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윤리 사상
1. 서론
복잡한 사회 속에서 매순간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관점의 조명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도덕적 행위를 반성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기가 쉽지 않다.
특히 Joseph Fletcher의 상황 윤리의 영향으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혼돈 속에서 참된 기독교적인 윤리의 표준과 판단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이 말하고 있는 윤리를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칼빈은 신학적 윤리학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직접 정의하지 않았다. Johnson에 따르면 칼빈은 윤리(ethice)라는 말을 기독교강요에서 쓰지 않았다고 하면서, 단지 도덕( moralia)이라는 단어는 기독교강요에서 17번 사용했고, 윤리와 관계된 순종(obedentia)이라는 용어는 215번 사용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단어들의 사용은 칼빈에게 윤리라는 개념과 내용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de vita hominis christiani)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윤리학적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윤리에 대한 칼빈의 서술은 그의 십계명 해설에서 잘 나타난다. 칼빈은 펠라기우스가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다는 주장과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가 구원을 위해 율법 준수를 주장한 기존의 잘못된 견해들을 벗어나서 그의 윤리학의 기초로서 십계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켰다. 십계명에 대한 설명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2, 8, 1-59)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 제1권 15장, 제2권1,2,7,8장, 제3권 6,7,8,9,10,19장을 중심으로 칼빈의 윤리사상에 대하여 알아본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과 의 윤리 사상(기독교강요 1권 15장 2권 1,2)
1) 칼빈의 윤리는 철저히 성경에 기초한 삼위하나님을 전제한 윤리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의, 지혜, 선을 보여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표본일 뿐 아니라 우리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상태는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우선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이다(창2:7, 18:27). 왜냐하면 “흙집에 살며”(욥 4: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 이상으로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시고 그 그릇에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게 하시고 창조주의 크신 관대하심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황송하옵게도 질그릇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불멸의 영의 거처(육체)로 삼기를 원하셨으므로, 아담은 마땅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하심을 자랑할 수 있었다. 칼빈은 육체를 비하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좌소가 영혼이었다.
영혼은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흠 없이 창조 되었으므로, 그 죄의 책임을 창조주께 전가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생활의 핵심으로서 자기 부정을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심을 말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욕을 위해서 살지 말고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gloriam Dei)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말한다.
2) 인간이 자기 능력 안에는 아무 선한 것도 없으며 가장 비참한 궁핍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다고 배웠을지라도, 아직도 그가 결여하고 있는 선과 그 박탈당한 자유를 동경하라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이같이 하여 그가 최고의 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될 때보다 더욱 태만의 잠에서 깨어나 분연히 일어나게 되는 것은 없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장 고귀한 영광의 표시로 단장하여 뛰어나 있다고 할지라도, 그럴 때일수록 더욱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성경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창 1:27) 이상의 것을 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한 행위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을 박탈당한 인간이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넘치게 받았을 때 그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함으로 이전에 그가 많은 은총을 인식하고 영광을 돌리지 못했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3) 철학자들은 선과 악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의 지성에 거하는 이성은 충분히 우리를 올바른 행동으로 인도해주고 이성에 속해 있는 의지는 실제로 감성에 의하여 악한 것들을 하도록 부추김을 받았다. 그러나 의지는 자유 선택을 할 수 있으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그 지도자인 이성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4) 스콜라 학파에서는 세 종류의 자유가 두드러지는데, 첫째는 필연으로부터의 자유, 둘째, 죄로부터의 자유, 셋째, 비참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중 첫째 자유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고나는 것이라 도저히 빼앗길 수 없지만, 나머지 둘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게 되었다. 나는 필연을 강제와 그릇 되이 혼동시켜 놓은 것만 제외하고는 이 구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 차이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고찰해 보기로 한다.
5) "자유 의지"는 택함을 입은 자만이 중생을 통하여 받을 수 있는 은혜, 즉 특별한 은혜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으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기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6) 모든 자만심을 포기해야 한다. 자유 의지론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자신의 재앙, 궁핍, 벌거벗음 및 수치를 인식하고 완전히 절망하여 압도당하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에까지 진보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 자신 속에 없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것을 빼앗길 위험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땅히 자기 것 이상을 조금이라도 주장하게 되면 헛된 신뢰로 인하여 자멸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게 되며, 따라서 끔찍스러운 신성모독죄를 범하게 된다.
7) 참된 겸손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 “우리 철학의 터전은 겸손이다”라는 크리소스톰의 말은 언제나 나를 매우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한 말은 더욱 더 나를 즐겁게 한다. 즉, 어떤 사학자가 웅변술의 제일 원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전달"이라고 대답했다. 두번째 원리는 무엇이냐고 할 때도 역시 "전달"이라고 대답했다. 세번째 원리는 무엇이냐고 할 때 역시 "전달"이라고 대답했다. 만약 여러분이 나에게 기독교의 규범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겸손"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8) 인간의 천품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 오성(悟性)초자연적 은사는 박탈당하였고 자연적 은사는 부패되었으나, 인간과 짐승을 구별시켜 주는 이성은 남아 있다. 어거스틴으로부터 빌려온 공통적인 견해, 즉 자연적 은사는 죄 때문에 부패되었고 초자연적 은사는 그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견해에 동의한다. 여기서 두번째 말, 즉 초자연적 은사는 그것이 천상 생활과 영생 복락을 얻는 데 충분한 의 뿐만 아니라 신앙의 빛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당할 때, 그는 동시에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바라보기 위해 갖추어야 할 영적 은사들은 박탈당한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되고 중생의 은총을 통하여 그것들을 회복할 때까지 영혼의 축복된 생활에 속하는 모든 자질이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는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성결과 의를 위한 열심 등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회복시켜 준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자연적 은사보다 뛰어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것들이 제거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의지는 인간의 성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멸절되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바른 것을 추구할 수 없게 되었다.
9) 진리의 빛은, 인간의 정신이 아무리 그 완전함으로부터 타락하여 사악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뛰어난 은사들을 옷 입고 그 은사들로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성경(고전 2:14)이 "육에 속한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저속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예민하고 통찰력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예를 통하여 인간 성품에서 참 선을 박탈당한 후에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남겨놓으셨는가를 알아야 하겠다.
10) 예술과 과학에서의 인간의 능력은 역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11) 우리는 모든 인류에게서, 이성은 인간 본성에 고유한 것임을 알게 된다. 마치 감정을 가진 짐승들이 무생물과 구분되는 것과 같이, 이성은 우리를 짐승들과 구분지어 준다.
12) 영적 분별력은 중생될 때까지는 완전히 상실되어 있다. 오성의 한계이다.
13)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시 119:18)라고 기도한다. 이 표현을 통해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비췰 때, 그것은 태양이 지구 위에 떠오르는 것과 같으나, "빛들의 아버지"(약 1:17)라고 불리우는 그분이 눈을 뜨게 해주지 않는다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성령이 그 빛을 비추어주지 않는 모든 곳은 암흑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든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조명을 받을 때에 한해서만 그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서슴없이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 이상의 지성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는 자는 그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무지한 것이다.
3. 율법은 윤리 이해의 기초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배양시키는 윤리 사상 (기독교강요 2권 7,8장)
이는 칼빈은 율법의 의를 위한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자들과 싸웠다. 율법의 제1용법은 율법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의를 그대로 실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율법은 거울과 같다. 거기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력, 둘째 우리의 죄악, 그리고 이 둘의 결과를 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율법이 회개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자들에게 율법은 둘째 의미로 작용 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규제한다. 이러한 기능에 의해서 사회질서 속에서 악이 규제를 받는다. 율법의 제 3의 용법은 중요한데 이는 창조적이다. 그것은 성도들이 알고 있는 구원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기위한 선한 생활에 지침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적극적이고 규정적이며 도움이 되는 지침을 제공한다. 즉 십계명의 열 가지 계율을 따라서 도덕률과 그 내용을 규명 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구약 백성을 그것으로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 안에서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도덕적 및 의식적 율법은 그리스도께 로 인도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1) 중보자는 타락한 인간만 도와준다. 나는 "율법"이란 말을 경건 되고 의로운 삶의 규범을 제시해주는 십계명을 뜻할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전달해 준 종교 형태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벧전 2:9).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중보자를 믿음으로써 감히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올 수 있도록 모든 제사장과 왕 같은 영광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2) 율법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3) 도덕법은 우리를 변명할 수 없게 만들며 우리를 절망 상태로 빠뜨린다. 율법을 준수하는 자는 우리 가운데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약속으로부터 제외되어 완전한 저주 가운데로 빠져들어 간다. 나는 여기서 일어나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교훈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실제로 제안된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기는 하지만 그것에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는 없다. 이것을 나는 그것들이 우리를 위압하고 있으며 또 용서받을 수 없는 혹독함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어서, 우리는 율법에서 임박한 죽음을 볼 뿐이라고 생각한다.
4) 그러나 율법에 나타난 약속은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만을 바라본다면 우리 모두 정죄와 저주를 받기 때문에(갈 3:10) 우리는 낙담과 혼돈과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이를 완성케 하시며, 그리하여 우리가 그 약속들의 조건을 성취한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약속에서 오는 혜택을 받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문제를 다룰 때 더 자세하게 논의할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한다.
5)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며, 거울같이 우리의 죄악성을 드러내 주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도록 해준다. 즉 율법은 엄격하므로 우리에게서 자기기만을 제거해 준다
6) 율법의 두번째 기능은, 적어도 형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켜, 율법의 절박한 위협을 듣지 않는다면 공정하고 옳은 것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7)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는 굴레가 된다
8) 율법은 주로 신자들을 권고하고 선행을 촉구한다. 율법의 세번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율법의 본래 목적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서 다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하고 새긴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렘 31:33; 히 10:16), 즉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바라도록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감동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율법에 의해 두 가지 방법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
율법은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더 철저하게 알고 그들을 납득시켜 그것을 확신케 하는 최선의 도구가 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시종이 자기 주인에게 칭찬받기 위하여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모든 습관을 자세히 알아내어 지키기 위하여 자기를 거기에 적용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9) 의식법(儀式法). 의식들은 효력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 그 사용이 폐지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강림하심으로써 의식들을 종식시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식들의 신성성(神聖性)을 조금도 훼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인정하고 높이 받들었다.
10) 십계명과 우리와의 관계.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므로 우리에게 전적인 요구를 한다. 율법이 영혼, 정신 및 의지의 순종을 요구할 뿐 아니라, 육체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성령의 향기만을 풍기는 천사와 같은 순결함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11) 세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두 돌판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숙고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두 부분으로 나누시고, 거기에 모든 의를 포함하시며, 그 첫 부분은 그의 존엄성에 대한 예배와 특히 관계된 종교상 의무에 돌리고, 두번째 부분은 인간과 관계를 갖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의무에 돌린 것이다.
의의 일차적인 토대는 하나님 경배임이 분명하다.
4. 그리스도인의 생활 (기독교강요 3권6~10, 19장) : 하나님 주권의 생활 윤리, 그리스도, 성령, 성경 중심의 윤리 사상
칼빈은 자신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생활의 핵심으로서 자기 부정을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심을 말한다. 칼빈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를 주관하도록 한다. 또 오직 그 분만을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우리의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분만을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고 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사욕을 위해서 살지 말고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다. 칼빈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부정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영광(gloriam Dei)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말한다.
5. 결론
칼빈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존재의 의미를 갖으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분명한 멧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칼빈의 윤리 사상은 자기부정을 통한 기독교인들의 삶의 보편적인 규칙을 제시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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