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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사 시험공부 정리

예림의집 2013. 4. 8. 15:29

 

초대교회사 시험공부

 

1. 신약시대 팔레스타인의 4대 당파

*바리새파 : 마카비 독립전쟁 이후에 일어난 하시디안으로 경건주의적 특징을 띠고 있었으며, 약 6,000명 정도의 세를 발휘하고 있었다. 구별된 자들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율법준수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불경건한 자들을 경멸하였다.

*사두개파 : 정치적이었으며, 귀족적이었다. 주로 제사장의 신분으로 계급층에 속하여 있었으며, 매우 현실적이었으며, 자유주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 특징이다. 로마의 통치를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였다. 산헤드린 의회를 장악하였다.

*열심당 : 세롯당 이라고도 하며, 행동적 독립결사단체로 무장 봉기를 통해 조국을 해방시키려 하였다. 그들은 마카비의 영광스런 시대를 희구하였다. 갈릴리 언덕 등에서 은신 생활을 하며 게릴라전으로 로마 행정가들이나 세금 물품들을 습격하였다.

*엣세네파 : B.C. 150년경부터 약 4,000명 정도의 규모로 공동체 생활을 해왔다. 사해 근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금욕적으로 가장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고자 하는 종파였다. 결혼을 금지하고, 공동 식사를 하고, 안식일을 엄수하는 등 수도원적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바리새파보다도 더욱 엄격한 분리주의자였다. 쿰란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종말론적인 사상이 강하였다. 이들이 쿰란의 사해사본을 남겼다. 정치나 전쟁에 전형 간심이 없었다.

 

2.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과 결과 및 그 영향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 : 로마관리들의 지나친 탐욕으로부터 기인한 악정, 대제사장들이 사리사욕으로 눈이 어두워져 드러낸 부패, 감람산에서 4,000여명의 폭도집회를 통해 백성들이 보인 강포, 유대인들의 반란이 그것이다. 이로 인해 가이사랴에서 유대인 2만여 명이 살육 당하는 비참함을 맛보게 된다. 수리아 총독 갈루스가 3만여 명의 군사로 예루살렘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후 70년 4월에 디도가 출정하여 성을 포위하였지만 외부와 교류가 되지 않아 식량 결핍으로 고난당하게 된다.

*결과 : 70년 9월 8일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 당하고, 성이 파괴되고 성전 방화가 일어났으며, 사망자 110만 명, 포로 9만 7천 명이라는 아픔을 겪게 된다.

*영향 : 이와 같은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독교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유대교의 총 본산이 함락됨으로써 기독교가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각지로 흩어져 전도할 수 있는 판도가 확대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정경형성이 촉진되었으며, 기독교 조직 운동이 촉진되게 된다.

 

3. 로마 기독교 박해의 원인

*로마의 종교 정책 : 로마의 종교는 공포심을 없애기 위한 예배와 의식이었다. 종교를 갖지 않은 로마인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신이 로마 제국을 보호한다고 믿었다. 원로원은 로마시민은 조상 때부터 섬겨오던 신만 섬기게 하였다. 황제숭배의 시작은 쥴리어스 시저를 원로원에서 신으로 숭배하면서 부터이다. 황제숭배는 모든 문화의 핵심이 되었고, 강요되었다. 로마의 기본 종교정책을 일단 황제숭배를 인정하면 모든 종교에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와 기독교는 로마와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박해의 직접적인 원인 : 로마인들은 기독교를 원로원에서 승인하지 않은 불법 종교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의 발란을 무서워하여 기독교의 단합됨을 두려워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식인해위와 근친상간을 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이는 성찬과 비밀집회를 하는 것이 오해를 산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군복무를 거부하였다. 이는 국가 안보에 대한 근심을 주었다. 제일 큰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만을 숭배하는 것을 일종의 정치적 도전으로 해석되었다.

 

4. 로마의 10대 박해

①Nero(네로) : 64년 6얼 18일 로마시의 대화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평민들의 인심이 극악에 달해지자 네로는 자신의 정치적 안전을 위해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비목하고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인류를 증오했다”는 죄목으로 박해와 처형을 일삼았다. 바울과 베드로가 이 때 순교하였다.

②Domitian(도미티안 81-96) : 도미티안 황제는 성장기의 상처로 심한 열등의식이 있어서 자신이 “주님, 하나님”으로 불려지고 신으로 인정박도 싶어 했다. 그는 15년간 통치하면서 기독교를 기혹하게 박해하였다. 기독교인들이 그들만의 국가를 꿈꾼다는 이유를 들어 재산을 몰수하고, 살해하였다. 이 때 로마의 클레멘트가 순교하고 사도 요한이 밤모섬으로 유배되었다.

③Trajan(트라얀 97-117) : 트라얀 황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에 다음과 같은 원칙을 칙령으로 정하였다. 첫째, 수색하여 기독교인 찾지 말 것. 둘째, 기소되어 유죄 판결시만 처벌할 것. 셋째, 신앙을 부인하고 로마 신을 찬양하면 석방할 것 등이었다. 이 칙령으로 인해 혹독한 박해는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나 지속적인 박해는 계속 되었다. 이그나티우스가 이 때 순교하였다.

④Hadrian(하드리안 117-138) : 하드리안은 125년경 아시아의 총독 미누시우스 푼다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정당한 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 하드라인의 칙령은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근거 없는 모함을 받는 것을 보호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국경일날 모든 시민이 로마 신에게 예배할 것을 강조하였다.

⑤Marcus Aurelius(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 :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죽일 때 각종 고문과 잔악한 악행을 사용하였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이 때 저스틴 마틴과 폴리갑이 순교하였다.

⑥Septimius Serverus (셉티무스 세베루스 191-211) : 그는 태양신 제사장 딸 돔나와 혼인 후 기독교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국가신상에 절을 하도록 시킴으로써 적극적인 신자들을 색출하였다. 입교를 금지하였으며, 포악무도하였다. 이로 인해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의 부친인 레오니다스가 순교하게 된다.

⑦Maximinus(막시미우스 235-238) : 기독교 성직자를 처단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황제가 암살한 전임 황제를 지지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이때 지진사고가 있었다. 이에 교회지도자들을 무고히 핍박했다. 이로 인해 폰티아누스, 히폴리투스가 금광에 노예로 붙잡혀가 유배지에서 순교하였다.

⑧Decius(데키우스 249-251) : 기독교인 때문에 이민족 침입했다고 기독교인들은 몰아붙였다. 국력이 쇠약해 진다는 이유로 기독교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악형에 처했다. 제국 내 하나의 종교로 통일원칙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박해하였다. 황제에게 제사할 것을 강요하였고 제사증을 발급하였다. 오리겐이 중형에 처해졌고, 키프리아누스는 도피하게 되고, 파피아누스와 예루살렘의 알렉산더가 순교하였다.

⑨Valerianus (발레리아누스 253-259) : 그는 초기에는 기독교에 동정적이 엇으나 후에 박해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공민권(公民權)을 박탈하였다. 질병과 흉년이 기독교인 때문에 신이 노한 것이라고 하며 기독교인을 박해했다. 기독교인의 공적 모임을 금지시켰다. 이때 오리겐은 중병으로 죽었고, 키프리안이 순교하게 된다.

⑩Diocletian(디오클레티안 284-305) : 그는 기독교 조직이 제국 조직보다 강함을 느끼고 박해를 하였다. 가장 혹독한 박해로서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서는 불태워졌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재산과 시민권은 박탈위기에 처했으며 로마신들에 대한 숭배가 강요되었다. 그는 데키우스의 반기독교칙령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반포하고, 심한 경우에는 기독교인을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이때에 마우리티우스와 알바누스가 순교를 당했다.

 

5. 교부들 정리

*폴리갑(A.D 69~160) : 폴리갑은 AD 70년에 태어나서 젊은 나이에 감독직에 올라 사도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로, 사도 시대의 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전승하여 가르쳤다. 그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서머나 교회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므로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155년 화형으로 순교당한 속사도 교부이다.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놓아주겠다는 재판관의 회유를 단칼에 거절하고 순교하였다. 그는 사랑의 감독자였으나, 당시 ‘마르키온’을 향해 ‘사단의 맏아들’이라고 할 정도로 이단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단호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빌립보의 서신’이 있다.

*순교자 저스틴(A.D. 100-165) : 2세기에 출현한 변증가로서, 터툴리안에 의해서 가장 탁월한 변증가로 불리워지게 된 사람은 철학자이며 순교자인 저스틴이었다. 그는 젊어서 여행을 많이 했으며, 당대에 유행하던 온갖 종류의 철학 등을 열성적으로 섭렵하면서 스토아주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 피타고라스주의, 플라톤주의를 차례로 섭렵하였다. AD 15년 그가 32살이 되는 해, 어느 날 해변을 걷다가 그리스도인인 어떤 노인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깨달음을 얻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저스틴은 165년에 두 번째로 로마 체류 기간 동안에 다른 6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루스타구스의 재판정에 끌려가서 태형과 참수형을 선고받고, 목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하였다.

*이레니우스(A.D.140~203) : 소년 시절 사도적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이며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레니우스는 순교자 저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터툴리안이 세운 서방교회 신학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레니우스는 이단 사상을 논박하고 사도적 기독교를 설명하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이단 논박을 위해 <영지주의자에 대한 고발과 논박>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레니우스는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구약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경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레니우스는 사도들의 기록(신약성경)과 전해 내려오는 사도들의 가르침(전통)중요시 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AD.250-215) : 헬라철학자였던 클레멘스는 개종 후 최초의 기독교 학자가 되었다. 그는 헬라 철학과 고전 문학 등을 포함한 당대의 학문들에 전통하였다. 그는 철학자처럼 생활하고 가르쳤으며, 그 시대의 영지주의자들의 형식과 언어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헬라 지성의 세계를 위한 사도였다. 그는 철학을 기독교를 위항 예비의 단계로 보았고, 하나님께서는 합리적 피조물들 속에 진리의 선한 씨앗을 심어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로 인하여 기독교 교리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이교도들에의 권면, 교사, 잡록 등이 있다.

*오리겐(Origenes, A.D.185-254) : 오리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 최대의 신학자요, 동방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원래 기독교 가정 출신인 오리겐은 클레멘스의 제자로 18세에 학당 지도의 책임을 맡았다. 인간들의 본능적인 지식에의 갈구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며 무지야말로 경건에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았다. 오리겐은 철학은 단지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을 형성해 나가는 통로라고 하였다. 그는 풍유적(알레고리) 해석의 원조이다. 그는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위해 성경을 구해냄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토대를 보호하였다. 그는 조직 신학의 분야의 개척자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사고의 범위는 우주적이어서 사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언젠가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할 때가 올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로 인해 한 때 그는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닛사의 그레고리가 있다. 그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 인해 254년 두로에서 순교하였다.

*터툴리안(A.D.160~220) : 터툴리안은 개종한 후로 정통이건 이단이건 간에 기독교서적을 연구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얼마 후 카르타고에 돌아가 장로가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처음에는 로마교회와 친분이 있었으나, 후에는 그의 타고난 청교도주의를 강화하고 몬타니우스파에 동조하게 되었다. 터툴리안은 그의 사상 속에 헬라기독교, 라틴 특유의 전통주의, 그리고 금욕주의 등의 세 가지 사조를 띤다. 회심한 후 초기에는 헬라변증가들을 따라 로고스신학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일련의 이단들을 논박하면서 라틴특유의 법적인 라틴신학을 정립하였고, 말년에 몬타누스에 가담한 후에는 금욕주의적인 경향을 띄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사도적 계승 이론, 영혼의 기원설, 원죄설 등과 삼위일체나 기독론의 형식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발전에 기여했으며 기독교사상의 발전에 심오한 흔적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다.

 

6. 기독교 이단

*에비온파 : ‘가난한 자’라는 뜻으로, 데시우스 황제 박해시에 사막으로 피신하여, 편지로 교회를 지도하였다. 무려 81통의 편지나 쓰여졌다고 한다. 저서로는 251년 “교회의 일치”가 있으며, 여기서 노바티안파의 분열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258년 바렐리아누스의 박해 시 순교하게 된다. 이들의 신학의 특징은 바울교리를 배척하고 율법을 고수했다는 점이다. 특히 마태복음만을 사용한 점이 특이하다. 할례 시행, 안식일 준수, 금식, 율법의 문자적 해석, 동정녀 탄생 부인, 그리스도의 인성만 주장, 수세 시 직분 받는 것을 거부, 예수가 원래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후에 그의 아들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영지주의(그노시스파) : 플라톤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동방의 신비주의, 기독교가 혼합된 혼합종교이다. 두드러진 특징은 ‘이원론’이다. 세계는 물질계와 영계로 되어있으며, 물질계는 악하며 조물주가 다스리고, 영계는 선하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의 탄생을 말할 때 가현설을 주장한다. 즉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 탄생은 부인한 채 단지 육체를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최고 존재인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하급 아이온에 의해 만들어 진 것으로 보는 유출설을 견지한다. 유대교는 사탄의 종교라고 할 정도로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을 다분히 띄고 있다. 구원론은 영지주의인데,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통하여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금욕주의적인 특징을 보이며, 구약을 부인하고, 알레고리 해석이 지나친 면이 있다.

 

*마르키온파 : 마르키온이 144년에 로마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와서 새로운 종교 운동을 시작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들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 물질을 죄악시했으며, 금욕주의적이었으며, 구약을 부인하는 점을 볼 수 있다. 오직 사도 바울 만을 존경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이신득의, 철학과 율법의 배격, 복음만 주장하고 반유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과 구약 대립시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다르게 보았다. 그들은 10개의 바울서신과 일부 누가복음만을 정경으로 채택하였다. 이는 정경론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교리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매우 강조한다. 예수의 성육신 및 육체적 죽음을 의심하고, 영적인 구원만을 강조한다.

*몬타누스파 : 156년에 몬타누스에 의하여 브루기아 지방에서 발생하여 후에 로마와 북아프리카에 널리 성행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성령으로 여기고, 성령의 체험적 은사를 강조하였다. 성서는 전부가 정경이라고 하는 구교와 일치하는 정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그들의 목적인 원시 기독교의 부흥을 부르짖으면서, 예언과 방언을 고조시키고, 특히 그노시스주의와 같은 신앙보다는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반대하고, 엄격한 규율을 실시하였으며, 천년왕국설을 주장하였다. 교회의 계급제도를 반대하며 ‘만인제사주의’를 주장하였다. 금욕주의, 금식, 고행 등을 장려했으며, 재혼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세례 후 범죄는 무서운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금욕적이며 천년왕국을 고대하였고 정통 기독교 교리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나 그들 자신을 성령의 대변자로 간주하며 예언자적인 계시를 믿고 방언을 하며 신자들의 만인사제직을 주장하였고 어떤 유의 오락 및 여흥도 생활 속에서 배격했었으며 오로지 순교자의 길을 추구하였다.

*노바티안 : 데시우스 황제(249-251)의 제위기간에 가해진 박해 속에서 변절한 자들을 신앙권 안으로 재 영입시키고자 하는 관용론자들이 감독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으로부터 발단된다. 이에 과벌론자였던 노바티안은 불만을 품고 새로운 분파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노바티안에 의하면, 변절자는 다시 교회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죄 중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는데, 살인, 우상숭배, 배교, 칠 계명 위반이 그것이다. 한편 가톨릭 교인이 자기들 교회에 가입하고자 할 때는 재세례를 베풀므로 받아들였다. 노바티안은 키프리안의 강력한 비판을 받게 된다.

*아리우스파 :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로는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내세운 기본 전제는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유일성이었다. 반면에 성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신성은 유일한 것이어서 나누거나 전가할 수 없으며 신성은 불변하기 때문에 복음서에 나타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성자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성자는 유한하고 존재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성부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성자를 반신으로 전락시켰고 성자에 대한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다신론을 다시 도입했으며, 참된 하나님인 성자만이 사람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속 개념을 훼손했다. 이런 그의 주장은 아타나시우스의 대 아리우스 논쟁을 낳았다.

 

7. 콘스탄틴 대제(A.D. 274. 2. 27-337. 5. 22)

*콘스탄틴 대제는 288년에 나이사스에서 서로마의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사망 후 황제 입후보자 6명이 경선하자 막센티우스와 싸워서 이겨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312년에 바로 이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시 로마 근교에서 전쟁할 때, 태양 위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기라’는 글자를 모든 병사들이 보게 된다. 그날 밤에 예수님이 나타나 십자가를 보여 ‘이것으로 기장을 삼으라’함으로 그대로 하여 승리를 거두는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동기가 되어 신자가 되었으며, 그는 항상 죄인이라고 생각하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세례를 받게 된다.

*업적

①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다. 밀라노에서 동방 황제와 함께 기독교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정지할 것을 합의하고 기독교 자유칙령을 선포하게 된다.

②또한 기독교 보호를 한다. 이단을 멸하고 교회의 통일을 도모하였다. 유세비우스를 궁중에 모시고 우대하였다. 본인이 기독교 보호자 및 교회의 외부적 감독으로 자처하고 공중에서 기독교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③325년에는 교리논쟁 해결과 교회 통일을 위해 니케아 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④기독교를 위해 법률 제정을 하였다. 십자가형, 검투, 죄인 이마에 황인, 축첩제도 등을 금지하고, 여자에게 토지소유권인정 등 고래풍속을 개량하였다. 또한 교회의 법률을 국가가 공인하였다. 교인간의 투쟁에 대한 교직자의 판결은 법률상 유효하였다. 대회의 결의는 국가의 법률이 되었고, 교회의 법률에 대한 불가침하였으며, 사죄 및 감형 요구권이 교직자에게 부여되었다. 법정과 군대 등이 주일에 휴무, 교직자는 세금, 병역의 의무가 면제, 박해 시 몰수 재산 반환 등 기독교를 위한 특별 법률도 재정되었다.

⑤콘스탄티노플로 천하였다. 이는 야만인과 페르샤인을 제어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길 목적도 있었으며, 통합 로마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고, 이후 새로운 기독교 수도가 형성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⑥기타 우상숭배를 금지하였으며, 이교전당을 몰수하여 교회에 주고, 관직은 기독교 신자여야만 부여하였다.

*교회에 미친 영향

①긍정적 영향

300년간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이제는 다른 종교를 박해하는 위치로 변하였다. 황제가 교회에 많은 지원하였고, 감독들은 세속적 부와 함께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교회 규칙이 제국의 법률화가 되었다. 주일이 제정되어 모든 노동에서의 휴식을 갖게 되었다. 성직자에게 토지면세, 병역면제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때론 감독이 법정 법관의 일도 하게 되었다. 시내사본, 바티칸 사본 등이 만들어졌으며 많은 교회당이 건축되었다.

②부정적 영향

제국의 관리, 관료들이 명목상 성도가 되고, 국민 다수가 수세 받게 됨으로 세속적인 무리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그러나 이교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그대로 따랐고 아직 교회는 이들을 수용할 태세가 준비 안 되어 교회가 이교화 되어 버렸다.

 

8. 니케아 회의(325)와 기독론 논쟁

*325년에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소집되게 된 동기는 첫째 부활절을 지키는 날짜를 언제로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함이었고, 둘째 아리우스에 의하여 일어난 신학논쟁 때문에 교회의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립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신학논쟁이 첨예화되어 나타났다. 아리우스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본질이 유사할 뿐이며, 그리스도는 무로부터 창조된 피조물이이기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며 신성을 부인하였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질이며,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완전한 인간임을 인정한다. 즉 삼위일체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였다.

니케아 회의의 결의를 통해서 니케아 신조를 제정하여 그리스도의 양성론을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아리우스파와 기타 이단들이 정죄되어 추방되게 된다. 또 한 가지는 이 회의에서 ‘부활절’을 제정했다는 점이다. 매년 ‘춘분 후 만월이 지난 첫 주일’에 부활절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기독론 논쟁

기독론과 관련하여 500년이 넘는 기간(325-879) 동안 논쟁이 지속되어 왔다. 이것을 통해서 기독론이 더욱 분명해 지는 계기가 되었다.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타나시우스와의 기독론 논쟁을 통해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처벌하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립’하게 된다.

38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소집한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는 인성제한설을 주장하는 아폴리우스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제한을 기각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질임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확립’ 되었다.

431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에베소회의’에서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인정하나 양성의 분리를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가 항의하였으며, 결국 회의는 네스토리우스의 출교를 결정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1인격 통일’로 결론지어졌다.

449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한 ‘에베소 도적회의’에서는 단성론을 주장하던 유디케스가 도마에 올랐다. 안디옥파는 수령을 쫓아내고 유디케스를 다시 복직시킨다. 이리하여 강압적으로 단성론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곧 451년에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칼케톤회의’를 소집하여 단성론을 주장하는 유디케스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칼케톤 신조를 작성함과 동시에 ‘일인격 양성론’을 확립한다.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예수는 완전한 신이요 완전한 인간이다. 예수의 신성은 성부와 같고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는 없으시다. 예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

553년에 유스티니안의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유디케스에 대하여 칼케톤 신조를 재차 확인함으로써 그들을 이단으로 결론지었다. 특히 이 회의는 칼케톤 신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정통교리를 삼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9. 수도원 창설의 원인과 결과

*원인 : 첫째, 기독교의 세속화 현상에 대한 반작용과 둘째, 금욕과 경건과 극기 생활을 위한 동기와 셋째, 개인의 신앙 활을 위함이며, 넷째 이원론 사상의 영향으로 물질 없이 만족을 얻기 위한 바램이 그것이다.

*대표적 인물들

최초의 수도원 운동가인 안토니 : 이집트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조실부모하고 누이와 같이 살게 된다. 그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말씀에 감동받아 유산으로 구제하고 금욕 생활을 위해 암굴로 들어갔다. 아리우스 학대에 반대하여 정통주의를 변호하였다. 그리고 은둔적 생활을 원함에 따라 은둔적 수도생활이 생겨나게 되고, 후일 이 은둔주의는 수도원 창설의 파생 원인이 된다.

파코미우스 : 최초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고, 제복을 만든 사람이다. 고행주의적 수도생활을 추구하며, 기둥 위에서의 삶을 살아 간 시므온은 지나치게 개인 구원을 추구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교부로서 수도원 예찬론자이고 신학과 고행의 생애를 살다간 제롬(346-420) :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를 “벌게이트”라 한다.

극단주의 예방하고자 하였으며, 수도원 규칙을 제정하여 교회와의 연락을 도모하고자 한 바실도 수도원 운동가 중에 하나이다.

베네딕트(480-543) : 베네딕트는 이탈리아에서 출생하였으며, 로마 유학 중에 시민의 타락상에 실망하여 산중 동굴에서 3년간 고행을 하게 된다. 이후 집단 수도원 12개를 건설하였다. 이중 이상적인 대표적 수도원은 529년에 지어진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베테딕트 수도원에서는 농사, 가난하고 병든 자 구제, 이웃 전도와 같은 활동에 힘썼다. 개인구원을 강조하였으며, 민주적이면서도, 비고행성을 띠는 베네딕크 수도원은 서유럽 수도원의 전형이 되었고, 이후 유럽에 확산되게 되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수도사들의 선거에 의해서 수도원장을 선출하는 민주적 방식이 있었으며, 원장 및 수도사가 평등하였고, 중대사는 상의에 의하여 결정하는 권한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매일의 예배와 노동은 이들의 임무였다. 생활에 있어서는 규칙적이었지만 비고행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이들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10.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 및 작품

어거스틴(354-430)은 이교도 아버지와 신실한 신자 어머니 모니카와의 사이에서 북아프리카의 타가스트에서 출생하였다. 수사학, 라틴문학, 철학 등에 심취했었으며, 키케로의 호르텐시어스를 읽고 지적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청년시절에 8년 간 이원론에 빠져 마니교를 신봉하였었다. 그러던 중 383년에 밀라노에 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곳에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감화를 받게 되고, 34세 되는 387년에 그에게 세례도 받게 된다. 이후 395년에 힙포에서 장로 및 감독이 된다. 이후 수많은 신학 논쟁을 감당하고, 교회를 지도하면서 그의 나이 7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를 평가하길 바울 이후 교회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신학자라는 칭송을 듣고 있다. 뿐 만 아니라 그의 역사철학이 중세를 지배하게 되고, 은총교리가 종교개혁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해 온 것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삼위일체와 예정론을 중심으로 한 신론. 둘째, 원죄, 인간의지의 부패와 무능력, 영혼의 유전설을 근간으로 하는 인간론, 셋째, 신인 양성, 대속적 죽음, 유일한 중보자를 말하는 기독론, 넷째, 행위공로의 무용성,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 은총은 불가항력적 은혜로부터 드러난 구원론, 다섯째, 무형 및 유형교회로 구분, 가톨릭 신자 됨이 구원의 요건, 성경을 최고의 전형으로 삼으면서도 교회권위를 크게 강조하는 교회론, 여섯째, 내세신앙을 믿는 종말론이 그의 신학이다.

어거스틴의 4대 명작은 다음과 같다. 참회록(397), 신의 도성(413-426), 삼위일체, 독백, 도나티스트에 대하여,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교리적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어거스틴은 아담의 원죄와 죄의 유전을 인정하나,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를 아담에게만 국한하며 원죄의 유전을 부인하는 원죄관의 차이점을 보인다. 둘째, 어거스틴은 구원에 관해 인간은 자유선택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나, 펠라기우스는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보는 자유의지에 대한 신학적 차이를 보인다. 셋째,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구원은 예정된 불가항력적 은혜로만 가능하며, 펠라기우스는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나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도 천국으로 인도하는데 가항적이라고 하였다. 넷째, 어거스틴은 죄의 결과가 인간의 사망이라고 보는 사망관을 가지고 있으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자연적 사망관을 가지고 있다. 어거스틴은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므로 유아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고, 펠라기우스는 유아는 타락이전과 같기 때문에 속죄적 의미에서 볼 때 유아세례는 불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결론적으로 볼 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을 담지하고 있으며, 펠라기우스는 자력구원적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