3조)을 익히 아는 우리도 콘스탄티노플 곧 새 로마의 지극히 거룩한 교회의 대권들에 관련하여 동일한 법령을 결의하고 반포했다.
-이는 교부들이 고대 로마의 권좌[주교좌]에 대해서 대권들을 부여한 것도 황도로서의 특성을 고려하여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점을 고려한 일백오십 인의 주교들은 새 로마의 지극히 거룩한 권좌에도 동일한 대권을 부여했으며, 그 도시가 황제의 위엄과 원로원에 의해서 높임을 받고, 고대 황도 로마와 동일한 대권을 누리는 점을 감안하여, 교회적으로 동일한 존경을 받고 오직 로마에만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판결했다.”
2. 교황제의 형성
-2세기에 들어와서도 이단들과의 투쟁에서 로마교회는 약 160년경 사도 베드로와 바울을 기념하여 기념비들을 세우는 등, 사도들이 남긴 전통의 수호자로서 스스로를 인식했다.
-2세기 말엽의 교황 빅터(Victor)는 다른 교회들이 지나친 독재라고 생각한 태도로서 동방 헬라를 포함한 모든 교회들이 로마 교회가 지정한 것과 동일한 날짜에 부활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382년 다마수스(Damasus) 교황 때부터 베드로에 관한 구절이 비로소 로마의 우월성을 보장하는 신학적, 성경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중요한 근거로서 이용되었다. 교황 다마수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자문을 구하기 위해 송달된 편지들을 마치 지방장관들이 황제에게 보낸 편지와 비슷하게 취급하였다. 이에 따라 답장을 쓸 때에도 마치 황제가 내리는 칙서처럼 공식화된 형식을 따라 작성하였다. 다마수스는 감독들 가운데서도 자기만이 유일하게 베드로의 역사를 통한 후계자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또한 로마 교회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예배의식이 각처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도 이 때 즈음이었다. 중요한 교회들이 사용하고 있는 예배의식을 모범으로 삼아 주위에 있는 작은 교회들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416년 교황 이노센트 1세는 오직 로마교회에 의하여 다른 서방지역의 교회에까지 복음이 전파되었으므로 모든 라틴계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예배의식을 좇아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에 있어서 서방교회들을 일반적으로 로마의 예배의식에 일치하도록 이끌고자 하는 노력은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 이전에는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마침내 로마 주교는 자신의 지위가 신적으로 제정되었다는 주장과 , 자신이 사도들의 군주인 베드로의 계승자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자신이 세계 교회의 수장이며, 기독교 세계의 보이지 않으시는 최고의 수장이신 그리스도의 가시적 대표자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올바로 말하자면 이 주장은 한 번도 인정을 받은 적이 없고, 오늘날까지 교회사에서 불화의 씨앗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 기독교 세계는 그 주장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으며, 라틴 기독교 세계도 다양한 저항을 내놓다가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기독교 세계의 가장 중요한 지역들이 교황제에서 영구히 벗어났다.
로마교 제도의 근본적인 오류는 교황제와 교회를 동일시하고 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기 위해서 개신교뿐 아니라 동방 교회 전체에 대해서도 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필립 샤프, 교회사 3, 283)
3. 네 반석위에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태 16:18)
*밀레비의 주교 옵타투스는 384년경에 키프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시적 통일’ 사상을 확고히 견지했고, 그것을 최고선으로 주장했으며 움직일 수 없는 베드로의 권좌를 그 사상의 가장 안전한 보장으로 이해했다.
-베드로에 관해서는 사도들의 수장이요 천국 열쇠를 지닌 사람으로서, 한때 그리스도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도들과 꾸준히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교회의 통일성이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도 노출되지 않는 불변의 외적인 사실로 나타날 수 있게 한 인물로 보았다. 이 모든 특권들이 사도의 계승자들인 로마 주교들에게 전승되었다고 보았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는
-로마 교회를 대단히 높게 평가하며, 그 도시의 주교에게 마치 이교 로마의 황제들이 지녔던 정치적 권한과 같은 종교적 통치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수위권을 다만 “명예가 아닌 신앙고백의, 서열이 아닌 믿음의 수위권”이라고 부르며, 사도 바울을 베드로와 동등한 지위에 둔다.
*다마수스 교황의 친구였던 제롬은
-“로마 수장의 야심을 버리시오. 나는 어부의 계승자이자 십자가의 제자와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머리를 따르지 않는 나는 당신의 거룩함과 더불어, 즉 베드로의 권좌와 더불어 신앙의 사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져야 한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초기에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말씀을 베드로 개인에게 적용했으나, 후에는 이 해석을 분명히 철회하고 페트라(petra)와 페트루스(petrus)가 구분된 것을 토대로 페트라를 그리스도로 간주했다.
교황 레오 1세(Leo I, 440-461)
*5세기의 교황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로 꼽을 수 있는 레오는 다마수스의 로마교회에 대한 사고를 물려받았을 뿐 아니라, 얼마나 기독교가 그 위엄을 높이 유지하는가에 따라 로마 제국의 영광도 함께 유지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로마 감독의 우선권 사상에 그 고전적인 표현을 제공하였으며, 로마 교회의 수위권 발전을 마무리한 사람도 그였다. (리터, 고대교회, 485).
*455년 레오의 한 설교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베드로만 선택되었다. 그는 부름 받은 모든 백성과 모든 사도들과 교회의 모든 교부들의 머리여야 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많은 사제와 목자들이 있지만 베드로는 참된 의미로 최종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그 모든 자들의 지도자이다. .... 그 밖의 지도자들에게도 어떤 것들은 그[베드로]와 공유할 수도 있지만, 그 은혜는 다른 자들에게 허락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항상 그를 통해서만 주셨다.” (리터, 고대교회, 485 ff.)
*"레오가 451년 칼케돈 회의에 '토움'(Tome)을 보냈을 때, 그는 회의에 모인 감독들에게 이를 토론이나 조사의 대상으로 삼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런데 이미 문제가 해결된 이후였으므로 사실 더 이상 토론할 여지도 없이 사람들은 마치 베드로 자신의 말인 양 '토움'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다. 실제로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레오가 교회회의의 결의에 의지하는 수도 있었으나, 그가 생각하던 권위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회의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헬라 측 감독들은 이와 같은 레오의 견해에 동조할 수 없었다. 칼케돈에서 레오의 '토움'이 진실로 가치 있는 베드로의 말로서 받아들여진 이유도 사람들이 읽어 본 결과 이미 통용되고 있던 정통의 기준에 어긋남이 없다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훈족인 아틸라의 침입(452년)
*460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교황 게라시우스 1세(Gelasius, 492-496)
*"축복받은 베드로의 교구는 다른 어떤 감독들의 회의에 의해 매어진 결정이라 할지라도 다시 풀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겔라시우스는 또한 동방의 총대주교들이 황제들의 원조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 성직자들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황제가 고위 성직자들과 특히 그 누구보다도 최고위의 성직자일 뿐 아니라, 황제가 어떻게 책임을 수행하고 있는 가를 하나님께 보고할 임무를 띠고 있는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다."(H. 채드윅, 초대교회사, 268)
III. 이민족의 침입과 서로마의 붕괴
-A.D. 410년 서고트족 알라리히(Alarich)에 의한 로마 침입 -->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452년 훈족 아틸라의 침입
-460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
-A.D. 476년 게르만의 용병대장이었던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서로마의 완전한 멸망
-A.D. 490년 동고트족 데오도릭(Theodoric)에 의한 이탈리아 점령: 데오도릭은 동고트족의 왕으로서 이탈리아 전체의 1/3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황제의 총독으로서 다스렸고, 로마 원로원 의원(Patrician of Romans)의 칭호를 얻음. 아리우스주의자였던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신앙고백을 따르던 이탈리아 교회를 특별히 핍박하지는 않았으나, 갈등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의 정책은 국가 행정은 철저히 로마 시민의 손에 맡기는 대신, 군사에 관련한 일들은 고트족의 손에 장악하고 있었다. 그의 정책을 집행하던 로마인들이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보에티우스(Boethius)등이다.
-데오도릭은 이주한 게르만족의 동맹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프랑크족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부르군트족은 콘스탄티노플과 동맹을 맺는 등의 위기상황에서 보에티우스는 모반죄로 기소하였고, 카시오두루스는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는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의 이탈리아 재정복의 결심에서 그 긴장들이 표면화 된 것으로서, 동로마 황제는 데오도릭의 죽은 지 10년경에(536년) 이탈리아를 재 정복함
-A.D. 568년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하여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를 거의 장악하였고, 로마를 동로마의 총독의 주둔지였던 라벤나(Ravenna)와 남부의 지역으로부터 고립시켰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의 교회들을 불태웠고 성직자들을 학살하고, 수도원을 약탈하기도 했다. (529년 세워졌던 몬테 카시노에 있던 베네딕트 수도원은 롬바르드족에 의해 6세기 말경 폐허로 변하기도 함).
-민족들의 이동에 따른 끊임없는 전쟁은 도시들과 농촌을 피폐시키고, 교역과 통신을 단절시키며, 로마 세계의 전체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탈리아는 가난, 기근, 질병 그리고 인구 감소의 재난을 계속해서 경험해야 했다.
-탈리아의 교회와 로마의 교황청은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민족의 약탈의 대상이 되었었고, 때로는 콘스탄티노플과 이탈리아에 있던 정치 세력 간의 다툼에 말려들어,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도덕적인 권위 역시 크게 상실함.
-롬바르드족이 침입했을 때, 로마 교회는 그 영향력을 상실한 라벤나의 동로마총독을 대신하여 그 주변 기독교인들에 대한 영적 지도자 겸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한 설교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러한 때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도처에서 환난을 보며, 도처에서 애도의 소리를 듣습니다.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성들을 무너졌고, 밭들은 황무지가 되었으며, 땅은 고적하게 변했습니다. 촌락들은 텅텅 비어 있고, 도시들에는 주민들이 없으며, 남아 있는 이 가련한 자들조차 매일 살육을 당합니다. 하늘의 공의의 회초리가 쉬지 않은 까닭은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회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고, 어떤 사람들은 사지를 절단 당하고, 어떤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으며, 우리가 그런 모습들을 도처에서 목격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생에서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런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기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때 세상의 여왕이었던 나라가 어떤 지경이 되었는지 우리는 지켜보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현세를 적극적으로 경멸하고 온 힘을 다해 경건한 분들이 이뤄놓은 일들을 배워 우리도 그렇게 행합시다."(필립샤프, 교회사전집 4, 204-205).
--------------------------------------------------------------------------------------
그레고리우스 1세(590-604)
*생애
네 명의 라틴 교회의 박사들(Doctors of the Church) 중의 하나로 인정됨: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제롬(Hieronymus), 암브로시우스(Ambrose).
"590년 수도원에서 불려 나와 로마의 감독직에 취임한 그는 교황권을 공고히 하고 로마 제국의 폐허 위에 교회를 서구 세계에서 살아 남은 하나의 강력한 지배력으로 건설하는 데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스티븐 니일, 기독교선교사, 홍치모·오만규 공역, 78)
*그레고리우스는 로마의 유력한 원로원 가문에서 태어났다(540). 젊은 나이에 고위 관직에 오른 뒤 573년 이전에 로마의 장관(praefectur)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원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서 막대한 유산을 처분하여 빈민 구제와 수도원 설립하였다-시칠리아에 6곳, 로마에 1곳을 설립하였는데, 로마에서는 카엘리우스 언덕에 자리 잡은 궁정 터에서 설립하였다.
- 그는 자신이 설립한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 수사로 들어갔다. 수도원에서 그는 지극히 검소하게 살았으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중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때가 자기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3년 뒤 교황이 새로 즉위하면서, 로마의 부제(diacon) 7명 가운데 하나로 임명되어 로마 시에 행정책임을 맡게 됨.
- 교황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 579-590)에게 콘스탄티노플 주재 교황대사(apocrisiarius)로 파견되었다. 그는 헬라어를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고 그 직책을 유능하게 감당하였고. 585/6년경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있었으며, 성 안드레아(Andreas) 수도원의 대 수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성직자단과 원로원과 백성의 만장일치에 의해 교황에 선출되었고, 14년 뒤인 604년 3월 12일 죽었다.
천사성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역사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민족의 침입과 서로마의 붕괴 (0) | 2014.04.14 |
---|---|
이단 운동 (0) | 2014.04.14 |
계시의 이해 (0) | 2014.04.09 |
경건주의 (0) | 2014.04.09 |
합리주의의 발전과 바로크 시대 (0) | 2014.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