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교의신학

Chapter III.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예림의집 2013. 9. 23. 22:31

 

Chapter III.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우리는 앞 장에서 성경이 구속사와 구원서정을 매우 밀접한 연관관계에 두고 다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구속사와 구원서정이 연결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그 말은 구원의 완성이 어떻게 적용되느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구원서정 논의를 시작하는 서두에서부터 문제로 제기했던 부분이다.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예수라는 내가 아닌 타자에 의해 일어났던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 나의 것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성경은 완성과 적용 사이의 연결을 그리스도의 영(고후 3:17), 성령께서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본 장에서 우리의 목표는 완성과 적용의 연결을 위해 성경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피려 한다. 우리의 논의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 존재론적 관계가 아니라, 구원 사역의 측면 즉 기능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조명하려한다.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이 논의를 통해 구원서정 논의를 위한 방법론 도출에 한 걸음 더 다가서려 한다.

 

I. 요한의 증거

요한문헌 중 특히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특별히 사역적 측면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본문이다. 특별히 그 말씀을 하시는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에서 우리는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14-16장은 예수께서 앞으로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신다(14:2)는 말씀으로 시작하여 여러 말씀을 하시던 중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시고 있다. 아직은 구속사의 진행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기에 당연히 염려를 하게 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대신하여 그들과 함께 있을 성령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보내주실 그 성령을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 보혜사는 14-16장과 요한1서에서만 등장하는 요한만의 표현으로 성령을 가리킨다. “다른”을 통해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자신과 대비를 이루며 자신을 대신하여 조력자가 되고 힘이 되어 줄 존재라는 의도는 전달이 되지만 그 존재가 누구인지 제자들은 아직 알기 어렵다. 그것을 잘 이해하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어 17절에서 그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연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 보혜사라는 분에 대해 진리의 영이 고유 이름인가? 아니면 별명쯤 되나? 다른 가능한 표현도 있었을 법 한 대, 왜 굳이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결국 이 분이 성령이심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요한 식으로, 사랑의 영이라고 했어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아니면 단도직입적으로 거룩한 영, 성령이라고 했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직전에-아마 짧게는 불과 몇 분 전에- 6절에서 당신에 대해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방금 전에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보내실 보혜사에 대해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다면, 논리적으로 그는 나의 영이라는 말씀이 된다. 즉 예수님은 오실 성령을 소개하시면서 의도적으로 당신과의 관계성 속에서 성령을 소개하고 계심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다시 26절에서 보혜사에 대해 보충하셨다. 우선 26절에서 크게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보혜사가 바로 성령이라고 밝혀 주신 점이다. 그런데 26절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즉 성령이 누구신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즉 예수님은 성령이 누구신지에 대한 존재론적 관점이 아닌 기능적 관점에서 답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어떤 관점에서 성령을 이해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당신과의 관계를 통해, 특별히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의 관점에서 성령을 이해하기를 원하시는 의도를 보게 된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은 보혜사, 즉 성령이 “내 이름으로”오신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서 자신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내 이름으로는 나를 대신하여, 내 권세로, 내 것으로, 내 목적을 위해, 나를 위하여 등의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의 권세로,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신다는 뜻이 된다. 즉 오시는 성령의 활동의 범위와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종속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혜사가 “내 이름으로” 오신다고 하심으로써 이미 17절에서 그를 진리의 영, 즉 자신의 영으로 소개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 성령이 “내 이름으로” 오셔서 하시게 되는 일을 예수님은 우선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는 압축적 표현으로 말씀 하셨다. 여기에서 긴 설명이 아닌 비교적 단정적인 말씀이기에 더더욱 의심이 드는 것은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너무도 선명하게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실 거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인가? 그 구절은 “그리고”로 다시 뒤의 말과 이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한글 성경에서는 “가르치고” 속에 “그리고”의 의미가 같이 가지고 있다. 여기서 “그리고”는 병렬적으로 두 개의 내용을 동등하게 연결한다기보다 앞의 내용을 “그리고”를 통해 보강, 보충하는 설명의 관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리고”를 두고 “모든 것”이 앞뒤로 두 번 반복되면서 뒤의 “모든 것”의 의미가 더 명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앞의 “모든 것”이 “그리고” 뒤에 나오는 “모든 것”으로 보강되는 점증적 관계이다. 결국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대하여 보충하는 -즉 종속적- 관계에 있음을 보게 된다.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수님은, 우리식 표현으로, 가르치는 사역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르치는 사역이 성령의 개별적인 사역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성령이 하실 티칭 사역이 그리스도가 이미 제자들에게 하셨던 티칭 사역을 지원하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한정 지으셨다. 예수를 믿어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로 드러나는 것으로 한정되고 있다. 즉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성령이 하실 일을 당신과의 관계, 특별히 당신이 하신 사역을 지원하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한정짓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내 이름으로” 오신다고 표현하신 의미이다.

15장 26절에 내려가면 다시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러나 앞서 보았던 구절들과는 달리 여기에서는 성령을 “내가 보낼 것이다”, 즉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명시하셨다. 14장 16절과 26절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주체가 아버지, 즉 성부라고 하신 것과 종합하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되는 교리가 확증이 되는 경우이다.

예수님은 다시 “보혜사”를 “진리의 영”으로 명명하셨다. 앞서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라고 하신 바가 있다(14장 17절). 그러나 “진리의 영”이 제삼위 하나님의 고유명사 즉 이름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진리의 영”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보혜사”가 “성령”이라고 밝히신 바가 있다(14장 26절). 이제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고 “보혜사”가 “성령”이므로, 이 논리는 이제 “진리의 영”이 다른 영이 아닌 제삼위의 하나님 “성령”임을 분명하게 한다. 그래서 15장 26절에서 예수님이 다시 “보혜사”가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을 때는, 이제 그 “진리의 영”은 분명하게 제삼위 하나님 “성령”으로 이해된다. 이제 예수님은 “진리의 영”을 단순한 별명이 아니라 마치 “거룩한 영(성령)”을 대신할 수 있는 이름처럼 사용하신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영(성령)” 앞에 “진리”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데에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 그것은 26절 끝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라는 말과 연관이 있다. 사실 26절에서 주절은 바로 이 부분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다”이다. 즉 “성령”에 “진리”라는 수식어 내지 별명이 붙는 것은 그의 사역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증거하다”는 14장 26절에서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 사역을 기억나게 하는 것과 일치한다. 성령이 보혜사가 되시는 결정적인 이유가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기 때문이며, 동시에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오로지 그리스도-말씀과 사역을 포함하여-를 증거하는 일로 재차 한정된다.

보혜사 성령에 대한 설명은 26절로 마무리가 된 듯한데, 27절이 따라 나오고 있다. 사실 27절의 내용은 26절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치 사족처럼 보이는 듯한 27절이지만, 26절과 27절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고,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27절에서 “너희”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대상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다. 이 말을 우리의 정황에 적용하며, 사도들의 사명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포함된다. 예수님이 성령에 대해 설명하는 맥락 속에서 곧이 27절의 내용을 첨부하시는 데에는 “너희도 … 증언하다” 때문이다. 물론 제자들이 사도로서 증거의 사역을 하게 되는 근거로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라는 부사절이 따라 나온다.

이 문장에서 주절은 “너희가 증언하다”이다. 헬라어 원문 상에서는 쉽게 눈에 띄는 특징으로, 26절 맨 뒤에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다”라는 주절이 나오고 27절에서 바로 “너희도 증언한다”가 반복된다. “증언하다”는 동사가 두 번 연이어 사용됨으로써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과 사도들 -또는 앞으로 교회가- 할 일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는 단서이다.

한글 성경에는 “그리고”가 명시되고 있지 않다. 단지 26절의 말미가 “것이요”로 번역 되면서 “그리고”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나 두 문장 사이에 “그리고”는 매우 의도적인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를 사이에 두고 “증언하다”가 앞뒤로 대비되는데, 차이는 전자는 미래시제이고 후자는 현재시제일 뿐이다. 결국 성령이 하실 일과 사도들이 할 일(증거)이 같은 일을 하게 되는데 그 둘 사이가 어떤 순서적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서정 논의와 연관하여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26절에서 성령이 증언하는 것은 앞으로 있을 사도행전 2장 사건에 전제를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보혜사를 보내주셨다는 이제까지의 정황을 보더라도 쉽게 파악이 되는 내용이다. 막연하고 불확실한 의미에서 미래시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사도행전 2장의 구체적인 사건을 마음에 품고 말씀하신 미래시제가 된다. 반면 27절에서 제자들이, 그리고 앞으로 교회가, 할 증언의 사역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이때의 현재시제는 -종종 헬라어 현재시제의 의미가 문맥 속에서 판단되듯이- 앞의 미래시제의 의존적 관계에 있는 시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미래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있은 후의 시점을 기준으로 그 후부터 지속되는 보편적 서술의 의미로써 현재시제가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27절에서 예수님이 굳이 첨언하시는 강조는 “너희”사도들의 증거사역(현재시제)은 성령이 오셔서 증거사역(미래시제)을 하심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26절과 27절 사이의 순서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이 시간적 순서는 사도들의 증거사역이 성령의 증거사역에 의존적인 관계임을 말한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는 것은 구속사에 해당된다. 그리고 구속사적 강림사건의 결과로 성령이 하시는 증거의 일이 구원서정의 일이다. 이미 14장 26절에서 본 것처럼 성령의 증언의 일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다. 즉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구원을 적용하는 것이 성령의 구원서정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각도에서 사도(너희)들이 하게 될 증거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앞으로 사도와 교회가 담당해야 할 구원서정의 사역이다. 즉 성령이 오셔서 구원서정의 일을 하심에 따라 앞으로 사도와 교회를 통해 구원서정의 사역이 계속될 것을, 그리고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은 구속사의 일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역은 모두 구원서정의 일로써, 성령이 구원서정의 일을 하심으로 사도(교회)가 구원서정의 일을 하는 것이다. 앞서 요한복음 7장과 20장을 다루면서 구속사의 진행과 구원서정의 연관관계를 살펴 본 것처럼,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14장 이하의 문맥에서도 같은 관점이 확인되고 있다.

16장 13-15절에서도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성령이 오시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 대해 확인해 주셨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애초의 질문은 보혜사가 “누구”신가라는 관점에서 말씀이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은 “무슨”의 관점에서 성령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계시다는 점이다.

13절에서 예수님은 14장 17절과 15장 26절에서 사용하셨던 “진리의 영”이라는 표현을 또 사용하셨다. 그러면서 왜 오실 영이 진리의 영인지를 다시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계시다. 이제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는 제자들에게 확실히 간인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령은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너희를” 인도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지금 세 번째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이 성령의 적용의 사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가 그리스도인 것은 이해가 되는데 “모든 진리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잠시 의문이 생긴다. 본문이 말하는 진리는 이제까지의 문맥에서 확인되었듯이 예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진리 앞에 “모든”이란 수식어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헬라적 사고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물론 본문이 의도하는 좁은 의미에서 보면 “아니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세상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는 반드시 창조세계 안에 존재하는 것을 그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 탐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창조의 영역 안에 있지 않는 것을 그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세상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는 일반계시 안에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한다. 즉 없는 진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찾아낸 진리라고 해서 그 진리가 하나님이 모르시는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 창조 안에 두시지 않은 진리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록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찾은 진리이라도 그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일부이다. 그래서 그 지식을 구원의 효력이 있는 지식(특별계시)과 구분하여 일반계시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자들이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자신들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진리는 참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이미 창조하신 세계와 그 안에 널려 있는 진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인정할 때에만 그 진리가 참된 진리가 된다. 존재론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의 문제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에 도달할 때 그 진리가 참된 진리가 된다. 그리스도가 구원과 모든 지식에 있어서 중보자이심이 인정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창조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고 그때 그 진리가 참된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진리”를 넓은 의미로 보더라도 그 답은 “예”가 되는 것이 맞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실 때에 비로소 “모든 진리”로 접근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어서 성령이 “진리의 영”인 것을 13절 하반부에서 긍정과 부정의 방법으로써 다시 강조하셨다. 먼저 예수님은 부정의 방법을 취하였다. 이제까지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설득 방법은 모두 긍정의 방법이셨다. 여기에서 단 한 번 부정의 방법을 통해 긍정의 진술을 더욱 확고히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 부정은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이다. 이 문장은 한글로는 잘 옮겨지지 않는 접속사로 연결되면서, 앞에서 한 말을 뒷받침하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즉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 되시는 근거로 접속사 이하의 문장이 따라오는 구조이다. 이때 접속사와 함께 부정문이 오면서 부정의 방법이 앞의 문장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구조상 접속사 앞에서 부정의 부사가 옴으로써 부정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을 “말하다” 동사로 대변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스스로”로 번역되는 부사구가 “말하다”를 수식하면서,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을 “말하다”로 압축 표현하기는 하나, 부정 부사와 합하여 “스스로 말하지 않고”가 되어 그 말하는 일에 성령이 주도권을 갖지 않는다는 제한적 의미가 부각되고 있다. 다시 말해, 그 말하시는 -또는 증거하시는- 사역이 성령 자신의 주도권이나 목적과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각인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부정의 방법을 통해 성령이 하시는 일을 매우 구체적으로 한정하고 계시다.

대신 긍정의 방법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을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고 말한다. 앞서 “말하다” 동사에 대해 부정을 나타내는 부사가 있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긍정의 “말하다” 동사가 다시 쓰인다. 그러나 이때 긍정은 무한히 열려있는 긍정이 아니라, “오직 들은 것”만으로 제한되는 긍정이다. 역시 성령이 하시는 일이 자발적으로 성령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에게 들려진 것, 부여된 것, 위탁된 것만으로 한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제한적 의미에서 “오직 들은 것”을 “장래 일”이라고 보아도 좋고, “오직 들은 것”에 “장래 일”이 포함된다고 보아도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서 “장래 일”을 18장 4절의 “당할 일”과 참고하여 볼 때, “장래 일”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가 겪으실 구속사적 사역과 연관이 있는 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깊은 논의는 본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이 자리에서는 하지 않기로 한다. 중요한 것은 역시 예수님은 성령이 하실 일에 대한 긍정적 진술에 있어서도 매우 분명하게 제한적 의미를 두고 계시다는 점이다.

14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모든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령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이것은 앞서 14장 26절에서 “내 이름으로” 성령이 오신다는 의미와 같은 의미이다. “내 이름”과 “내 영광”을 종합할 때, 성령의 사역이 달리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 의미는 특별히 14-15절에서 더욱 부각된다.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4절을 다시 옮기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서 받아서 너희에게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하실 일이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부여받은 일, 결국 그리스도의 일을 할 때에 그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원하는 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것임을 강조하는 의도라고 하겠다.

15절은 14절을 보충 부연 설명하는 관계이다. 예수님은 14절에서 말한 소위 “내 것”의 의미를 다시 보강하시면서, 결국 성령이 하시는 일이 “내 일”임을 거듭 확인하신다. 14절의 “내 것”이 15절에서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로, 즉 아버지께 속한 모든 것으로 재해석 되고 있다. 여기에서 대비되는 두 개체가 발생한다. 하나는 “아버지께 있는 것”, 즉 성부에게 속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 즉 성자에게 속한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있는 것”이 “내 것”이라고 단순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 있는 것”과 “내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성부와 성자 간에 존재론적 동등성의 의미로 이해하고 지나치기가 쉽다. 물론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는 -성령도 물론-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므로 이 말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 “아버지께 있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 하기 때문에 좀 더 숙고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에 성부의 어떤 신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단 우리는 의식하고 이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신이 되는 것이 성경의 구원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내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성부로부터 부활을 통해 받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것”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내 것”이다. 신성적 또는 존재론적 의미의 “내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의미의 “내 것”, 곧 구원론적으로 우리에게 주실 “내 것”이다. 즉 인성을 입으시고 구속사역을 통해 이루신 그 것, 즉 부활 때 성부로부터 신부인 우리를 위해 받을 그 것, 그리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의 영원한 중보가 되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것”이며,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그 구원을 주시는 분이 성부이시므로 “아버지께 있는 것”이 된다.

15절 전반부(“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것이라”)는 “그러하므로”를 통해서 후반부(“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의 말씀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때 15절 후반부는 14절에서 한 말을 다시 반복-“내가 말하기를…”-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 측면에서 보면 15절은 14절이 왜 옳아야 하는지를 확인, 부연한 셈이다. 그러나 수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14절과 15절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같은 말-즉 성령은 내게로부터 전할 내용을 받아 너희에게 적용하는 사역을 할 것-을 강조하시는 효과를 거두셨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중요한 의도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완성(“내 것”) 사역이 전체가 되어 성령이 앞으로 하실 적용(“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사역이 있게 됨을 천명하는 효과를 달성할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요한복음 14-16장에 나타나는 관련된 구절들을 중심으로 예수께서 성령을 어떻게 소개 하시는지에 -그런 의미에서 성경에서 성령이 누구시냐는 질문에 대해 가장 명시적인 본문이 취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예수님은 성령이 “누구”신가의 문제를 “무엇”의 관점으로 답을 하셨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가 사역의 관점을 통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드러났다. 그리스도의 완성의 사역이 근거가 되어 성령의 적용사역이 있음을 예수님은 증명하신 것이다. 성령이 오시는 의미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구원서정 논의에 있어서 구원의 각 국면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의 의미를 통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방법론적 측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취하신 방법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성령을 이해하는 문제가 막연히 열려있는 주제일 수 있고 흔히 그런 경향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통제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사하신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고 한정적인 방법이셨다. 즉 성령이 하실 일을 일관성 있게 그리스도가 하신 구속사역을 통해 이해할 것을 당부하셨다. 구원서정을 논하는 우리의 목적을 위해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매우 중요하기에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II. 바울의 증거

그러면, 예수님이 강조하신 부분에 대해 복음서 이후의 신약이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롬 8:9-11, 고전 15:45, 고후 3:17-18, 갈 4:6, 벧전 1:11). 그 점에 있어서 아무래도 바울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가 중요하다. 바울이 만난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였다(행 9장). 그 이후 그의 메시지는 부활하시어 지금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 그가 성령을 언급할 때도 그의 관점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보다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써의 기능적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성령을 이해하였는지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는 피하려고 한다. 단지 우리의 논의 법위 안에 있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반영되고 있는지 확인하려 한다. 특별히 사도행전 2장 이후의 관점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중요한 관심사이다.

바울에 앞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미 누가의 진술은 우리가 앞서 충분히 다루었다. 그 논의에 힘입어 더욱 의미가 부각되는 구절이 사도행전 1장 8절이라고 생각된다(추가 설명: 행 1:5, 막 1:4, 8-10, 눅 3:16).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단어가 “성령”과 “증인”이다. 아직 2장의 사건을 앞에 둔 채, 누가가 기록해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통일성 하에서, 우리가 방금 전까지 다룬 요한복음 14-16장 내용과 조화를 잘 이룬다. 특별히 6-7절의 정황에서 이야기되는 궁금증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경계하셨던 것처럼, 성령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뭐든지 물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8절에서 성령이 오시는 목적을 “증인”의 일로 제한하셨다. 요한과 같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성령이 오시는 데에 제자들의 사역이 의존하는 관계이다. 특별히 그 의존의 내용이 “증인”의 사역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한의 도움을 받아 표현한다면, 성령이 오시어 “증인”의 일을 할 때, 제자들도 “증인”이 된다는 논리이다. 이 말씀을 6-7절의 정황을 고려해서 다시 음미한다면, 성령이 오신다고해서 자신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무 질문이나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사고조차도 그리스도가 하시고자 하는 일과 계획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미도 생각할 수 있다. 성령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로 한정됨을 보게 된다.

그 외에도 사도행전 5장 9절과 8장 39절,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18절에서도 “주의 영”이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히브리적 정서를 감안할 때, 다분히 구약의 “여호와의 영”을 상기시키는 표현이지만, 이 시점이 부활이후의 시점임을 기억할 때, 이 “주의 영”은 부활하신 그리드도의 영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특별히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영”은 로마서 8장 9절에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가 구약의 여호와임을 주저함 없이 표현하고 있다. 앞서의 사도행전 2장과 요엘 2장에서 보았듯이, 여호와의 영은 이제 성령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중요한 특징이다. 신약은 의식적으로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특히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된 한정적 의미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갈라디아서 4장 6저에서 “아들의 영”이 바울 서신 가운데 최초로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관하여 부르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주는 의미는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을 성부, 성자와 함께 인격의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8장 15절과 비교할 때, 두 구절은 비슷하면서도 뚜렷이 구분되는 차이를 보인다. 롬 8장 15절에서 “부르짓는”의 역할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인 반면, 갈 4장 6절에서는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로마서에서 성령이 “우리의 영과 더불어” 내조하시는 사역이 부각되는 반면,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활동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로마서만큼 정제된 신학은 아니지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령을 아들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볼 때, 5절에서 우리가 받을 “아들의 명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받는 것임이 분명하다. 바울이 자신의 최초의 서신에서 이 일을 하시는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추적 역할을 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이다. 물론 이 부분을 그 앞에 오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배제하고 이해할 수 없다. 더 크게는 15장의 문맥에서 부각되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를 통해 이해해야 될 문제이다. 그 대비는 40절 이하에 “하늘에 속한 형체”와 “땅에 속한 형체”,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과 “땅에 속한 것의 영광”, “해의 영광”과 “달의 영광”, “별과 별의 영광”, “썩을 것”과 “썩지 않을 것”, “욕된 것”과 “영광스러운 것”, “약한 것”과 “강한 것”, 그리고 “육의 몸”과 “신령한 몸”으로 열거되는 대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대비들 가운데 전자의 것들이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질서이고, 후자의 것들이 “마지막 아담”에게 속한 질서이다. 궁극적으로 바울의 강조는 후자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후자는 전자를 배제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바울의 논리는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취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즉 전자가 없는 후자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는 전자가 있음으로 성취되는 관계이다. 이것은 고대 헬라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영과 몸의 이분법적 -또는 불연속적- 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행-특히 구속사의 관점에서 볼 때-이라는 보편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44저의 “육의 몸”과 “영의 몸”의 대조에서, 전반부에서 “육의 몸”은 40절부터 진행 되어온 대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죄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44절 후반부에서 “육의 몸”과 “영의 몸”의 대조는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의 대조, 즉 죄성으로 물들기 이전의 창조된 상태로의 “육”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44절 내에서 모종의 사고의 전환이 일고 있다. 전반부까지는 현실적인 차원의 육을 생각하며 “신령한 몸”, 즉 부활한 몸을 말하다가, 후반부에서는 죄성의 육을 넘어서 창조의 몸을 부활의 몸(“영의 몸”)과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질서와 부활의 질서의 대비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45절은 44절 후반부와 대비를 이룬다는 것이 중요하다. 44절 전반부 이후 바울의 사고는 보다 보편적 틀로 전환이 이루어져 44절 후반부에서부터 창조의 몸을 생각하면서 45절에서 “육의 몸”과 “생령”을 연결을 짓고, 44절의 “영의 몸”을 45절의 “살려 주는 영”과 연결 짓고 있다. 다시 말해, 44절의 “영의 몸(부활의 몸)”과 45절의 “살려 주는 영”과는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게 된다.

44절까지 대비의 연상선상에 있는 45절에서 이루어지는 대비는 아담과 그리스도가 분명하다. 아담은 첫 번째 질서, 즉 창조의 질서를 대표하고 그리스도는 두 번째 혹은 마지막 질서, 즉 재창조의 질서를 대표한다. 아담에서 그리스도의 진행은 불연속의 이분법적 대비가 아니라 그 대비 자체가 역사적 진행이며, 특히 구속사적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종말론적 아담으로서 아담이 상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완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아담의 시대 즉 옛 시대를 마감하고 부활로써 새 시대를 연 것이다. 본문의 표현을 따른다면, 옛 시대는 “산 영”으로, 새 시대는 “살려 주는 영”으로 대비된다고 하겠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살려 주는 영”은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과의 대비를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살려 주는 영”이라고 부르는지가 우리에게 관심사가 된다. 44절과 45절의 문맥에서 “영의(도는 신령한)”와 “영”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영의(신령한)”는 인간 존재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서는 늘 성령-특별히 성령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롬 1:11, 7:14, 고전 2:13, 14, 15, 12:1, 14:1, 갈 6:1, 엡 1:3, 5:19, 골 1:9). 특별히 고린도전서 2장 13-15절이 가장 명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의 차이는 “하나님의 영”, 성령이 근거가 됨이 분명하다. 그 말은 성령의 활동 유무가 “영적으로”의 의미를 결정짓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44-45절 문맥에서도 확인되는데 44절에서 -그리고 46절에서- 보게 되는 “영적은”의 의미는 45절에서 “생명을 살리는” 활동을 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문맥에서 “생명을 살리는”활동을 하는 성령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존재론적으로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과 기능의 측면에서 동일시하는 말이다. 즉 아담으로 대변되는 창조의 사역과 대비되어, “생명을 살리는” 활동인 재창조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써 성령이 하신다는 의미에서 동일시되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은 이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활동이 그리스도가 부활을 통해 “마지막 아담”이 되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바울은 성령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역의 관점에서 성령의 사역을 제한적-또는 종속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성령과 동일시하는 가장 명시적인 구절이 고린도후서 3장 17절이다. 우선 바울은 노골적으로 “주는 영이시니”라고 했으며, 그 영을 “주의 영”이라고 불렀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앞서 다룬 고전 15장 45절을 전제로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는 것은 매우 잦은 일이다. 히브리적 정서를 감안할 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며, 이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성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동등하신 삼위일체 관점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불렀느냐에 대한 답은 3장의 문맥 속에서 나온다.

우선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영”이 성령임은 정황을 통해 분명해 진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가 “영”이라고 한 것이 요한복음 4장 24장에서 “하나님은 영”이라고 할 때와 같은 영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갖고 성령이라고 한 것이다. 우선 같은 문장에서 “주의 영”이 성령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바울이 한 문장에서 앞의 “영”과 뒤의 “영”을 의도를 갖고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앞의 “영”도 성령을 일컬음이 분명하다. 또 다른 단서는 “영” 앞에 관사가 있다는 점이다. 즉 앞서 3절 6절에서 언급했던 “그” 영, 즉 성령을 의식하면서 그리스도를 “영”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17절에서 그리스도를 성령이라고 부른 것은 3절 이하의 문맥에서 제기되는 내용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울은 3장에서 “먹으로”와 “영으로”, “돌판”과 “마음 판”, “조문”과 “영”, “죽이는 것”과 “살리는 것”, “정죄의 지분”과 “의의 직분”, “없어질 영광”과 “길이 있을 영광”, “구약(옛 언약)”과 “새 언약”, “모세”와 “그리스도”를 대비시키고 있다. 이 일련의 대비는 모세와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두 개의 질서 또는 집행으로 집약된다. 그것은 구속사적 대비이고, 언약적 대비이며, 옛 것과 새 것의 종말론적 대비이다. 이 때 1-11절까지 보면 대비 속에서 무게가 성령(영)으로 집중됨을 볼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이 옛 언약의 “영광”을 능가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더욱이 14-17절은 성령을 새 언약의 집해의 일을 하는 에이전트로서 수건을 벗기는 유효성이 그리스도에게(그리스도 안에서) 있음을 담보하는 역할을 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성령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은, 바울의 논리를 볼 때, 한 언약(새 언약)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능가하는 사역에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나인 것으로 바울을 이해하고 있다. 즉 구속사적, 언약적, 사역의 측면에서 둘은 하나의 일을 집행하고 있는 것이다. 비로소 3절에서 “그리스도의 편지”와 “하나님의 영”의 연결이 17절에 가서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성령이라고 함으로써 완성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영” 앞에 관사가 있어서 그 영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3절 이하의 문맥에서 드러나는 내용이 필수가 된다는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하면서 그리스도와 성령 간에 존재론적 구분을 혼동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다. 17절에서 말하는 동일시는 기능적 또는 사역적 의미이다. “새 언약”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 됨을 바울은 하나라고 -즉, 주는 영이라고- 부른 것이다. 또한 18절에서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한다고 할 때, “주”와 “영”이 이 변화의 사역에 함께 관여함을 보이고 있다. 즉 한 구속 사역에 그리스도와 성령이 관여하되 성령의 활동은 “그리스도 안(14, 16저)”이라는 단서를 전제함으로써 그 활동의 유효성이 성립되는 관계에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이 본문 속에서 모세와 그리스도의 대비,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비를 통해 그리스도와 성령이 한 구속의 사역에 종사하되 성령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일이 그리스도의 일-즉 새 언약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시간적 순서로 가장 나중에 쓰인 로마서 8장 9-11절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전제하고 본문을 이해하려 한다. 바울은 8장 1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의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결과적으로 본문에서 몇 가지의 표현을 상호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 등의 표현이다. 언뜻 보기에는 1-11절에서 “육”과 “영”의 대비가 바울의 논지를 움직이는 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논지-1절에서 말했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삶이 다른 점-의 무게가 11절 끝의 “몸”에 실리고 있다. 특별히 이 “몸”은 “죽을 몸”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이 바울에게는 “육”을 지니고 있는 신자의 현재의 모습이 10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이다. 그 “너희”의 상태에 대해서 바울은 그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몸”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신자의 현재의 모습이 “육”과 “영”의 긴장 구도를 통해 이해되고 있다. 이에 비해 달라지는 것이 바울이 11절에서 소망하는 신자의 미래의 모습이다. 바울은 한마디로, “너희 죽을 몸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의 논지는, “몸”의 관점에서, 현재의 모습에서 미래의 모습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때 바울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현재의 모습(10절)에서 미래의 모습(11절)으로 완성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하나로 보는 데에 근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바울은 10절의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나 9, 11절의 “너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결국 하나라는 전제를 갖고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라는 관점은 11절에서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실” 성령이 9절의 “하나님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신자의 미래 모습을 성령이 하시는 사역으로 보면서 그 영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즉 “하나님의 영”으로 보고 있다. 그 영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킬 때 사용하였던 영이며 이제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 동일시되고 있다. 현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란 곧 “하나님의 영” 즉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거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이 마찬가지로 미래적 차원에서 “너희 죽을 몸”을 살리신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구원을 현재와 미래적 의미에서, 또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에서 하나의 구원을 완성 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기능적, 도구적 측면에서 볼 때, 성령이 신자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의 성격을 결정짓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 된다.

앞 본문들을 통해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로마서 8장 9-11절에서도 성령을 존재론적 측면이 아닌 기능적 또는 사역적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연결을 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바울이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이라는 구속사적 사건들이 전제가 되어,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성을 적용하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III. 요약 및 결론

본 장에서 우리는 구속사와 구원성정의 밀접한 관계를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를 통해서 조명해 보았다. 우선은 예수께서 직접 설명하신 본문을 근거로, 다음은 바울이 갖고 있었던 이해를 통해서 사역적 또는 기능적 측면에서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해해야 하는 제한적 의미가 강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이 논의는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먼저는 완성된 구원을 적용하는 구원성정의 일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고 성령이 하시는 이 적용의 사역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이해이다.

구원서정 논의의 방법론을 찾고 있는 우리에게 본 장의 논의는 이제 우리가 찾고자 하는 방법론에 훨씬 더 가깝게 다가가게 했다는 생각이다. 이제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원(완성)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신다(적용)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통해서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지 마지막 연결고리를 찾으면 된다. 그것이 다음 장에서 논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