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구원론 필기 총정리

예림의집 2013. 12. 9. 09:27

필기 총 정리

 

구원서정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구원론은 좁은 영역이다.

-구원서정을 논하는 부분이다.

-과거에는 구원의 순서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개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구원론 할 때와 성령론 할 때 그 범위가 다르다. 성령론 안에 구원론이 일부를 차지한다.

-구원론은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룬다.

-성령론은 그 범위가 훨씬 넓어, 신론, 성례의 문제, 종말론적 사역, 생태 신학 등을 다룬다.

 

*구원론이라는 학문을 왜 하게 되었는가?

-구원론에 해당되는 내용은 결국 신약 성경(신약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구원론은 조직신학에서 나오는 학문이고, 구원서정은 순서라기보다는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구원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의 일 자체가 구원서정 영역에 해당된다.

-신약 성경 자체가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4복음서는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의 일을, 사도행전부터는 그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느냐를 다루고 있다.

-전자의 것도 구원이요, 후자의 것도 구원이다.

-구원이란 한 단어로 두 개의 별개의 사건을 부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사건,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구원

-이것이 우리가 쉽게 웃으면서 하고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라 이 점을 계속해서 염두해 두고 공부해야 한다.

-성경이 그러한 형태를 지니고 있고, 성경이 하고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성경은 구원을 “복음서를 통해서 들어나는 완성된 구원”과 “행전을 비롯한 후반부에 성령이 오심으로 인해서 사도들이 나가서 증거하는 구원” 즉, 기독론적 차원의 구원과 구원론적 차원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사도행전부터 이후의 내용들이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서정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적용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교회의 기능과 사역 도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역사가 구원서정의 사역을 어떻게 해 왔느냐 이다.

-전통의 차이는 곧 구원서정의 차이이다. 구원을 소개하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서 전통이 나누어졌다.

 

*개혁주의의 역사는

-어느 다른 전통보다도 구원서정 논의에 있어서 활발했던 역사이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 중에 가장 많이 차지하는 주제가 “구원론”이다.

-종교개혁 정신이 가장 투철한 전통이기에, 이 정신이 구원서정에 있어서 로마 케톨릭 교회가 잘못되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투철하다고 하는 개혁신학의 전통은 구원론 논의를 가장 많이 했다.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Kuyper

Hoeksema

Murray

*칭의

-신 칼빈주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

-칭의가 영원 전에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중생

-인간의 전적타락을 강조

-칭의는 영원에서 시작한 것임으로 현실에서 거론될 수 없다.

 

 

 

 

*소명(소명)

-웨민을 충실하게 반영

-중생과 소명을 분리하지 않고 먼저 소명을 거론한다.

-성령이 우리를 중생시킬 때

독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매체로 사역하신다.

-바빙크와도 유사점이 있다.

-결론은 정통적인 개혁신학 전통 신학자임에도 구원서정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구원서정 논의의 문제점

①성경의 지나친 확대

-성경 속에서 하나의 구원서정을 발견할 수는 없다.

-성경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로마서 8:30 조차 구원서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구원서정 작업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공식을 주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의도는 아니다.

-구원서정을 논한다는 자체가 별개의 구원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구원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러 말로 피차 권면하라”

-같은 한 구원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다.

-포도송이나 다이아몬드 같이.

-구원의 표현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그러나 동일한, 다양한 구원이다.

②지나친 단순화

-구원서정의 논의가 단순화 작업일 수밖에 없지만, 입체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 하나가 구원서정의 중요하지만 너무 몰입되어 전체 그림에서 이탈되어 나올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생명력을 상실할 수 있다.

-전체(그리스도)에서 너무 이탈되어 버릴 수 있다.

③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적 논리의 지배

-17C 개혁 전통주의 신학은 상당이 사변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체계가 상당히 영향을 주던 시기.

-택함이 소명을 낳고, 소명이 칭의를 낳고, 칭의가 회개를 낳고,

-원인과 결과로 보는 자체가 그리스도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논의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못하면서 별도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④지나친 주관화

-구원서정 논의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 차원의 구원을 관찰하고 적용, 상담, 지도하는 정황에서 시작되었다.

-구원론이 학문화 되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에 교인들을 교육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좀 더 바람직한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경우에 내가 지금 어떤 구언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함이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 없는 은혜, 은혜만을 위한 은혜가 될 수 있다.

-구원사역을 지나치게 주관화 시키는 데서 오는 경우이다.

-내가 추구하는 은혜가 실지로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지 의식되어야 한다.

-그 은혜를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높이느냐, 그의 일을 더 열심히 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구원서정 논의

-순서적 개념이 아니다

-순서보다는 적용의 의미를 먼저 떠올려야 한다.

-과거에 구원서정 논의는 어떻게 해왔는가?

-개혁주의 안에서는 구원서정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각기 나름대로 개혁주의에 충실했고, 구원서정 논이 이후에도 개혁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간적인 평가가 아닌 이미 학자들에 의해서 드러난 사실이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어떤 특정한 순서, 열거하는 공식이 있는 것처럼 추적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성경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일, 단순화 작업,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론, 지나친 주관화의 문제

-문제의식을 갖고, 대안을 찾자

-방법론이 필요하다.

-지엽적인 기교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를 지배하는 원리를 말한다.

-기본적인 원리는 성경으로 들어가서 찾는다.

-성경은 어떠한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 추적한다.

 

누가복음 24장 44절-49절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44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난 3년 동안의 함께 사역하심

-모세 율법과, 선지자의 글, 시편 --> 구약 히브리 성경

-유대적 정서에서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믿고 있는 성경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성경관: 예수님은 성경이 나(예수님)을 가리켜 기록하고 있다.

-구약성경을 해석한다고 하는 해석학적 원리로도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많은 설교자가 구약을 해석할 때에나, 시악을 해석할 때에나 그 성경관을 무시하고, 때로는 모르고 해석한다.

-구약 계시는 오실 그리스도, 신약 계시는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해석의 원리).

-절대 구약의 본문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올 수 없는 본문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사람들에게 준 것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과 유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소명의 의미는 말씀을 다룰 수 있는 권세와 고난과 능력(실력)이 부여되어졌다는 것이다.

-나의 소명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말씀을 다루는 것이고, 그 방법은 성경이 정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에 대해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신다.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되고 있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46절: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고난, 부활)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복음서의 신학이 바울 신학에서도 일관되게 말하여지고 있다.

-구속사(기독론)적 성취에 초점을 두고 있다.

*47절: 회개와 복음전파(구원서정)

-구원서정의 일이 앞으로 진행되어져야 할 것.

-46절은 구속사(기독론)이고 47절은 구원서정(구원론)이다.

-구약 성경이 구속사와 구원서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죄의 문자를 해결하는 것이다.

-죄 사함을 받는 회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 믿는다기 보다는, 믿는 자들의 폐혁한 삶에서 돌이키라는 뜻

-구원서정을 공부하는 우리의 잣대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믿음에서 나오는 회개, 회개하는 믿음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47절은 구원서정의 일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져야 하는 일.

-믿고 구원 받는 것(구원서정), 복음전파(구원서정의 사역)를 말한다.

-저자가 같다는 것을 볼 대, 많은 것들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해준다.

*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구원서정의 일이 되어져야 할 것과 너희의 역할이 만나게 된다.

-너희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이 구원서정의 사역이다.

*49절

-혼자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뭔가(성령)을 보내 줄 것이다.

-약속하신 것, 위로부터 오는 능력

-성령이 약속의 성취, 결과와 능력과 일치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은 약속과 성취를 떠올리면 된다.

-구약의 역사는 약속인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약속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은 성령이다.

-약속과 능력은 구약적 정서와 신약적 정서가 포함된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을 통해 구약적 특징과 신약적 틍징을 한 눈을 볼 수 있다. 중심, 근간, 힘, 명분, 목표

-누가의 수사적 특징을 볼 수 있다.

*45절

-그들의 마음이 열렸다. 성경을 깨달음

-우리가 사모해야 할 부분

-예수님이 성경이 누구를 가리켜 기록하고 있는지를 말해줄 때에 마음에 빛을 주시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미 성령은 활동을 하고 계셨다.

-그러나 구약 계시는 기록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것(성령의 활동)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기록하지 않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도 의미(의도)가 있는 것이다.

-구약 성도들과 신약 성도들의 구원서정은 본질상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그러한 것을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구약성경은 보다 더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을 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약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방식과 신약성경이 하는 방식은 차원이 다르다.

-신약성경은 성취에 그 해석의 키가 있고, 구약성경은 그 해석의 키가 기다림에 있다.

-신약과 구약이 분명히 다른 차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구약차원으로 산다면 성경의 의도한 바가 아니다.

 

누가복음 24: 25-27절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5절 예수님의 꾸지람

-더디 믿는다: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더디 믿는다.

-율법과 선지자들과 시편에 기록된 것-->구약성경

-너희는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것을 왜 믿지 못하느냐?

*26절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

-구속사적 관점에서 두 시점을 나눈다.

-고난(비하, 사심, 고난, 죽으심, 장사), 영광(부활, 승천, 교회, 재위, 재림)

-고난과 영광은 신학용어 이전에 성경의 단어들이다.

-각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큰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영광 속에 구원서정도 포함되어 있다.

-영광은 구속사적 단어이지만, 그 속에 구원서정의 사역도 그리스도의 영광가운데 되어지는 일이다.

*27절 누가의 주석

-모든 성경에 쓴 바(모세, 선지자의 말)

-자기에게 관한 것임을 설명했다.

-예수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경관: 구약성경은 당신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32절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것 또한 성령이 하시는 일

-사역적(실천신학적) 측면에서 중요한 맥

-성경을 풀어주는 것

-성경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는지를 풀어주는 것

-요셉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원론 차원의 위치를 차고하고 있는지.

-교인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보고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요셉스토리의 주인공이 요셉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연결해 주는 것이 성경을 풀어주는 것이다.

-성경을 풀어주는 설교자가 되라!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마음을 열어 깨달아 알게 된다.

 

사도행전 1장 2-9절

①행 1: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사도행전은 시작하자마자 성령이라는 단어가 바로 쓰이고 있다.

②3, 4절은 누가복은 뒷 부문을 다시 정리해 주는 부분이다.

③5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세례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중요한 의미가 집약되어 있다.

-요한의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대비를 이룬다.

*성령세례

-이런 표현은 개혁신학에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개혁신학의 구원서정에는 없는 부분이다.

-공유되는 그 의미는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더 추구해야 될(도달해야 될) 은혜의 경지. 체험을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누린다고 할 때에 그 구원보다 더 높은 경지의 것이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 더 누리고 추구해야 할 것이 마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은총 보다 더 나은 것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 이상의 은총은 없기 때문이다.

-5절의 의도는 성령세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물로 세례를 받는 것과 대비를 이룬다. 시대의 차이 방법의 차이이다.

-누가 요한의 물세례를 받았었는가? 회개하면서 세례를 받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 즉, 이미 믿는 사람들 중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받았던 것이 아니고 나아오는 누구든지 받았던 것이 물 세례이다.

-마찬가지로 몇 날이 못 되면 같은 전통이(세례)가 물이 아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즉 믿는 사람들 중에 더러 성령이 임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믿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것이 바로 중생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5절은 2장에 나오는 성령강림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④8절은 누가복음 24장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

-누가복은 24장 29절이 4절과 8절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구약성도들의 약속의 성취는 바로 성령강림까지이다.

-과거에는 약속을 믿고 바라던 삶에서 신약성도의 삶은 능력으로 사는 삶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삶의 차이이다.

-성령이 오신 것과 능력을 연결시키고 있다.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을 받아서 나의 증인이 된다.

-사도들이 내 증인의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구원서정의 일을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하고 신약에서 성취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성취에서 멈춘 것이 아니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사도들을 통해서 구원서정의 일이 진행될 것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약, 복음서에서 사도행전, 서신서, 계시록이 통한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심으로 어떻게 구원서정의 일이 진행되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1장은 도입에 해당하고, 2장부터 본격적인 사도행전(구원서정)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2: 1-21절

①1-3절 성령이 임하심

②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결과

-성령이 말하게 했다.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방언; 4, 6, 8, 11

-4과 11절의 단어는 글로사(언어, 용어, 단어)

-6과 8절 디알레토스(사투리)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방언과는 다른 언어의 차원을 말한다.

-말하다와 듣다가 반복됨을 주의해야 한다.

-과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방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소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방언이 아니라 언어의 소통을 말하는 것이다.

-들었다는 것은 그 내용이 전달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전달된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제목정도만 열거되어 있다.

-11절 “하나님의 큰 일”

③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무엇인가가 드러나고 있는 계시의 사건이다.

-제목: 하나님의 큰 일

-14절 이하의 베드로의 설명을 보아야 한다.

-이 일: 하나님의 큰 일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겠습니다 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로 만난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큰 일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그 큰 일이 무엇인지 말해주겠습니다.

④베드로의 설교: 하나님의 큰 일 본문: 요엘서 2장 28절 본문 인용

-17~21절

-하나님의 큰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택했던 것이다.

⑤(욜 2:28, 개정)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후에: 막연한 미래

-여호와의 신: 성령이라는 단어는 없다.

(행 2:17, 개정)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말세에: 요엘이 말했던 그 후에는 바로 지금이다. 이 시점에다 그 끝을 맞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하는 베드로의 해석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구약의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는 말은 가끔씩 기록되었다.

-그 사건이 특별함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던 것이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선지자, 제사장, 사사 등 중요한 사람에게 굉장히 구분되어진 특별한 사건이다.

-요엘의 예언은 그 틀을 깬다는 것이다. 요엘의 말은 정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이것은 선지자와 구약을 대표하는 의미가 있다. 구약성경 전체가 기다리고 바라는 뭔가를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 강림의 사건인 것이다

-구약 성경도, 구약 성지자도 고대하던 일이 지금 성취되었다.

-요엘의 예언 속에서는 미래에 관한 일이 막 섞여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성령 강림 들이 혼재해 있다.

-베드로가 인용을 할 때 구체적으로, 시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요엘의 예언의 초점은 21절에 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말세가 되면 성령이 만민에게 임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다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큰일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 날이 온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성령이 오시는 것.

-구원서정의 일이 선포된 것이다.

-구원서정의 일이 진행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냥 좋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하는 것을 성경이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큰일인 것이다.

⑥14절: 이르되(말하다)

-아포펭고마이: 4절, 14절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메사지나 의도를 전달하는 것이다.

-계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의미로 선별된 단어이다.

-사실 4절에서부터 이미 이 모든 사건은 계시를 말하고자 하는데 의도와 초점이 있었고, 14절에 베드로가 말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 계시를 말해주겠다는 것이다.

-4절부터는 사건 계시(행위 계시)이고, 14절부터는 말씀 계시로 앞에 있었던 사건 계시를 설명해 주고 풀어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부활은 행위 계시이고, 구약성경은 이 행위계시에 대해서 예언(말씀 계시)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이 사건을 증거(말씀계시)하고 있다.

-행위계시와 말씀계시

-성경은 행위계시가 중심이지만 이 둘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두 개의 별개의 계시가 아니고 하나의 게시를 사건과 예언, 증거를 하는 관계이다.

-말씀계시는 사건계시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⑦행위계시(1~13), 말씀계시(14~36)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하나의 메시지가 소통되고 공유되는 일이 가능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언어의 혼잡은 첫째, 하나님의 훈계와 심판이자 하나님의 배려이다.

-언어의 혼잡으로 소통의 장애가 생겼다.

-행 2장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속(구원서정)에 관한 하나님의 큰 일이 소통되어지는 것이다.

-선교라는 사명을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것이다.

-사도행전은 바로 2장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2장은 사도행전의 출발점이다.

⑧세례와 성령이 임하는 순서가 맞지 않은 경우

-성령은 수시로 임하는가?

-성경의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도행전의 특성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그 일이 이스라엘이 아닌 교회라고 하는 정황 속에서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확인, 인정, 공인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강림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워졌다.

-말씀사역(설교)의 결과로 교회가 세워진다.

*설교를 한다고 할 때

-성경을 풀어서 강론할 줄 알아야 한다.

-구속사를 드러내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

-각 본문마다 아웃라인을 정하여 그 아웃라인대로 설교하라.

-성경에서 같은 본문을 취하지 않은 한 같은 아웃라인이 나올 수 없다.

-각 본문은 다르게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것을 말하되 다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 10: 44-48절

①모든 것

-베드로의 설교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설교하되. 케리그마)

-증인은 나가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

-그리스도에 관한 구속사의 내용과 구원서정

②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임어 죄 사함을 받는다(구원서정)

③44절 성령이 임했다.

-방언을 말함.

-방언은 성령이 임했다 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우리와 같이(은) 성령을 받았다.

-방언으로 알게 됨

-세례를 주자. 저 사람이나 우리나 같다.

-예루살렘 교회가 여기에까지도 연장이 된다.

-한 교회 사람들이다. 한 교회에 속함을 입증하는 증표가 세례이다.

④8장에서 빌립의 세례

-이 사건과 동일한 맥락의 사건이다.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2자의 사건에 대한 교회적인 차원에서의 확인이 방언과 사건이다.

-여러 성령강림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교회적인 사건에서 멀리 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이라는 매체로 확인하고 세례를 주므로 한 교회 확증

-세례를 통해서 하나의 교회를 이룬다.

 

*계시가 성취되는 것이 무엇인가?

-구속사에 근거하여 구원서정이 실천되는(가능케 되는) 것에 포함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진행은 구원서정의 일이 진행이 되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구원론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다.

 

-부활 이후의 시점에 비로소 완성의 의미를 가진다.

-구약 예언의 성취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완성) 됨.

*성령을 닫으라

-과거시제: 한 동작으로 완성됨.

-한 동작: 단회적 사건(행 2장의 오순절 사건)

②23절

-구원서정

-22절을 전제로 하신 말씀

-성령이 오신 다음에 너희가 구원서정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죄용서의 복음

*고후 5장 18-19절

(고후 5:18, 개정)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9, 개정)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화목하게 되는 것: 구원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기를 부탁하심.

-사도바울도 같은 맥락에서 구원서정을 이해하고 있다.

-구속사에 근거한 구원서정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화목의 직책이다.

 

*연합의 개념

①union

-연합

②communion

-교통, 교제, 친교

-구원서정

 

*구원 완성의 개념

①completion

-이미 완성

-기독론적 측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어 우리에게 지금 적용되는 구원

②consummation

-아직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지지 않음

-구원론적 측면

-최종적 완성, 천국에서의 삶.

 

*이미-아직의 역동성

-종말론적인 구원의 삶의 이유

-직선적으로 구원의 개념을 열거하는 삶과 정면으로 배치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의 삶은 그 자체가 완성된 구원이면서,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다.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

-전통적으로는 외적인 부르심과 내적인 부르심으로 나누어 이야기 하는데 내적에 부르심에 해당되는 유효한 부르심을 이야기해야 한다.

-내적인 부르심은 외적인 부르심(복음으로의 초대)을 전제로 한다.

 

*외적인 부르심

-외부에서 우리에게 복음이 제시되는 것을 말한다.

-복음이 제시가 되면 우리가 그 복음에 대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여지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펠라기우스,

-세미펠라기안(하나님의 도움+인간의 반응): 가톨릭, 알미니안 등의 총칭

-복음으로의 초대가 전제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것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락 전의 상황: 일반적인, 보편적인 복음으로서의 초대(반틸), 일반계시, 종교의 씨, 종교성

-타락 후의 상황: 롬 1:16-20.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는 것이다. 심판은 공의로운 것이다. 이미 복음으로의 초대가 사람에게 있었다.

-구원이 어떻게 시작이 되느냐의 관점.

-우리의 신앙 고백(전제)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게 된다.

 

*유효한 부르심

①구약성경

-창조의 사역과 연관성이 있다.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선택되고 세워지고 백성이 된다.

-부르심은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소유권이 강조된다.

②신약성경

-부르심의 의미는 매우 좁아진다.

-구체적으로 구원과 연관이 있는 부르심이 된다.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구원이 있게 되는 특징이다.

-부르심의 동작을 하시는 주체와 부르심이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유효하다

①하나님의 예정을 구현하는 동작

-부르심의 기원이 신적이며 영원에 속한 기원이다.

(롬 8:28, 개정)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삼위일체 구도에서(소요리문답)

from 성부: 서부로부터(예정과 영감)

forward 성자: 그리스도와 연합.(부르심의 유효함의 최종적 의미)

through 성령: agent, by(말슴이 더불어 강조된다)

-엡 1:3-12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②부르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진다(WCF 10:1). by the Word and His Spirit

-중생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말씀과 더불어 라는 강조가 개혁주의의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시작을 중생으로부터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복음이 약화되고 전도, 선교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없이 사람에게 구원이 일어날 수 없다.

-제 침례파(인간의 관여X), 알미니안(인간의 의지적 판단), 웨슬리안 등에서 나타난다.

-아브라함 카이퍼: 말씀의 사역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사역 다음에 오는 것으로 본다. 신 칼빈주의

-말씀이 주어질 때 성령이 사람에게 그 말씀이 이해하도록 하신다. 이미 그 안에 중생의 개념이 들어 있다.

-WCF는 따로 중생을 다루지 않고 부르심의 결과로 중생을 설명하고 있다.

-부르심이란 말씀에 대한 강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외적으로 선포가 되고, 택함을 받는 자들에게는 구원으로의 초대, 택함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는 것이다.

-전도를 할 때 우리의 관심은 누가 택함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새우는 것이다(롬 1:17).

③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유효하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유효함의 최종적 성취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연합이 언약의 핵심이 된다.

-구약백성에게 맺었던 그 언약이 비로소 나에게 까지도 적용이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속이 나에게까지 유효한 약속이 되는 것이다.

④엄청난 실천적 측면에서의 차이점

-거룩이라는 성질을 낳는다. 거룩으로 부르심이다.

-부르심이 성화의 삶을 낳는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거룩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룩이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달라보이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가?

-거룩이 이 세상을 향해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중생(Regeneration)

-중생의 교리의 강조는 전적 타락, 무능의 교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크다.

-전적 타락의 교리를 어느 정도 희석시키는 당태에서는 중생의 교리가 그만큼 덜 중요해질 수 있다.

-개혁신학의 역사에 많은 논의가 되어져 있다.

 

*중생의 의미(넓은 의미: 종교개혁 당시)

-구원의 전 과정을 중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칼뱅).

-제 창조적 의미에서 새롭게 태어나서 거룩에 이르는 전 과정을 중생이라고 넓게 썼다.

-칼뱅의 강요를 읽으면서 우리가 배웠던 것과 가름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생의 의미(좁은 의미)

①구약성경

-구약의 주제는 다시 태어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있음으로 찾기가 어렵다.

-중생적 의미는 다분히 신약적이다.

-나만의 문둥병 치료 사건(육체적 중생: 어린아이 몸처럼 새롭게 태어남)

-마른 뼈들이 새로운 군대가 되는 모습

-시편 다윗의 시 “내 영혼을 다시 소생시켜 달라”는 내용이 중생적인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신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서정을 구약에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이지만, 그 때에는 구원서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구약 성도들의 구원에 성령이 주도하심은 사실이다.

-성도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같은 방법(믿음)이다.

-그 일을 하시는 성령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이다.

②신약성경

-복음서 안에서는 요한복음을 제외하고서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새롭게 된다: 중생이라는 의미이다.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우주적 차원에 새롭게 됨으로 언급되고 있다.

-세상이는 없는 단어이다.

-주님의 재림과 우주적 차원의 새롭게 됨을 연결시키는 종말론적 구도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에는 중생의 사역을 하게 될 성령이 오시는 역사를 잘 기록하고 있다.

*바울서신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옛 사람에 대한 종결, 새 삶의 시작 등의 명확한 불연속적인 대비가 있다.

-종말 사상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듭나게 하심: 중생의 단어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유효하게 부르심이 성령과 말씀으로 되어진다.

-썩지 아니할 씨: 말씀

-썩지 아니할 씨: 성령(0)

-유효한 부르심과 중생을 거의 같은 사건으로 보고 있다. 의미하는 것이 다르다.

*구분

-구원서정의 시작은 말씀에서부터 시작되어진다.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로 중생과 믿음이 생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중생, 하나님만의 하시는 일

-의식의 차원에서는 믿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간의 반응

*요 3:1-8

(요 3:1, 개정)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요 3:2, 개정)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요 3:3,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4, 개정)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요 3:5,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6, 개정)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 3:7, 개정)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8, 개정)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중생의 전제: 거듭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육으로 난 것과 영으로 난 것의 대비(6절, 강조)

-존재론적 한계 그 자체를 들어서 분명한 대비를 들고 있다.

-육: 죄성을 지닌 육인가? 타락 전의 육인가?

-그 육이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육의 힘으로는 중생의 일을 하 수가 없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이 일은 성령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중생의 교리에 있어서 전제가 되는 것은 전적 타락의 무능력과 육의 무능력을 말한다.

-성령만이 할 수 있다.

-거듭나다(아노펜): 다시 태어나다, 위로부터 나다.

-거듭나다=물과 성령으로 나다, 보다=들어가다.

-니고데모의 사고 속에는 다시 태어난다(두 번 난다)로 여겨진다.

-예수님의 말씀은 위로부터(성령으로) 태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물: 세례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씻음을 의미한다.

-모세의 전통과 새로운 전통을 대비시키고 있다. 새롭게 되는 방법

-구약에서 행하던 모든 예식들이 어떻게 신약성경에 왔을 때에 구원의 구체적인 의미와 연결 되는 지 알 수 있다.

-중생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중생이 되었다는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효한 부르심의 교리와 연결하여 생각할 때에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 자체가 성령이 하시는 일리고 신비롭다.

-위로부터 나다=하나님께로 나다=우리가 다 알 수 없다=신비롭다.

*특징

-그 의미가 굉장히 총체적이고 전인격적인 지배의 범위를 말한다.

-중생은 전적 탈락에 대칭이 됨으로 중생 또한 전체의 살아남이다.

-타락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회복

-중생했다고 해고 죄의 문제가 없어진 것이 아니다.

-죄의 종, 지배함을 받다가, 중생을 통하여 죄가 나를 더 이상 지배하지 않는다.

-그 대신 성령이 지배하는 것이다.

-나에게 여전히 죄성은 남아 있다.

-죄성의 유혹에 져서 넘어지고 죄를 짓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정죄함을 없고, 죄를 이길 능력 또한 주어졌다.

-중생 전에는 죄가 나의 기본적인 모든 성향을 다스려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죄의 일이다.

-중생 후에는 죄의 지배, 권세, 통치에서부터 내가 벗어난 것이다.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이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죄성이 우리에게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성령의 힘으로 그 죄성을 이길 수 있다.

-중생은 성령이 지배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는 것이다.

-중생은 죄 짓지 않고 성령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중생은 우리의 전 인격이 총체적으로 의미가 다 달라지는 것이다.

-새로운 능력(원리)가 우리 안에 생겼다. 성령의 힘이 생긴 것이다.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싸움(고난)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복습(질문 답변)

-구원의 의미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고 자 함.

-신약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누린다는 것이 충만, 풍성함, 온전함으로 표현으로 되어 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누린다고 할 때에, 충만, 풍성함, 온전한 등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이다. 그 왜에 구원은 없다.

-WCC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구원을 말하고 있고, 그리스도가 아니래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과연 내가 기금 누리는 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충만이고 풍성이라면 그것은 구원이다.

-그러나 혹이라도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기독론적인 근거를 명확하게 하지 못한다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를 근거하지 않는 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없고,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 외에 더 좋은 구원이 없다.

 

*김삼환, 조용기 목사님의 문제,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처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분이 아니다.

-한 교회라고도 생각 안한다.

-지역교회와 대한예수교 합동 교단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교회의 범위이다.

-직접적인 답은 말할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

-장로교주의란 위임된 권한을 가지고 집행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개인의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 속에 독자적 행보를 하는 것은 이탈이다.

-교회가 타락하였고, 힘을 잃어가고 있다.

-목사가 정치에 읍소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초대교회 방언과 현재의 방언의 차이점

-30년 전 한국교회 기독교는 방언을 하면 이단이라고 여겼다.

-하나의 교회 = 하나의 신앙 공동체 = 하나의 신학

-혹시 우리가 균형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차분하게 집혀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다는 것?

-많은 경우에는 우리가 이미 설정해 놓은 명시적인 답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

-운명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충분히 성경에 들어난 게시된 뜻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답을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는 것도 믿음이고, 안하는 것도 믿음이다.

-기도의 기본적인 핵심은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는 것이다.

-기도는 소통이기에 나의 인격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요하다.

 

*교수님의 대답들은 질문에 대한 본질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명쾌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있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대답들로 가득 찼다.

-질문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답변 끝에 안전장치를 한다.

 

믿음(Faith)

 

*구약적 정황

-아만

-믿는다고 하는 동사가 목적격이 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고 목적격을 붙잡는 의미이다.

-언약의 약속들이 가지고 있는 객관성에 근거한다.

-믿음의 정도에 따라 그 주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붙잡고, 맞기고, 의지한다는 의미이다.

 

*신약

-피스튜어, 피스티스

-복음에 대한 초대에 대한 반응

-언약의 성취인 그리스도와 구속사의 모든 것, 즉 새 언약을 붙잡는 의미를 가진다.

-믿음의 의미가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는 의미가 중요하다.

 

*믿음의 성질

①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엡 2:8, 개정)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의 수동성: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시는 것이다.

-나의 동의, 결단이 믿음은 아니다.

-믿음은 전인적인 신탁의 의미를 포함하나 믿음의 근본적인 출발은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심으로 인해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주시는 새로운 능력이다.

②믿음의 행사는 나의 동작이 된다.

-믿음의 능동성:

-수동성과 능동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는 동작의 주체는 나이고, 그 믿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중생 되었다면, 믿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겠는냐는 질문은 옳지 않다(에큐메니컬 신학).

-중생의 의미는 성령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온 것임으로 그 성령이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이 수반된다.

-믿음을 행사하는 주채는 나의 전 인격이다(이성, 인격, 감정).

*믿음을 전적으로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경우.

-구원은 내가 얼마만큼 믿느냐에 해당된다는 의미로 믿음을 생각하는 것. 믿음이 강하다, 약하다, 덜 믿었다.

*믿음을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보는 경우

-나는 할

-매 경우, 모든 순간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전적으로 내가 행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에 대한 가늠이 경건과 영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능동적인 동작에 믿음이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 자체가 나의 전인격적인 동작이지만 그 동작은 아무런 값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기여가 없다. 아무런 공로가 없다.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십시오. 나는 내려놓겠습니다.

*디아 피스테우스, 에크 피스테우스, 에피 피스테이, 디아 피스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아무런 값, 기여, 공로가 없다.

③믿음의 정도

(마 6:30, 개정)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올리고피스토스

-겨자씨 만한 작은 것. 일상에 있어서 비교할 수 있는 최소치

-작은 믿음: 작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부정의 의미가 들어 있다.

-믿음이 거의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하고 인정할 만큼의 어떤 모양이 거의 없다.

-믿음은 그 대상을 붙잡는 일을 하는 것인데, 믿음이 아닌 것은 믿음이라고 해도 그 믿음이 정작 믿음으로서 일을 하지 못함은 믿음의 대상을 붙잡는 것을 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작은 의미로 평가 되어진 것이다.

-성경에 믿음의 정도에 대한 표현은 나오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믿음의 요소

①지식의 요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성경에 계시된 지식

-계시를 통해서 지식이 전달된다.

-지식을 갖는 기능을 이성이 한다.

-믿음이라고 하는 일에 이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기관이 관여를 한다.

-어거스틴, 안센, 칼뱅, 개혁신학에서 이성을 굉장히 주의 깁게 다룬다.

-이성이 스스로의 힘으로 알 수 없고, 중생된 이성이어야 한다.

-이성을 배제하는 믿음은 지식을 배제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계시를 배제하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미 들어난(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탈한 또 다른 구원을 주시지 않는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을 동원하는 것이 믿음이다.

(롬 10:13, 개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 10:14, 개정)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개정)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롬 10:16, 개정)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롬 10:17, 개정)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개혁주의는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이성의 기능이 오해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②동의의 요소

-믿습니다라고 할 때에 가장 우선적으로 널리 생각되는 부분.

-내가 그 지식에 동의합니다. 그 지식의 내용을 수용합니다.

-아멘.

첫째,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에 동의합니다(성경을 통해서).

둘째, 나는 나 스스로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셋째,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넷째, 바로 그 구제주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 예수를 믿으면 영생하고, 구원 받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됨을 동의합니다.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해서 그것이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작이다.

③신뢰(연합)의 요소

-내 자신을 맡기는 것

-믿음의 완성

-나에게 제시된 구원에 지식에 대해서 내가 확신을 하고, 꽉 붙잡고 동시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

-WCF는 믿음을 설명을 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는 추상명사로 되어 있지만, 개념일뿐 아니라 믿음을 설명할 때 to accept, receive, unite, hold onto, rest in의 동사(행동)으로 성명하고 있다. 믿음을 동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동사의 목적어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한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붙잡는 방법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다. 이 자체가 아무런 일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공로나 값으로 처주지 않는다. 믿음 속에 어떠한 공로의 개념이 들어가면 안 된다.

-믿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만 한다. 믿음 외에 그리스도를 붙잡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일은 공로로, 행위로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받을 만큼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끌어안을 수 없다. 매달릴 수 없다.

-존 머리: 믿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길은 오직 하나, 오직 믿음으로이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엡 5:18, 개정)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충만함을 받으라 -> 충만되라(동작, 동사), 받으라는 말은 원문에는 없다.

-현재형으로 지속된 행동을 말한다.

-계속해서 충만한 상태로 있으라.

-신약 성도가 사는 길이 항상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성령충만이 어떤 도달해야할 고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평범한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성령충만이라는 또 다른 경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갈 5:16, 개정)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개정)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엄청난 오해를 불러오는 구절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선택의 문제로 가져가는 경향이 있다. 성경의 사고에서 이탈한 주석이다.

-두 가지가 대립이 되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있지만 선택의 입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취해도 되는 중립이라는 것이 생기기 때문에, 의를 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짓고 있지도 않고 있다는 자기 논리에 빠져서 마치 중립 상태에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도 아니고 죄도 아닌 중립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의가 아니면 죄이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성령 안에서 동행하다, 성령과 더불어 같이 걷다.

-현재시제로 계속해서 끝나지 말고 그 동작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성령을 따르지 않을 때이다.

-성경의 논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야함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죄라는 논리이다.

-신학지남(5년 전), 창세기 3:1-7의 인식론적 해석 볼 것.

-선택의 입장이 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주셨다. 그 길을 계속 가라하셨다. 그 길을 가다가 멈추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

(살전 5:17, 개정)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하라 동사 자체가 현재 명령임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강조하기 위해 쉬지 말고(부사)를 더 쓴 것이다.

-종교적 기도 형식의 이상의 것. 삶의 본질적 의미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성령과 소통을 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이고 끊임없이 성령 충만하며, 동행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말씀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메시지이다.

-믿음으로로 압축될 수 있다.

-믿음으로 그 자체가 동작이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 붇잡는 것을 놓지 않는 것,

-믿음으로 사는 것=성령으로 충만한 것=쉬지말고 기도하는 것

(롬 14:23, 개정)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은 다 죄니라: 보편적인 진리

-곧 그리스도 없이 한 것, 성령을 따라 하지 아니한 것, 그리스도를 붙잡는 마음 없이 하지 않는 것.

-우리가 하는 일상의 일들, 모든 것, 모든 생각, 모든 말,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 그 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내가 인격적으로 붙잡지 않고 나를 부인하고 그분에게만 매달리는 나의 인격적인 것이 빠져 있다면 그것이 바로 죄다!

-그리스도가 없는 것, 그리스도를 놓은 것, 성령을 좇지 않는 것이 죄이다.

-죄라는 특정한 것을 특별히 더 해야 죄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믿음으로) 하는 행위만 죄가 아니다.

 

회개(Repentance)

 

*신구약 성경의 연결이 회개의 촉구 메시지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이 시작되면서 마치 신약세계사 시작 된 것으로 보여 지지만

-실상 구약의 배경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실상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주자가 되며, 그의 외침 또한 구약의 마지막 마침이 된다.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의 말씀의 침묵이 구약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곧 임할 것이다”라는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지금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동일하다.

-세례요한의 등장의 의미는 구약시대가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이제까지 말해왔던 메시지가 예수님이 오셔서 전하시는 메시지와 연결이 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가 구약의 모든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중요하다.

-신·구약이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예수님께로 귀착됨을 볼 수 있다.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회개가 구원은총의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회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조건이 아니고 회개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삶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게 된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삶이듯이 회개한다는 자체가 구원의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를 예기했을 때에는 그 전제가 그 사람들이 언약의 울타리의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는 것을 전재로 한다.

-회개하고 언약 안으로 들어오라는 것이기 보다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으로 산다는 문제와 땔 수 없는 관계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만이 아니고 의인이 살아가는 방법이 믿음이듯이 믿음의 사람이 늘 동시에 하는 거싱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이다.

-칼뱅은 믿음과 회개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다.

-어떤 학자는 칼뱅은 믿음, 중생, 회개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칼뱅이 회개를 구분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인 성례를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회개를 한다. 믿음과 회개의 땔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회개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일을 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지만, 죄의 기준으로 볼 때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다.

-회개 역시 믿음이 동작인 것처럼 회개 역시 동작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믿음은 회개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믿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는 것이기에 매일매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오늘날 매우 간과되어 있다.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하기에 어려운 시대이다.

-너무 이 시대는 믿음 하나만으로 다 해결된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루터란의 영향이다.

-루터란 구원 서정은 믿음과 칭의 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는 동작은 곧 그 자체가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멀리하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이다.

-그리스도를 끌어안은 만큼 죄를 밀어내는 동작을 한다.

-죄와 더불어 싸우는 삶이 믿음의 삶이다.

-신앙이라는 그 자체가 어떻게 죄를 물리치느냐, 어떻게 죄와 싸워서 이기느냐에 크게 의미를 두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죄의 문제를 실랄하게 지적하고, 아파하고, 뉘우치고, 돌이키려는 노력이 약한 시대가 되었다.

-이것을 바꿀 소망은 우리들 밖에 없다.

-믿음이라는 것은 회개와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손 바닥과 손 등의 관계이다.

-WCF도 죄 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회개가 죄 사함을 가져오는 어떤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언약이라는 그 관계 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처럼 회개할 경우에 용서해 주시는 공식을 설정해 놓으신 것이다.

-회개가 죄 사함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나, 회개가 없이 죄 사함이 오지 않는다.

-회개의 삶 자체가 성화의 삶으로 보일 수 있다. 성화의 기준은 거룩이고, 같은 시간과 과정이지만 회개는 죄를 기준으로 하는 것,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회개가 있다. 믿음이 있는 만큼 죄를 싫어하게 된다. 죄를 혐오하고 무서워하고 더러워하고 멀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뉘우치고 아파하고 회개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것이 회개의 은총이다.

-회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전인격적인 행동이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공식적인, 기계적인, 의식적인 것으로 명확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을 이야기할 때 항상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통이라고 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삶에 있어서 교통을 누리는 삶이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을 방해하고 망가트리는 요소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은혜들이 회개할 때 까지는 막히는 것이다. 그런 은혜를 스스로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이 점에 대해서 깨닫고, 아파하고, 뉘어쳐 회복이 될 때에 원래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교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죄를 짖게 되면 무엇을 상실하며, 망가지게 되는지를 인격적이고 유기적인 관계에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칭의(Justification)

-구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의미가 칭의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의인이 되는 사건

-이 문제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칼뱅은 이 문제를 놓고 우리의 모든 신앙이 이 칭의의 교리에 달려있다고까지 말했다.

-루터는 교회가 서고 넘어짐이 칭의에 있다고 말했다.

-이 칭의 교리를 정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오늘날 다시 크게 불거지고 있고 심각하게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1999년 10월 31일 로마 가톨릭과 루터란이 합의를 했다. 피차 내렸던 정죄를 내려버리고 서로 이견이 없음을 확인하고 일치에 대한 공동성명을 하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야말로 종교개혁을 풀어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았다.

-2009년 세계 감리고 총회가 금란교회에서 열렸다. 이 공동 성명에 감리교도 참여한다는 조인식을 해 버렷더, 로마 가톨릭+루터란+웨슬리안 이 공동참여를 함으로서 종교개혁을 뒤집는 공식적인 행동을 했다. 감리교, 성결교, 오순절, 구세군, 은사파 등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버렸다. 기독교의 상당수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버린 것이다. 뒤집은 것이다.

 

*복음을 지킨다라고 하는 것

-칭의교리를 지키는 사건이었었다.

-이신치의 교리의 회복

 

*칭의교리가 복음인 이유

-칭의교리는 장차 하나님이 의인과 죄인을 나누시는 심판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전재한다.

-칭의는 나에게 이미 선언된 신판 판결과도 같은 사건이다.

-장차 있을 심판대에서 주님이 나를 의인이라고 구분하고 하늘나라로 들어갈 것이 이미 내려졌다는 의미

-칭의가 살아있기 위해서는 심판이 살아있어야 한다.

-이미 종말론적으로 그 심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나에게 선언이 된 것이다.

-이미 나는 의로운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는 누가 나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출발점이다.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다.

 

*칭의의 법정적 개념이다.

-종교개혁이 지켜낸 것.

-칭의가 반드시 법정적인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은 오염된 것이다.

-법정적 개념이 아니면 칭의가 아니다. 반드시 법정적이다.

-판사가 선언을 하는 것을 그 사람을 죄인 또는 의인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판사는 이미 재판 과정에서 들어난 증거에 의거하여 선언하는 것이다.

-선언과 간주, 그렇게 불러준다.

-그 동작 자체가 그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라고 선언하거나 간주하는 것이다.

-칭의는 절대 그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칭의 안에 절대 만드는 의미가 들어가면 로마 가톨릭이 된다.

-로마 가톨릭은 의인화 된다는 개념을 쓴다.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다.

*성경의 용례

(신 25:1, 개정)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칭의와 정죄 모두 법정적 개념이다.

(잠 17:15, 개정)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이 매우 가증이 여기신다. 혐오한다. 하나님의 공의와 맞지 않는다.

*칭의동사가 사용되는 경우

①하나님께 쓰이는 경우

(욥 32:2, 개정)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하나님을 의롭다 해야 하는데 자신을 의롭다 했다.

-하나님을 의롭다 하는 것이 칭의이다. 하나님을 의롭다 해서 하나님이 의로워지신 것이 아니다.

(눅 7:29, 개정)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하나님을 목적어로 삼아, 하나님을 의롭다 했다.

-칭의는 의로운 자를 만들지 않는다.

②그리스도에게 사용되는 경우

(딤전 3:16, 개정)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디카이오(칭의 동사. 수동태). 부활사건을 말함. 부활로 말미암아 그의 의가 드러난바 됐다.

-칭의는 단지 의를 선언하는 것 뿐이다.

(롬 1:3, 개정)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개정)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기본적으로 인성과 신성에 대한 구절로 이해한다. 3절은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오셔서 하셨던 총 사역을 나타내고, 4절의 영으로는 부활을 기점으로 달라진 새로운 시대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대의 구분으로 보는 것이 더 맞다.

-부활한 시점에 가서 그리스도가 아들이라고 불려졌다는 것은 이제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사건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그의 아들됨이 들어난 것을 말한다.

③아담의 칭의 경우(가상)

-아담이 불순종함으로써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를 가상해 보자.

-끝까지 잘 지켰다면 아담이 의롭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때 아담을 의롭다라고 했다면 그 칭의는 순종에 잘 했다라고 하는 것이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아담은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의로운 상태로 만들어졌다.

-행위언약의 정황 속에서 관건이 되는 순종에 대한 인정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이 더 의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칭의의 의미는 아담의 순조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 가상의 경우는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나타난다(딤전 3:16). 그리스도의 모든 대속의 삶을 순종하신 자체를 근거로 그 순종을 하나님이 의롭게 인정하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칭의 사건이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사건이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와 아담의 관계는 대칭관계이다.

④죄인의 칭의

(롬 4:5, 개정)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행함이 없는 경건치 아니한 자(죄인, 악한자)가 행함이 없이 단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죄인이 칭의될 때 행함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의 정신을 담고 있는 핵심 구절이다.

-칭의는 죄인 칭의 인다. 의인 칭의가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의인칭의를 말한다. 우리가 의인이 되면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반발이 루터이다.

-우리가 의의 근거, 공로가 아무것도 없었을 때 오직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했다.

-칭의는 신분상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속성, 성별, 내면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불려지는 것 뿐이다. 의인화가 아니다.

-칭의가 하지 않는 것은 칭의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 근거가 있을 때에 그 근거에 준해서 의롭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법정적 칭의이다.

(잠 17:15, 개정)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다. 장치가 필요하다.

-그 장치가 바로 “믿음으로”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것을 나에 것으로 누리게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간주되어서 그 전가된 의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라고 불러주는 것이다(칭의)..

     

죄인 칭의

-종교개혁의 핵심 사상. 이신칭의의 핵심이 죄인칭의이다.

(롬 4:5, 개정)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믿음으로 하는 것은 자체가 어떤 장치와 같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서 그 안에서 엄청난 일(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칭의의 정의(효과, 결과)

①죄 사함

②의인 됨

-죄 사함을 받고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의인이 하늘나라 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를 위해서 살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법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나님의 모든 영광, 이름, 의가 걸려있다.

-법은 하나님의 의(도덕체계)를 단보로 한다. 법은 간단하지만, 그 법을 어기면 결국 하나님의 의, 도덕, 거룩하심, 영광되심, 존엄하심을 침회하는 것이고, 회손하는 것이고, 더럽히는 것이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모든 법은 양면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창 2:17, 개정)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첫째, 긍정적 요구: 먹지 말라

둘째, 부정적 요구: 죽으리라

-긍정적 요구를 어겼을 때, 부정적 요구가 성립되는 것이다.

-긍정적 요구를 다하면 하나님의 의를 세우게 된다.

-주정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페널티이고 여전히 긍정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까지를 행위언약이라 한다.

(창 3:15, 개정)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구원자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언함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한 그 순간부터 은혜 언약은 발동한 것이다.

-부정적 측면에 대한 집행 자체가 유보되고 있다.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이 은혜언약이다.

-은혜언약은 말없이, 소리 없이 이미 아담이 타락한 순간부터 발동되고 있었다.

-3:15절은 단지 은혜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구절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아담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또 다른 아담이 없고, 그리스도 이후에는 어떤 아담도 없다.

-성경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거울에 비친 이미지처럼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놓고 말하고 있다.

-아담이 행위언약에 있어서 머리(대표)가 되었다.

-은혜언약의 머리와 대표는 그리스도다.

-행위언약에서는 아담이 한 대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면, 은혜언약에서는 그리스도가 한 대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부정적 요구인 죽음이라는 형벌을 대속의 죽음으로 감당해야 했고,

둘째, 긍정적 요구인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한다.

-그냥 형벌을 지시고 죽으신 것만 한 것이 아니고, 아담이 원래 했어야 되는 일까지 해야 아담을 대신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요구로서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법을 충족시키셨다.

-그리스도가 인성을 입고 오셔서 율법에 대하여 순종의 삶을 사셨다.

-선악과와 율법은 같지 않지만 그 조항이 문제가 아니고 그 법을 주신 이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선악과 법은 이미 깨어져서 유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충족시키는 방법으로 새로운 법의 체계를 주었는데 그것이 구약의 법(율법)이다.

-조항은 다르지만 법이 근거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모세의 율법은 창 2:17의 행위언약에서의 법의 힘을 잇고 있다.

-율법의 정신은 지키는 것만이 살 길이고 어기면 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율법(행위언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전적타락, 전적부패로 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대신 오셔서 대속의 죽으심을 감당하실 뿐만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서 율법을 지키시는 일 또한 성취하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은 아담 대신에 순종의 일을 다 해 주셨는데, 그 순종은 긍정적 요구와 부정적 요구에 대한 순종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이것은 능동적 순종(율법), 수동적 순종(죽음)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동적 순종에 대한 문제, 십자가에 죽으심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하치 등은 이 부분을 굉장히 반대하였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핵심적 의미는 능동성과 자발성이다.

-아담의 순종 대신에 그리스도의 순종의 방법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아담이 했어야 할 순종과 더해서 부정적 요구까지 감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①의롭다함을 받음 -> 적극적 의

②대속(죄 사함) -> 소극적 의

-이 두 가지를 합쳐서 그리스도의 의라 한다

(딤전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건(구속사적 의).

-신성적 의가 아니고 구속사적 의를 말한다.

-구속사적 순종에 근거해서 의롭다고 칭함을 받았다. 구속사적 의를 완성하셨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

-놀라운, 신비스러운 교통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로 전가된다.

-이제 그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되었다.

-칼빈주의와 비 칼빈주의의 차이

-루터는 의인칭의를 외쳤던 로마 가톨릭에 대하여 내 의가 아니고 다른 이의 의라고 강조하여 타자의 의(alien)에 의해서 칭의될 수 있다고 하였다.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칼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된다고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는 것이다.

-전가된 의에 의해서 죄사함과 의인됨이 있는 것이다.

*칭의는 죄 사함과 의인됨이다.

-하나님이 그냥 죄인을 의롭다고 불러져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대속의 순종을 통하여.

-이미 의롭다 함을 이루었고, 죄를 사함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의인되는 것이다.

 

*믿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믿음은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한다.

-믿음은 나의 공로나 행위나 어떤 다른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대상으로 한다.

-믿음으로라는 말은 그리스도만을 끌어안았다. 연합했다.

-나의 인격적인 반응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첫 번제 변화가 칭의이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이 연합의 동작은 계속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상태가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믿음으로라고 하는 것은 계속해서 필요한 동작이다.

-그리스도인이 살 수 있는 방법이 믿음으로 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다.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달라진 모습이 거룩이고, 성화이다.

-칭의는 되었는데 성화가 안 되었다는 것은 잘못된 복음제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세상과 달라보인다. 이것이 거룩이고 성화의 모습이다.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 칭의와 성화가 떨어질 수 없는(하나의 축에 걸린 두 바퀴처럼) 이중 은혜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칭의와 성화가 뒤섞이면 안 된다. 반드시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야 한다.

-칭의는 의의 문제이고 성화는 거룩의 문제이다.

-칭의는 신분의 문제이고 성화는 성질의 문제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섞이면 안 되는 다른 관점의 문제이다.

-루터란은 칭의만을 강조하여 도덕적 회의, 반율주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의인의 문제가 거룩함과 떨어지지 않는다.

-2009년 개혁논총 “칼빈의 칭의론과 한국교회”

 

성화(Sanctification)

-성화의 의미는 거룩을 말하고, 칭의이 의미는 의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의와 거룩이 다르다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카도쉬의 의미: 따로 때어 놓다. 즉 구별하다. 분리하다의 의미이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으로. 구분. 그 자체가 거룩이다. 거룩의 초기적인 용례는 주로 제사와 관련해서 의미가 사용된다.

-시편, 선지서에서 보면 거룩에 의미가 제사의 정황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삶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하기오스의 의미: 죄의 삶에서부터 벗어나서(분리되어서) 하나님을 위한 분리 구분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하는 것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칭의 사건(구속사적 칭의사건)에서 온다. 그리스도의 의는 구속사적으로 획득하신 의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께 받으신 것. 이것이 칭의의 근거가 된다.

-성화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되심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롬 6:10, 개정)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더 이상 죄로 인해서 죽으실 일이 없다.

-죄에 관한 모든 일이 다 끝났다. 단번에

-죄로부터 그리스도가 분리되심

-이제 그리스도가 살아나심으로서 그의 하나님(성자) 되심이 드높여진다.

-그리스도의 구소사적인 사역에 있어서 더 이상 죄와는 상관이 없을 것을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한다.

-이것이 우리의 성화의 근거, 모형, 페턴이 된다.

(고전 1:30, 개정)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거룩함. 성화를 이루었다.

 

①성도의 성화가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적 의미에서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신 의미 속에 성도의 성화가 있다.

②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됨으로써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부활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되신 그리스도, 성화되신 그리스도와 연합.

-성화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골 3:1, 개정)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찾으라=거룩의 삶,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

-전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연합)

-성부와 성자의 영의 대표적인 성질이 거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령이 내주하심에 가장 특징적인 것이 바로 거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거룩이다.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내주하시는 것 자체가 거룩이다.

③점진적인 성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신약의 메시지는 점진적인 성화를 말하지만, 그에 앞서서 우선적인 강조, 전재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졌다라고 하는 것이다.

-단정적 성화, 결정적 성화, 확정적 성화

④단정적(확정적, 결정적) 성화

-우리를 거룩하다라고 단언하는 의미이다.

(고전 1:2, 개정)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진 성도(과거완료)

-이미 다 거룩해 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속에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거룩해졌다.

(고전 6:11, 개정)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거룩함: 과거시제 완료 수동형

-이제 죄에 대해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살마들이다. 라고 강조함

(요일 3:9, 개정)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골 3:1, 개정)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 개정)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골 3:3, 개정)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⑤옛 사람과 새 사람

(골 3:9, 개정)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골 3:10, 개정)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벗다: 완료동사

-입다: 완료동사

-이미 벗고 입는 것은 끝난 것이다.

-앞으로나 점점이 아닌 이미 죄에 대해 분리된 거룩한 사람이다.

-조금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100% 거룩 그 자체이다.

(엡 4:22, 개정)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엡 4:23, 개정)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엡 4:24, 개정)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5, 개정)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이미 죄에 대해서 다 벗어 버렸고, 이미 새 사람이 되었다.

(고후5:17개정)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미 완성된 동작.

-신약성경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적인 역동성.

-이 종말 계념이 그리스도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사람이다.

-옛 것과 새 것, 옛 시대와 새 시대의 교차는 매우 단정적이다. 단번에 옛 것이 끝났고 이제 전적으로 새 것이 시작된 것이다.

-이 구도 속에서 성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단정적인 성화를 이야기해야 점진적인 성화가 도출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신약성경은 점진정직 성화와 함께 단정적인 성화를 단증하고 있다.

 

점진적 성화(지속적 성화)

-점진적 성화라는 말 자체가 오해를, 그릇된 기대감을 주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계적으로 내가 점차 성화되어져 간다는 어떤 잘못된 기대감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성화의 삶에 대하여 오히려 안일해질 수 있는 작용을 한다.

-성화는 언제나 될 것이다라는 희망은 좋지만 그 자체가 안일을 가져올 수 있다.

-지속적: 성화는 우리가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것이다.

*왜 지속적인 성화를 유지하라고 하는가?

-우리 안에 죄성이라고 하는 것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칭의는 죄에 대하여 신분적인 측면이 해결된 것이다. 법정적 칭의

-성화는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다루고 있다.

-우리를 실제로 지배, 장악, 실족케 하는 죄송은 존재한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성의 지배가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어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중생한 다음에 성화의 삶을 살며 남은 죄성에 대하여 나를 어떻게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느냐의 싸움이다.

-보다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의미이다.

(롬 8:13, 개정)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대로, 몸의 행실: 죄성대로 사는 것

-점진적, 지속적 성화

-이 말을 하기 전에 바울은 6장에서 단정적 성화를 미리 이야기 하였다.

-논리의 진행을 볼 때, 매일의 삶에서 죄성을 이겨나갈 수 있는 근거는 이미 우리가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골3:5,개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앞에 1-4절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게 살아났다. 성화되었다.

-단전적 성화를 근거하여 점차적으로, 지속적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된다.

(고후 3:18, 개정)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변화된다. 현재시제 수동형.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간다. 지속적, 점진적 성화.

*지속적 성화를 이루라!

①진리의 말씀으로

(요 17:17, 개정)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성경을 읽는 것. 그리스도를 아는 방법.

(딤후 3:16, 개정)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②믿음으로

(갈 2:20, 개정)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지금 나의 삶의 방식을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말한다.

-믿음은 어떠한 확신이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을 믿는 것이다.

-칭의 된 다음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고, 계속 예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칭의도, 성화도 믿음으로 된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다.

-믿음을 오해하지 말라. 믿음은 첫째 내가 만들 수 없고, 성령이 내주하심으로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둘째, 내가 전인격적인 믿음의 동작을 하는 것이다. 내가 믿어 구원을 받는 것이지 성령이 대신 믿어 주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늘 믿음으로 사는 것. 내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령이 가능하게 해서 내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나의 일과 성령의 일이 분리되어져서는 안 된다.

-성화의 삶 자체가 구원의 삶, 구원 받은 자의 삶인 것이다.

-성화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③율법의 세 번째 기능

-첫 번째 기능: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

-두 번째 기능: 죄를 억제케 하는 기능

-세 번째 기능: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성을 반영함으로 율법을 안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에 위배되는 것을 깨달아. 율법을 지켜나간다.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이, 기꺼이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간다.

-구약의 율법체계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율법체계가 하나님의 도덕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실천적인 성화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④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사는 노력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본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표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일

(엡 2:10, 개정)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의도가 바로 선한일을 하는 것이다.

(벧전 2:9, 개정)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내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 부담이 될 수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나. 우리를 살리기 위한 말씀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들어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을 볼 수가 없다.

 

*성화는 우선적으로 개인적 성화이겠지만, 교회적 차원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의 거룩이 교회의 거룩으로

-오늘날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교회가 하는 일이라고 해서 다 거룩한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일이 너무 많다.

-전도대회의 경품

-행운권 추첨

-교회 내에서의 상행위

-각종 대회들

-거룩하지 못한 방법은 반드시 그것으로 마음을 실족해 하는 일이 생긴다.

-세속의 방법, 죄성을 부추기는 것, 불필요한 경쟁심리, 요행심리를 부추김

-효율성을 추구하여 거룩을 침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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