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스마트한 세상이다!
오늘날처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세계에서 ‘혼란은 기회’라는 말은 큰 의미를 갖는다. 변화는 비즈니스의 본질이며 필수 조건이다. 피터 드러커는 지극히 평화로운 1980년대에 이미 ‘혼란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고 설파했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에 이른 지금, 비즈니스는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심오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 기회가 널려 있다.
하지만 언제나 가장 스마트한 경쟁자에게만 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어떤 종목에서 경쟁하든 다른 경쟁자들을 압도할 정도로 아웃스마트해야 살아남는다. 적당히 해서는 스마트한 세상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스마트기기들을 통한 우리 삶의 변화도 대단하다. 스마트 폰의 사용으로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는 33.6%, 신문 읽기는 40.2%, 독서는 41.5% 가 감소했다고 한다.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 편리함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만은 아닐거다.
스마트(smart)란? ‘똑똑한’, ‘영리한’이란 뜻으로 지능화된 또는 지능형(intelligent)이라는 용어와 같은 의미이며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에 관하여 말할 때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특히 지금까지는 기대할 수 없었던 정도의 정보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마트의 의미는 '단정한', '빈틈 없는', '세련된' 등. 상류사회를 지칭하기도 한다. 스마트(smart)의 사전적 의미는 ‘영리한’, ‘민첩한’ 등이다. 즉 위기에 대응하는 적합한 방법이 스마트의 의미에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현재의 위기 극복의 해법을 스마트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교육인가?
소크라테스의 어머니는 산파였다. 어린 시절 그가 물었다.
“왜, 엄마는 남의 집에서 아기를 만들어 오세요.”
“아기를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엄마 뱃속에서 아기가 나오려고 할 때 도와주는 것 뿐이란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청년기까지는 석공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아테네에서 새로운 신전건축에도 직접 참여하며 석공의 일도 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처럼 그것을 직업으로 이어가진 않았다. 사고와 사색을 위해 석공의 길을 가지 않기를 결심하였다.
어느날 그는 아버지에게 석공 일을 배우며 멋진 사자상을 조각해내는 아버지에게 어떤 방법으로 조각을 해나가야 하는지 물었다.
“먼저 바로 그 돌 속에서 사자를 보아야만 한단다. 마치 돌의 표면 뒤에 사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 처럼 말이야. 그 다음엔 사자를 풀어 놓아 주어야 한단다. 네가 그 사자를 보면 잘 볼수록 어디를 더 깊이 쪼아야 하는지를 그만큼 잘 알게 되는 거지.”
그는 질문과 질문을 통해 떠오르는 것들을 관념으로 풀려 나올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이런 대화방식을 산파술이라고 한다. 아마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모습이 아닐까?
학자들은 교육개념을 간단하고 쉽게 드러내기 위하여 은유를 사용한다. 쉐프러(Isral Scheffler)는 교육에 관한 은유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로, 주형(shaping or molding)이다. ‘주형은유’는 무엇보다도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교육과정에서 교사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학습자는 그 무엇으로 만들어져 가는 재료와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학습자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한 반면에 교사는 이미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학습자들에게 ‘주입’함으로써 지도하고 이끌어 가는 존재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으로 학습자를 형성하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주형은유에서의 교육대상은 마치 진흙과 같은 수동적 또는 피동적 존재이고 교사는 자기가 정해놓은 목표대로 학습자를 인각해 가는 능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학습자의 최종적인 모습은 교사의 선택에 달려있다. 학습자는 독자적으로 자신을 형성해 갈 수 없다는 면에서 ‘주형은유’는 각 개체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성장은유’와는 대조적이다. 학습자 자체는 최종적인 결과나 진행상의 어떤 과정을 수용하고나 거부하지 못한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전적으로 주형을 하는 교사에게 달려있다.
둘째로, 성장(growth)이다.
근대 자연주의 철학이 발견한 어린이의 개념이 성장은유의 발생에 영향을 미쳤다. 어린이라는 개념의 발견은 중세의 전통적이고 권위주의적 교육으로부터 아동의 자발성, 내적인 성숙을 중시하는 아동중심적인 교육 곧 근대교육으로 선회하게 하였다. 그 결과로 교육의 은유에 있어서 전통적인 주형개념에서 성장개념으로 바뀌었다. 루소시대 이전까지는 어린이를 단순히 성인의 축소형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아동관의 변화는 교육이란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의 내부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임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의 어원적인 근원은 라틴어 ‘educere'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교육을 ‘성장’으로 은유할 때는 교육이란 학습자 내부의 ‘잠재적 능력’이 밖으로 발산될 수 있도록 주변의 환경을 만들어주고 장애물을 제거해주는 것으로 정의한다. ‘성장은유’는 이렇게 아동의 ‘잠재적 능력’과 ‘심리적 발달단계’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교육이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공헌하였다.
세 번째는 예술(art)이다.
이 은유는 ‘주형은유’에서는 학습자를 수동적인 모습으로, 교사를 지나치게 주도적인 모습으로 부각하는 데 반하여, ‘성장은유’에서는 학습자의 자발성을 강조한 결과 교사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소평가 되었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아울러 주형과 성장은유 모두에서 교사와 학습자의 ‘상호작용’이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즉,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는 주형은유나 성장은유 모두에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교사와 학습자의 관계는 예술가와 재료 사이의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가는 재료의 성질을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재료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다룰 때 그 성질을 고려한다.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재료와 ‘겨루고’있는 것이다. 돌과 나무를 다룰 때는 그것들이가지고 있는 각각의 특성들을 고려해야한다. 이러한 과정을 생각하면 교육 역시도 ‘예술’로 은유될 수 있다.
스마트한 교사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학생이 새로운 세상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 옆에서 도움을 주어서 자신을 딛고 일어서는 ‘영적 거인’을 만드는 것이 우리 교사의 할 일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필요한 교사의 모습은 무엇일까?
스마트한 교사가 되는 것이다.
S specific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M marvelous 감탄이 있는 관계 형성
A amusement 즐거운 가르침
R result-oriented 확실한 결과지향
T trans-formal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삶의 변화까지
먼저 교사는 학생 개개인에게 관심을 갖고 그에게 맞는 교육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출석부에서 계산되는 숫자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불리우는 학생인 것이다. 김춘수의 ‘꽃’에서처럼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아니라 의미있는 만남의 관계이어야 한다.
교육은 ‘치료’와 같아야 한다. 개개인의 병의 증세가 다른 것처럼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다르므로 개별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는 전문적인 치료자인 의사이고 학생은 치료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대상인 학생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고 개인차를 지닌 존재로 생각해야 한다.
둘째, 감격하게 하는 만남이 되도록 해야 한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려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머리가 설득이 되고 가슴으로 감동이 되어야 한다.
지식으로 감탄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가르치는 학습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 이를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 교사는 학생의 관심을 유발시키되 학습 내용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내야 한다. 관심을 끌었으나 그 관심이 학습내용과 무관하다면 그는 실패한 것이다. 교사는 자신이 이해한 바를 잘 정리하여 학생에게 전달하는데 그 학생의 머리에 호소한다. 실지로 새로운 것을 깨닫는 것은 큰 기쁨이다. 따라서 학생은 가르치는 교사를 좋아하며 배우는 일을 즐거워한다.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을 만나는 교사는 행복하다.
뿐만 아니라 공과교수의 현장이나 교회생활에서 그리고 교회 밖에서의 만남에서 사랑의 모습으로 함께 해야 한다. 학생에게 관심을 갖고 많은 이야기와 만남을 통해서 이해를 넓혀가며, 이를 통해 존중하고 인정하는 모습 속에서 학생은 감동을 하게 된다. 나아가 세심한 배려를 보여주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선물을 통해서 감격하게 된다. 사랑으로 녹이는 일이 때로는 가르치는 것보다 우선이며 계속되는 진행형이여야 한다.
셋째, 즐겁게 가르쳐야 한다.
‘재미없는 주제는 없다. 다만 재미없어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듀엔 리트핀). 진리는 늘 새롭고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비함 뿐만 아니라 생명력이 있다. 따라서 교수와 학습은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재미가 없다면 전하는 사람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내 스타일 누구의 책임인가? 바로 나 자신의 책임이다. ‘프로들은 날마다 기초를 잘 다진다’(빈스 톰바르디). 우리 교회교육 현장에서 가장 슬픈 일은 우리 교사들이 아마추어처럼 한다는 것이다. 프로는 지금의 우리 처럼 구태의연하여 늘 실패하거나 또 실수를 두 번 이상 반목하거나 하지를 않는다. 재미있는 수업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도록 계획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스타일은 예측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구태의연해서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모세를 만나신 하나님은 과히 충격적이다. 제자들을 먼저 보내시고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놀랐다. 그 체험이 그들에게 어떤 결과를 주었는가? 죽도록 충성하게 만들었다. “남을 놀라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정복하고 만다”(존 폴 죤스). “유머는 열정이나 결단, 매서운 언변도 부수지 못하는 장벽을 부수는 능력을 갖고 있다”(제임스 W. 로빈슨). 함께 웃는 학생들은 함께 배운다.
넷째, 결과를 기대하고 가르쳐야 한다. 문장으로 표현된 구체적인 교육목표를 가지고 집중할 때 학생에게 교사는 의미있는 존재이며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교육은 ‘판매’와 같다. 학습이 발생하지 않은 활동은 교육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는 일이 없으면 아무리 대단한 노력을 기월였다고 해도 판매라는 것도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곧 교사의 활동이나 교수활동 그 자체의 본질보다는 학습의 결과를 강조하는 것이다.
교사는 당신이 맡고 있는 학생들 안에 어떤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지식을 알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태도의 변화인가 목표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네(Robert M. Gagne)는 학습의 결과를 언어정보(verbal information), 지적기술(intellectual skills), 인지전략(cognitive strategies), 태도(attitude), 운동기능(motor skills)으로 나눈다. 다시 정리하면 지식 획득( 학생이 학습한 것을 명제형태로 진술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는 일), 문제해결 능력(단순히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문제를 직면할 때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 문제 발견(문제해결을 위해 학습자가 이전에 습득한 법칙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고방식을 적용해가면서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것), 태도 변화(태도란 어떤 유형의 사물, 사람 또는 사태에 대한 개인의 행위에 영향을 주는 습득된 내적 상태를 말하는데 학습을 통해 변화한다), 실행(습득된 정보가 선택적인 지각을 통해 단기기억과 장기저장을 통해 필요한 상황에서 인출되어 근육과 신체를 통해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이며 교사는 이러한 항목들에 맞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일을 해야 한다.
다섯째, 삶을 변화시킬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며,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어 그 성품이 인생을 변하게 한다고 한다.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는 예수님의 명령처럼 끝까지 책임지고 가르치는 교사가 참된 교사이다.
변혁(Transformation)에 대해 로더(James E. Loder)는 삶의 체계가 고차원적인 체제로 변화하는 것으로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이며 회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재양식 삶의 태도 가치 체계의 새로운 변화이며 확신있는 경험이다.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성공의 열쇠이다. 보통의 교사들은 성공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과 정보들을 전달하는 것 이상으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학생들이 배워 알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가르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교회학교 교사에게 있어서는 한 가지가 더 첨가되어야 하는 바 그것은 “학생이 배워 알고 그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르친 것이 아니다.”이다.
골 1:9, 10절에서 바울은 이 점을 명확히 일러주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처음에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시작하여(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더 나아가 그 지식의 유용성과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으로 발전하여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그 모든 것을 실천하게 하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마지막에는 헌신으로 결실을 얻게 한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위에 열거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지 않은 가르침은 불충분한 가르침이다.
스마트폰을 켜고 편리함을 누릴 때 마다 질문해 본다. 나는 스마트한 교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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