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경건주의

예림의집 2014. 4. 9. 18:46

경건주의

*17세기 경건주의

①개혁파 경건주의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독일의 개혁파 경건주의

②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

-경건주의는 17세기말 화란과 독일의 개신교에서 일어난 참 경건과 참 교회를 위한 교회 안의 개혁운동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손꼽히는 의미 있는 운동이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화란에서는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으로서 진행되었다.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은 Nadere Refomatie(나더러 레포르마찌)라고 불리우는데 그 번역은 “심화된 종교개혁(Further Reformation)" 혹은 제 2의 종교개혁(The Second Reformation)으로 번역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화란의 개혁파 경건주의에 직접 영향을 받은 독일 개혁파 경건주의 운동과, 또한 독일 루터파 경건주의 운동으로 각각 발전하였다.

-경건주의의 “전 교우운동”은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설의 발전으로 볼 수 있다. 경건주의는 성령과 내적 생명을 존중하는 운동으로서 성도들의 “경건 모임”을 통해서 “경건 서적”을 독서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1. 화란 개혁파 경건주의(Dutch Reformed Pietism)

1)화란 개혁파 경건주의의 기원

①초기 경건주의는 청교도적 경건주의이다.

②개혁파 경건주의는 청교도주의의 영향으로 화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③청교도의 이상은 1620년 네덜란드를 경유하여, 신대륙으로 향한 “메이 플라우어”호 이전부터 이미 네덜란드에서 결실을 보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④1561년의 벨기에 신앙고백(Confessio Belgica)을 중심으로 칼빈주의가 정초되었다.

⑤네덜란드의 미델부르그 지역을 중심으로 이미 도르트 총회(1618-1619) 이전부터 청교도의 영향이 확대되었다.

⑥네덜란드의 테일링크(W. Teelinck, 1579-1629: 윌리엄 퍼킨스의 제자)와 우트레크트 대학교의 푸치우스(G Voetius, 1589-1676) 등이 네덜란드의 청교도적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⑦30년 전쟁 이후 다시 활기를 띠었던 신비주의적 영성주의의 흐름에도 근거한다.

⑧경건주의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주의, 네덜란드의 엄숙주의(Preazisismus), 프랑스의 얀센주의(Jansenismus), 정적주의, 그리고 유대인들의 차씨드주의(Chassidismus)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2)화란 개혁 교회 경건주의의 근원

①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퍼킨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으며, 회심에로의 열망과 양심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청교도주의 신학의 아버지이며 동시에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려진다. 네덜란드 경건운동(Nadere refomatie)의 푸치우스에게 영향을 주었고, 푸치우스의 독일인 제자인 운데어아익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신학+성도의 삶

-이 세 가지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②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

-화란에 청교도주의를 접목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청교도주의 신학을 배웠다.

-1610년 화란으로 피신한 후, 1622년 화란 프라네꺼(Franeker) 대학의 신학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은 『신학의 정수(Medulla Theologiae, 1623)』가 있다.

-신학과 삶을 연결하였고 화란의 푸치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서 경건훈련과 함께하는 신학공부를 하였다.

-18세기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도 에임스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에임스는 신학과 현장의 삶을 연결하도록 했다.

-그의 성화론은 전인이 성화의 은혜에 참여하지만, 성화는 먼저 영혼에서 발생하고, 다음에 몸으로 나아가, 인간의 몸이 영혼과 같이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회개, 성화, 자기절제의 삶을 강조하였다.

 

3)화란 개혁파 경건주의 신학자

①푸치우스(G. Voetius 1589-1676)

*ecclesia reformata(16세기) semper reformanda(17세기) est(개혁된 교회는 개혁되고 있다.).

-보헤티우스는 잘못된 표기

-개혁파 경건주의는 화란 개혁주의에서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에서 교리는 완성되었으나 그 교리가 삶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던 시대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17세기는 화란의 국가적 전성기였다. 경제적 번영기요 국제적 전쟁과 승리의 시기였으며, 교리적 정통의 자부심을 가지던 시기였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들의 신학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전적 은혜를 믿었음에도 전쟁과 전염병과 자연 재해를 만날 때는 은혜를 의심하고 불안해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634년 푸치우스는 “학문과 병행하는 경건에 대하여”로 우트레크트 대학 취임 강연하였고, 신학과 경건의 혼합을 강조하였다. 또한 금욕적 경건의 신학을 강조하였다.

*내 영이 주를 갈망하며(Geestelijke Verlatingen)

-1646년에 초판이 나오고 1659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이는 그의 사후에 제자 호른베르크가 완성한 것이다. 푸치우스는 성경의 가르침은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과 불안 속에 사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위의 책을 통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불안과 염려가 찾아오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증거라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일하시는 증거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1664년에 “경건의 연습으로서의 금욕”을 저술하였는데, 이 연습이 신하그이 본질이라고 하였다. 고아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병든 사람을 방문하였다.

*선교론과 교회론

①이방의 회심

②교회의 수립(장로제도 수립)

-반드시 회중 가운데 장로를 선출

-민주주의

-회중 가운데 선출

-장로+목사=당회

-현지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

③하나님의 영광

-개신교 선교 신학의 아버지

*푸치우스의 제자 호르베른(Johnnes Hoornbeeck)

-푸치우스를 이어 우트레크트대 교수를 역임하였고, 푸치우스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 『내 영이 주를 갈망하며』를 완성하였다. 1654년부터 레이든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Nadere Reformatie를 도왔다. 선교에 열정적이었고 인기 있는 설교가였으나 49세에 별세하였다.

②콕세이우스(J. Coccejus 1603-1669)

-언약신학의 아버지(구약신학의 아버지)

-푸치우스와의 논쟁

*27세에 “거룩한 언어학에 관하여(De Philoloia sacra)"라는 취임 연설로 브레멘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1636년에 화란의 프라네꺼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650년에는 레이든 대학으로 가게 되는데 레이든 대학에서 주로 언약신학을 연구하였다.

-언어적, 역사적, 영적, 성경적, 그리스도적 성경해석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언약』, 『약속의 총체적 교리』를 저술하였다.

-교회는 구속사적 하나님의 계약의 형태며 천국의 모형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라 주장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가 바른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독일 개혁주의적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운데어아익은, 푸치우스와 콕세이우스의 제자로서 푸치우스에게는 경건을, 콕세이우스에게서는 신학을 배웠다.

 

2.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

1)독일 루터파 경건주의의 시대적 배경

①종교개혁 이후 참혹한 30년 전쟁을 거치면서 정신적인 새로운 기운을 갈망하게 되었다.

②교회는 교권화, 극단적 교리화 됨으로 생동력을 상실하였다.

③영국 청교도의 경건성이 역으로 유럽에 전해졌다.

-이는 제 2의 청교도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를 거쳐 스위스로 전해졌다.

④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간극은, 실천적 경건을 강조하는 청교도주의의 역할로 연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⑤독일의 경건주의의 경우 극단적인 스콜라적인 “논쟁신학”보다는 “성경”에 근거한 신학에 갈급하였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⑥독일의 개혁파 경건주의는 1665년 독일 개혁교회의 운데어아익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1675년의 독일의 루터파의 경우는 슈패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⑦신앙고백시대를 끝내고, 정통주의 지배를 종결시켰다.

-30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독일의 교회의 특징은, 정통주의를 표방하면서, 신자들의 경건한 삶의 차원에 무관심하게 되면서, 영성의 기갈 현상을 초래하였다.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은 논쟁을 위한 논쟁으로 치닫고,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균형 있는 영성을 함양할 수 있는 풍토가 조성되지 못하게 되면서,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자 인간 내면의 영적인 삶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2)독일 개혁교회 경건주의

-운데어아익(Theodor Undereyck, 1635-1693) 중심.

①독일 개혁교회 신학생들이 화란에 신학 유학을 가서 영향을 받아 왔다.

②화란 개혁교회의 신학이 독일 경건주의의 발생에 영향을 준 것이다.

③독일 출신의 테오도르 운데어아익은 화란 우트레크트 대학의 푸치우스의 제자이면서 레이든 대학의 콕세이우스의 영향을 받은 학생이다.

④그는 1660년부터 독일 뮐하임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⑤독일 교회가 화란처럼 살아있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파악하면,

첫째, 구원의 확신 없는 성도들의 무지,

둘째, 비신앙적 삶을 살면서도 형식적인 신앙고백에 근거한 잘못된 신앙적 안정감 이다.

⑥전 교우를 참여시켜 해결을 시도하였다.

-전 교우 운동. 경건 모임 운동, 성경읽기 운동. 문서운동(평신도에게 경건서적 소개)

-『그리스도의 신부(Christ Braut, 1670)』:독일 경건 서적의 효시

-독일적 청교도운동 즉 경건주의 운동으로서 성공.

 

3) 독일 경건주의의 내용

①내면의 빛이 있어야만 성경의 진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②별도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운동은 아니었으며, 단지 신학적인 차원에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라 하겠다.

③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된 신자들만이 내면의 빛을 가져올 수 있다.

④지식을 육적인 지식과 영적인 지식으로 구분 했다.

-정통주의자들이 소유한 지식은 육적인 지식이고, 자신들의 지식은 영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였다.

⑤성화된 삶을 믿음에 대한 증거로 보았다.

 

4) 독일 경건주의의 특징

①전 교인 참여 운동

-온 성도가 참여하는 평신도 운동.

②성경 읽기 운동

③디아코니아 운동

-양로원, 빈민원, 고아원,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하였다.

-특히 프란케 목사 지도하의 독일의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④선교운동

-현대적 의미의 선교가 시작됨

-성경보급을 위해서 최초의 성서공회인 칸슈타인 성서공회가 1710년 독일에서 설립됨

⑤현대적 의미의 찬양 운동

-네안더(Neander) 중심

-단음의 시편 찬양을 벗어나 현대적 찬양을 시작함.

 

5)독일의 루터파 경건주의 학자들

①슈페너(J. Sperner, 1635-1705)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트라부르그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였으며, 루터파 정통주의 신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던 중 제네바를 여행하면서 장 드 라바디(Jean de Labadie)에게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청빙을 받고, 1666-1686년 동안 목회 사역을 하였다.

-1670년 이후 프랑크푸르트에서 collegium pietatis(경건 모임)을 시작하였다.

*Ecclesiola in ecclesia(교회 속의 작은 교회)

-정식 예배 외에 경건생활을 위한 특별한 모임

*저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1675)』

-원제:gksksladl 기뻐하시는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향한 간절한 복음의 소망

*개신교 개혁을 위한 6원리

첫째, 평신도와 성직자, 모두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둘째, 만인 제사장설을 주장하였다.

셋째, 행위가 뒤따르는 신앙이 요구된다.

넷째, 반교권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다섯째, 성직의 개혁과 성직자의 사명감을 회복하여야 한다.

여섯째, 생명력 있는 설교를 재발견하자고 역설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생한 개인의 체험적 신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고, 성경연구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가정 성경연구 모임을 전개하였다. 설교자들이 그들이 설교한 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②프란케(A. H. Francke, 1663-1727)

-할례대학 중심 활동

-경건주의 운동을 이끌어 간 인물로 아이프찌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할레 경건주의는, 루터 교회 정통주의자들과 연합한 의회 쪽과의 싸움에서 프로이센 제국과 동지 관계를 가졌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앙고백주의 논쟁술 대신, 성경 원어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교육과 성경해석학 중심의 수업을 하였다.

-그의 개혁 이상은 “인간 변화를 통한 세계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1710년 칼 힐데브란드 폰 칸수타인과 더불어, 최초의 독일 성서공회인 “칸슈타인 성서공회”를 설립하였다.

*덴마크-할fp 선교회

-1706년 덴마크 왕 프리드리히 4세가 할레에서 신학 교육을 받은 선교사들을 인도로 파송하였다. 이는 독일 개신교 최초의 해외 선교이다.

-할레 대학에 청빙을 받아서, 학문적이고도 조직적으로 경건주의 운동을 이끌어 갔다.

-사회사업: 고아원, 병원, 모자원을 세웠다.

-문서선교 사업: 성경과 종교적인 서적을 출판하여 보급하는 활동을 하였다.

-신학: 율법과 복음, 회개, 그리고 은혜를 중심 주제로 삼았다.

 

③벵겔(1687-1751)

-그는 류빙겐 대학 출신의 교수이며 경건운동을 주도한 자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본문비평을 시도했고 헬라어 신약성경을 발행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성경해석학을 중시하였다. 그의 신학 사상을 살펴보면 사랑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강조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6)할레 대학(Halle University)

①브란덴부르그 작후에 의해서 세워진 대학이다.

②스패너의 권유를 따라서, 프란케가 신학부를 담당하였다.

③경건주의 운동에 대해서 조직적이고도 학문적인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④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7)경건주의 운동의 결과

-경건주의 운동은 또 다른 하나의 교단을 이루지는 않았으며, 루터파 교회 안의 한 종파로서 존재했다. 이후 루터파는 다음의 두 개의 형태로 구분되었다.

①비덴베르그 중심의 정통파

②할레 대학 중심의 경건파

 

8)경건주의 운동에 대한 평가

①성경 연구를 촉진시켜서, 신학적 이론에서 실제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②성령에 의한 인간의 내적인 감동과 그 거듭남의 필요를 강조하였다.

③17세기의 교회에 활기를 보여주었다.

④이 경건주의에서 모라비아 공동체가 생겨났다.

⑤할레대학을 중심으로 선교에 주력하였다.

 

9)진센도르프와 모라비아 교회

*진센도르프(Nikilaus Von Zinzendorf, 1700-1769)

①신앙적인 열심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②10세 때 할례대학교에서 경건주의와 프란케 밑에서 교육을 받음

③1734년에 루터파 목사로서 안수를 받음

④1736년 색손 땅에서 평화를 교란한다고 추방당함.

⑤10년 후 추방령이 철회되어서, 고향에 돌아와서 4년 후 사망(1746년).

 

*모라비아 교회와의 관계

①진센도르프는 경건주의 운동과 모리바아주의 운동을 결합시켜 주었다.

②상속 받은 대지에 “헤른후트”라는 피난촌을 건립했다.

-보헤미아의 후스 일파와 함께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사회를 건립하려고 노력하였다.

③그는 정부에서 일하게 된 후에는, 목사 안수도 받아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였다.

④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던 중에 선교 비전을 가지고 국제적인 선교조직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⑤추방된 후에,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고, 영국, 서인도제도, 미국의 펜실베니아와 그 곳의 인디언들에게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라비아 교회

<시작>

①30년 전쟁 당시, 로마 교회의 박해로 모라비아로부터 보헤미야에 피난 온 후에, 장 후스 일파에도 진센도르프 백작이 자기 영토 안에서 살도록 해 주었다.

②헤른후트(Hermhut: 주님의 망대)라는 곳에 피난촌을 세웠다.

③진센도르프의 지도로 1727년 8월 13일, 모라비아 교회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④이들의 경건주의 운동을 Moravianism이라고 말한다.

 

<결과 및 평가>

①반수도원적 신앙으로 세계선교에 목적

②정렬적 독신자들로서, 후에 감리교이 창시자인 웨슬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③모리아비아 성도들이야말로, 경건주의의 최상의 결실.

④수적으로는 적은 무리였지만, 영적인 유산과 학적인 결실이 가장 컸다.

⑤술라이어마허가 이 모라비안 교회의 출신이다.

 

*자유주의와 신비주의(경험주의)는 서로 만나고 있다.

-텍스트(성경)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서울신학·총신신대원 > 역사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세의 개념과 시기  (0) 2014.04.10
계시의 이해  (0) 2014.04.09
합리주의의 발전과 바로크 시대  (0) 2014.04.09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과 존 낙스  (0) 2014.04.08
30년 전쟁  (0) 2014.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