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강 교회의 본질과 의의①(3월 11일 화요일)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다. 구약에서는 자녀 됨이 나라의 백성 됨으로(출 19:6; 시 100:3) 나타난다. 교회는 언약의 공동체이다. 언약의 목적은 영생이다. 아담과의 첫 언약은 순종을 조건으로 하는 행위언약이었다. 그 행위는 단지 소극적 순종을 요구하는 해위였다(창 2:17).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면 영생을 누렸을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완전한 자녀 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첫 언약의 머리였다. 그가 순종하였다면 모든 후손이 영생을 누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의 죄가 전가되었다. 죄의 전가로 죄책과 오염이 전가되었다. 죄책은 사망의 형벌을 의미한다. 오염은 전적 무능과 전적 부패의 비참한 상태를 뜻한다.
아담으로부터 전가 받은 죄를 원죄라고 한다. 모든 인류는 원죄에 속하여 모태에서 잉태되면서부터 사망과 오염에 속한다(시 51:5).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조성되면서 죽었다(엡 2:1). 그러므로 이제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이 마음에 품는 것과 뜻하는 것이 모두 악하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 즉 자유의지조차도 상실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사람의 선행은 단지 외형적으로 그리할 뿐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중심이 온전치 못하므로 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그림자초차도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타락 후 인류는 아무도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중심으로 선을 행하려고 할 수도 없다(시 53:1-4). 사람은 선행에 잇어서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
아담의 범죄 후 인류는 전적으로 타락하여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되었다. 그리고 사망의 형벌에 속하여 스스로 사망을 이길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행위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타락 후 인류는 더 이상 순종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는 언약의 당사자가 될 수 없었다. 오직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체결될 수 있을 뿐이었다.
구약의 모든 언약은 은혜언약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과 맺은 언약은 모두 은혜를 그 실체 곧 질료(materia)로 한다. 이는 사람 편에서 무엇을 행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믿음을 조건으로 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공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 이제는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은혜로 즉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나 공로는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나 믿음 자체에 무슨 공로가 있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조건이되, 단지 도구적이거나 형상적일 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의 의를 그저 우리의 것 삼아 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히 12:24)”이시다. 그가 아담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순종하고 뿐만 아니라 죄의 값도 치르는 것이어야 했다. 아담은 단지 소극적으로 금한 것을 하지 않았으면 되는데 우리 주님은 모든 고난을 다 받으시고 모든 율법을 다 순종하셔야 했다.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셨다(요 19:30). 그리하여 모태에서 형성될 때부터 죽음까지의 죄에 대한 값을 다 치르셨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요 19:30) 의를 그저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셨다. 우리는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다만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그리하셨다(롬 4:5).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에 이름은 그저 구원에 이름이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 -그 분의 기버하심, 뜻하심, 원하심에 따른 것이다(엡 1:5, 9, 11)
주께서 죽음을 죽이는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셨다. 그리하여 한평생 죽음에 매여서 그것에 종노릇하는 우리를 놓아주셨다(히 2:15). 오직 순종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요 우리는 아멘 할 뿐이다(고후 1:20).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취하신 생(영생)은 생명, 생기. 생활을 아우른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에 의한다.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협약은 우리의 생명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에 미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이루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0)"
의를 다 이루심: 구속사적 성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오직 우리를 구언하기 위함이시다. 타락이 없으면 성육신이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의 구원을 작정하였다.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으로 세 가지가 창조 전에 미리 정해졌다.
①첫째, 구속주로서 그리스도를 정하셨다. 제 2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주로서 작정되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그 이루신 의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전가된다.
②둘째, 대속(代贖, redemptio)으로 구속 방식을 정하셨다. 대속의 방식은 대신 값을 치르는 것 즉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룻에게 보아스가 그리했듯이(룻 4:1-12) 무름에 합당한 자리로 서시기 위하여 주님은 사람이 되셨다. 구원의 방식이 대속이어야 하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셔야 했다. 다만 값을 치르기 위하여 죄는 없으셔야 했다(히 4:15).
③셋째, 구속백성을 정하셨다. 삼위 하나님은 성부의 뜻, 성자의 공로, 성령의 인 치심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를 미리 선택하셨다. 선택은 무조건적이었다. 그것은 선을 행할 자질을 미리 바라보고 정한 것이 아니었다. 구원이 무조건적이므로 선택도 그러하다. 오직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대로(엡 1:5)”,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엡 1:9)”, “그의 뜻의 결정대로(엡 1:1)” 자녀 될 자를 자녀로 택하셨다. 그리하여 구원의 은혜가 “그저 주시는 바(엡 1:6)” 된 것을 나타내셨다. 선택의 무조건적 은혜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 돌려지는 영광이다(엡 1:6, 12, 14).
구원은 전적인 은혜의 산물이다. 선택은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에 따른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듯이 값없이 내리는 것이다.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그러나 유기(reprovatio)는 조건적이다.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이다. 그러므로 선택과 유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 어떤 불평도 돌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협약이 역사상 성취되었다. 구원협약이 이루어지는 역사적 경륜이 구속사이다. 구속사는 언약의 역사적 성취와 전개를 함의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을 때, 그 이루심은 구약의 모든 언약을 모두 포함 한다. 노아의 자연의 운행에 대한 약속, 아브라함과의 복의 약속, 모세와의 성도의 거룩한 삶의 약속, 다윗과의 자녀로서의 다스리심에 관한 약속 등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되 진리 가운데 그리하신다. 아버지는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단지 관념적이지 않으며 실제적(혹은 실재적)이다. 그것은 단지 형상학적인 교감이나 윤리적 정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사랑은 의를 이루신(마 3:15) 역사적 사랑이다. 주님의 긍휼, 자비, 인자, 진리, 진실, 공의와 함께 역사한다(시 40: 10-11; 57:10; 61:7; 85:10; 89:14; 118:2). 주님의 십자가의 가로대는 사랑을 세로대는 진리를 의미한다. 주님께서 못 박히신 곳은 사랑과 진리가 만나는 점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의를 다 이루셨다;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언약의 성취로서 구속사는 곧 언약사라고도 불린다. 언약의 두 측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에 있다.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공로는 함께 역사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공로로 나타난다. 아들의 공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드러낸다. 주님은 이 땅에 단지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의를 다 이루시고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의 대속은 주님의 의를 그저 전가해 주시는 무조건적 은혜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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