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스크랩] 박형룡박사의 교회론 요약

예림의집 2014. 3. 10. 23:20

<박형룡박사의 교회론 요약>

 

제 1 편 교 회

 

제 1 장 명칭과 사적고찰

 

제 1 절 성경적 명칭

구약에서는 「카할」과 「에다」의 두 명사가 교회를 가리켜 사용되었다. 신약도 70인경에서 인출되 두 말 「에클레시아」와 「쉬나고게」를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주위에 회합하여 그를 자기들의 주로 공인하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들을 수납한 군단에게 이 말을 최초로 적용하신 자이시었다. 그것은 메시야의 「에클레시아」, 진정한 이스라엘이었다.

church(영어), kerk(스코틀랜드어), Kirche(독어)라는 명칭들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에서 인출된 것이 아니라, 「주께 속한다」는 의미의 「퀴리아케」에서 온 것이다. 「토 퀴리아콘」혹은 「헤 퀴리아케」라는 명칭은 처음에 교회가 집회한 처소를 가리켜 말하였다. 「주의 것」매우 아름다운 이름이다. 존재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지만 가장 특별한 의미로 「주의 것」이라 칭함은 교회의 헤아릴 수 없는 특권이다. 교회는 주 자신의 피로 사신 그 자신적 소유물이다.

 

제 2 절 역사상의 교회관

속사도 교부들과 변증가들은 교회를 일반적으로 성도의 교통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여 소유하신 백성으로 제시하였다.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구별이 없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영적인 면을 주중하였으나 그 유형적인 면에 과히 끌려 갔다. 중세기에는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치중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정치를 위한 두 권력이요 교회는 교직자오 평신도이 두 계급으로 구성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개념은 이것은 본질적으로 참신앙의 속박에 의해 연합된 모든 사람들의 교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교횡에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피택자들이 속한다. 지상의 참 교회는 그 영적 교제에 관한한 무형적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는 곳에, 성례가 옳게 거행되는 곳에, 기독교 권징이 유지되는 곳에 유형교회로 나타난다. 루터는 교회를 그리스도 신자들의 영적 교통으로 보았고 모든 신자들의 제사직의 성경적 관념을 회복하였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을 주장하였으나 교회의 유형과 무형의 두방면을 구별하였고 이것들은 두 교회가 아니라 동일 교회의 두 방면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기에 유의하였다. 칼빈과 개혁파신학자들은 루터와 같이 직위들, 말씀, 성례들 같은 교회의 객관적 규례들에 기초적으로 교회의 통일성과 성성을 추구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제일로 신도들의 주관적 교통에 그리하였다.

슐라이허막허의 소견에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집단, 동일한 정신에 의하여 생기 고취되는 신자들의 단체였다. 리츌은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구별하는 대신으로 왕국가 교회를 구별하였다. 그의 소견에 왕국은 사랑의 동기로 행동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이요, 교회는 예배를 이하여 모인는 동일 집단이었다.

제 2 장 교회의 성질

 

제 1 절 교회의 다양 정의

훅스마는 기록하되 「교회는 창세전에 선택된 자들이 그 지체들을 구성하는 유기적 총전인 그리스도의 몸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그의 영과 말씀을 통하여 모든 시대들에 세계 모든 민족들로부터 소집되고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의 회집으로서 지상에 나타나는 자들이다」고 하였다. 유효적 소명 혹 신앙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에게 부름받은 피택자로, 유효적으로 부름받은 자들의 단체, 신실자 혹 신도들의 집단으로 정의되었다. 세례와 신앙 고백의 관점에서 교회는 세례를 받고 진정한 신앙을 공언하는 자들의 집단으로 정의되거나 혹 진정한 종교를 공언하는 자들 및 그 자녀들의 집단으로 정의되었다.

제 2 절 교회의 본질

로마 카톨릭파는 교회를 정의하여 「세례를 받고 동일 교리에 신앙을 공언하고 동일 성례에 참여하며 한 사람의 유형적 원수 교황 아래 있는 합법적 목자들의 치리를 받는 모든 신실자들의 집단이라」고 한다. 로마 카톨릭파는 교훈하는 교회와 신앙하는 교회 혹은 치리, 교훈, 건덕하는 자들로써 구성된 교회와 교훈, 치리, 성례를 받는 교회를 구별하여 교회를 두 층으로 나눈다.

헬라 정교회는 교회의 유형적, 무형적 상이한 두 방면을 인정하나 오히려 외면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치중한다. 이것은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집단에 발견하지 않고 이것이 보존되어 있는 감독 교직단에 인정한다. 교회의 무오가 주장되나 이 무오는 감독들에게 있으며 따라서 회의들과 대회들에게 있다.

루터와 칼빈이 다 같이 교회를 단순히 성도들의 집단, 즉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성화되고 그를 머리로 하여 그에게 연합된 자들의 집단으로 보았다. 보편적 교회 즉 하나님의 계획에 존재하며 시대들의 진정에서만 실현되는 대로의 교회는 시간의 진정에서 영생을 얻기로 소환될 피택자들의 전 단체로 존재한다고 사고되었다. 무형교회는 신자들만을 포함하는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의 교회요, 유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공언하는 자들과 그들의 자녀들로 구성되며 따라서 성도들의 집단으로 판단되는, 사람이 보는대로의 교회이다. 이상적 의미의 교회, 하나님의 의도하시며 장차 한번 실현될 바 대로의 교회는 ‘숨은 교회’라 칭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나타남과 완성은 주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관은 교회의 유형함을 시인하는 동시에 이것의 조직을 또한 시인한다. 그러나 조직은 결코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 사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제 3 절 성령이 역사하시는 단체

구원론은 개인의 종교생활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논술하고 교회론은 교회단체의 종교생활에서의 성령의 활동을 묘사한다. 성령의 사역에 이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은 계시기인 사도시대의 교회에 독특한 은사로서 후대 교회에는 중지되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이외의 모든 성령의 능력의 사역은 여전히 교회에 행해지고 있다. 신자들의 보편적 제사격은 정당하게 성경에 기초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말세에 하나님이 그의 영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리라한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에 성취되어 성령이 사도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부어 주신 바 되셨다. 예수의 약속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은 많은 개인들에게 보다도 주로 그의 교회의 핵심인 12사도에게 주신 것이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은 출석한 w자들을 개인들로 상대하기보다도 신약의 교회에 향한 일이었다. 복음진리의 정통노선은 교회 역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끊임없이 진행한다. 구원을 위한 바른 교훈은 금후에도 성령의 조명을 받는 참 교회 안에 영구히 계속할 것이다.

 

제 4 절 교회의 다면적 구별

지상에서 투쟁중에 있는 교회를 전투적 교회라 칭한다. 구원얻고 승리를 축하하는 천상의 교회는 승리적 교회라 칭한다.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구별은 루터가 최초로 지었는데, 상이한 두 교회에 언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교회에 두 방면에 관설한다 하였다. 이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구별은 기본적으로 전투적 교회에 적용되기로 의도된 것이었고 개혁파 신학에서 이것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적용된다. 이것은 지상에 존재하는 대로의 교회가 유형적이며 무형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교회를 무형적이라 칭함은 이것은 본질에서 영적이어서 육안으로 식별되지 못하는 때문이며, 어느 사람이 이것에 속하고 어느 사람이 속하지 않는지 정확히 결정하기 불가능하기 때문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과 행위에서, 말씀과 성례의 성역에서, 외면적 조직과 정치에서 유형화하였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무형면에 그것의 본질을 발견하되 오히려 그것의 유형면을 적정하게 인정함으로 교회생활에 중도를 취하였다. 교회의 무형면과 유형면을 구별하되 그 유형면에 약간의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섞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용인함으로 두 면의 양적 차이의 사건에 중도를 취한 것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와 건물, 성전, 집과 같은 조직체로 아울러 말한다. 교회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이고 유기체에 언약을 시행할 임무가 주어진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이 주어진다. 이 유기체와 조직체의 구별은 유형교회에만 적용되는 구별이니 유형한 단체로 간주된 교회의 상이한 두 방면에 주의를 촉구하는 것이다. 유기체로서의 교회는 성령의 유대로 연합된 신도들의 집단이지만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신도들의 모친, 구원의 방편,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완성을 위한 동작자이다. 교회가 은혜의 조직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것의 사명에만 주목하기를 마치 왕노릇 하는 것이 그 인물의 성질에 관계없고 사람들 가운데 가지는 그의 지위에만 관계된다고 보는 것과 같다. 교회가 은혜의 조직체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으로서의 그것에게 은혜 언약의 시행을 위한 사역을 맡기신 때문이다. 이 사명없이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남아 있을 수 있다. 유형교회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몸이고 이 몸에 언약을 시행할 임무가 주어지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조직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의 조직체는 그것의 유기체와 밀접하여 나누일 수 없는 무엇이다.

초대 교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주로 장래 실재, 교회의 현재 발전의 종국목표이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실재로 보아 교회와 동일시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교직단과 동일시하였으나 개혁자들은 현경륜에서 이것을 무형교회와 동일시하는 견해에로 환원하였다. 리츌의 감화 아래 이것은 종교적 성격을 박탈 당하고 목적있는 윤리적 왕국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현금에 이것은 흔히 사회에 소개되어 그것을 그 모든 관계에서 변형시키기로 목적하는 새 원리로, 혹은 사랑의 동기에서 오는 행동을 통한 인류의 도덕적 조직체, 창조의 최종 목적으로 정의된다. 하나님 나라와 무형교회의 관계를 살펴보면 둘은 얼마만큼 서로 같다. 동시에 신도들의 집단을 하나님 나라라 칭하는 때의 관점과 교회라 칭하는 때의 관점 사이에 상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교회로서의 그들은 이상적 질서의 소개를 위한 길을 준비함에 하나님의 기구로 부름을 받고 나라로서의 그들은 그 자신들 중에 그 이상적 질서의 초보적 실현을 표시한다. 유형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설립과 확장에 기구가 되는 한 이것은 목적에 향한 수단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종속한다.

 

제 5 절 여러 시대의 교회들

개혁파 교회는 역설하기를 교회는 처음부터 세계에 있으며 구약의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신체에 속하여 신약의 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한 백성을 형성하며 그들 전수를 위하여 하나의 동일한 구원이 있다고 한다.

인류의 기원적 조직에는 족장적 행정이란 것이 있었다. 교회도 가족으로 시작되었다. 구속의 계획은 인류의 기원적 상태를 가족으로 추정하고 실현된 것이었다. 족장시대에는 신자들의 가족들이 종교적 회중을 구성하고 족장들이 제사로 되어 경건한 가정교회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로 조직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였다. 교회는 아직 독립적 조직을 얻지 못하고 오직 이스라엘의 국가생활 안에 조직적 존재를 받아 가지고 국가교회의 특수한 형식을 취하였다.

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생활로부터 이연되어 독립적 조직을 얻은 동시에 교회의 국가적 경계가 철폐되었다.

교회는 두 경륜 아래 동일한 성질과 의장을 가진다. 기초가 동일하고, 성원되는 조건들이 동일하며, 구약의 성례들은 신약교회의 성례들과 동일한 은혜를 상징하며 인쳤다. 두 교회는 정확히 동일한 명칭을 가졌다. 신약의 ‘주의 교회’는 구약의 ‘주의 교회’의 역술이다. 스데반은 과연 시내산 아래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 칭하였다.

제 6 절 교회의 속성

교회의 통일성이란 만대와 만국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함의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체의 통일이며 따라서 그것의 머리에 의한 통일이며 성령에 의한 통일, 신앙에 의한 통일이다. 그리고 이 통일의 배경에 만유를 통일하시는 한 하나님이 계신다. 내면적 통일은 신체의 통일이니 모든 신도들을 지체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적 신체의 통일이다. 교회의 내면적 통일은 신도들의 신앙 고백과 그리스도인 행위에서, 그들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 하나님의 공예배에서, 동일 성례의 참여에서 자연히 외면적 표현을 추구하며 얻는다. 교회에 장로를 세우며 집사를 두어 유형한 조직체로 만든 것이 사도들의 지도 아래 된 일이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연합의 유대를 교회의 정치 조직에서 발견하지 않고 말씀의 참된 전파와 성례들의 바른 거행에서 찾았다. 전교회를 한 개의 외적 조직체로 통일하려도한 유일시도인 로마 교회는 좋은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고 형식주의, 의식주의, 율법주의 등 많은 폐단에 인도하고 말았다. 교회가 보다 더 큰 분량의 외면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함은 당연하나 완전한 통일이란 현세에서 득달되지 못할 이상이다. 통일의 다수와 다양은 미와 질서를 구성한다. 영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교회가 외형에서 다수 다양의 변이를 가짐은 고도의 미와 질서를 나타낸다.

거룩은 교회의 주요하고 가장 특징적인 덕성이다 이 영적 덕성은 교회의 세계에서의 판이한 입장과 직임, 또는 세계와의 충돌을 결정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룩’의 관념은 역시 외면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외면적 의식적 거룩이다. 프로테스탄트파는 그리스도의 의, 성령의 갱신, 하나님께 성헌함으로 인하여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중보적 의의 전가의 효력으로, 그 의를 힘입음으로 교회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인정된다. 교회를 주관적으로 거룩하다고 보나니 이것은 교회의 생의 내면적 원리에서 성령의 갱신과 성화를 받아 현실적으로 거룩하고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환전한 거룩을 목적으로 삼는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성별되어 하나님께 봉헌되었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교회는 그 자체가 이미 거룩하다는 사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거룩을 파괴하려는 적성세력들에 대항하여 싸움으로 그것을 보전하며 유지해야 할 것이다. 교회느 또한 자체의 거룩의 현재정도에 멎을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높은 정도의 거룩에 향해 승진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교회의 거룩은 그것의 영광스러운 속성인 동시에 장엄한 의무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엄밀히 공동적이시다. 그 공동적인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시니 그 안에서 교회는 참으로 참으로 보편적인다. 공동의 속성은 로마 교회가 전용하여 그 파만이 공동적이라 칭할 권리를 가진 듯이 하며 그 교회는 교회의 다른 속성들과 같이 이 속성도 유형적 조직에 적용한다. 로마 교회는 ‘카톨릭’이란 말을 명사상 모순되게 사용한다. ‘카톨릭’이란 말은 ‘공동적’, ‘보편적’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단체생활에 성령이 틀림없이 주어진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제외하도록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말의 근본적 보편적인 의미를 박탈하여 이 말 자체가 허용할 수 없는 제한을 이 말에 가함이다. 프로테스탄트파는 공동성을 기본적으로 무형교회에 적용하고 제 2차적으로 유형교회에 돌린다. 무형교회만이 모든 시대의 모든 신도들을 한 사람도 제외하지 않고 다 포함하며 따라서 성원들을 세계만국 중에 가지며 인생의 모든 방면에 관할적 세력을 행사함에서 진전한 공동 교회인 것이다. 교회의 공동성의 가장 중요하고 적극적인 실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상 모든 나라들과 모든 종족들에게 전하며 어떤 인종이든지 믿는 자들이면 세례를 주어 교회에 받아 들이는 엄장한 의무의 이행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민족과 인종의 차별이 없다. 그러나 교회의 공동성이 현세에서는 충분히 실현되지 않는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공동적이나 장래 새창조의 천국에서야 그 공도성이 충분히 실현되어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찬송할 것이다.

어느 때와 어느 곳의 교회든지 교리적 사도성과 함께 조직적 사도성을 반드시 가진다. 사도들 자신들은 신경륜의 조직된 교회의 핵심을 구성하고 그들의 생애 중에 그 교회를 건성하였다. 그들이 조직한 교회는 도무지 존재를 그치지 아니하여 왔다. 교회는 많은 파동을 경험하였으나 그 때문에 파멸되지 아니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은 심히 큰 파동이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사도적 교회의 계속을 성과하였다. 금일에 교회는 사도 시대에 가졌던 통일성을 나타내지 못하고 분열로 손상을 당하나 참된 교회마다 오히려 사도적 교회의 조직적 계승이다. 나무의 많은 가지 중에 말라서 전정되어 없어지는 것들이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가지들은 오히려 그 나무의 계승이다. 같은 모양으로 역사상의 참 교회마다 사도적 교회의 계승이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라고 사도들 전수에게 향하여 질문하신데 대하여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한 것은 사도들의 대표로 한 것이요, 자기 개인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이 사도라면 모든 사도일 것이요, 베드로 한 사도만이 아닐 것이다. 신약의 다른 성구는 과연 교회의 기초를 말하면서 선지자들과 함께 ‘사도들’(복수)을 꼽았다. 그리고 ‘이 반석’이 모든 사도들을 의미하는 때에 교회의 기초로 될 것은 그들의 인물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베드로가 대신 고백한 그 신앙일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께서는 자기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교회를 기초로 하여 자기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약속들은 그의 교회의 멸절과 오류로부터의 보전을 뜻한 것이요, 이것의 무오를 보장하지 않는다. 또 그의 약속들은 교회의 직원들에게 발언된 것이 아니라, 참 신자들의 단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약속들이 보증한 교회는 영구히 계승하는 사도들의 손에 권위가 위임되어 있는 외면적 유형적 결사가 아니다. 사도들의 계승은 신약이 알지 못하는 공상이다. 교황과 전 감독단은 성경에 알려지지 않는 교권자들로서 무오한 권위를 주장할 근거를 갖지 못한 것이다. 교황의 교회에 모순과 미망이 충만함을 보아도 그 교회의 무오를 운운할 여지가 없다.

 

제 7 절 교회의 특성

성경은 신적으로 영감된 인생 저자들에 의해 16세기의 기간에 기록되었다. 그 결과로 지상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그의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을 점점 더 얻었다. 교회가 진보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진보적으로 계시하신 때문이었다. 특별계시는 성경에서 완성되었으나 교회의 진보는 끝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점에서 매 시대의 교회는 진보를 수요하였으니 즉 성경의 이해에서이다 역사의 사건으로서 진리의 영은 여러 세기를 통하여 교회로 하여금 보다 더 낫게 또는 보다 더 깊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게 하였다. 교회의 의무는 보수와 함께 진보를 포함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보수하기를 중지하면 이것의 기독교적 성격을 잃을 것이요, 진보하지 않으면 멸절될 것이라 한다. 기초를 보수하는 것은 그 위에 건설하여 진보하기 위함이다. 교회의 지도 인물들이 오랫동안 사용하여 온 라틴 문구 “Ecclesia reformata semper est reformanda"는 개혁된 교회는 항구히 계속하여 개혁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스스로 개혁하기를 중지하면 개혁교회로 불리워질 권리를 상실한다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사야 54장 10절; 마태복음 16장 18절 같은 성구들은 교회의 불멸성을 확언한다. 이 확언은 지교회나 교파에 적용될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관설한다. 교회의 불멸은 자동적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전으로 인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자신의 설립을 받았다. 하나님의 도모에서 교회는 사람의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시대들에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가족과 정부는 신적 기원을 주장할 만한 다른 두 단체들이다. 세 단체 중에 교회만이 그리스도에 의해 창립되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결코 가족과 정부의 창시에 그리스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삼위는 항상 함께 일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서만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특별히 의의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니 그리스도는 구주이신데 교회는 구원얻은 자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의 유기적 머리이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이것이 가진 어떤 생명이든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그의 교회를 통치하시는가? 그는 교회의 직원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시고 그들을 기구로 하여 교회를 통치하신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권위를 위임하시되 그 권위를 그들에게 양도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중대한 사실이다. 결국 직원들을 통하여 교회를 치리하시는 자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치리하신다.

사람의 몸의 지체들이 정상 상태에서 조화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다 같이 머리에게 순종함이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 평화를 위하는 열심을 자긍하나 그들은 또한 교회의 파멸을 위하여 역사하는 자들이다. 교회는 진리의 계시에 의해 존재를 얻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진리의 전달자들로 사용하신 사람들은 보통으로 선지자들이라 칭한다. 그들의 임무는 미리 말하는 것 보다도 말해내는 것이라고 적절히 설명되어 왔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교회의 작용은 진리를 받쳐 주는 것이다. 교파들이 하나, 둘 거짓 교회로 되어 버릴 수 있으나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백성이 항상 있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교회가 진리의 수호자로 시간의 종말까지 계속하는 것을 보실 것이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교회의 의무를 강조하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기 위하여 진리의 성령을 받았다. 교회의 임무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교회와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첫째로, 성경은 구원얻은 사람들이 마땅히 교회와 연합할 것을 가르친다. 성경의 제 2교훈은 은혜의 방편들을 분배하는 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교회의 임무라 함이다.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거행으로 교회는 그것의 회원들을 양육하여 신앙에서 자라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그들의 구원을 완전케 하는 부분이다. 우리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하고 아무것도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고 결론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하는 은혜의 방편들을 교회에 위임하심으로 그것을 높여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도 참된 일이다. 교회는 심고 물주나 하나님은 자라게 하신다. 한편에 심는 자나 물주는 자는 아무것도 아니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모든 것이시다. 다른편에 교회는 사람들의 구원을 향하여 하나님과 함께 노력한다는 영광스러운 탁월성을 가진다.

 

제 8 절 교회의 표지

말씀의 진정한 전파는 교회를 유지함과 교회로 하여금 신실자들의 어머니되게 함에 큰 방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적합하게 하는 것이 성례의 정당한 거행이라고 원칙적으로 말할 수 있다. 사실상 성례들에서 말씀에 유형하고 실체적인 형식으로 전파된다. 참된 기독교의 권징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의 순수한 전파에 있다.

 

제 3 장 교회의 정치

제 1 절 교회의 조직

여호와의 교회가 언제 성립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담이 범죄한 후에 구속하실 허락을 주신 날로부터 교회가 성립되어(창3:15,16, 6:18) 그동안 여러 모양으로 지내었고 계속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느니라(행7:38, 눅10:67-79; 요4:21-26, 출3:15,16)”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신약이 예수 교회는 언제 세워졌느냐고 묻는다면 “예수 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심으로 세워셨느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구약에는 족장시대가 있었고, 모세 이후에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 안에 조직적인 존재를 받아 국가의 특수한 형식을 취하였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 2:41)은 이미 교회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오순절에 성령의 역사의 큰 역사로 그 후 점진적으로 기독교회는 구체적인 존재를 가지게 되었다. 신약을 무오하고 충족한 신앙의 법칙으로 되게 한 그 동일한 성령의 약속은 또한 모든 지역과 모든 시대의 교회들을 위한 충족한 실행의 법칙으로 되게 하였다.

교회의 형식은 신약에 명확히 제정되지 않고, 편의에 의해서 신자들의 각 단체가 그것의 상태에 최선히 적합하는 조직의 방법을 채용하는 이론이 있다. 신약에 나타난 사도적 교회 정치의 조직 형식은 장로주의를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결론이다.

 

제 2 절 교회 정체의 다양

역사상에 교회가 취한 정치 체제의 3대 전형이 있으니 감독정체, 장로 정체, 회중정체라는 것이다.

감독 정체는 왕정의 형식을 가진 교회 정체로서 역사적인 감독직 즉 우월한 교직자들의 서열의 계속에 주안을 둔다. 감독들의 연속적 인 계대를 통하여 사도적 권위가 전래된다는 으미의 사도적 계승은 이 정체의 기초적 원리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정치를 사도들의 후계자인 감독들의 반열에 게 직접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위임하셨다. 감독 정체는 초기와 중세기에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정체이었고 바티칸 회의때까지 그 교회의 한 부분에서 유지되었다. 이 정체가 영국교회에 이전되었고 보다 적은 정도로 미국 감독교회에 과도하였다.

로마 카톨릭교회 정체는 사도들의 후계자 뿐 아니라, 사도들 중의 수반인 베드로의 후계자도 인정하여 그의 후계자는 지금 그리스도의 특별 대표자로 높인다. 그것의 지상 군왕 혹은 교황의 권위를 높인다. 로마 교회는 무오한 교황아래 서 있는 전제 군주국의 성질을 가지나니 그의 옥탑에서 하는 말은 행정 사건만 아니라 성경의 해석, 아래 낮은 자리의 반열의 계급등이 있어 그에게 엄정한 책임을 치리한다. 처음에는 교회 회의를 주장하다가 성경의 최종적 해석권을 포함하니 실로 성경이상의 권위이다. 교황 정체는 석경학적, 역사학적으로 전연 유지될 수 없다.

장로회 정체는 대의를 특징하는 한 교회 정치체제이다. 신도들이 선거한 대표자들에게 있고 모든 교직자들이 동일한 수준에 있다. 이 정체는 한 편에 교회 정치가 단일 교자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과 다른 편에 그것이 회중 일반의 행동으로 되는 것을 아울러 반대하고 치리장로들을 대표자들로 선택하여 그들과 목사들로 하여금 당회는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되는 통상으로 장로는 목사보다 많다. 전통이 교리나 실행의 충족한 지도자 로 고찰되지 않고, 항상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아래에 있다. 사도들은 교회를 직접 명령으로 치리하지 않고 자기들이 설립한 교회들에 장로들을 택해서 세웠다. 성경에 묘사된 교회의 근본적 성질은 이같이 연합과 광대회의들이 설치를 요구하는 듯하며 또 성경의 어떤 구절은 사도의 교회의 어떤 의미의 연합을 형성한 사실을 지시하는 듯 하다.

회중 정체는 또한 독립성의 정체라 칭한다. 장로회 정체와 같이 교직자들의 동일 서열을 인정한다. 그러나 권위는 선택된 대표자들에게 있지 않고 신도들의 직접 결의에 있다. 각 교회는 상호 독립하여 충분한 정치권을 가진 완전한 교인이다. 그러나 성역의 직권을 전연 회중의 결의에 의뢰하게 하는 이 회중정치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는 바와는 잘 조화되지 않는다.

하이델베르그에 거주한 의사 도마스 에래스터스는 교회를 국가의 한 국면으로 보았다. 그는 국가는 신적 조직체로서 사람들의 현세적 신령적 궁핍을 모두 채워주기로 의장된 것이므로 순수한 교리의 전파와 성례와 권징의 상당한 시행을 위한 의무를 갖고 있다. 이 교회 정체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루터파)에서 다양으로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교회의 머리라는 근본 원리와 또는 교회와 국가는 기원, 대상, 행사되는 권세, 그 권세의 시행에서 판이하다는 사실과 충돌된다.

전국 교회 정체는 교회란 국가와 동치인 자원적 결사라는 추상위에 진행한다. 개별적 교회들은 한 개 전국적 교회의 작은 부분이다. 기원적 권력은 전국적 조직체에 있는 바 그 조직체는 지교회들에게 치리권을 갖는다. 또 지교회들이 자치권을 전연 무시하며 자치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책임의 원리들을 알지 못하며 형식주의를 양성하여 공언상 영적인 교회를 형성하여 지리적 밧줄로서 속박한다.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모든 정치를 원리상 배척한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 대신에 특별계시를 사용하기를 주장하므로 성경보다도 내적 광명을 앞세우며, 공중설교 대신 성령으로 고무된 교훈의 말씀을 더 즐겨 사용한다.

 

제 3 절 교회와 국가

엄정히 논리적인 로마 교회의 교리에 의하면 국가는 교회의 한 국면 뿐이다. 에래스터스의 견해는 교회를 국가의 한 국면 뿐으로 본다. 개혁 교회의 보통 교리에 의하면 교회와 국가는 둘 다 신적 조직체들로서 상이한 목적들을 가지며 매 점에서 서로 독립하여 있다.

로마 교회의 타락한 전제적 권위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혁 교회에서는 처음에 교회의 권징을 국가의 권력으로 시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애국 운동과 교회 일의 혼동은 미국 남북 전쟁때 장로교회에 있어서 북방정권에 충성하기를 맹세하지 않는 남방 교직자들을 파면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국가가 기독교 교육을 돌아보지 않는 반면에 교회는 이것에 큰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국가의 의장은 무엇인가? 세속정부는 사람들이 민권을 누림에 그들을 보호하기로 의도된 신적 조직체이다. 국가는 신적 조직체요, 이것의 관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다. 유형교회는 사람의 구원을 취득함에 기구가 되기로 의도된 신적 조직체이다.

 

제 4 절 장로주의 근원과 발전

‘장로회’라는 말은 ‘장로’라는 말을 어근으로 한 것인데 ‘장로’라는 말은 신약에 약 60회, 구약에 약 100회 나타난다. 장로교회란 민선 장로들에 의하는 대의형의 정치를 행하는 교회이다.

칼빈은 파렐로 더불어 제네바에서 추방되긴 전에 신도게요서와 요리문답을 준비했다. 헬베틱 제 1 신도게요서는1536년에, 헬베틱 제2 신도게요서는 1567년에 나타났다. 제네바에서 제정한 ‘정치와 권징의 법칙’은 여러 개혁교회 장로교회의 정치 및 권징의 표준문서에 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제 5 절 개혁파 정체의 근본적 원리

그리스도는 매우 특별한 의미에서 자기의 신체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는 무력에 의하여 교회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교회 안에 공작하시는 자기의 영에 의하여 하시며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의 표준으로 삼아 하신다. 직원들은 교회에게 부여된 기원적 권세에 참여하고 그들의 직원으로서의 권위는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는다. 그리스도는 교회 전체에게 권세를 위임하는 동시에 또한 이 권세는 교리, 예배, 권징의 유지를 위하여 따로 세우신 대표적 기관들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그리고 특정적으로 행사될 것을 규정하셨다. 교회치리에 행사되는 이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의 치리단체에 있고 그 단체에서 광대회의에로 확장되는 것이다.

영미 장로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는 근본원리 8조를 선언하고 의거한다. 1) 양심의 자유, 2) 교회의 자유, 3)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4) 진리와 행위, 5) 상호관인, 6) 직원의 선거, 7) 치리권, 8) 권징이다.

장로회 정치체제는 장로에 의한 대의적 정체라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정체는 권위와 자유의 양면적 성격을 가진 것이다. 최초부터 교회란 권위적 제도인 면과 자발적 결사인 성격을 겸비하여 내려온 것이며, 항상 그렇게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 6 절 교회의 직원

비상 직원이란 사도시대의 교회에만 있었던 직원들이었다. 이 직원들은 통상적으로 사도시대 이후에 중지되었다고 본다. 사도란 이 명칭은 예수님이 선택하신 열두 사람과 바울에게만 적용될 것이나 또한 바울의 사역에 조력하고 사도적 은사와 은혜를 받은 어떤 사도적 인물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선지자들은 교회의 건덕을 위한 말씀의 은사를 비상히 많이 받은 듯하고 이따금 신비를 계시하며 미래 일을 예고함에 있어 계시의 기구로 되었다. 사도와 선지자 외에 전도인이 성경에서 언급되었다. 빌립, 마가, 디모데, 디도는 이 반열에 속하였다. 칼빈은 목사와 교사를 교회의 정치를 주관하는 통상직원이라 하고 교사의 직무는 목사의 직무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교회의 통상직원들 중에 장로 혹 감독이 제 1차로 고찰될 만함은 그들 중에 교회정치를 주관하는 기본적 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사’와 함께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발견된다. 칼빈에 의하면 목사와 교사는 교회가 도무지 버릴 수 없는 직원들이요, 두 사이의 차이를 말하면 교사는 권징이나 성례의 거행이나 훈계나 권면을 주관하지 않고 성경해석에만 주력하여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가 신자들 중에 유지되게 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다 목사의 직무에 포함되어 있다. 빌립보서 1장 1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공적 문안에 의하면 집사는 사도시대 교회의 두 주요직임들의 하나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사도와 같은 비상직원들의 소명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직접 호출에 의하여 비상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통상직원들은 통상한 방식으로 교회의 동인을 통하여 소명을 받았다. 통상직원의 소명은 이중으로 온다. 내소는 하나님이 주신 어떤 통상적 섭리적 지시로 구성되며 특별히 세 가지를 포함하나니 ①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뜻에 향한 사람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어떤 특별한 사역에 헌신하기로 강박된다는 의식, ② 그 추구되는 직임에 적당한 은사의 일정량이 자기에게 현존한다는 확신, ③ 하나님이 그 목표에 향하여 길을 열어 주신다는 경험이다. 외소는 교회의 매개를 통하여 오는 소명이다. 이 소명은 오직 지교회 전체 즉 그 직원들과 신도들이 발하는 것이다. 특별히 두 가지 의식이 직원의 취임에 연결되어 있다. 임직식은 임직될 후보자의 소명과 시취를 예상한다. 이것은 장로회의의 행위이니 안수가 수반한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이 둘은 분명히 손잡고 동행하였다.

금일에 여자 교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이것을 금지한 사실을 곡해하여 부인하는 것을 능사로 삼는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서 여자의 교회교권을 허락하지 않음은 2천년전의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다.

 

제 7 절 회의들

개혁파 교회정치는 체승적 혹 체강적 순서의 회의들을 특색으로 가지고 있다. 이 회의들은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이다.

지교회의 대의정치 기관인 당회는 교회의 기원적 권세의 좌소이다. 개혁파 모든 교회는 치리장로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목사로 하여금 교회의 정치를 위한 당회를 구성하게 한다. 개혁파는 장로나, 목사나, 감독이나를 물론하고 어느 한 사람이 치리하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며 회중 정치를 시인하지도 않는다. 개혁파 교회정치는 지교회의 자치를 인정한다.

성경에는 한 지방의 지교회들이 반드시 유기적 연합을 결성하여야 된다는 솔직한 명령이 없으며 이같은 연합의 실례가 발견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묘사하는 교회의 근본적 성질은 이같은 연합을 요구하는 듯이 보인다. 회중의 직접 대표자들이 당회를 구성하고 노회에 대표자로 열석하며 또 대회와 총회에 대표자로 된다. 이 회의들은 교회적 회의들이므로 순전히 과학적, 사회적, 산업적, 정치적인 사건들은 그 직권 아래 있지 않다. 교회적 사건들만이 그 영역에 속하나니 즉 교리와 도덕, 교회정치와 권징, 기타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통일과 질서를 보전함에 관계된 사건들이다. 광대회의들은 당회에 부여된 것보다 더 고등한 종류의 권세를 대표하지 않는다. 동시에 광대회의들의 권위는 당회의 그것보다 정도에서 더 크고 범위에서 더 넓다.

노회는 그 지방에 있는 모든 목사와 각 교회의 장로 한 사람씩으로 구성된다. 대회는 보다 더 큰 지역에 있는, 적어도 3 노회를 포함하는 목사, 장로들의 회합이다. 총회는 장로교회의 최고 치리회이다. 이것은 한 개의 단체로서 이 교파의 모든 지교회들을 대표한다. 총회는 각 노회로부터 선출된 같은 수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제 4 장 교회의 권세

 

제 1 절 교회 권세의 원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설립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필요한 권세 혹은 권위를 부여 하셨다. 그는 유기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행정적인 의미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다시 말하면 그는 몸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영적인 국가의 왕이시다. 교회는 무형교회와 유형의 두 면을 가지고 있는 바 유형교회는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혼합되어 있어 그 원천이 그릇 인정될 위험이 없지 않다. 교회는 공산주의자들이 힐난하는 바와 같이 특권계급의 기구가 되거나 혹은 참되고 영원한 목적과 계획이 없이 주위에 있는 어떤 도덕적 혹 사회적 수요를 만족시키는 취미같은 사람들의 앞잡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요. 그것의 모든 결정들에 생존한 권위이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와 왕의 자격으로 교회에게 권세를 부여하셨다. 그는 교회가 반석위에 확립하여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제승하지 못할 것을 친히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 권세를 사도들의 대표로서 받았으니 그들은 교회의 핵심이며 기초이었다. 교회의 직원들은 비록 회중을 기구로 하여 직임에 나갈지라도 권세는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것이다.

 

제 2 절 교회 권세의 성질

교회의 권세가 영적이라 함은 이 권세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주어진 권세요,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이 행사될 수 있으며, 신자들에만 속해 있으며, 도덕적이고 영적인 방법으로만 행사될 수 있다는 뜻이다. 교회의 권세가 신령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것이 무형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신체와 영혼을 아울러 통치하시며 그의 말씀과 성례가 온 사람을 상대로 하여 발어하며 집사의 성역은 육체적 수요에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람의 외면적 현세적 정상 위에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하고 교회는 사람의 내면적 영적 정상에 하나님의 정치를 대표한다. 교회의 권세는 독립된 주권적인 권세가 아니라, 사역적 권세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서, 교회에 대한 그의 주권적 권위에 종속된다는 것이 성경에서 풍부하게 입증된다.

 

제 3 절 교회 권세의 삼중

하나님은 교회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교회를 진리의 귀중한 보화를 지키는 자로 삼으셨다. 그리고 진리를 담은 영감받은 책으로 순수하고 손상됨이 없이 보존됨으로써 마침내는 목적을 성취하고 만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함으로써 이 권세를 행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세상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중에게 선포하여 죄인을 회심시키고 성도들을 교화시키는 것도 교회의 의무이다.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작성함으로써 이 권세를 행사하여야 한다. 이단이 나타날 때마다 언제나 신조와 신앙 고백서의 작성, 곧 교회의 신앙을 명확히 문서화하여 선언하는 일이 요청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얻게 된 신앙고백서에서만 만족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경이라는 광산을 더 깊이 팜으로써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학무적 연구를 생명의 말씀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할 것을 원하신다. 예수님은 교회에 권징을 제정하셨을 때 사도들을 주시고, 그들의 말과 관련하여 교회에도 매고 푸는 권세 곧 금지되어야 할 것과 허용되어야 할 것을 선언하고, 선언적인 의미에서 죄를 용서하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하는 권세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다. 첫째로 그것은 회원을 받아들이는 것과 축출하는 것에 관한 그리스도의 법을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하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교회의 회원들의 영적인 덕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두 가지 목적은 보다 높은 목적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는 일에 이바지한다. 교회의 평회원들도 권징의 시행에 참여하도록 요청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권징은 교회의 직원들에 의하여 시행되며, 권징이 형벌이 될 경우에는 오직 직원들만이 시행의 주체가 된다. 교회는 권징을 엄격히 시행하는 동시에 온화의 정신을 잊지 말 것이다. 성경은 올바른 권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18:15-18; 롬16:17; 고전5:2,9-13 등)

병자를 심방하여 성경말씀과 기도로 위안하는 일은 교회의 긍휼권 행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구약시대에는 교회에서 구제하는 것보다 개인으로 하여금 구제하는 방침을 더 중시했다. 주님은 교회 내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셨다. 구제가 교회의 의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집사들은 교회의 모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을 수행하는 책임 있고 신중을 요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방편을 고안하여 필요한 재원(財源)을 모으고 모은 돈을 관리하며 그것을 신중하게 분배하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

 

제 5 장 교회의 임무

 

제 1 절 교회의 예배

모든 예배는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 기독교 예배는 다른 예배와 다르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성질이 그에게 드리는 예배의 의미를 결정한다. 그리스도 신자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이시므로 진정한 기독교 예배의 성질은 그의 성격에 의하여 또는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구약의 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의 신앙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의지에 향한 순종의 한 형식이었다. 성경적 예배에 있는 신앙의 순종에는 항상 주의 하신 바에 대한 찬송, 숭경, 감사의 요소들이 따른다. 하나님의 은사의 사람편에서의 인정은 입술로만 할 것이 아니라 생활로써 할 것이다.

예배는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의 앞에 모임이다. 성령은 고립한 개인들에게 크게 강림한 것이 아니라, 교회로 모인 중에 그리하신 것이었다.

의식은 ‘예배를 거행하는 형식 혹은 형식들’이라고 정의된다. 의식과 관련에서 세가지 삼갈 것이 있다. 1) 자발성(自發性)을 억제하지 말라. 2) 외식(外飾)이 되게 하지 말라. 3)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응답하는 형식으로 할 것이다.

개혁교회의 예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적이다. 성경의 낭독과 강도 및 교훈은 예배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이 지니는 권위는 외면적이기보다는 내재적이니 지금 하나님이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것의 권위는 스스로 증명하는 권위이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사람에게 알리는 가장 활기 있는 방식은 강도이다. 예배 중에 성경을 낭독하는 외에 각급 주일학교를 통하여 성경 교훈을 시행하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임무이다. 기도는 예배의 한 중요한 부분이다. 기도에서 회중은 하나님 앞에 연합적으로 꿇어 절하여 그를 창조주, 구속주, 유지주로 높이는 것이다. 예배는 또한 헌금을 포함한다. 이것은 예배자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순종적 응답의 구체적 표현을 행하는 기회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인도하시면 홍수나 한재가 있는 때에 금식일이나 감사일을 지키는 것도 우리 지혜와 성경대로 합당히 행하는 것이다. 세례와 성찬은 예배 중에 거행하는 성례이다. 축복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삼위일체의 명의로 권세있게 복을 비는 것이니 장립된 목사가 할 수 있고 장로나 강도사는 할 수 없다.

 

제 2절 교회의 건덕

‘건덕’(edification)은 헬라어의 ‘οίκοδομή’의 역술로 로마서 15장 2절, 고린도전서 14장 3절, 고린도후서 10장 8절, 13장 10절에서 사용되었다. 이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가옥을 건축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참되고 구원하는 신앙을 표현하여 그리스도 안에 신앙의 기초를 설치하는 때이다. 다음에 그는 남은 생애를 통하여 그 기초 위에 집을 건축하여야 된다.

유형교회가 교역자를 두고 성경을 가르치며 규율을 세우고 권징을 행하는 것은 교회원들의 건덕을 중요한 목적으로 한 일이다.

교회원들의 건덕을 위하여 제정된 특수한 기회는 공예배와 상호교제 및 봉사에서 발견된다. 공예배 회집은 주께서 함께 하시는 특별한 은혜가 약속되고 또 시행되는 기회일 뿐 아니라, 또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좋은 기회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신체인 교회에 영적 은사들을 주심은 1) 교회의 유익이 목적 2) 신자들의 참여 3) 성령의 기름 부음 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회원들의 모든 연약과 결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다. 도덕적으로 충분한 영광스러운 교회는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유의 관념의 독특한 성경적 발전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특권들의 고찰로부터 출발하였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긍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의 속박에서 구출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약속하신 땅에 정착시키셨다. 방종자가 되지 않게 할 것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할 것에 대한 경계가 주어진다.

 

제 3 절 교회의 증거

교회의 최고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증거하는 일다. 교회의 이 임무는 참으로 고귀하니 이 일에서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신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약교회를 세우실 때에 그것의 임무로 지정하신 것은 그의 구속애의 기쁜 소식을 ‘모든 족속’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교회는 세계의 복음진리를 증거할 사명을 가지고 존재하는데 이 사명을 수행하기를 중지하면 교회됨을 중지하는 것이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영원계로 가는 자, 복음을 듣고도 불신앙으로 저항하는 자가 도처에 무수하니 교회는 그들을 방관하고 버려둘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에서 변할 수 없이 결정된 일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바에 대한 감사애는 증거의 동기의 가장 깊은 요소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복음의 증거에 매진케 되는 다른 하나의 유력한 요소이다.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증거를 위한 다른 한 동기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우리 교회 신도들은 구속의 복음을 널리 증거함이 당연하다.

외지 선교와 국내전도를 구별하는 것이 교회의 증거사업에 실재한 현상이다. 그러나 인근지로부터 이역 땅 끝까지에 믿지 않는 백성이 사는 곳은 모두 복음 증거의 경역이다. 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격은 역사의 매일매일의 사변들을 통제한다는 것을 믿고 매진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이 그리스도의 주재 아래 인치될 뿐 아니라, 진리의 매경역이 그에게 성헌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여’야 한다. 성경은 교회가 그것의 전도를 두 가지에 아울러 지향할 것을 가르친다. 외지선교와 국내전도에 치중하고 자체의 회원들을 돌아보기에 등한한 교회는 자멸을 감행하는 자이다. 조직된 교회의 증거에 균형이 잃어지는 또 다른 방면이 있으니 그것은 교회의 사회적 의무에 관한 것이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개인구원에 관심을 두나 사회적인 함의도 가지는 것이다.

교회의 증거에 대하여 위에서 말한 모든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 전연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에 주의 임재를 통해서만 이 임무가 능히 수행될 것이다. 증거에 향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동력은 교회원 각 개인의 마음과 생활에 움직여져야 된다. 각 개인이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감과 주께서 함께 하여 힘주심을 느끼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증거의 임무에 나가는 때에 큰 세력을 발휘한다.

 

제 2 편 은혜의 방편

 

제 1 장 은혜의 방편 개관

 

제 1 절 은혜의 방편의 함의와 특성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하는 은혜를 베푸시는 방편들을 교회에게 맡기시는 것으로 교회를 존귀케 하셨다. ‘은혜’의 의미는 죄인을 죄와 부패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고 해방하며 중생하고 성화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유쾌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권능이 ‘은혜’이다. 방편을 정의하면 우리의 경험에 세계로부터, 우리가 사는 외면적 세계로부터 취해진 우리의 인생존재와 성질에 적응하는 요소들이라 할 것이다. ‘은혜의 방편’이란 성령이 죄인에게 베푸시어 그를 죄와 부패의 속박으로부터 현실적으로 구출하시고 중생, 성화하시어 하나님 보시기에 유쾌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총애의 대상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 행복들과 덕성들을 주시는 방편들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영혼들에게 은혜 즉 성령의 초자연적 감화를 주는 통상한 경로가 되기로 정하신 제도들을 지시하기를 의도한다.

개혁파 신도게요서들의 공통한 입장에 의하여 엄밀히 말하면 말씀과 성례가 본격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설치하시고 자기의 은혜의 전달에 있어서 통상적으로 자신과 연결하시는 객관적 경로들로 간주될 수 있다. 기도를 은혜 방편의 제 3요소로 추가한 것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이다. 성경적 근거로는 사도행전 2장 41,42절에 보도된 예루살렘 원시교회의 행사에 주의를 재촉한 것이다. 말씀, 성례, 기도는 신앙을 공작하며, 강화하심에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편들이다. 세례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구원얻게 하는 일에 정규적으로 시행되는 기구요, 성만찬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여 속사람을 자라게하는 주의 명령에 의한 행사이다. 말씀과 성례는 은혜언약의 본질적 요소들이다. 말씀은 율법과 복음인 바 이것들은 언약의 율법과 복음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는 보통은혜기구들이 아니라, 죄인에게서 죄를 제거하고 그를 갱신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하게 하는 특별은혜의 기구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는 독자적으로 은혜의 방편이요, 이것들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사건들과 연락된 효능으로가 아니다. 교회가 말씀을 전하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일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제 2 절 은혜의 방편의 역사적 여러 견해와 개혁파 견해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내 세웠으나 성례를 말씀보다 더 참된 은혜의 방편으로 고찰하였다. 특별히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말씀의 당연한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고 말씀에 대해 다만 은혜의 사역에 있어서의 에비적인 의미만을 부여하였다. 말씀과 비교하여 성례는 진정한 은혜의 방편으로 간주되었다. 로마교회는 점진적으로 발전된 조직체를 방편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루터파는 종교개혁과 함께 치중하였던 강조점은 성례에서 말씀으로 옮겨 갔다. 루터는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강조했다. 그는 성례는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성례는 사실상 가시적인 말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루터는 특히 재세례파들의 주관성에 반대하면서 성례의 객관성을 강조하였고, 성례의 효력을 수례자의 믿음보다는 신적인 제정에 두었다. 루터는 신비주의적인 재세례파와 많이 항쟁하며 그들에 대한 반동으로 그의 은혜의 방편의 최종적인 견해를 설정하였다. 재세례파를 비롯한 종교 개혁 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신비주의적 종파들은 사실상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를 시여함에 있어서 방편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은혜를 전달하실 수 있기 때문에 외적인 하나님의 은혜 전달의 방편에 제한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성주의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영구적인 효력을 지닌 의식으로 간주했으나, 다만 도덕적인 효력을 지닌 것으로 밖에는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은혜의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개념보다는 인간이 일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17세기의 알미니우스주의자들과 18세기의 합리주의자들은 이 견해를 공유한다.

개혁파의 견해는 1) 하나님이 정하신 통상적인 방편이다 2) 하나님의 특별은혜는 은혜의 방편들이 작용하는 경역에서만 공작한다. 3)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적으로 간접 공작하나 방편들을 신적 부착물로 하여 이것들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사용에 수반한다. 말씀과 성례는 동일한 내용을 가지나 후자의 내용은 전자의 내용으로부터 인출된 것이요, 독자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다. 5) 하나님만이 구원의 유효한 원인이다. 은혜를 분여하고 전달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사용하시는 방편에 매이시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유롭게 그 방편들을 사용하신다.

 

제 2 장 은혜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

 

제 1 절 의미와 논거와 전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방편으로 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죄인을 위한 크고 충족한 은혜의 통로이다. 다른 모든 방편들은 교회에 종속된다. 그러나 루터파와 개혁파를 막론하고 개신교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존중하며, 실로 말씀이 성례보다 우월하다고 간주한다. 그들이 은혜의 방편으로 간주하는 것은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킨다.

대사명의 말씀이다. 사도들이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은 도처에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다. 또한 사도들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성경 자체가 가르칠 뿐 아니라 또한 교회와 세계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확증된다.

전도는 승귀하신 주, 초월한 선지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니 그만이 그의 교회를 모으시고,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어 구원에 이르게 한다. 전도자는 다만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이 말씀하시어 그리스도 자신이 음성이 그의 백성에게 들리게 하는 자이다. 전도자의 파송은 사도같이 소명과 사명을 그리스도께로 받아 순회 전도하였으니 그들이 그리스도의 들은 사도들같이 직접 사명을 받지 않으나 오히려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전도자의 말은 권위적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전도는 복음의 권위적 선포이다. 전도자는 반드시 그의 사신을 가져 오고 아무것도 더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그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권위를 갖고 전할 것이다.

 

제 2 절 능력의 소재

루터파는 처음부터 성령이 방편으로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주장한 반면, 개혁파는 성령이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고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이후에 루터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회개시키는 능력을 신적 기탁물로 가지고 있는데 이 능력은 결코 말씀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에서 심지어 말씀이 사용되지 않을 때에나 합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말씀 안에 임재한다는 루터파 자체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개혁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으니, 곧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요,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개혁파는 다만 성령이 죄인들의 마음속에 작용할 때만 말씀은 믿음과 회심으로 이끄는 효력을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권능 있는 것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령의 냄새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망의 냄새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과 회심에 인도하는 효능을 발휘함은 오직 죄인들의 마음에 행하는 성령의 수반적 공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 효능을 말씀 안에 부착하여 비인격적 능력으로 보기를 거절했다. 성경은 가르치기를 진리의 성화하는 감화보다 앞서서, 그 감화를 유효하게 만드는 영혼에 설령의 공작이 행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교리, 사역의 객관적 계시가 없었다면 그의 제자들의 내면적 경험은 불가능하였을 떳이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영적 식별력이 없었다면 그 객관적 계시는 전연 쓸 데 없기가 저 핍박자들의 경우에서와 같았을 것이다. 성경 말씀이 성령의 공작 아래 은혜의 방편으로 수행하는일은 간단히 묘사하면 죄인을 반성시켜 회개에 이르게 하고 구원에 이르기까지에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거룩한 사상, 감정, 목적, 행동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호출된다.

 

제 3 절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 말씀의 구성

개혁 교회는 처음부터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의 두 구성 요소가 되는 율법과 복음을 구분했다. 구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고, 신약에도 율법과 복음이 있다. 율법에는 명령이나 금령의 형태로 된 하나님의 뜻 전체가 포함되고 복음에는 신구약을 망라하여 화목의 사역에 속한 것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추구하고 구속하는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이 포괄되어 있다.

 

제 4 절 율법과 복음의 가치

율법은 죄를 억제하고 의를 증진시키는 목적을 돕는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자신이 율법의 요구를 시행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율법은 신자들의 삶의 규범으로서 신자들에게 의무를 확인시켜 주고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개혁파는 율법의 두 번째 용도를 충분히 인정하여 ‘율법을 통하여 죄 인식이 온다’고 말한다. 동시에 율법이 구속의 필요를 인식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화의 교리와 관련된 율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칼빈은 율법의 제 3 용도에서 신실자들이 마음에는 하나님의 영이 이미 살며 통치하신다. 그리고 마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새겨져 그들은 성령의 지도아래 그에게 순종하도록 영향을 받는다.

 

제 3 장 성례 개관

 

제 1 절 하나님 말씀과의 관계와 필요성

성례들은 그 근본적 성질과 목적에서 매우 단순하다. 그것들은 쉽게 거행되고 그 자체에 명백한 의미를 가지는 간단한 행동들로 구성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복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에 향한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우리의 순종과 수양을 증진하기 위하여 제정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적 명령의 효능으로 의무적이다. 성례들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의무적이다. 성례의 기원은 그리스도 자신에게 돌아간다. 기독교에 이보다 더 오래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학이 있기 전, 교회 정치가 있기 전,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부터, 성례들이 있었다.

 

제 2 절 성례의 의미와 구성

원래 sacramentum 이라는 고전적 의미에서 신성한 것으로 내어 놓는 것으로 이해된다. 본래 쟁송하는 두 당사자가 공탁한 금전의 금액을 가리키는 말이다. 교부들은 성례는 무형한 은혜감각할 수 있는 표호라고 하였다. 또 어거스틴은 내면적이며 영적인 은혜의 외면적이며 유형한 표호라고 하였다.

성례의 각자가 감각에 명료히 나타나는 물질적 요소를 포함한다. 이 물질적인 요소들만을 성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이 용어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표징(sign)과 상징되는 것을 가리킨다. 표징과 인은 상징되고 인침을 받은 어떤 것의 존재를 가정하며, 통상적으로 성례의 내면적인 요소라고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모든 영적인 부요함을 말한다. 이것은 영적 혹은 도덕적이고 관계적이어서 믿음을 통하여 성례를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외적인 표징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성령에 의하여 사용될 때 은혜의 방편이 된다.

 

제 3 절 구, 신약 성례의 비교와 수

구경륜 기간에 두 성례가 있으니 즉 할례와 유월절이었다. 할례는 피의 제사로서 죄책과 죄의 오염을 제거하는 것을 상징하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삶의 전영역에 침투시킬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의미했다. 유월절 역시 피의 성례였다. 이 대속은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신약교회도 역시 두 성례가 있으니 곧 세례와 성찬이 그것이다. 신약시대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이것들은 피 없는 성례이다. 그러나 이 성례들은 구약의 할례와 유월절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복을 상징하는 것이다.

 

제 4 절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례의 정당성과 유효성

성례의 정당성(validity)란 성례가 의도된 목적을 따라서 진정한 성례의 성능을 갖춤을 의미한다. 모든 교파들이 다 동의하기를 성례가 정당한 성례되기 위한 바른 재료, 바른 형식, 바른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의 의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명령하신 바를 실행하려는 절실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제 4 장 기독교 세례

제 1 절 세례의 유추, 제정, 역사

그리스도께서 화목을 제정하시고, 그 사역이 부활에서 성부의 열납을 받은 후에 신적 권위를 가지고 제정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완성된 속죄사역에 성부의 인치심이며 그 사역을 그의 백성의 칭의를 위한 대속물로 승인하셨다는 것을 공적 선언이다.

1) 교부시대 - 세례를 교회에 가입하는 의식으로 보는 동시에 통상적으로 이것이 죄의 용서와 새생명의 전달에 밀접히 연결되었다고 고찰한다. 물을 붓는 것이 당시 세례의 양식이었다고 보는 증인들도 있다. 2) 중세기와 로마 교회 - 세례 중생, 미신적 의식, 담보인 스콜라 학자들은 처음에는 장년들의 경우에 세례는 신앙을 예상한다고 하는 어거스틴의 견해에 참여했으나 점차로 다른 관점이 우세했으니 즉 세례는 항상 작용에 의해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주관적 상태의 중요성은 축소되고 세례는 중생과 교회가입의 성례라고 하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특색적인 개념은 점차로 우세를 얻게 되었다. 3) 루터파와 재세례파의 입장 -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성례관을 전적으로 제거하지 못하여 세례 중생의 관념을 보존하였고 아이들 속에 신앙이 공작된다고 생각하였다. 4) 개혁파와 기타파의 견해 -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은 세례는 신자들을 위해 제정되었고, 새생명을 공작하는 것이 아니라. 강화될 뿐이라는 것을 추상 위에 전진하였다.

5) 침례파의 유래 - 침례파는 교회사상 특수한 어떤 큰 운동에 그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성경 중에 그 특수한 교의의 빙거를 발견함으로 만족한다.

제 2 절 세례의 의미와 내포

세례는 물로 씻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는 것이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주님의 사람이 되기를 서약하는 것을 표시하며 인 치기를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요건은 바른 재료와 바른 형식이 있으며, 바른 의도가 있다. 바른 의도에는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게 하여 생명에 참여하게 하고 다른 은사도 같이 누리게 하는 것이다. 또 주의 사람이 되며 유형교회의 회원이 되게 한다.

기본적으로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됨과 은혜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을 표시하고 인치고 전달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하고, 제 2 차적으로 그의 구원을 받고, 우리 자신을 그에게 거룩하게 헌신할 것을 서약을 가견적으로 인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 절 세례의 적절한 양식

개혁파 신학은 그 본질을 정결케 함이라는 개념에서 찾는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세례는 이전의 세례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만일 그가 이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은 세례를 제정하셨다면, 그는 모든 가능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 내용을 명백히 밝히셨을 것이다. 더욱이 성경은 세례가 영적인 정결케 함 또는 씻음을 상징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성경은 결코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세례의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 시대의 영적 갱신에 관한 예언의 말씀은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를 정결케 하리라>고 하셨다. 히브리 저자는 독자들이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고 말한다.

제 4 절 세례의 시행자와 수령자

개혁 교회에서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보고, 가르치는 장로나 목사가 유일한 세례 시행자라는 원리를 견지했다. 개혁교회는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다른 종파들이 베푼 세례를 인정했다. 단 삼위일체를 부인한 종파의 세례는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의 신앙 고백에 근거하여, 믿는 부모들의 유아들은 그들이 언약의 자녀요,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언약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를 받는다.

 

제 5 절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세례의 유효성과 필요성

세례는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을 위하여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셨고, 그들에게 모든 백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 세례는 영혼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뿌림으로 죄의 죄책으로부터 정화되고 성령의 다시 새롭게 하심으로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하여 진다는 진리를 표호한다. 신자의 영적 생활에 이미 들어온 것이 세례의 의식에서 말씀을 기구로 한 성령의 공작에 의해 강화되며 굳어지는 것이다. 신자가 참된 신앙을 가지는 때에 이미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힙입어 죄사함을 받았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성례마다 두 가지가 있으니 외면적 유형적 표호와 그것이 표시하는 내면적 무형적 은혜이다. 이 두 사이에 성례적 혹 상징적 관계가 있어 자연히 은혜의 특성들과 효과들은 표호에게 귀속시키는 용어를 생기게 한다.

세례가 필요함은 이것이 명령된 때문이요, 보편적으로 본무적임은, 이것이 신적으로 임명되고 가장 귀중한 은혜의 방편이어서 고의적으로 이것을 등한시하는 것은 불경건이 되는 때문이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세례는 제 일단계의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이미 주어진 줄로 예상하는 것이니 세례가 상징하는 인치는 은혜가 바로 이것을 받기 전에도 이것 없이는 자주 실현된다.

제 5 장 성찬

 

제 1 절 성찬의 유추와 역사

어거스틴은 오랫동안 성찬론의 실제적인 발전을 저해했다. 그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말하면서도 상징과 상징이 의미하는 것을 구별하였고, 본질의 변화를 믿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제의적 성찬론과 중세의 화체설을 반대했다. 칼빈은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그는 성례에서 주께서 몸으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성찬에서 주의 임재는 비록 영적이지만 실재적인(real) 임재임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임재가 영적인 덕과 효력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제 2 절 성찬의 제정과 명칭

성찬의 제정의 관한 사보도가 있으니 즉 공관 복음의 각자와 고린도전서 11장에 있는 것이다. 이 명칭은 고전11:20에서 나왔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명칭이다. 아마도 이 성경 구절에서 바울은 성례와 애찬을 명확히 구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특히 이 만찬이 주의 만찬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다. 주께서 십자가 위 수난의 전야 위 예루살렘 다락방 유월절연회석에서 제정하신이 예식은 영구한 권위를 가지어 이것의 수행을 우리의 영구한 본무로 만들었다. 주께서 친히 떡을 떼어 주시고 잔을 돌려주시며 그것들이 자기의 대속적 죽음이 상징이라는 것을 설명하시고 그 일을 행하여 자기를 기념하라고 부탁하신 언행에 얼마나 숭고한 존엄성이 나타나는가?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주는 것이니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다.

제 3 절 성찬의 의미와 내포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의하면, ‘주의 성찬은 곧 성례니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포도즙을 주며 받는 것으로 그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합당하게 받는 자들은 육체와 정욕으로 참예함이 아니요, 믿음으로써 그 몸과 피에 참여하여 자기의 신령하게 받는 양육과 은혜 중에서 장성함으로 그의 모든 효험을 받음이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은혜를 신자들에게 더하여 주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포도즙으로 표현하여 이것을 먹고 마시도록 제정하신 것이다.

주의 죽으심과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참여함을 나타내고 있다. 영적 양육과 영적 성장을 말하고 신자들의 연합을 나타낸다. 성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의 특별한 사랑을 인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떡과 잔을 그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셨다. 또한 성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임을 인치는 의식뿐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도께 언약 속에 있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음을 인치는 것이다.

 

제 4 절 성찬에서의 성례적 연합

칼빈의 견해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에서 발견되는데, 그의 교리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실질적으로 임재한다는 것이다. 입으로 먹고 마셔지는 임재가 아니고 오직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에만 계시고 땅에 계시지 않으시니 장소적 임재라는 상상은 제거되어야 할 것이며 오직 그와의 교통은 신앙으로, 영적으로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제 5 절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찬의 효능

성찬은 단지 말씀의 효력과 받은 은혜를 증가시킬 뿐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요, 영적으로 자양분을 공급받고 다시 사리는 은혜요, 구원의 확신을 점점 증가시키는 은혜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하여 신자들의 영적 생활에 영양을 공급하고 성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성찬의 효율적인 작용은 수찬자의 믿음 그 자체뿐만 아니라 믿음의 행동에달려 있다. 불신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받을 수 없다.

 

제 6 절 성찬 참여자

정당한 참여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로서, 구주의 구속의 피만이 자신을 구속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찬에 관하여 적절한 이해와 견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성찬과 보통의 식사를 구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영적으로 자라고 점점 더 그리스도 형상을 닮아 가려는 거룩한 소원을 가진 자들이어야 한다.

제 6 장 기도

제 1 절 기도 개관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지는 대화이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의 기원을 하나님께 고하여 그의 뜻에 합당한 것을 간구하며 죄를 자복하여 그의 자비하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게 된다. 대요리 문답에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고하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한 성령의 도움으로 그의 긍휼을 감사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모든 자연, 자연으로부터 나온 만물을 친히 관찰하시어 자기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모든 행동을 통제하시는 것을 가정한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무수한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수 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무한성의 권능은 반드시 만물을 지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살며 기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법칙이나 자연세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동작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이같은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자연의 법칙과 세력을 사용함 없이도 동작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주되심을 승진할진데 그가 세계 위에 직접 동작하실 권능을 소유하신다는 것을 승인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이적의 가능성은 언제나 인정될 수 있으나 이것의 실제적 출현은 이 교회이 역사기에는 별로 없다는 것이 프로테스탄교회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이적적 응답은 우리 기도의 통상한 목표가 되기 어렵다.

 

제 2 절 기도의 대상

기도는 그 대상에 신적 속성을 돌리므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성당히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기도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게나 혹은 판연한 위들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올려졌다. 성경은 명백히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위임되었다. 그는 높이 올리워 회개시키며 사죄하신다. 그는 성령을 주신다. 그는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의 생명이시라 하여 그를 기도의 상당한 대상으로 높인다.

 

제 3 절 열납될 만한 기도의 요건

열납될 만한 기도의 첫째되는 요건은 진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무한히 높은 실유이시어 거룩과 지식과 권능에서 무한하시다. 우리가 경건한 송구로 그를 섬길 것이 요구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경외의 정신으로 침투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겸비는 첫째로 우리의 피조물로서의 미소를 느낌과 둘째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공로없고 깨끗지 못함을 의식하는 것을 깨닫는다. 간절은 매우 중요하며 우리 주께서 세 번 이것의 필요성을 제자들에게 인상시켜 주었다. 그는 우리가 청구하는 행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것과 소원의 상당한 간절성을 나타낼 것을 요구하신다. 자기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바로 평가하는 사람마다 그의 소청이 무엇이든지 물론하고 절대복종의 정신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 그는 능히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 그는 우리의 기도의 응답하시는 성향을 가지고 계시는 분, 우리의 기도가 그의 지혜로운 목적과 우리의 최선한 유익에 조응하면 확실히 응답하시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그가 사람들의 유일 구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제 4 절 기도의 여러 가지

묵상 기도, 은밀 기도, 사교적 가족적 기도, 공 기도가 있다.

제 5 절 은혜의 방편과 능력

기도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가깝게 인도한다. 감사는 하나님의 자시하신 모든 자비와 그의 긍휼에 감사하는 일이다. 감사 성화의 생활에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함께 성령의 은사가 특별히 요구된다. 성령이 은사는 기도의 주요한 목적물로 주께서 말씀하셨다.

크리스찬의 영적 생활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생활로 연결되며 귀착된다. 경건을 하나님과 연결된 영혼의 생활이라고 하면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성도를 만드는 것은 절대적으로 기도의 힘이다. 성결한 성격은 참된 기도하기를 힘쓴다. 기도는 많은 어두운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면 그것은 많은 부패와 영적 생애를 부흥시키며 활기를 주는 데 마치 마술과 같은 역사를 할 것이다. 기도를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면 성스러운 생활에 반드시 그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기도는 이해력을 부여하며 지혜를 가져오게 한다. 또한 사상을 확대시키며 힘을 주게 된다. 밀실은 기도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예림의집
글쓴이 : 김정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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