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편 하나님의 실유
제1장 하나님의 존재
조직신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왜 신론을 가장 처음에 공부하는가?
많은 교의신학이 신론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것이 가장 논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하나님과 그의 우주에 대한 관계에 관한 지식의 조직적 진술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19세기의 신학자 슐라이어막허는 그의 신학의 출발점을 신론이 아니라 인론에 둠으로써 기존의 체계에 대해 도전을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람의 종교적 의식을 신학의 원천으로 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적 계시로 믿는 신앙은 불신임하고 사람 자신의 감정적이나 이성적인 이해에 기초한 지적 통찰을 종교 사상의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기초를 통해 종교적 의식과 그것에 포함된 교리들의 연구와 분석에 전력하였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연속적으로 논술하지 않고 오직 단편적으로 하며 삼위일체의 논의로써 결론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교의(신론)의 논술에 있어서 일부는 유신론 즉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 신론과 구별하여 개진하는 경우도 있으며, 신론에 내포된 모든 주제들을 특별한 분류 없이 순서대로 거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뻘콥의 예를 쫓아 신론의 내용을 하나님의 실유와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편리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신론에 내포된 모든 주제들이 성질상 둘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절 하나님 관념의 기원
모든 사람은 그들이 의존하며 책임으로 대하는 실유가 계신다고 확신하며 실제로 모든 사람은 그 하나님에 대한 얼마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 확신의 원천은 무엇이며, 하나님 관염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세 가지로 답변할 수 있다.
첫째, 초자연계시적 기원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지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계시의 방편에 의해서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가진 신관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계에 현존하는 모든 하나님 관념은 다 원시적 계시의 잔해나 혹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둘째, 직각적 기원이다. 영으로서의 인생은 본성의 소질에 뿌리 박혀 있는 직각적인 확신으로 인해 몽롱하게나마 하나님을 의식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 의식은 경험에 의해 든든해진다. 다만 죄악이 인생의 영혼을 흐리게 하여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게 한다. 이런 하나님 관념은 생득적 관념들이며,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자명한 진리들이어서 다른 사람의 증명이나 교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방인들에게도 조잡한 종교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셋째, 이론적 기원이다. 하나님 관념은 이론의 과정에 의해 나타난다. 이 관념은 이성을 사용하며 인과적 법칙을 찾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찾으며 지원한다.
넷째, 종합적 기원이다. 하나님 관념의 기원은 어느 것 하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계시, 직각, 이론의 삼설은 각각 하나님 관념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유익하다. 그러나 확실하게 중요한 것은 성경계시 속에 주어진 하나님 관념이 가장 우선시 되며 기본이 되어야 한다.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관념이 참되고 순수한 하나님의 관념이고 사람의 직각이나 이론에 의해 얻어진 관념은 불완전한 신관이기 때문이다.
제2절 유신논증
하나님이 존재하신 다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대가정이다. 이 가정이 없다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가정이다.
첫째, 성경적 가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차적 증거는 근본적으로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특별계시이며, 이차적 증거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계시이다. 물론 이차적 증거는 일차적 증거를 전제하고 출발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수많은 구절에서 선언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알려진 사실로 가정하며 전진하고 변론이 아닌 선언을 하고 있다.
둘째, 합리적 가정에서 출발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변론을 통해 확립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이것을 우리는 유신논증이라고 부른다. 유신논증들은 귀납적인 변론들로서 하나님의 존재의 개연성을 찾아내려고 한다.
① 본체론적 논증 : 모든 존재는 자신의 실유를 증명할 수 있는 필연적인 실유를 가지며 이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실유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무한하고 완전한 실유를 발견할 수 있다.(안셂, 데칼트, 사무엘 클락, 빅터 구장 등)
② 우주론적 논증 : 인과율의 관념에 기초한 논증으로 인과논증이라고도 한다. 모든 사물은 그 존재와 변화보다 앞서 있는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제일의 혹은 필연한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쫀 락, 라이프닡즈, 토마스 아퀴나스, 아리스토틀, 버스웰, 버트란드 럿셀 등)
③ 목적론적 논증 : 세상의 모든 원리들은 혼돈한 상태가 아닌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을 목적인이라 부르는데 과정에 실현될 계획을 가지고 시작하는 동력인이다. 이 목적을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인 목적이 존재한다.(소크라테스, 플라톤, 키케로, 데오빌루스, 클레멘트, 터툴리안 등)
④ 도덕적 논증 : 양심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도덕적 판단의 직각이고 선을 행하고 악을 물리치려는 의무감이다. 이 양심에 표현된 도덕적 법칙은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갈 때 도덕적 창조주의 존재에 대해 증거한다.
⑤ 종교적 논증 :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식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종교적 예배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본능의 대상이 되는 고등실유의 실재가 존재함을 말해준다.
⑥ 심미학적 논증 :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미와 숭엄에 대한 마음은 심미애를 가진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한다. 자연의 모든 미와 숭엄은 창조주로부터 인생에게 주어진 계시이다.
⑦ 인론적 논증 : 사람의 자아, 자유, 의무의 의식으로부터 창조주의 존재 뿐 아니라 그의 인격성과 도덕성을 알 수 있다.
⑧ 역사적 논증 : 세계의 역사에 목적 있는 진보와 도덕적 정치의 실현은 세계를 통치하는 초자연적 권력의 존재를 증거한다.
이런 논증들에 대해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논증들 각자가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절대적인 증명을 하지는 못하더라고 종합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임은 틀림없다.
제3절 반 유신 제론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실제적으로 보편하여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해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개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무신론 : 무신론은 실천적 무신론과 이론적 무신론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생활하는 무리들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은 존재하지만 그것을 억압하며 살아간다. 후자는 보다 더 지성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의 부정을 이론과정에서 기초시키는 무리로서 하나님이 없다는 단언을 합리적 변론에 의해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② 오신관 : 유신론적 신개념의 부정을 합의하는 그릇된 신관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으로 범신론은 하나님을 세계와 동일시하여 하나님이란 넓고 큰 세계의 동작과정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초월한 어떤 인격적 존재가 아닌 하나의 과학적 체계가 된다. 유한신론은 유한인격적 신관을 가르치는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제한을 두어 절대자의 한 부분으로서 이해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들은 축소되며 진정한 예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다신교와 배일신교를 양산해 낸다. 추상적 관념신론은 하나님을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관념의 인격화로 본다.
제2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1절 긍정과 부정
① 하나님은 알려질 수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을 완해할 수는 없으나 알려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불가완해자 되심을 고백하는 한편 그가 능히 알려진다는 것과 그를 아는 지식이 구원에 절대적 요건이라는 것을 공언한다. 이것은 또한 초대의 교부들도 주장한 것이었고 종교개혁자들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도움 없는 인생의 이성이 일반계시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을 얻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스콜라 신학과는 다르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계로부터 하나님의 대해 얼마간의 지식을 배울 수는 있으나 오직 성령의 조명하는 감화 아래 특별계시로부터만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죄가 인간의 지력을 흐리게 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을 얻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재창조적 권능을 가지고 인간의 심정에 들어오실 때에는 죄악한 사람이라도 그의 흐려진 눈이 밝아서 하나님을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헤겔이나 슐라이어막허 같은 범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불가완해자 되심에 도전하여 인간이 특별계시 없이도 하나님에 관한 충족한 계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개혁 신학자들의 입장은 하나님은 능히 알려질 수 있으나 하나님을 빠짐 없이 완해하여 그에 관한 원만무결한 지식을 가지기는 불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지식의 완전무결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사람의 지식은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에 대해 찰스 하지는 “하나님에 안에는 우리가 가진 관념보다 더 무한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반틸은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해할 수 없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으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얻어지는 한 참된 지식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개진적으로 알지 못하는 바를 참으로 알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그의 하신 일들이나, 그의 말씀에서나, 그가 계시하신 바에 결정되는 한 참으로 우리는 그가 어떠하시다고 참으로 알 수 있다.
②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가능성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생인식력의 제한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들을 우리는 불가지론자라고 부른다. 불가지론자들은 이전 여러 세기의 헬라철학의 회의론자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한다고 하며, 혹 하나님이 존재할지라도 그에 관한 참 지식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은 절대적이어서 사람의 유한심에 전여 관여하지 않으며 연락을 하지 않기에 교섭이 불가능하며, 둘째 인생의 마음의 성질로 보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지론은 그 이론을 살펴볼 때 많은 문제점이 존재하며 그들의 변론 또한 지엽적이다.
제2절 하나님을 아는데 선 요건
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며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사람에게 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에 관한 지식을 사람에게 전달하는 주체인 동시에 사람이 그 지식을 받아 연구하는 때에 사람의 연구의 대상이 되신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피동적으로 현현되심인 무엇이 아니라 그가 능동적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자전달 하시는 초자연적 행동이며 목적 있는 행동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런 능동적인 자계시 없이는 참된 하나님 지식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없다.
②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방법에 대해 성경은 두 가지 계시를 증언한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초자연계시)로 구분한다. 일반계시라함은 우리 주변의 자연, 사람의 의식, 세계의 섭리적 정치에 나타난 계시를 말하며, 특별계시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자체에 체현된 계시이다. 또 달리 말하면 일반계시는 창조에 기초하여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알아 교제하려는 것을 추구하며,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계획에 기초하여 인류 창조의 본목적을 달성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두 계시는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룹마다 중대한 이견이 존재한다. 스콜라철학에서는 특별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삼위일체, 성육신, 구속과 같은 지식들을 제외하고는 학문적 지식에 근거해서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이성은 학문적인 신학체계를 통해서 절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으며 오직 특별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조명이 필요함을 말한다. 이성론은 이성으로서 모든 것에 대해 알 수 있음을 말한다. 바르트는 이성을 통한 일반계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절대 알 수 없으며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③ 이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생득적이며, 획득적이다. 생득적 지식은 사람의 마음의 소질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되어 나오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날 때부터 그의 의식에 가지고 태어나는 지식이다. 획득적 지식은 하나님의 계시의 연구에 의해 얻어지는 것으로 지각과 숙고, 추리와 변론에 의해 알아지는 지식이다.
제3장 하나님의 본체의 요의
제1절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 알 수 있음
① 하나님의 실유(본체)란 하나님의 참된 실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우리가 실유라고 할 때는 어떤 단순한 사상이나 관념을 말하는 것 뿐 아니라 사상, 감정을 포함한 현상을 일체를 포함하는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성질에서 무한, 영원, 불변하는 실체이며 모든 신적완성들의 공통 주체와 모든 신적 동작들의 공통 동작자가 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본체의 지식을 가진다.
② 우리는 하나님을 완해할 수는 없으나 알 수는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뿌리 박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하신 신적 속성들을 통해 그 본체의 지식 얼마를 알 수 있다.
③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본체에 관한 지식은 부분적이면서도 참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의 도덕적 피조물 사이에 어떤 관계들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제2절 본체와 속성과의 관계
① 하나님의 단순성에 의해서 우리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토대로 하여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들(하나님은 생명, 빛, 지혜, 사랑, 의 등)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본체가 지닌 속성들을 알 수 있다.
② 하나님의 속성을 구별하는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유명론적인 견해에서는 하나님의 각각의 속성들은 모두 동일하여 하나님 안에서 논리적 구별이 없다고 말한다. 실재론적 견해에서는 하나님 안의 속성들의 객관적 실재를 주장하였으며 이 각각의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체에 있어서 합일되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제3절 하나님의 정의
① 실재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라고 할 때 이 ‘정의’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본체를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정의라는 말이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임을 가장 가깝게 이해하는데 도달할 수는 있다. 만약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정의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개념들을 동등하게 포괄하는 보다 더 고등한 어떤 개념을 찾은 후 하나님에게만 적합할 특성을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리는 것은 불능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위의 정의는 하나님의 알려진 속성들을 열거하는 분석적, 묘사적 정의일 뿐 하나님의 근본적 실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본체에 관한 지식을 가지는 한계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근본적 실유를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과 창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속성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체를 완해할 수 없으나 속성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② 명목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라 함은 하나님을 가리켜 사용되는 명사의 의의를 설명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경에 사용되는 성호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칭에 대해 많은 정의들이 있으며 그 명칭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것들까지 고찰되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명목적 정의는 그의 실재적 정의에까지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제4절 하나님의 이름
① 하나님의 명칭들은 사람이 아닌 신적기원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인간의 언어에서 차용된다. 따라서 신적기원을 가진 하나님의 성경적 명칭들의 참된 의미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을 바로 이해함에 크게 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명칭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다 보니 오용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우리는 하나님이란 말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②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이 하나님(엘, 엘로힘, 엘욘), 주(아도나이), 전능자,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 등으로 사용되어졌다.
③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명칭이 하나님(데오스), 주(큐리오스), 아버지(파테르) 등으로 사용되어졌다.
제4장 하나님의 속성(상)-비 공유적 속성
제1절 하나님의 속성 개관
① 하나님의 신적 속성은 하나님의 실유의 고유한 품질들이다. 이런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알기위해 많은 방법들이 있어왔다. 합리적 방법은 하나님에 관한 직각적 지식을 강조하며 이성을 의존한다. 인과의 방법, 부정의 방법, 우수의 방법을 통해 우리는 피조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방법에서는 종교적 경험(신적실재에 대한 직관들, 종교적 수요, 종교의 감정)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속성들을 결정하려 한다. 성경적 방법에서는 오직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신인동형 동성주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과 공통한 속성을 소유하거나 행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알 수 있다고 한다.
②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속성을 분류함에 있어서 절대적이고 정확하고 완전한 분류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상대적 속성은 하나님에게 속한 절대적 속성(자존, 무량, 영원, 편재, 전지 등)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속한 속성으로 구분한다. 내재적 유출적(자동적 타동적) 속성은 신적본체에 내재적으로 남아있는 속성(무량성, 단순성, 영원성)과 그것으로부터 유출되어 만들어진 결과들(전능, 자비, 공의)로 구분한다. 형이상학적 도덕적 속성은 하나님의 의지와 구별되어 그의 소질에 속하는 속성(자존재, 단순, 무한)과 하나님을 도덕적 실유로 만드는(진실, 선, 긍휼, 공의, 거룩)과 같은 것으로 구분한다. 긍정적 부정적 속성은 신적 존재의 적극적 완전을 표현하는 속성(편재, 전능)과 모든 종류의 흠결이나 제한을 표현하는 속성(불변, 무한, 불가완해)으로 구분한다. 비공유적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 속에서 피조물 안에 하나님과 유사한 속성을 살핌으로써 구분한다.
제2절 하나님의 절대성과 자존성
①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을 우리는 절대적 속성이라고 한다. 절대자에 대한 개념은 철학과 신학에서 모두 다루어진다. 그렇다면 철학의 절대자가 신학의 절대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절대자에 대해 가지는 개념여하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절대라는 말이 하나님의 실유에 대해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을 모든 실유들보다 먼저 존재하셨고, 모든 것의 지성적이며 자원적인 원인이며, 영원자존재의 인격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비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실유에 치중하고 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과 더불어 관계하심을 강조한다.
② 하나님은 그의 존재의 근거를 그 자신에 두신다(자존성). 하나님은 자신의 근거에 대해 독립적이며, 하나님 자신이 모든 세력과 모든 실유의 생적원천이다. 하나님의 실유는 원인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실유의 필연성에 의해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제3절 하나님의 불변성
①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독립 자존성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실유 뿐 아니라 그의 목적들과 약속들에 변경이 전혀 없으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지식과 계획, 도덕적 원리들과 결의들은 영원히 동일하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볼 때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오해는 대체로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부동성으로, 신인동형동성적 표현들을 문자적 진술로 오해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부동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비유나 유추적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과오를 범해서도 안된다. 어떤 사건에 관해 하나님의 목적을 종합적 전체적으로 살피지 못하면 하나님의 목적의 변경에 대해 오해하기 쉽다.
제4절 하나님의 무한성
①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의 자존성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제한으로부터 자유하셔서 그의 실유나 속성들에 제한이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존재하는 만물의 총화와 동일시하는 것을 함의하지 않으며 인출된 유한물들의 공동존재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② 하나님의 완전성은 신적실유의 자체에서 고찰된 무한성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양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외연적이기 보다는 내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③ 하나님의 무한성을 시간과의 관계 살필 때 하나님의 영원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시간으로부터 자유하고 자신 안에 시간의 근거와 이유를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영원성은 모든 시간적 제한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에게 시간의 구별이 없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나 시간에 내재하셔서 관계하신다.
④ 공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무한성은 무량성과 편재성으로 구분된다. 무량성이란 하나님이 공간에 의해 제한되거나 정계되지 않고 반대로 모든 유한한 공간이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공간적 초월성을 말한다. 편재성이란 공간 안에 여러 가지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가지는 하나님의 특성으로 공간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때로 하나님의 무량성과 편재성에 대해 범신론과 초연신론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계에 내재하시나 또한 초월하시기 때문에 범신적이거나 초연하시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⑤ 하나님의 무량성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편재성은 하나님의 내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세계 속에 포함된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구별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내재성이란 하나님이 물질적 우주 속에 무형적 본체로 만물에 인격적으로 퍼져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서로 모순되는 듯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버려지지 않고 병립하여 왔다. 둘 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이기 때문이다.
제5절 하나님의 유일성
하나님의 유일성이 의미하는 바는 첫째, 오직 하나의 절대자존, 불변, 무한하신 영이 계신다는 것과 둘째, 신적성질은 나누어 있지 않고 또 나눌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단수성과 단순성이라 부른다.
① 하나님의 단수성이란 하나님의 수적으로 하나되심을 말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한분의 신적 실유가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질상 독특하심을 강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절대, 자존, 불변, 무한의 개념들은 오직 하나에게만 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② 하나님의 단순성이란 내면적 품질적 유일성으로 하나님이 분할 될 수 없는 동시에 복합적이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은 분립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본체에 첨가된 무엇이 아니다.
제5장 하나님의 속성(하)-공유적 속성
제1절 하나님의 영적, 생적, 인격성(서언)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께서 영적실유가 되심을 말해준다.
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며 영성을 가지심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시며 물질에 의뢰하지도 않으심을 말해준다.
② 하나님의 영성은 하나님의 불가견성을 함의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은 불가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보여주심이 아니라 사람의 형체를 취해 외면적으로 계시하심을 말해준다.
③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은 자신과 다른 만물의 존재와 활동의 원천으로서의 정신력을 자신 안에 가지시기에 사시는 하나님이시다.
④ 하나님은 인격적 존재가 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을 자기의 의지에 의해 결정하시는 자유적 동인이며 동시에 우리의 인격들이 모든 특성들을 가지도록 하는 인격적 원인이 되신다.
제2절 지성적 속성
하나님은 영원하고 순수한 실유이시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힌 지식은 그 충만영원한 본체보다 작지 않다. 하나님 안에 실유과 지식은 함께 연관되어 있다.
① 하나님의 지식 : 범신론은 무한 안에는 지식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우주의 존재형식으로 제한하며,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 안에 다른 속성이 있음을 부인하여 지식과 능력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안에 속성들이 각각 다른 것으로 구별되며 하나님 안에 지식은 그것의 근본적 성질에서 우리 안에 지식이 어떠함과 같다고 추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식에 관하여 풍부한 증거들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지식은 몇 가지 점에서 인간의 지식과 같지 않다. 첫째, 원형적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 완전을 특성으로 한다. 둘째, 직각적이다. 그 자체의 광명에 의해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식별하는 지식이다. 셋째, 독립적이다. 그의 피조물이나 그것들의 행동에 의해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넷째, 총괄적동시적이다. 하나님은 일시에 모든 사물을 그 총화로 본다. 다섯째, 개별적이다. 하나니은 모든 것을 직각적으로 인식의 직접동작에 의해 아신다. 여섯째, 명확하다. 하나님은 사물들의 여러 가지 개념들을 종합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가장 명확한 직각의 동작에 의해 모든 것을 투시한다. 일곱째, 불변적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변치 않는 인식의 동작에 의해 사물들의 모든 것을 지각하신다. 여덟째, 완전하고 충분히 의식적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현상이 아닌 자기의 본체를 통해 모든 것을 아신다.
② 하나님의 지혜 : 지식과 지혜는 서로 밀접히 관계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지식과 구별된다. 하나님의 지혜는 수단을 목적에 맞게끔 하는 하나님의 지능으로 하나님은 항상 가능한 최선의 목적을 정하시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최선의 수단을 선택하신다.
③ 하나님의 진실 : 하나님의 진실은 그의 지성적 도덕적 모든 속성들에게 성격을 부여하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는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무한하게 진실하고 하나님의 선과 공의는 그것들의 모든 행사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성질의 완전한 표준에 조응함에서 무한히 진실하다. 우리는 이것을 진정성과 신실성이라 표현한다.
진정성이라 함은 공허와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할 만한 실유의 완성을 의미한다. 신실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기억하심과 자기 백성에게 맺으신 약속들을 성취하심을 의미한다.
제3절 도덕적 속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에게 향하여 행사하시는 가장 눈부신 신적 속성으로 하나님의 성질의 탁월한 특징들을 구성하는 영광스러운 완성들로 인정된다.
① 하나님의 거룩은 구약의 가장 탁월한 종교적 용어중 하나이다. 거룩은 분리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거룩의 성경적 관념은 위엄과 도덕의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위엄적 거룩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절대적으로 구별되어 무한한 위엄으로 높이 올라 계심을 표시하며 하나님에게 돌려질 모든 것이다. 도덕적 거룩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위엄적 거룩의 관념에서 발전된 것이다. 도덕적 거룩도 분리의 관념인데 죄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며 소극적인 것을 뛰어넘어 적극성을 가지는 윤리적 완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은 사람의 마음에 심어지고 양심을 통해 말하는 도덕율에 계시되었으나 특별하게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의 최고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체인 교회 안에서 계시된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활동의 원인이 된다.
②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거룩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성경에서 의는 근본적으로 율법엄수의 관념을 가지는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피조물에게 향한 바르심은 불순종하는 자에게 향하여는 잘못이 된다.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 의와 상대적 의로 구별되는데 하나님의 절대적 의는 그 자신의 실유의 무한한 도덕적 완전(보편적 의)이며, 상대적 의는 도덕적 창조물들에게 행사되는 하나님의 무한히 의로운 성질이다.
하나님의 상대적 의는 주재적 공의와 분배적 공의로 다시 나눠진다. 주재적 공의는 선한자와 악한자의 통치자로서 나타내시는 공의이며 우주적 정치의 집행과 관련된 상대적 의이다. 분배적 공의는 율법의 시행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로서 상벌의 분배에 관계한다. 이는 세계 통치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의 통치를 나타난다.
③ 하나님의 선은 형이상학적 의미로 그 자신이 절대적 완전이시며 절대적 지복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선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피조물에게도 선하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 자신의 자의식적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보시니 선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윤리적 선은 일반적으로 그 대상들에 의해 구별되는데 성경적 의미의 하나님의 선은 자선과 사랑, 예양, 긍휼, 은혜를 포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의 여러 방면들이다. 하나님의 자선은 일반 생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이다. 이것은 창조주가 자기의 감각 있는 피조물에 대해 가지시는 애정으로 자연의 전 구조에 계시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이성적 피조물들을 향한 고등한 성격의 것이다. 이 사랑은 대상에 대해 소유와 교제의 욕망을 가지는 만족과 반김을 포함하며 자기계시와 자기전달에 끌어간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타나는 총애로써 청구권 없는 자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행복의 원천이다(구원적 은혜).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선의 한 면으로 그의 피조물의 고난에 대해 동정을 느끼고 구출을 계획하기에 이르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이다. 따라서 이것은 심판이 천연으로 나타난다.
제4절 주권적 속성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은 그의 성질의 한 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유의 완성을 기초로 하여 나타나는 특권이며 이 주권은 특별히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주권적 능력으로 구분하여 살펴 보려고 한다.
①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지는 모든 일의 목적인으로 제시되기에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하나님의 신적자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진다. 하나님의 의지는 항상 그의 본체와 다른 속성들과 조화된다. 그리고 그 의지하심에는 항상 좋은 이유들을 가지시며 결코 전단적이거나 우발적인 양식을 움직이시지 않고 최고의 지혜로 하신다.
하나님의 의지는 이중성격을 가지는데 이에 대한 구별은 여러 양식으로 표시된다. 선행적 의지와 후수적 의지는 하나님은 선행적 의지에 의해 자기의 영광의 현현을 결정하셨고 후수적 의지에 의해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 세계의 창조를 결정하셨다고 한다. 절대적 의지와 조건적 의지는 사람의 거둠과 구원과 관련하여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가 있는 것인지 조건적인 부분이 있는 것인지를 논한다.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와 교훈적 의지에서 전자는 하나님이 어떤 것을 수행하기를 의지하시는 제재 없는 의지이며 후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도덕적 피조물을 위해 제정하신 삶의 규칙이다. 하시려는 의지와 하게 하시려는 의지에서 전자는 무엇을 스스로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열의이고, 후자는 그의 피조물로 하여금 무엇을 행하게 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불현적 의지와 현현적 의지에서 전자는 하나님의 숨은 도모에 들어 있는 의지이고 후자는 그것이 어떤 계시나 사건자체에 의해 알려지는 의지이다. 하나님의 비밀적 의지와 계시적 의지에서 전자는 하나님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작정의 의지이고 후자는 율법과 복음에 계시된 교훈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관계하여 두 가지 중요한 논건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비밀적 의지와 계시적 의지가 서로 충돌된다는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 안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에 충돌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비밀적 의지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행하실 바를 결정하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계시적 의지는 우리가 반드시 행해야 할 바를 결정하시고 지시하시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영역은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 둘째, 하나님의 의지와 죄의 관계가 있다.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가? 알미니안은 하나님이 예지에 의해 죄를 허용하기로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자유를 하나님의 의지 이상에 두어 하나님의 주권을 희생시키게 된다. 개혁주의에서는 이런 알미니안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계에 죄가 들어온 방법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이실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그의 의지의 행사에 있어서 필연적이신가? 동작적이신가?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와 범신론적 필연의 개념, 의지의 자유와 무분별 신학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그의 피조물의 동작에 대해 절대 독립하여 존재하는 동시에 스스로 자기의 실유의 법칙에 의해 자유롭게 동작하신다.
②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 : 하나님의 능력은 원인과 결과의 우리가 사상하는 근본법칙을 넘어 제한을 받지 않는 전능함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의지와 구분되어 지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는 절대적 신능력과 질서적 신능력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무제한, 자제한을 포함하며 불가능의 허용한다. 무제한에서는 하나님은 능히 의지하시는 바를 무엇이든지 다 행하실 수 있음을 말한다. 자제한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모든 것을 다 하도록 강제되지 않으시며 자유적임을 말한다. 불가능에서는 하나님의 성질에 모순되는 것을 행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과연 전능하신가?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먼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먼저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이름에 나타난다. 또한 전능은 무한한 실유로서의 하나님의 관념자체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끊임 없이 확대되는 경험들은 하나님의 전능함에 대해 우리에게 증거를 제시한다.
제5절 유복적 속성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복있으심을 계시하는 속성들에는 완전, 복있으심, 영광을 거론할 수 있다.
① 하나님의 유복성 :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은 하나님의 복있으심을 함의한다. 왜냐하면 복있음은 생명을 가지고 교란을 당함 없는 완전한 실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있음의 정도는 실유에 속하는 완전의 분량에 적응한다. 또한 이 절대적 완전은 하나님 자신이 지식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절대적 지식으로 자신을 아시며 절대적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이 절대적 완전은 자충족을 함의한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기뻐하시며, 자신 안에서 안식하신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의 영광 :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내면적으로 복있으시고 외면적으로 영광스러우시다.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은 전 피조계와 특별히 은혜의 영역에 계시된다. 이 영광은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고 그를 통해 교회 안에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삼국면에서 구별한다. 피조물의 경앙과 숭경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대라 하며,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대상으로서 영광이라 한다. 그리고 영광자체는 모든 피조물들의 굴복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 존엄과 연관된다.
제6장 성 삼위일체
제1절 삼일교리의 개관
삼위일체는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의 독특한 계시의 진리이며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교리이기에 충분한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우리의 미약한 지혜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 교리가 기독교를 세계 모든 종교들과 구별하는 판이한 표지임은 분명하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성질과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관념은 우리의 하나님 사상을 조명하여 풍부케 하며 구속적 진리이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우리를 바른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간다. 또한 하나님을 합리하게 사고할 유일양식을 공급한다.
제2절 일체에 삼위의 증명
삼위일체는 하나에 셋, 또는 셋인 하나, 하나인 셋으로 말 할 수 있는데 성경에 발견되지 않지만 한 본체가 영원한 삼위로 실존하신다는 대 교리의 중심적 사실을 표현하는 술어이다. 우리가 현재 이를 표현하려는 단어들은 전혀 충분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말할 때는 일체에 삼위, 삼위인 일체를 말하는 것이다.
① 인격성과 복수성 :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들은 하나님을 이성적 도덕적 실유로 계시하기에 하나님의 인격성을 강조한다. 또한 성경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유사를 가진 인격성을 가진다. 그러나 사람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세 인격이시다. 하나님의 세 인격성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설명을 하려 하지만 우리는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성이나 경험만의 근거 위에서 알려진 교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교리이다. 성경의 모든 대교리들은 다 점진적으로 계시되어 구약에서 몽롱한 암시가 신약에서 명료한 진리로 나타났다.
구약에 있는 삼위일체의 증거는 이미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가리켜 복수 대명사로 말씀하신 것에서 드러난다. 특히 하나님은 자기 삼위 사이에 공동협의적으로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그의 왕이나, 여호와와 함께 주를 말하는 것 등에서 하나 이상 수의 하나님의 위가 나타난다. 그리고 때로는 여호와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구약에서의 성령에 대한 내용은 통상으로 명확하지 않지만 자세히 본다면 서령에 대한 내용이 인격에 대해 사용되는 언어들도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 있는 삼위일체의 증거도 조직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곳곳에서 풍성하게 발견된다. 하나님은 유일이시라는 것은 신약의 근본적 가정이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각각 다 하나님을 인정한다. 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인격적 교제의 대상임을 말하며 서로 사랑하고, 기도하며, 영화롭게 하신다.
제3절 교리적 진술
삼위일체 교리의 정의의 최고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6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이 교리에 내포된 사상을 좀 더 충분히 진술하기 위해 몇가지 중요한 제언들을 살펴보며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① 유일불가분적 본체 : 하나님은 그의 본체적 실유에서 하나이시다. 여기서 본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서 여러 단어들이 있지만 우리는 본체 또는 실체라는 말로 하나님의 실유를 설명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님이 되어 계실 바 그 무엇이다. 신적본체의 유일성은 하나님의 유일성이 함의하는 진리이다. 이 유일성은 단수성과 단순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신적실유의 본체는 수적으로 유일이며 내면적 품질적으로 유일이어서 분할될 수 없다.
② 삼위 혹은 삼실존 : 한 신적실유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인격)의 실존들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증명된다. 오직 신적본체 안에 위(인격)적 자아구별이 있으니 그것은 종속적으로 하나일 뿐 아니라 수적으로 하나이다. 이것은 현현의 세 양식이 아니라 존재의 세 양식이다.
그렇다면 신격 안에 위적 구별이 있다는 관념은 신적 유일성과 어떻게 조화가 되겠는가? 하나님의 속성들이라 칭하는 모든 신적 완성들을 구성하는 영원적, 자존적, 신적본체는 동일한 의미와 정도로 모든 위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다. 그러나 이 신적본체는 인격적 특성들에 의해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영원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셋이다. 이것은 이성이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해된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계시하신 때문이다.
③ 각위에 전본체 : 하나님의 분리되지 않은 전본체가 삼위의 각자에게 동등으로 속한다. 이것은 신적본체가 삼위에게 분배된 것이 아니라 모든 완성들을 가진 전체로 삼위의 각자에게 있어서 그들이 본체의 수적 유일성을 가지게 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함은 그것은 영적본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적본체는 삼위와 병립한 독립적 존재가 아니시라는 것이다. 신적본체가 삼위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면 참된 유일성은 불가하다. 위적 구별은 신적본체 안에 있는 것이다.
④ 일정한 순서 : 신적실유 안에 삼위의 실존과 사역은 일정명확한 순서를 가진다. 위적 실존에 있어서는 성부는 제일, 성자는 제이, 성령은 제삼이시다. 이 순서는 시간이나 본체적 존위의 선후를 가리킴이 아니라 인출의 논리적 순서에 기초함이다. 성부는 다른 위에게서 발생되거나 발출하지 않으시고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적으로 발생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부터 발출하신다. 이 발생과 발출은 신적실유 안에 있는 것으로 위적 실존의 양태에 관한 어떤 종속을 함의한다.
이 본체적 삼위일체의 각 위에 돌려지는 피조물을 향한 외향적 사역에 있어서는 성부는 영원한 로고스이신 성자 안에 보여 지신 대로만 상당히 계시되신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통해서만 피조물 위에 인격적으로 동작하신다.
⑤ 상이와 구별 : 성경 계시에 의하면 삼위의 위적 특성들은 현저하고 특수하여 서로 대상적이다. 동작의 질서에서 서로 달라서 한 위에 돌려질 수 있는 동작들이 다른 위에게 돌려질 수 없다. 첫째, 실존의 상이가 있다. 성부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발생을 통해 존재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을 통해 존재하신다. 둘째, 사역의 상이가 있다. 내향적 사역은 신적실유 내부에 있는 사역으로 삼위합작에 의하지 않고 비공동적인 각위 자신적 사역이다. 외향적 사역은 한 위의 독점적 사역이 아니라 신적실유 전체의 사역이다. 그러나 각각의 사역들은 창조는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⑥ 동등과 종속 : 삼위는 본체적 실유에 관한한 절대적으로 동등이며 위적 존의에 차이가 없다. 그러나 위적 실존의 양태와 사역에 관한 순서와 관계의 종속이 있다. 동등이란 하나님 안에 한 위와 다른 위 사잉에 본체적 실유에 관한 종속이 없으며 위적 존위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종속이란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역의 순서(구속의 사역과 세계의 일반적 정치)에 있어서 순서와 절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⑦ 신비하나 진리 : 삼위일체의 교리는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는 것은 완전히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위험에 빠지는 오류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⑧ 다양유추의 예증 : 초대교회부터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유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들이 있어왔다. 물질계에서 취해 온 예증, 정신계에서 취해온 예증, 법인 인격, 그리스도의 기도, 사랑의 성질 등이 그것이다.
제4절 삼위의 각론
▣ 성부
① 하나님에게 사용된 명칭은 아버지이다. 첫째, 모든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아버지라는 명칭(창조적 사역)이 사용되었다. 둘째, 하나님의 구약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신정적 관계(하나님의 부친적 관심)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셋째, 하나님이 영적 자녀를 생산하신다는 사실에 비추어 사용(양자의 영)되었다. 넷째, 형이상학적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위에 그와 제 이위와의 교호적 관계에서 사용되었다.
② 독특한 내향적사역 : 소극적으로 성부는 발생 또는 파송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성자의 발생과 성령의 파송이다. 성부의 독특한 내향적 사역은 능동적으로 성자를 영원히 발생하심이다.
③ 특수한 외향적사역 : 성부에게 돌려진 외향적 사역은 성부가 전면이 계심이 분명하다. 첫째,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포함된 선택을 포함하는 구속의 계획이다. 둘째, 제일 당사자로서 구속의 언약에서 성자에게 사명을 발하셨다. 셋째, 창조와 섭리의 사역에서 성부는 창시자와 선발자가 되셨다. 넷째, 구속의 적용의 발단에 있어 유효적 소명의 특별한 동작자이시다.
▣ 성자
① 제 이위에 적용된 명칭은 아들이다. 삼위의 제 이위는 아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성경에서 아들이 가르키는 의미는 다양하지만 이 말이 단수로는 삼위일체의 제 이위에게만 사용되었다. 첫째, 윤리적 종교적 의미로 쓰인 경우가 있다. 둘째, 강탄적 의미로써 하나님의 부친적 행위에 이해 출생되었다는 사실에서 쓰인다. 셋째, 직위적 즉 메시야적 의미로써 하나님의 아들이라 쓰인다. 넷째, 형이상학적 의미로 그리스도 본래의 자격의 의미가 결합되어 하나님의 본래적 영원한 아들이라고 쓰인다.
② 성자의 위적실존 : 성자의 위적 실존은 하나님 안에 위적 구별들을 부정하는 모든 양식적 단일신론자들에 대항하여 역설된다. 첫째, 성경은 성부와 성자를 동렬에 두어 두 사이에 위적 관계가 존재함을 지시한다. 둘째,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두는데 맏아들의 특권을 가진 탁월한 존재로 둔다. 셋째, 독생이라는 술저을 통해 성부에 의한 성자의 영원발생의 교의를 말해준다. 넷째, 로고스라는 표현을 통해 그와 성부와의 관계, 즉 언어와 발언자의 관계를 표현한다. 다섯째, 성자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묘사한다.
③ 성자의 영원발생 :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는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시고..”라고 말한다. 또한 성부와 함께 성령이 파송에 참여하신다. 성자의 발생교리는 삼위의 제 일위와 제 이위가 부자관계를 가지신다는 성경 묘사에 의해 암시된다. 첫째, 하나님의 필연적 행위이며 자연적인 행위이다. 둘째, 성부의 영원적 행위이다. 이 영원성은 성자의 선재와 성부와의 동등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셋째, 성자는 성부의 위의 명확한 형상이며 그 자신에 생명을 가진다. 넷째, 인출의 관념은 발생에 필연적으로 함의된다. 이 말은 아들과 독생의 단어가 동치라는 데서 증거된다. 다섯째, 발생은 반드시 영적 신적인 것으로 사유된다. 여섯째, 성자의 발생은 제 일위가 신적실유 안에서 자기 자신의 실존과 같은 제 이위적 실존의 근기로 되어 제 이위로 하여금 분할이나 격리, 변화없는 신적본체 전부를 소유하게 하시는 영원적 필연적 행위이다.
④ 영원한 자격에 이의 : 그리스도의 영원한 자격에 대한 이의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났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하는 아리우스파에 반대한다. 둘째, 하나님의 초자연적 동인에 의해 직위적 칭호로 불리웠다는 소시너스파에 반대한다. 셋째, 영원한 이위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들이란 칭호를 붙인 어떤 삼위일체론자들에 반대한다.
⑤ 성자의 신성 : 성자의 신성은 자주 부정되어 왔지만 성경은 성자의 신성에 대해 견실한 증거를 보인다. 첫째, 성경은 성자의 신성을 단언하여 하나님이라 칭한다. 둘째, 성자에게 신적 명칭을 적용하여 여호와, 하나님이라 칭한다. 셋째, 성자에게 영원적 존재, 편재, 전지, 전능의 신적 속성을 돌린다. 넷째, 성자가 신적 사역을 행하신다고 말한다. 다섯째, 성자에게 신적 존영을 돌린다.
⑥ 경륜적 삼위일체에 성자의 지위 : 경륜적 삼위일체의 외향적 사역에 제 이위를 점령하신다. 만물이 성부로부터 났다면 그것은 성자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며 성부가 만물의 절대적 원인이시라면 성자는 중보적 원인이 되신다.
▣ 성령
① 제 삼위에게 적용된 명칭은 하나님의 영이다. 이 ‘영’이라는 명칭은 특수한 이유에 따라 각각 상이한 형식을 취한다. 첫째, 삼위의 외향적 사역의 특수한 양식을 지시하기 위한 교호적 명칭으로서 영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둘째, 삼위의 성화사역을 통한 하나님으로서 전 우주에 거룩함의 조성자시이기 때문에 성령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셋째, 그 자신이 성부로부터 발출하여 성부와 동체적인 영이시라는 친밀한 위적관계로써 하나님의 영으로 사용되었다. 넷째, 삼위가 구속의 사역에서 가지시는 직무적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사용되었다.
② 성령의 인격성 :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서 많은 부정의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성령의 인격성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이다. 첫째, 일인칭이나 인칭대명사와 같은 인격에게 적합한 칭호들이 성령에서 돌려진다. 둘째, 인격의 특징들이 성령에게 돌려진다. 셋째, 성령과 다른 인격들과의 관계에서 성령 자신의 인격성이 포함되어 있다. 넷째, 성령을 그 자신의 능력과 구별한 구절들이 있다.
③ 성령의 발출과 밀접 : 성령의 다른 위들과의 주요 관계는 발출과 밀접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전자에 따라오는 특징이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시는데 이를 성부와 성자의 입장에서 보면 출송이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영이라는 명사는 제 삼위의 특성적인 위적 칭호이다. 그런데 그는 성부의 영이라 칭함과 동시에 성자의 영이라 칭한다. 즉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체를 소유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성부 성자로부터 오심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 또는 아들의 영이라고 칭호하고, 그리스도로부터 파송되심을 말해준다.
성령은 다른 위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을 가리켜 나의 영,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 칭호들이 이 밀접한 관계를 확실하게 증거한다.
④ 성령의 신성 : 성령의 신성을 위한 증명은 성자의 신성을 위한 증명과 유사한 방식을 취한다. 첫째, 성령에게 하나님이라는 신적 명칭들이 돌려졌다. 둘째, 영원과 편재, 전지와 전능의 신적 속성이 돌려졌다. 셋째, 창조와 섭리적 혁신, 중생과 부활 등의 신적 사역들을 행하신다. 넷째,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신다는 의미에서 예배의 대상이되신다. 다섯째, 성령의 종속은 직무적 경륜적인 의미를 지닐 때 뿐이다.
⑤ 신적 경륜에 성령의 사역 : 특수하게 구속의 특별한 경륜은 성령에게 돌려지는 역사들이다. 일반적으로 피조물에 직접 동작하셔서 사물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 성령의 특별한 임무이다. 자연계에서 성령은 창조의 사역의종결적 접촉으로서 생명을 매개하며, 사람을 영감하며 능력을 주어 직무를 수행케 한다. 구속계에서 감동을 통해 예언을 하게 하며,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구속사역의 지식을 사람에게 영감케 한다.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하시며 교회의 설립과 유지를 책임지신다.
제2편 하나님의 사역
제1장 하나님의 일반적 작정
제1절 신학과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작정
①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작정에서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이라는 명사들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 전자는 만사만물에 관계하는 넓은 범위의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를 뜻하고 후자는 특별히 구원에 관계하는 좁은 범위의 도모를 뜻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교리는 신학과 성경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장래에 생길 무엇이든지 영원부터 주권적으로 결정하시고 전 피조계에 자기의 주권적의지를 행사하시되 자기의 선정하신 계획에 의해 하신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의 신학적 논의는 하나님 안에 출발점을 둔다.
② 성경에서의 하나님의 작정 :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전 우주의 주로서 만사만물을 창조, 보존, 정치하시는 일에서 매일 매일 그의 작정을 우리에게 전시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의 역사적 실현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 실현의 배경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도모 자체에 대해 교훈한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와 완전한 권능을 가지고 장래 영원부터 되어질 모든 사건들을 과거 영원에서 미리 결정하여 두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지는 견해다.
③ 작정의 성경적 명칭 : 구약명사로서 작정의 지성적 요소를 강조하는 에차(경영, 모략), 소드(회의), 메짐마(작정, 경영, 도모) 등의 단어가 있고, 작정의 결의적 요소를 강조하는 하펠츠(뜻하심), 라촌(기뻐하심) 등의 단어가 있다. 신약명사로는 뿔레(도모), 델레마(결의적요소), 유도키아(기쁘심, 기뻐하심), 등의 단어가 있다. 신학적 명칭으로는 라틴어로는 decretum, 영어로는 decree가 쓰인다.
제2절 하나님의 작정의 증명
하나님의 작정의 진리성은 성경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증명된다.
① 성경적 증명 : 성경은 모든 사물, 특별사물, 구속사역이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 생성진행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성경은 만사만물이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되었음을 선언한다. 둘째, 성경은 특별사물들과 사건들이 작정되었음을 선언한다. 셋째, 구속사역으로서 신자들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설립과 그의 백성을 향한 사역을 작정하셨음을 선언한다.
② 합리적 증명 : 첫째, 신적 지혜에 의해 증명할 수 있는데 할 일이 클수록 더욱 계획을 수요하게 되며 계획의 실행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일들을 대비하게 된다. 이 모든 일에는 지혜가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는 반드시 계획을 가질 뿐 아니라 전 우주의 계획에 세밀한 항목가지 포용하고 있다. 둘째, 신적 예지에 의해 증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영원부터 우주의 모든 사변들을 고정되고 확실한 것으로 선견하셨으며 따라서 맹목적 운명이나 사람들의 변할 수 있는 의지는 불가하다. 이 고정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만 근거를 가진다. 셋째, 신적 불변성에 의해 증명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바는 항상 그가 하기로 목적하셨던 것이다. 넷째, 신적 자선에 의해 증명할 수 있는데 만약 신적 작정이 존재하지 않은채 우주의 사변들이 일어난다면 불안을 가진 채 암흑 가운데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유의 개념에 배치된다. 다섯째, 자연법칙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데 자연계의 모든 법칙은 창조된 때부터 지금까지 일정하여 변함이 없다. 이것은 세계 만사가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작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섯째, 학문의 증언에 의해 증명할 수 있는데 현대과학과 철학은 이 우주에 일정불변의 법칙이 있음을 증언하여 작정의 교리에 응원한다.
제3절 하나님의 작정의 성질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우주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변들을 확실케 하시는 그의 계획이다. 이것은 영원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이며 절대적 자유와 지혜로 택정하셨음을 말한다.
① 내재와 외향 : 하나님의 내향적 사역은 각 위들 상호간에 내재한 일 즉 발생과 위자와 발출과 출송인데 하나님의 작정이 외계에서 실현되기까지 하나님 안에 내재한다는 의미를 뜻한다.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것은 사물들과 행동들을 한 계획에 포용하는 외계적 사건들을 위한 준비이다. 이 신적 계획 즉 하나님의 작정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하시는 바에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그의 자유적 피조자들의 움직임도 포용한다.
② 단일계획 :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유한한 이해에게는 다수로 느껴지지만 그 자체의 성질에서는 결과들과 원인들, 목적과 그것에 필요한 방편들도 포함하는 단일한 하나의 계획이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는 작정들의 계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한 만사를 다 포괄하는 단일 총괄적 계획이 있을 뿐이다.
③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지식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에서 발언하여 그의 자유적 지식에로 진출한다. 하나님의 필연적 지식은 모든 가능적 원인 및 결과들을 포괄하는 지식이며 하나님의 작정을 위한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은 그의 자유적 지식의 기초가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의 병발적 동작에 의한 작정에 따라서 역사적 지정에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물들의 지식이다.
④ 행동하려는 작정은 그 행동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작정은 작정의 실행인 창조, 섭리, 구속과 혼동될 것이 아니다. 작정은 신격 안에 있는 우리가 아는 속성들의 외향적 사역을 위한 최초의 현현과 운용이며 외향적 사역을 실행하려는 결정이다. 따라서 결정과 실행은 구별되어야 한다.
⑤ 구경적 목적 : 하나님의 작정의 구경목적은 그 자신의 영광이다. 이것은 자주 만물의 목적으로 선언된다. 예수께서도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셨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이 목적으로 살 것이 요구되었다. 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계시에 따라 하나님의 무한, 영원, 불변하심을 믿는 자들에게 유한한 피조계 안에서 사고될 수 있는 최고선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제4절 신적 작정의 특성
① 신적 지혜에 기초함 : 작정을 가리키는 신약 명사들 중 하나인 도모는 신중한 고려와 협의를 암시하는데 하나님 삼위 사이의 상호교제를 함의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숙고의 요소가 있는 것을 암시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에 근시나 준순을 함의하는 숙고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지적인 계획이 있었음을 말한다.
작정의 지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실현에 전개된 지혜에 의해 추론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모의 지혜성은 하나님의 영구확립성에 의해 추론된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유한한 마음에 설명되지 못하나 그것은 배리하거나 불합리한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② 자유적 고의적임 : 작정이 기원한 의지는 자유의지이며 신적 지성 혹은 결의의 본능적이나 필연적인 행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가능한 최선의 계획을 가지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에 속한 일이며 필연이 없고 다만 무한한 지혜가 지혜롭게 행동하리라는 확실성만 존재한다.
③ 영원적임 : 신적실유에는 시간의 계기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적이다. 동시에 영원이 동시성과 비계기성에도 참여한다. 작정의 영원성 안에 있는 상이한 요소들의 순서는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것이다.
④ 불변적임 :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원적 불변적이시며 따라서 영원부터 지혜와 지식에서 무한하여 각 피조물에 관한 사상과 목적에서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계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무식의 실수로 인해서나 실행력의 흠결로 인해 자기의 작정을 변하실 필요가 없으시며 신실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작정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⑤ 효과적임 :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동등으로 효과적이어서 작정된 사건들의 확실히 올 것을 무오히 결정한다. 아무 것도 그의 계획을 좌절하지 못한다.
⑥ 절대적 무조건적임 : 하나님의 작정은 그 자체가 아닌 무엇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작정의 실행을 위한 방편들과 정상들까지도 작정 안에 결정되고 포함되어 있다. 작정의 절대성은 작정의 영원성, 불변성,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존하는 사실로부터 추론된다.
⑦ 보편적 전 포함적임 : 하나님의 작정은 세계에 생성하는 바 무엇이든지 다 포괄한다. 또한 현실적으로 생성하는 모든 사물을 전부 포괄한다. 하나님의 영원성, 불변성, 전지, 예지, 전능으로부터 나오는 추론은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의해 진행된다.
⑧ 죄에 관하여는 허용적임 : 하나님은 그의 이성적 피조물의 자유행동의 결과를 선견하시고 그 결과인 범죄를 허용하기로 작정하셨다. 그 작정은 단순히 사람이 자기의 즐겨하는 대로 하도록 버려두기로 하는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5절 이의와 실용적 가치
오직 개혁파 신학만이 작정의 교리에 대해 정당한 해설을 제출한다. 그 이외의 여러 신학체계들은 이것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① 작정의 교리는 숙명론을 포함하기에 용인될 수 없다고 한다. 사건들이 비합리적인 우주과정에 따라 생기한다는 것인데 작정의 교리는 선하고 합리한 하나님의 뜻이 사건들을 미리 결정하였다고 가르치기에 숙명론과 혼동할 수 없다.
②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는 사람의 도덕적 자유와 충돌한다. 사람은 이성적 자결정의 능력을 가진 자유적 동인으로 자기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사를 수행하기로 작정하셨고 사람을 위해서도 그의 생의 진로를 결정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이 사람의 자유동작을 작정하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하나님의 확실성과 예지는 사람의 자유동작과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실행도 자유와 충돌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는 하나님이 작정하여 주신 한도 안에서의 자유이다.
③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생성한다면 사람은 장래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없고 구원을 위해 노력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의 작정은 실현된 후에 알려지는 것이기에 인생행동의 규칙으로 발령될 수 없고 실용될 수 없다. 오히려 작정은 확고한 신념을 통해 노력을 격려한다.
④ 하나님의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 만사가 결정된다면 죄 역시도 하나님의 조성하신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에게 불의와 어두움이 없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작정의 교리는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들인 자유적 도덕적 실유들의 조성자로 만드는 것 뿐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들의 자택한 진로에서 악하며 악을 행할 인생의지들을 창조하고 보존하기로 작정하신 것이며, 그들의 자유동작을 지지하신 것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작정은 기성적 작정이 아니라 허용적 작정이다.
제2장 예정
제1절 신학과 성경에서의 예정의 교리
① 신학상 예정의 교리 :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혼동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과 특수적인 것으로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이는 만사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일반적 작정의 논의에서 인생의 구원에 관한 특수한 예정의 고찰로 나아간다.
② 성경상 예정의 교리 : 예정의 교리는 예로부터 많은 비난과 반대를 받아왔지만 성경을 그 본연의 의미로 읽고 해석하면 판연한 예정교리의 지위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칼빈주의를 반대하는 이성론자들과 무신앙자들도 고백하는 바이다.
③ 예정의 성경적 명사 : 성경은 예정의 진리를 명시하는 여러 가지 명사들을 포함한다. 이 중에는 예정으로 직역되는 것도 있고 그 의미만 내포하는 것도 있다.
첫째, 히브리어 ‘야다’와 헬라어 ‘기노스케인(지식)’, ‘프로기노스케인’, ‘프로그노시스(예지) 이 말들은 단순히 지능적 예지나 선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혹자를 총애의 대상으로 삼는 그리하여 선정의 관념에 접근하는 선택적 지식을 지시한다. 둘째, 히브리어 ‘빠카르’와 헬라어 ‘에클레게스다이’, ‘에클로게(선택)’ 이 말들은 죄인들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과 관련된 선택 즉 열의의 수반함이 있는 선택의 의미를 강조한다. 셋째, 헬라어 ‘프로오리제인’과 ‘프리오리스모스(예정)’ 이 말들은 항상 절대적 예정에 쓰인다. 넷째, 헬라어 ‘프로티데나이’와 ‘프로데시스(에정)’ 이 말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 앞에 일정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에 확호 집착하신다는 사실에 주의를 지향한다.
신학상 예정이라는 말은 항상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지만 위에 말한 의미들과 결합하여 구원론적인 명사로 쓰인다. 이는 때로는 작정과 같은 의미로써 하나님의 모든 영원한 계획을 포함하기도 하며, 도덕적 피조물에 관한 계획을 지시하기도 하고, 타락한 사람들에 관계된 하나님의 도모를 지시하기도 한다.
제2절 예정의 주체와 대상
① 예정의 주체: 예정은 그 모든 부분에서 도모와 의지가 동일하신 하나님 삼위의 일치한 행위이다. 그러나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특별히 귀속시키는 것과 같이 예정의 주권적 행위는 성부에게 특별히 귀속시킨다.
② 예정의 대상 : 예정은 그 관계하는 범위에서 하나님의 이성적 피조물들에 국한한다. 이성적 피조물들 중에도 타락한 인류가 예정의 본격적 대상으로 성경에서 가장 흔히 언급된다. 따라서 타락한 모든 인류는 선악을 물론하고 예정의 대상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택하신 자로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위한 예정의 대상이실 수 없으나 몇 가지 의미에서 예정을 받으셨다. 첫째, 성자에게 향한 성부의 특별한 총애가 영원부터 그에게 베풀어졌다. 둘째, 중보된 그의 품질로 그는 하나님의 열의의 대상이시었다. 셋째, 중보로서의 그는 신자들이 모범해야 될 특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셨다. 넷째, 성부로부터 천국을 위임받아 신자들에게 전해주시게 되셨다.
③ 그리스도는 예정의 주체이신가? 이 문제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선택은 구원의 전 과정과 밀접히 연락되어 있음이 의심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야 한다. 이 선택과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연락은 자주 논의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성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동하시고 그리스도는 성부와 함께 행동하신다.
제3절 선택
예정은 선택과 유기의 두 부분을 포함한다. 예정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 하나님의 작정이다. 한 부분인 선택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계획이요, 다른 부분인 유기는 죄인들의 영벌에 향한 준비다. 한 가지 분명히 할 것은 선택되어 구원 얻는 자들의 구원의 이유와 근거는 그 자신들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① 선택의 종류와 정의 : 첫째, 민족적 선택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 어떤 민족을 택하여 다른 민족들보다 더 큰 영적 내지 지상적 행복을 받게 하신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열의와 사랑에 있다. 둘째, 은혜의 외면적 수단에 향한 선택이 있다. 이는 복음을 듣고 읽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과 사귀며 기독교의 감화를 받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하는 선택이다. 셋째, 직무적 선택이 있다. 이는 어떤 천직을 향한 선택이다. 넷째, 구원을 위한 선택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영원한 영광의 후사로 되기 위한 개인들의 선택이다. 이 모든 선택들은 하나님이 자기의 주권적 열의로 선견된 공로의 연고 없이 죄인들 중에서 일정수를 선출하여 특별은혜와 영원한 구원을 받아 누리는 자 되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행위다.
② 선택의 특성 : 첫째, 주권적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이며 그의 기쁘신 뜻의 표현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자진하여 사람을 선택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나오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열의이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당연성을 가진다. 하나님의 선택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능하고, 하나님만이 속죄를 확실케 하실 뿐 아니라 사람의 구원에 응용하는 일도 확실케 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의 희망이 있으며 이것이 복된 사건이고 최대한 위안이 원천이 된다. 둘째, 무조건적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의 과실이며 전능의 창조물이기에 무조건 적이며 신자들의 신앙과 선행은 선택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안에 사람의 행위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이 경륜에는 인생의 공로는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구속이 있을 뿐이다. 넷째, 불변적이다. 선택은 불변적이다. 피택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한다. 하나님은 인생과 같지 아니하여 지식, 능력, 신실에 결함이 없다. 다섯째, 영원적이다. 이 신적 선택은 결코 어떤 시간 안의 선택과 동일시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영원적인 것이다. 여섯째, 불가항적이다. 선택의 실행은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의한 것으로 사람은 이것을 항거하여 좌절하지 못한다. 이엇은 하나님이 능히 실제로 사람의 영에 감화를 주어 그리 하여금 의지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③ 피택자의 다수 : 피택자의 다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주권과 임의결정의 사건이다. 동시에 피택자의 수는 비피택자의 그것보다 더 많이 크다고 성경이 가르친다. 이 타락한 세계에서의 구속주의 나라는 사단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한 것으로 묘사된다.
④ 선택의 목적 : 영원한 선택의 목적은 가까이 있는 것과 최종적인 것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근재목적은 피택자의 구원이다. 사람이 구원얻기로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사람의 구원도 이 목적에 종속한다.
제4절 유기
유기의 문제는 많은 반대를 받아온 어려운 교리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교리의 정당성을 몇 가지로 증명한 후 요의에 들어가는 것이 편리한 순서일 것이다.
① 추론상 정다성 : 절대적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들의 영생을 향한 선정과 함께 남은 사람들의 영벌을 향한 선정을 논리적으로 주장한다. 전자는 고귀한 특권과 운명에 후자는 참여하지 못한다. 영원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들 중의 얼마를 그들의 죄가운데 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다. 유기의 교리는 원죄의 길에 기초한다.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의 청구권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에 대해 반대할 권리가 없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적 사역 아래 어떤 사람들은 복음과 기타 은혜의 방편 없이 버려둔 바 디는 것은 칼빈주의의 예정의 교리에 포함된 원리를 실질적으로 실현함이다.
② 성경적 증명 :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유기의 가르침을 명료하고 확실하게 보여준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악인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고, 진리를 알 수 없게 봉쇄된 자들이 존재하며, 악한 마음이 강퍅케 되어 회개의 소망이 없는 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유기의 교리에 반항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 찬 무식과 편견으로 인한 것을 따름이다.
③ 권위자들과 신경들의 지원 : 어거스틴은 선택의 교리와 함께 유기의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칼빈도 이 교리의 중대성을 깊이 의식하였다. 루터도 의인의 영원한 구원과 꼭 같이 악인의 영원한 멸망을 하나님의 계획에 귀속시켰다. 개혁파 신경들도 선택을 말할 뿐 아니라 유기를 말하며 이것을 예정의 근본적인 부분으로 말한다.
④ 요의 :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에 영원히 잃어진 자들의 잃어짐도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는 것은 필연한 진리다. 따라서 유기는 자기들의 죄 때문에 최종적으로 정죄 받을 인류의 한 부분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한 국면이다.
이요소-유기의 작정은 두 요소로 구성된다.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려는 결정(간과)과 간과된 자들을 형벌하려는 결정(정죄)이다. 이 두 요소 사이에는 중요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선택하지 않으시고 지나가 버리시는 소극적인 일이며 그 이유가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후자는 적극적이요 동력적이다. 간과된 사람들은 수욕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실제적으로 처치된다. 이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 즉 죄를 형벌하는 행위이다.
교리적 움직임에 있어서 정죄에 관하여 삭제하려는 경향이 교계에 있어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기의 작정에서 둘째 요소를 제외하거나 그것을 따로 선 작정으로 볼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유기의 적극적 방면은 선택의 반대로 성경에서 극히 명백하게 가르친 바 되어 우리의 무시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별은혜의 보류-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간과하시는 소극적 행위에서 주지 않기로 보류하신 것은 특별은혜, 즉 죄인을 변화하여 구원 얻게 하시는 은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유기된 사람들이 현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연 받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피택자들이 유기된 자들보다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그들만을 하나님의 중생시키시며 구원하시는 특별은혜를 받아 누리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의지와 동작의 특이한 관계-유기에 대해 하나님의 의지와 동작이 가지는 관계는 선택에 대한 그것과 같지 않다. 첫째, 열의와 직접동력이 없다. 하나님은 피기자들에서 열의로 직접동작하여 그들의 타락, 불의한 생태, 죄악한 행위의 책임적 조상되가 되셔서 그들의 유기를 직접 실현하시지 않는다. 둘째, 만족과 기뻐하심이 없다. 하나님은 유기의 작정에 의해 결과(형벌과 수난)하시는 바를 만족과 기쁨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신다. 셋째,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나 계속하는 것이나 모두 사람 자신이 책임을 진다.
병행균형과 이중예정의 문제-구원의 계획은 유기의 사실로 더불어 병행적이 아니며 균형적이 아니다. 구원얻은 자들의 구원의 믿음직한 원인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으며, 멸망자의 멸망의 책임적 원인은 멸망자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에서 동등으로 명확하다.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이중예정은 하나님이 피기자들의 멸망의 책임이 있는 원인이시라는 견해를 지시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런 의미는성경의 부정을 받는다.
유기의 작정의 목적-비피택자의 정죄는 하나님의 공의의 영원한 현현을 목적으로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의에 대한 상급을 요구함 같이 죄로 인한 형벌을 확실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작정 없이는 공의의 신적 속성이 결코 평가될 수 없다. 또 이 유기의 작정은 피택자들에 관한 종속적 목적들에 이바지 한다.
제5절 전택설과 후택설
칼빈주의자들 가운데 구원의 계획에 포함된 사건들의 순서에 관하여 의견의 상이가 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예정의 사상적 위치가 결정된다.
① 유래와 쟁점 : 구원에 관한 예정의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로 나누어진다. 또 이와 관련해서 유기의 해석에도 상이가 있다. 제 일의 견해에 의하면 유기는 구경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초하였고 제 이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기초적으로 죄와 연락되었다.
정확하게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쟁점은 무엇인가? 첫째, 예정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전택설자들은 창조하고 타락을 허용하려는 작정을 예정의 작정에 포함시키나 후택설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적 작정에 관설시키고 예정의 특별한 작정에서 제외한다. 둘째, 논리적 순서에 관한 것이다. 타락을 허용하려는 작정들이 구속의 작정을 향한 방편이었는가에 대해 전택설은 긍정하고 후택설은 부정한다. 셋째, 예정의 인격적 요소와 창조 및 타락허용의 작정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전택설은 예정의 인격적 요소를 그렇게 확장하고 후택설은 그리하지 않는다. 넷째,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것이다. 전택설은 유기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으로 보고 후택설은 그것을 하나님의 공의의 행동으로 본다.
② 전택설 : 전택설은 창조하고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들을 예정의 작정에 포함시키고 논리적인 순서에 치중하며 예정의 인격적 요소를 창조와 타락허용의 작정들에까지 확장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전택설은 구원의 계획에 포함된 작정들의 순서를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첫째, 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가능뿐으로 존재하는 관점적 피조물들의 얼마의 구원과 나머지의 침륜에 자기의 은혜와 공의를 크게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작정. 둘째, 이 같이 선택되고 유기된 자들을 창조하시려는 작정. 셋째, 그들의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 넷째, 피택자들을 칭의하시고 비피택자들을 정죄하시려는 작정이다.
전택설을 논증할 수 있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주권에 치중하는 성구들(토기장이의 비유)이 있다. 둘째, 자연의 사역에 구속사역의 예증을 포함하도록 제정되었음을 암시한다. 셋째, 논리적이고 통일적이다. 넷째, 천사들에 관한 예정의 유추가 있다. 이와는 반대로 전택설을 반증하는 경우도 있다. 첫째, 전택설이 말하는 창조될 수 있는 사람이란 공무다. 그리고 이미 창조된 줄로 고찰되지 않은 공부의 사람은 사랑을 받거나 선택을 받기 불능하다. 둘째, 전택설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전택설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이 자기의 직접동력에 의해 죄를 세계에 끌어 들이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전택설에 의한 예정은 타락되지 않은 무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성경적인 신관에 조화되지 않는다. 넷째, 전택설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 다섯째, 전택설은 유기의 작정을 선택의 작정과 일반으로 절대적이 되게 만든다. 즉 유기의 작정에 죄의 고찰이 없었던 것이라 한다. 여섯째, 전택설의 기초 위에는 유익한 은혜언약의 교리와 중보의 교리를 구성하기 불가능하다
③ 후택설 : 후택설은 창조와 타락을 향한 작정을 선택과 유기를 향한 예정의 작정 보다 앞선 것으로 보아 보다 더 역사적인 순서를 제시하며 예정의 인격적 요소는 창조와 타락허용의 작정들이 있은 후에 작정에 나타났다고 보며 예정의 한 부분인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의 행동 뿐 아니라 그의 공의의 행동도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후택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후택설자들은 선택의 대상들을 죄의 상태 중에 있는 자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합되어 있는 자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로 제시하는 성구들에 의존한다. 둘째, 후택설은 신적 작정들의 순서가 전택설보다 자연스러우며 신적 작정 실시의 역사적 순서와 조호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그 실시에서와 같이 그 작정에서도 인과적 순서가 있다. 셋째, 후택설은 모든 부분이 다 잘 연결되며 조화되어 분리될 수 없는 사슬을 형성한다고 본다. 넷째, 역사적 지위로 보아 후택설은 전택설보다 우월하다.
후택설의 반증은 다음과 같다. 첫째, 후택설은 죄의 문제를 해결치 못할 뿐 아니라 그렇다고 자천하지도 않는다. 둘째, 하나님이 죄를 의지하셨다는 진술을 기피하고 그가 그것을 허용하셨다는 단언을 한다. 셋째, 유기를 하나님의 공의의 행동으로 설명한다. 넷째, 후택설은 신적 작정의 통일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 여러 부분을 연락없는 무엇으로 만든다.
④ 학적 신경의 권위의 태도 : 많은 권위적 신학자들은 전태과 후택의 견해 중 어느 하나에 속하면서도 두 견해가 전적으로 상호 배치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다.
제6절 다른 교파들의 예정관
어거스틴주의, 칼빈주의의 숭고하고 원만한 예정관에 대립하여 루터파, 알미니안파, 웨슬레파의 저하되고 축소된 예정관이 있다. 전자는 선택과 유기를 포함하는 이중예정, 무조건선택의 절대적 예정을 주장하는데 비해, 후자는 선택만을 포함하는 단일예정, 신앙과 거룩한 생활의 선견에 의한 조건적 예정을 말한다.
① 루터파의 교리 : 자연인은 영적으로 선한 무엇을 위해서든지 전적으로 무능하다. 따라서 그가 능히 중생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거나 그 일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수 없다. 중생은 하나님의 일이요, 어떤 의미나 정도로든지 사람의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효과적으로 저항될 수 있다. 중생은 독점적으로 성령의 사역이지만 구원의 실패는 제공하는 은혜에 대한 사람의 자원적 저항으로 인한 것이다.
② 알미니안파의 교리 : 모든 사람이 아담으로부터 부패한 성질을 인출하고 그것에 이해 죄에 경향하지만 이 부패는 죄의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자원적 행동들과 그런 행동들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 또한 사람은 그의 타락에 의해 그의 선을 행할 재능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재능만으로는 영혼의 하나님께 돌아감을 보장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회심과 거룩한 생활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타락 이후에 그들에게 속하는 재능을 운용하여 이 신적 은혜와 협력하고 그로써 회심되고 구원얻는다.
③ 웨슬레파 알미니안주의의 교리 : 타락 이후 사람은 전적오염과 패괴의 상태에 있지만 원죄는 다만 우리의 성질의 외형적 저하가 아니라 전적인 도덕적 패괴다. 이 성질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아무 능력도 없다. 아담의 죄가 가져온 죄책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모든 사람들에게 온 칭의에 의해 제거된다. 또한 하나님의 영과 협력하는 사람의 재능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편적 영향 때문이다.
④ 무시의 경향 : 위에 거론한 몇 파의 예정관은 제 일부인 선택만을 논건으로 삼고 제 이부인 유기는 고찰하지 않으며 선택도 조건적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의 구원 얻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에 있다는데 동의한다.
제3장 창조 개관
신적 작정이 있은 후에는 자연히 그것의 실행이 있을 것이고, 그것의 실행은 창조의 역사로 시작한다. 창조는 시간이 순서로 제일일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먼저이다.
제1절 성경에서의 창조교리
① 성경적 증언 : 창조는 과학이나 이성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기 불능한 진리다. 따라서 창조교리의 증명을 위해 우리는 성경에 전적으로 의뢰한다. 창조의 교리를 향한 성경적 증언은 성경의 단일 또는 국한된 부분에 발견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며 세계의 창조를 역사적 사실로 또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으로 말하는 다수의 명료한 진술들을 포괄한다.
② 성경적 명사 : 성경에서 창조를 가리켜 사용된 명사들의 의미는 광범하고 엄밀하지 않다. 첫째, 히브리어 ‘바라’와 헬라어 ‘크티제인’-성경은 이 말들을 항상 절대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제 이차적 의미의 창조를 가리켰다. 또한 섭리적 지도 아래 생긴 사물을 지시함에도 이 말들을 사용하였다. 둘째, ‘아샇’와 ‘포이에인’, ‘야차르’와 ‘플낫소’-이것은 창조한다와 동의어로 사용된 다른 두 말 ‘만든다’, ‘짓는다’의 원어들이다. 이것은 주로 이의적 창조의, 섭리적 공작의 의미를 지닌다.
제2절 창조의 요의
창조의 성경적 교리는 그 핵심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있다. 이것은 만물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아 존재를 가졌다고 선언함이다. 이 선언에는 몇가지 중요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주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행동에 의해 시작을 가진 것이라는 것, 그 창조적 행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자유적 시간적인 동작이며 무로부터 판이한 물건을 산출한 종결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① 범위와 정의 : 하나님이 자기의 권능의 말씀으로 제 이원인의 간섭없이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셨다는 것은 성경의 교훈이요, 교회의 유구한 교리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는 이렇게 무로부터라는 일정한 범위에 국한되어 있다. 창조의 법위에 있어서 인용된 성구들은 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강조함에서 협의의 창조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이 창조의 기본적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의 넓은 의미를 가리키는 명사들이 완만하게 사용되는 때 많은데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창조가 좁은 뜻과 넓은 뜻으로 이중의 의미로 이해된다. 창조의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논의가 있으니 직접창조와 간접창조에 관한 진술이다. 그러나 직접과 간접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인다.
②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동 : 창조는 하나님의 삼위가 다 참여하셨다는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동이다.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창조의 공작자라고 가르치며 이 사실이 우상들과 구별한다고 말한다. 창조의 사역에 성부가 전면에 나타나심은 사실이나 이 사역은 또한 성자나성령의 작업으로 명백히 인정된다. 창조의 사역은 3위간에 분배된 것이 아니라 그 전부가 각 위에게 돌려졌다.
③ 하나님의 자유적 행동 : 성경은 유형 무형의 만물이 자유로운 창조의 행동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였다는 것을 긍정한다. 우주는 기원을 가지되 기존물질의 형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유의지와 말씀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절대적 필연인가? 상대적 필연인가? 많은 철학들과 신학자들이 창조를 하나님의 필연적 행동으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 견해는 아니다. 첫째, 하나님의 전능은 결코 필연적으로 현실적 창조를 함의하지 않고 창조할 권능만을 함의한다. 둘째, 창조는 유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게 완전한 만족을 공급하기 불능하다. 셋째, 물질적 우주와 특별히 죄악한 실유들을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질로부터의 유출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성질에 감손을 가져온다. 넷째, 실질을 참여하는 유출은 또한 그것의 유출하는 실유의 속성들을 참여한다.
하나님의 외향적 사역에 돌려지는 필연은 그 무엇이든지 다 신적 작정과 그것의 결과인 사물의 소질에게 제약된 필연이다.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지한 필연이기 때문에 절대적 의미의 필연이 아니다. 성경적 창조관은 창조를 우주의 논리적 필연적인 인출 뿐으로 보는 이론들에 반항한다.
④ 하나님의 시간적 행동 : 세계는 시간과 함께 창조되어 시작을 가졌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따라서 창조는 하나님의 시간적 행동이라는 것은 창조의 관념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성경이 창조의 때를 태초라고 말한 것은 절대적 의미로 모든 시간적 사물의 시작, 심지어 시간자체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최선이다.
⑤ 무로부터 무엇을 만들어 내는 행동 :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하나님이 태초에 무에서 기존재료의 사용없이 우주만물을 만들어 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라는 의미의 단어는 히브리어 ‘빠라’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 말 자체는 무로부터 무엇을 만들어냄을 의미하지 않고 섭리의 공작에도 사용되지만 오직 신적공작에만 사용된다.
어떤 이들은 무로부터 창조라는 표현을 세계가 원인업이 생성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하여 일반적으로 공리와 같이 간주되는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오지 못한다고 하며 비평하는데 이들의 태도는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로부터의 창조를 성경적 기초를 통해 확인한다. 첫째, 창세기 1:1은 창조사역의 시초를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이미 있는 재료로부터 만들어 내셨다고 서술하지 않는다. 둘째, 히브리서 11:3은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을 단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신앙으로만 그 사실을 이해함을 말한다. 셋째, 하나님에 의한 세계의 절대적 창조를 솔직한 말없이 함의적으로 가르치는 구절들도 있다.
⑥ 피조물의 판이와 의존 : 창조의 산물인 세계는 창조주와 판이하되 창조주에게 의존한다. 세계는 하나님이 아니요 하나님의 한 부분도 아니다. 절대적으로 판이한 무엇이다. 하나님과 피조세계 사이에는 질적 차이인 전타성이 있으며 심히 멀어서 미칠 수 없는 거리가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창조 후에 세계로부터 물러가지 않으시고 그것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신다.
⑦ 창조의 최종성 :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은 사람의 창조와 함께 종말을 고하였다. 그 후에는 다시 창조가 있지 않다. 계속적 창조론은 태초에 여사한 신적 창조적 권능이 항상 역사하여 전능한 정력으로 만물을 산출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이론은 몇 가지 면에서 적합하지 않다. 첫째, 이 이론은 우리의 외계에 참되고 고유한 실체들이 존재함을 믿는 우리의 생득적 신념에 위반한다. 둘째, 논리적으로 추진되면 하나님만이 참된 실유이고 그 밖에 모든 것은 실재 없는 현상뿐이라는 입장에로 나아가 범신론에 이른다. 셋째, 인과법칙을 믿는 우리의 신념에 충돌한다. 넷째, 창조가 완성되었다고 제시하는 성경의 교훈에 거슬려 행한다.
제3절 창조의 계획과 목적
① 계획성 : 창조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한 부분의 실행이다. 그 작정은 창조 하시려는 결의만 아니라 그 사역의 세밀한 내용의 계획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능을 소유하시기에 세밀한 계획 없이 창조의 대사역을 수행하셨을 수 없다. 창조사역의 내용과 피조세계의 현상을 살펴봐도 창조의 계획성은 확실하다. 창조는 모든 부분들이 연락되어 있는 하나의 계획에 의한 일이다. 피조세계는 만물만상이 격리 또는 문난한 상태에 있지 않고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또 질서적이어서 조화적 총전을 이룩한다. 그리고 각종 각물이 특수한 작용들과 적응성들을 가져 목적을 향한 수단을 구비하고 있다. 피조세계의 이 같은 현상은 영적 통찰력을 가진 마음으로 하여금 창조의 계획성을 추상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문제점이 생겨난다. 과연 창조의 구경목적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에 의거하여 사고할 때 그는 영원적 불변적이시며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성을 소유하시기에 그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큰 목적이 반드시 있어 그의 모든 작업에 조준되었을 것이며 그 모든 작업은 그 목적의 수단으로 되었을 것이다.
② 인생행복론 : 하나님은 그 자신에게 충족하시어서 아무 것도 수요하였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을 창조의 목적으로 삼으셨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이 그를 고무하여 세계를 창조하셨는데 그 목적은 오직 그의 피조물 특별히 사람의 최고 행복을 목적으로 하셨다.
그러나 이 이론은 몇가지 이유로 부족하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와 지선이고,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둘째, 피조물계에 발견되는 모든 것을 다 이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성경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피조물 안에 있는 무엇을 하나님의 주요목적으로 제시한 일이 전혀 없고 피조물의 개인적 복리나 공적 복리를 피조물 자신의 주요목적으로 제시하지도 않았다.
③ 하나님의 영광 선포론 : 교회는 창조의 참 목적을 하나님 이외의 무엇에 발견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 안에 특별히 그의 고유적 우수의 외면적 현현에서 찾았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실유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심이 아니다. 그것이 최종목적에 포함되기는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창조를 통해 오직 자기의 영공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둘째, 하나님의 이 현현은 공허한 전시로 피조물들의 경앙을 받기 위한 개진 뿐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녕과 완전한 행복을 조장하기로 목적한다. 또한 피조물들의 심정을 창조주의 찬송과 동화시키기와 그들의 영혼들로부터 감사, 사랑, 숭경을 불러내기를 추구한다. 셋째, 이 교리는 몇 가지 이유의 지원을 받는다. 즉 이 교리는 성경의 증언에 기초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선포는 창조의 최고목적이 될만하여 이 목적은 하나님의 독립성과 주권에 조응하며 종목목적들을 포함할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 득달된다.
④ 하나님의 영광 선포론에 이의 : 첫째, 이기적 설계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교리는 우주의 설계를 이기적 설계로 만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이기주의와 자아존중을 구별하지 못하며 인생의 표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며 수난과 멸망의 원인을 정확하기 이해하지 못함에서 기인한 것이다. 둘째, 신적 자족독립에 배치한다는 설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교리는 하나님의 자족과 독립에 배치한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추상하면 현저히 그의 완전성은 어떤 점에서 결함을 가지거나, 창조의 작업이 그 결함을 보충하고 신적 완전성에 이바지하거나,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계에 의뢰한 듯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론은 정확하지 않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해 세계를 창조하신 사실은 그가 결핍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며 자기의 고유적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이며 인생의 목적수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가하는 것이 아니다.
제4절 창조의 합리성
창조의 교리는 과학이나 이성에 의해 증명되기 불능하고 성경에서만 인출되며 오직 신앙으로만 수납된다. 그러나 창조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중대문제이므로 세속적 학문계에서도 자주 흥미를 가지고 논평되어 찬부의 양론이 대립함을 보게 된다.
① 절대적 창조의 합리성 : 감성과 의식에 의하여 또는 물질의 근본적 구조에 의해 절대적 창조의 합리성이 논증된다. 첫째, 절대적 의존감-피조물의 창조주에의 절대적 의존감은 각 사람의 심정에 고유적이며 모든 성경교훈에 내포되어 있기에 하나님에 대한 세계의 절대적 창조만이 이 절대적 의존감과 조응한다. 둘째, 의식의 증거-의식의 증거에 의해 보더라도 이 교리는 참되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의 영혼들은 판연한 개체적 실재들이요, 하나님의 부분들이나 작은 조각들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며 또한 그것들이 영원적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들은 창조된 것이 분명하다. 셋째,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무한히 지혜롭고 능하신 인격적 영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신다는 것, 그가 절대적 창조의 권능을 가졌다고 가정하는 때에 그의 존재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함에 충족하다는 것을 시인한다면 무로부터의 절대적 창조에 난관을 느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넷째, 원자들의 일양성-만일 완성된 우주의 구조에서 발견되는 의장이 신적 형성자를 증명한다면 물질의 기본적 구조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의장도 반드시 신적 창조주를 증명한다.
② 우주론적 목적논적 논증 : 우리는 우리와 우주가 존재한 줄 아나 우리와 우주가 자존재한 것일 수 없음은 유한물은 그 자체 안에 기원을 가지지 못한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원인없는 원인인 실유, 자존자의 실유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주의 기원을 고찰함에 있어서 자존재하는 제 일원인의 가정이 시인된다면 우리는 다시 일보를 나가서 그 제 일원인은 반드시 마음일 것을 추단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주와 같이 통일과 체계 있는 총전은 마음에서만 나왔을 터이기 때문이다.
③ 과학의 무능과 열망 : 현대과학 자체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기원이나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하겠노라고 자주 자백한다. 과학은 만물의 기원을 알아낼 능력을 가지지 못했으나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여 긴장하며 사람의 마음은 그 신비의 해결을 열망하고 있다.
④ 과학인의 신앙 : 사람의 마음은 과학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하다 해서 불가지주의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이 대신비의 해결을 열망한다. 그들의 열망은 무로부터 창조의 계시진리를 믿어 만족하며 안정을 보는 때 적지 않다. 또한 과학연구의 결과들에서 이 교리의 진리성을 지원하는 증거들을 찾아 자타의 창조신앙을 견고케 하는 자도 나타난다.
제5절 세계의 기원에 관한 다양이론
성경의 창조교리는 세계의 기원에 관한 유일한 견해가 아니다. 다른 몇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이 몇 이론은 세속적 학문계 사상계에서 창조교리에 대립하는 이의들이다.
① 이원론 : 두 종류의 자존하는 본원 즉 하나님과 물질이 있어 양자는 서로 판이하며 함께 영원적이다. 그러나 본래의 물질은 소극적이며 불완전한 실질 뿐으로서 하나님에게 종속하며 그의 의지의 기구로 봉사한다는 것이다. 근대의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도덕적 근거에서, 신격과 병존하여 그의 사역에서 그를 제약하며 제한하는 영원한 물질이나 다른 독립적 본원이 있다는 옛 플라토식 교설을 부흥시켰다.
이원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창조주가 아니라 사계의 구합자 세공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오지 못한다는 원리를 그릇 쓰며 이것의 물질영원설은 불합리하며 두 영원적 실질을 가정하는 것은 비철학적이며 선이 악을 이길 보증이 없기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② 유출론 : 세계는 신적 실유의 계기적 진화에 의한 필연적 유출이라고 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과 세계는 본질적으로 하나이기에 세계는 하나님의 현상적 현현이다. 유출의 관념은 모든 범신적 이론들의 특성이고 항상 동일한 양식으로 진술되지 않는다.
유출론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초월성을 부정하며, 그의 주권을 박탈하며 그의 거룩에 위험을 초래하기에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③ 진화론 : 진화론은 진화하는 물질이 이미 있는 줄로 예상한다. 그들은 이미 있은 물질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해 물질영원설이나 창조교리에 의뢰하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자들은 물질의 영원성을 믿고 생명의 기원을 자연발생에 돌렸다. 이 이론은 질서 있는 우주는 그것의 유기물체들이 다 자연법칙과 자연도태에 의해 생기하였다고 본다. 이것은 세계의 생명의 추세에 지성적 의장과 목적을 전적으로 제외한다.
우리는 이것도 동의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의 각 방면과 인생의 모든 경험의 반대를 받는 빈약한 무신론이며 맹목적인 우연론이다. 물질의 영원성을 믿는 것은 비기독교적 또는 무신론적일 뿐 아니라 또한 일반적으로 불신임된다. 또한 세력을 보편적, 불가분리적 특성으로 한 물질이 세계의 설명에 충족하다고 하는 관념은 오늘날의 과학계에 많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④ 우주 영원설 : 우주는 존재의 전체며 영원부터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우주와 지구의 시작에 관한 두 주요가설이 제출되었는데 하나는 성운가설이고 다른 하나는 소행성체 가설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우주는 영원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제4장 세계의 창조
제1절 창조의 성경적 보도
히브리인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우주의 기원과 그 본래적 혼돈이 질서적 세계로 변한 방식에 관한 보도들을 가지고 있다.
① 성경적 보도의 목적과 견지 : 성경의 첫머리에 나타난 영감된 창조기록은 어떤 목적을 가진 것인가? 이 기록의 기본목적은 사람들에게 지질학적 역사의 순열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흥대하고 항상 임재하는 문제에 관해 무엇을 계시하려는 것이다. 첫째,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는 본래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에서 나왔다. 둘째, 하나님만이 세계의 창조주시다. 셋째, 세계를 창조하심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전능, 전지, 전선의 영원한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넷째,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고귀한 기원과 존위를 가졌다. 다섯쨰, 인류는 타락을 가지며 이로 인해 원죄의 기원 그리고 구속의 필요를 보여준다.
창조기록의 견지는 이중이다. 먼저 창조의 설화는 세계의 창조를 거론하되 영적 세계에 주의를 향하지 않고 물질세계에만 관심을 두며 이것을 무엇보다도 사람의 서식소와 활동무대로 제시한다. 또한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하여 창조의 역사에 관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지도를 받으며 매사를 그와 관계하여 고찰한다.
② 창조의 보도의 기원 : 창조설화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반복 제기 되었는데 이에 대한 새로운 흥미는 바벨론 사람의 창조설화의 발견 때문에 고취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 설화와 바벨론 사람의 창조설화는 어떤 면에서는 유사하며 어떤 면에서는 상이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성경적 설화가 바벨론 문원으로부터 인출되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벨론 문원과 성경적 설화는 다르다는 것이다. 창세기에는 유일신주의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요소들의 주재시다. 하나님의 위엄은 최고하다. 따라서 우리는 영구한 영적 가치를 가진 장엄하고 숭고한 창조의 보도를 갖고 있다.
③ 창 1:1,2의 원시적 창조 : 창조설화는 창세기 1:1절의 장엄하고 단순하고 유명한 한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로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창조설화 전부의 제목으로 본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위의 구절은 제목의 형식이 아닌 설화의 형식이다. 또 다른 이들은 창1:1은 우주의 원시적 직접적 창조를 기술하며 히브리 어체로 우주를 가리켜 천지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하다. 창1:1절의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완전한 양태로 나타나는 불현계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절 육일의 사역(Hexaemeron)
우주가 한 순간에 무로부터 창조된 후에 존재하는 혼돈은 계기적 6일 동안에 사람의 서식에 적당한 세계로 변전하였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점들이 존재한다.
① 장기설의 고찰 : 창세기 1장의 창조일들의 길이를 유구한 세월의 장기간으로 보는 장기설은 과학적 이론의 영향을 받아 근년에 다시 일어났다. 이들은 창세기의 일들을 지질학적 일들이라고 추상하였고 창조의 기록과 암석들의 증거가 가경하게 동의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하여 창세기의 날들을 지질학적 기간들로 보았다. 또한 이들은 창세기의 보도와 지질학적 발견들 사이에 놀라운 조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전통적 석의가 과학적 이론들과 충돌할 뿐 아니라 잘 증명된 사실들과 모순되면 재사고와 재해석이 자연히 요구될 것이다. 그러나 추상된 지질학적 연대는 과학계에서라도 확증된 사실로 일반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석의적 고찰을 통해 볼 때도 쉽게 반박될 수 있는 부분들이다.
② 문자적 날이라는 설 : 창세기 1장의 날들이 문자적 날들로 이해될 것이라는 것은 항상 성행하여 온 견해이다. 그러나 이 견해에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첫째, 일순설-초대교부들은 그 날들을 창조의 사역이 완성된 시간의 진정한 지시로 보지 않고 완성된 창조의 역사를 인생적 이해에 적당하도록 질서적인 양식으로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문학형식이라 생각하였다. 이 해석은 석의적으로 의심스럽거나 불가능하다. 둘째, 반문자적 설-카이퍼와 바빙크는 첫 3일은 다소 다른 길이의 날들일 수 있으나 후 3일은 확실히 통상한 날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전문자적 날이라는 설-현대의 보수주의자들 다수가 문자적 견해에 찬성한다. 넷째, 광명기간 표시설-성경의 욤이라는 명사는 암흑의 기관과 구별하여 광명의 기간을 표시하는 것일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이상 몇 가지 고찰의 결과를 종합해 본다면 창세기의 저자는 어떤 은밀한 양식으로 지질학적 기간들을 암시한다는 것보다도 여섯 개의 문자적 일들에 관설한다고 추상하는 것이 훨씬 논리적이다.
③ 각날의 사역 : 하나님의 사역 전부는 공무, 존재, 질서, 생명, 고등생명의 순서로 향상전진한 것이다. 창조 6일의 사역에도 명확한 층계가 있어 각 날의 사역이 다음 날의 사역을 향하여 준비하였으며 전부가 하나님의 수공의 절정인 사람의 창조를 종점으로 하였다.
제1일-빛이 창조되고 빛과 어두움의 분리에 의해 주야가 구성되었다. 제2일-제2일의 사역도 분리의 사역이었다. 땅 위의 식물들과 동물들의 나타남을 위한 준비로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분리되고 이 분리에 의해 궁창이 성립되었다. 제3일-분리는 계속되어 해륙의 분리에 이르렀다. 물 위에 땅이 드러난 것이다. 바다와 육지의 분리에 추가하여 초목의 식물계가 설립되었다. 제4일-광체들이 창조되었다. 일월성신이 여러가지 목적을 위해 빛의 휴대자로 창조되었다. 그 목적은 첫째, 주야를 분별하는 것. 둘째, 징조가 되는 것(방위기점과 기후변화를 예시하여 중요한 장래 사변들과 심판들의 징조가 되는 것). 셋째,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정하는 것. 넷째, 지상에 빛을 비추어 유기적 생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제5일-물고기와 새가 창조되어 물과 공중에 서식하게 되었다. 역시 중요한 것은 그들 각기 종류대로 창조된 사실이다. 제6일-이 날에 창조의 사역은 절정에 달하였다. 이날 육상동물들이 창조되었으며 사람이 창조되었다. 사람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엄숙한 의논이 앞선다. 하나님의 수공품의 절정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나타난다. 제7일-하나님의 제7일 안식은 첫째로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의 사역을 끝맺으셨다고 하는 소극적 요소를 포함한다. 여기에 하나님이 자기의 완성된 작업을 보시고 기뻐하셨다고 하는 적극적 요소가 부가되었다. 창조의 작품은 하나님의 목적의 달성이며 이상의 실현이었기에 보시고 심히 기뻐하셔따.
④ 창세기 제2장의 설화 : 창세기 제2장은 제1장과 같지 아니하여 독립한 제2의 창조설화를 포함한다는 것은 근대 성경비판의 보통 추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연 그릇된 견해이다. 창세기 제2장은 최초창조의 설화가 아니다. 창세기 제2장은 사람의 역사의 서술을 시작하여 그 재료를 이 목적에 적합하도록 정렬하며 전장에 개설한 바를 저자의 이 목적에 필요한 것만치 중언하되 연대적 순서를 고찰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두 보도는 모순이 아니라 보충적이다.
⑤ 창조설화의 여러 가지 해석 : 첫째, 관념적 혹 풍유적 해석-이 해석은 설화의 문자보다 관념에 우위를 둔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시적 묘사로써 그 사역을 서로 다른 관점들에서 서술한다고 한다. 성경저자는 이 주제에 관해 당시에 득달할 수 있는 최선한 관념들을 이용하여 그것들을 가치있는 형식으로 만들고 모든 불미한 양상을 제해 버리고 종교의 인장을 찍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화는 역사의 기록으로 의도된 것은 분명하다. 또한 창세기의 첫장에는 시의 요소가 없다. 그리고 이 설화는 뒤따르는 역사와 나뉘일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역사로 보아야 한다. 둘째, 근대철학의 신화론-근대철학은 설화의 역사성 뿐 아니라 그 창조의 관념도 부정하고 창세기 제1장은 종교적 교훈을 포옹하는 신화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종교적 핵심을 가진 순박한 신화적 서술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말하지 않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세계의 존재적 근거로 보며 세계는 자립 존재가 아니라 의존 존재라는 것을 가르친다. 셋째, 회복론-창세기 1:1에서 언급된 기본적 창조와 창세기 1:3-31에 묘사된 제2차적 창조와의 사이에 유구한 시간이 경과하였다고 추상한다. 이 유구한 시간에 몇 번의 격변이 있어서 혼돈과 공허가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다음에 하나님이 혼돈을 정연한 우주, 사람이 서식할 만한 세계로 변경하셔서 회복이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학자들에게도 성경에서도 지원을 받지 못한다. 넷째, 조화일치론-창조일들을 몇 천년의 장기간들로 추정하여 성경과 과학의 조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계시는 과학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만큼 두 사이에 이와 같은 정합을 기대할 수 없다. 모세적 역사와 지질학적 역사 사이에 일반적인 합치는 지적하여 낼 수 있을지라도 전자의 상세에 어떤 과학적 사실의 명백한 진술을 발견하려는 것은 무익한 노력이다.
⑥ 유신진화론 : 어떤 기독교 과학자들은 성경에 가르친 창조의 교리와 진화론을 조화하려고 노력한다.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창조의 신념은 진화의 방법에 의한 창조라는 말로 표현된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로써 그 방법을 삼으신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진화의 과정을 우주의 일반적 과정으로 보되, 그 과정을 하나님이 간섭과 통제 밑에 두어 진화가 건너지 못할 구렁이 생길 때에는 거기에 하나님의 직접간섭을 허용한다.
이 유신진화론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것은 유신론도, 자연론도, 창조론ㄷ, 진화로도 아니다. 이것은 어떤 기간들 사이의 자연을 조력하여 빈 틈을 메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뿐이다. 성경적 창조는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돌발적으로 생성한 것을 의미하고 진화란 고유한 세력의 수단에 의해 수행되는 점진적 진보적인 변화의 계열이라고 정의된다. 이 이론은 성경적 창조의 교리와 자연주의 진화론에 아울러 파괴적 작용을 행하는 방해물이다. 진화론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어떤 유명한 과학자들은 진화론의 가설로서의 가치도 의문하여 마지 않는다.
제5장 영적세계
신론의 끝 부분에서 천사에 관한 논의를 배치함에 있어서 신학자들 사이에 방식의 통일 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창조의 논의 다음에 섭리의 논의와 가까운 위치에 두는 것이 통상하고 논리적인 방식이다.
제1절 천사의 존재와 창조
① 존재의 의문 : 성경은 천사들에 대해 많이 말하였으나 근대의 기독교계에는 천사의 존재를 의문하는 견해가 일어났다. 이것은 과거 교회역사에 천사에 대한 열정으로 인한 반발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이론적인 원인이 있기도 하다. 첫째, 이교적 원천설-모든 종교는 다 영적 세계의 존재를 인정한다. 특별히 바사사람들 가운데 천사의 교리가 발전되었는데 비평가들은 유대사람들이 바사사람들로부터 천사에 관한 신념을 끌어 들였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지 못한 심히 의문되는 가설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천사의 나타남을 보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화되지 못한다. 또한 어떤 학자들은 반대로 바사사람의 천사론이 히브리 사람의 그것으로부터 인출되었다는 결론에 달하기도 했다. 둘째, 자유신학의 부정-기독교회는 항상 천사의 존재를 믿어왔으나 이성론자들, 소시너스주의자들, 보편적 구원설자들 가운데 있는 근대 사두개인들은 천사들을 신적 정력들, 혹은 선하고 악한 원리들, 혹은 질병들과 자연적 영향력들의 인격화 뿐으로 본다. 근대 자유주의 신학은 천사의 존재에 관한 신념을 내 버리고 다만 천사의 관념은 구속의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생적 권능, 그의 백성을 위한 그의 특별섭리를 우리에게 인상시켜 주는 것 때문에 유용하다고 간주하는 것 뿐이다.
② 존재의 논증 : 첫째, 합리적 논증-라입프닛츠와 볼프, 칸트와 슐라이어막허 같은 인사들은 천사세계의 존재의 가능성을 시인하였고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이를 합리적 변증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둘째, 성경적 논증-철학적 합리적인 변론보다 더 견실히 천사의존재를 밝혀 주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 계시이다. 성경은 비록 천사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계획적 시도는 하지 않을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추상하며 그 역사제서는반복 천사의 출동을 보여준다.
③ 천사의 창조 : 성경이 말하는 천사들은 하나님과 판이하여 지음을 받은 실유들인 것이 분명하다. 천사들이 영원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창조를 말하는 성구들에 의해 확증된다. 그렇다면 천사들은 언제 창조되었는가? 천사들의 창조된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제2절 천사의 성질, 수, 조직, 봉사
① 천사의 성질 : 천사들은 영화한 인적 실유들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장차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나 우리가 천사일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천사는 인류와 다른 특수한 성질을 많이 가진 영들이다. 첫째, 신체없는 영적 실유-천사들은 신체 없는 영적 실유들이다. 유대인들과 초대 교부들의 다수는 천사들에게 기체 혹은 불의 신체를 귀속시켰다. 중세기 교회는 그들이 순전한 영적 실유들이라는 결론에 달하였다. 성경은 천사들은 영이라고 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 둘째, 이성적 도덕적 불사적 실유-천사들은 지성과 의지의 부여를 받은 인격적 실유들이다. 천사들이 지성적 실유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영들이라는 사실에 즉시 따라온다. 사상은 영의 특징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찬송, 예배, 교훈, 봉사의 작용들에 의해 가장 현저하여 진다. 또한 천사들은 도덕적 성질을 가지고 도덕적 본무 아래 있어 순종하면 상을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다. 셋째, 능력적이다-큰 능력이 천사들에게 귀속된다. 천사들은 비록 전능하지 못할찌라도 사람보다는 강하다. 넷째, 불사적이다-선한 천사들은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불사적 영생적이다. 이 점에서 부활한 성도들이 천사들과 유사하다.
② 천사의 수 : 성경에 의하면 천사들은 다수여서 큰 군대를 구성한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그들을 가리켜 자주 사용된 하늘의 만군 하나님으 만군이라는 명사 자체가 상당한 다수를 암시하며, 여러 논거에 의해 천사들은 가히 셀 수 없는 군다, 대군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천사들은 무리요, 종족이 아니다.
③ 천사의 조직 : 초대와 중세의 신학은 천사들의 조직에 대해 복잡하고 사색적인 묘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모든 영적 실유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이며 독특한 명칭은 성경에 없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 영들, 거룩한 자들, 순찰자라 칭한다. 그러나 천사들의 상이한 계급들을 지시하는 몇 가지 특별명칭들이 존재한다. 첫째, 그룹-이 상징적 묘사들은 이 천사들이 특별히 낙원, 성막, 성전, 하나님의 강림 중에 하나님의 권능, 위엄, 영광을 계시하며 그의 거룩을 수호하기로 임명되었음을 표시한다. 둘째, 스랍-그룹과는 달리 하나님의 보좌에 모시고 서서 그의 찬송을 노래하며 그의 명령을 봉행하기로 항상 준비도어 있다. 스랍들은 천사들 중의 귀족들로 화목의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준비하여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셋째, 정사, 권세, 보좌, 주관자-천사세계에서 권위의 지위를 점령한 어떤 계급의 천사들을 가리킨다. 넷째, 가브리엘과 미가엘-이들은 다른 모든 천사들과 구별되어 고유명자로 칭호된다. 가브리엘은 하나님 앞에 있는 일곱 천사의 하나로서 하나님이 계시를 소개하고 해석하는 특별직무를 가진 듯하며 성경에서 가브리엘은 특별히 긍휼과 약속의 사자인 듯 하다. 미가엘은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항하여 영계의 악세력에 대항하여 여호와의 전투를 행하는 용감한 전사이다.
④ 천사의 봉사 : 천사들의 봉사는 통상봉사와 비상봉사와 영원한 봉사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통상봉사-이것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연계에 동작하며 국가사변을 지도하며 사람의 마음에 감화를 주며 성령이 하시는 바와 같은 직접공작이 아닌 인생상호간에 하는 것처럼 진리의 암시와 사상의 지도 등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 준다. 또한 죄가 세계에 들어온 이후로 천사들은 구원 얻을 자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파송된다. 둘째, 비상봉사-사람의 타락과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중개하며 그의 백성에게 축복을 전달하며 그의 대적들에게 심판을 집행한다. 셋째, 영원한 봉사-선한 천사들은 영원히 하나님 봉사를 계속할 것이다. 요한이 묵시 중에 본 예루살렘은 미래시대에 속하고 영원히 존속할 것인데 그 성의 열두 문에 천사들이 있었다. 만일 그 곳의 천사들의 봉사가 있을 것이면 모든 선한 천사들이 다 그들의 임명딘 자리에서 영원히 봉사할 것이다. 넷째, 천사숭배의 불가-로마교회는 성경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세계를 치리하는 왕들을 공경하였으니 교회와 우주의 정치에 하나님의 봉사자인 천사들을 공경함도 당연하다라며 천사숭배를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군왕에게 존경을 장려하는 동시에 천사숭배함을 금지한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삼위 밖에 다시 없다.
제3절 악한 천사들
① 기원 : 세계의 악의 임재는 참으로 철학과 신학의 가장 난처한 문제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악의 관념을 자선, 거룩, 무한하신 하나님의 관념과 조화시키기 곤난한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악은 하늘에서 기원하였고 지상에서 시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악을 위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림 없이 하나님의 무한성을 손상함 없이 악의 기원을 말한다. 그것은 악의 기원을 천사의 타락에 발견하는 견해다.
성경은 모든 천사가 다 선하게 창조되었음을 말하면서 어떤 천사들이 자기들의 본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창조 땡의 신분에서 타락하였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그러나 그 시기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한다. 다만 사탄이 에덴에 들어와 뱀을 이용하여 유혹한 것으로 볼 때 사람의 타락 이전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타락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것은 신학에서 깊은 신비 중의 하나이지만 피조물의 자율성과 의지를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천사들의 타락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 자결정적 반역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천사의 타락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다 본래적 성결을 잃어버리고 성질과 행위에서 부패하여졌으며 그 중 어떤 자들은 지옥에 던지워 심판까지 기다리게 되었다. 또 어떤 자들은 자유롭게 버려두어 선한 천사들의 사역에 반항하고 있다. 미래의 어떤 날에 땅으로 내려 쫓길 것이고 심판 후에 불 못에 던지울 것이다.
② 그 분류 : 천사타락의 결과로 천사들은 여러 갈래로 분류되어 질 수 있다. 첫째, 지옥에 던지운 천사들-벧후 2:4, 유6에 언급된 내용으로 천사들의 죄에 대한 형벌로 하나님은 그들을 지옥에 던지셨으며 거기에서 영원한 사슬로 결박되어 큰 날의 심판을 기다리게 된다. 둘째, 자유로운 악천사들-이들은 이들이 수령 사단과의 관련에서 주로 언급되는데 그들의 주요 사역은 선한 천사들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항하는 전쟁에서 그들의 수령 사단을 원조하는 일인 듯 하다. 셋째, 귀신들-귀신이란 명칭에 대한 정의는 다소 난해한 문제이다. 그러나 세 가지 설명이 제출되었다. (1) 악인들의 영혼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도처에서 구원얻지 못한 망령은 스올과 하데스에 있다고 서술하지 지상에서 방황하는 자로 제시하지 않는다. (2) 아담 전인종의 영혼들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벽한 견해다. (3) 지옥에 갇히지 않은 타락천사들이다. 이것이 전통적 견해로서 추천할 만하다. 넷째, 사단-사단은 타락천사들의 인정된 수령으로 나타난다. 그는 본래 존귀한 천사들 중의 하나로써 하나님을 이반한 천사들의 수령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이며, 피조물을 파괴하는 자와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자, 이 세상 임금이나 신으로 칭호되었다. 다섯째, 악령들의 조직-악령들은 조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단은 그 조직의수령이다.
③ 그 활동 : 첫째, 타락천사의 활동-타락 천사들은 하나님과 그의 사업에 반역하며 파멸하려 한다. 하나님의 맥성을 미혹하려고 노력하며 죄인들의 악행을 격려한다. 신자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분리하려고 분투한다. 둘째, 귀신들의 활동-귀신들은 사람들에게 질고를 인치한다. 그리고 사람의 정신적 문란을 초래한다. 사람들을 도덕적 불순결에 인도하며 그릇된 교리의 유포에 종사한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진보에 반항한다. 때로는 인류나 동물에 접사하기도 하며 가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수행하시는데 쓰임 받기도 한다. 셋째, 사단의 활동-사단에 대해서 성경은 그의 역사를 직접으로 계시한다. 사단의 목적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는 것이다. 그를 위해 사단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노력하였고,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고등피조물인 사람을 습격한다.
④ 그 운명 : 악한 천사들은 버리우고 소망없는 영들이다. 그들은 마침내 불 못에 들어갈 것이다. 사단의 역사는 지옥에 금고된 악한 천사들 이외의 모든 악한 천사들의 역사이다. 그들의 시작과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계획들은 실패할 것이며 지옥에 던지울 것이라는 것이다.
제4절 천사교리에 대한 이의, 오해, 새 흥미
금일에 천사교리는 매우 무시 내지 기각을 당하고 있는데 이 사태에 이바지한 원인들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로 그노시스주의자들의 어리석은 사색들이 있었으며 최종으로 보다 더 근세에 마술에 관한 과장된 신념이 있었다. 그런데 현대신학계에 천사에 관한 새 흥미가 일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① 천사교리에 대한 일반적 이의 : 첫째, 과학적 세계관에 반대-천사교리는 근대 과학적 세계관에 반대된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세계관에 어떤 진리가 있던지 이것은 신적이나 인적인 자유동인의 활동을 제외하지 않는다. 둘째, 무한공간관에 반대-이 세계와 다른 경역을 분리하는 경계로서의 궁창을 생각하는 구개념의 포기와 함께 우리는 천사들의 하늘에 관한 신념을 전부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무한한 공간은 우리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들의 세계를 포함하지 못할 바가 아니다.
② 악한천사교리에 대한 특수적 이의 : 첫째, 타락이전의 타락이 있었나?-천사타락의 관념은 자가모순이다. 교만에 의해 결정된 타락은 교만을 예상하게 즉 타락이전의 타락을 가정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에 향한 외적 동기를 죄 자체와 혼동하는데서 기인한다. 불순종을 향한 외적 동기는 불순종 자체가 아니다. 둘째, 단일행동이 전 성질을 변갱하였을까?-사단의 단일행동이 자기의 전 성질을 변갱하여 그 후로는 악만을 의지하게 할 수 있었다고 추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나 만일 사단의 불순종이 하나님이 정하신 시련기 중에 된 행동이라면 그 단일행동이 그렇게 영구한 악효과를 내게 되었을 수 있다. 그리고 단일행동이 성격을 영구히 개변하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인류 중에서 관찰된다. 셋째, 희망없는 반역을 시도하였을까?-사단 같이 지혜로운 실유가 희망없는 반역을 시도하였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어떤 분량의 지식이던지 단순히 지식만은 도덕적 행동을 확실케 하지 못한다. 넷째, 악화악행할 영을 창조하셨을까?-하나님이 장차 악하여지고 악을 행할 영들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은 그의 자전에 조응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들의 창조와 보전보다 더 하나님의 자선에 부조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결, 도적, 전쟁이 인류 중에 허용되었으니 악이 천사들 중에 허용됨도 특별히 하나님의 자선에 부조응하지 않는다. 다섯째, 악령들 중에 조직이 있을까?-악령들 중에 조직이 있다는 관념은 자가모순이다. 악의 본성은 분열하며 분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이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을 가짐은 사실이니 악령들의 조직도 불가능하지 않다. 여섯째, 사람의 죄책을 악령에게 이전할가?-인생범죄의 죄책을 시험자 악령에게 이전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해롭다고 한다. 양심이나 성경이나 시험을 범죄의 구실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사단이 인생의지를 강압할 능력을 가졌다고 보지도 않는다. 일곱째, 인생을 사단의 기구로 제시하는가?-이 교리는 인생을 사단의 기구와 노예로 제시하여 그의 지위를 낮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인생의 실상을 제시함이 사실이나 그의 본래적 존위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능적 영광을 높이 말하면서 그리한다.
③ 다양의 오해 : 첫째, 사단신념의 이교발원설-사단에 관한교리는 포로기 후에 이교원천으로부터 히브리인 중에 소개되었다는 의견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에 위반된다. 둘째, 악의 인격화설-사단은 악의 인격화 뿐이라고 이성론적 이론은 주장한다. 또한 금일에 현대주의 교사들 중에 사단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단의 인격성에 대해 풍부히 증언한다. 인격적 대명사들이 그에게 적용되었고, 인격적 속성들이 그에게 돌려졌고, 인격적 행동들을 그가 한다. 셋째, 악령들의 작폐를 과장하는 견해들이 있었다-악령들에게 풍우, 화재, 염병 같은 자연적 재난들이 추적될 뿐 아니라 그들이 인생들로 더불어 계약을 맺는다는 관념까지 일어났다. 넷째, 접사의 부인-신약 역사에 진술된 여러 가지 접사의 현상들을 가르켜 진정한 마귀의 접합이 아니라 정신이상이나 전간발작이나 기타 유사한 질병의 상태라 하며 그리스도께서 이 현상들에 대해 취하신 태도는 비유적 해석이라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상들은 분명히 접사였음은 당시 유대인의 성행하는 신념이 그러했고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분명히 그 신념을 채용하고 재가하였다. 다섯째, 악령의 투옥과 자유활동-어떤 말씀들은 타락천사들이 지옥에 던져내리워 심판날까지 기다린다 하고, 또 다른 성구들은 그들이 악령으로 지상에서 자유활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두 가지 보도를 조화시키기 이해 그들은 지금이라도 지옥과 무저갱에 겨락되어 있다고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악령들을 지옥에 던지워 내리운 자들과 자유로 활동하는 자들로 갈라 생각하면 문제없다.
④ 현대 신학계의 새 흥미 : 현금에 신학계 밖에서는 천사들이 의식적으로 부정되지 않는다면 성경 역사에 그들의 나타난 것이 막연히 감정적으로 회상될 뿐이다. 어떤 현대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천사의 교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은조를 상징적으로 제시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금일의 교회는 전체에서 천사들보다도 귀신들을 더 의식하게 됨은 교회가 금일의 환경에 횡행하는 천만의 악세력의 자극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신의 의식에서 천사의 의식에로 과도하는 거리는 멀지 않다.
제6장 섭리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 세계에 대해 가지시는 관계는 어떠한가? 초자연신론은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하고 범신론은 둘을 혼동하나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를 섭리하신다고 가르친다.
섭리는 하나님이 그의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하시는 준비와 그의 모든 피조물의 보전과 관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요오디는 의미일 뿐 유일의미는 아니다.
제1절 섭리 개관
① 섭리의 지식 : 우리는 어떻게 섭리의 실재성을 아는가? 섭리의 지식을 위한 의지할만한 근거가 있는가? 섭기의 지식의 근거 혹 원천은 합리적, 성경적으로 아래와 같이 증명될 수 있다.
첫째, 합리적 증명-먼저 섭리의 실재성은 연역적으로 신적 속성들에 의해 논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가 우주와 역사에 관한 자기의 영원적 계획을 실행하실 것을 확실케 하며 이 계획의 실행은 창조만 아니라 섭리도 포함한다. 또한 하나님의 자선은 그가 자기의 창조한 우주를 수호하실 것을 확실케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는 도덕율의 원천이기에 그는 도덕율을 옹호하기 위해 우주 안에 공의를 시행하시며 반역자들을 형벌하신다. 섭리의 실제성은 귀납적으로 자연과 역사의 사실에 의해 논증될 수도 있다. 개인들과 민족들의 외면적 운명은 전적으로 보다 더 고등한 권력의 처리에 굴복한다. 그리고 세계의 도덕적 질서는 비록 불완전하나 신적섭리를 인정함 없이는 설명되기 불능하다.
둘째, 성경적 증명-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는 성경의 기초적 가정이다. 성경은 세계와 이생의 모든 방면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을 가르친다. 이는 먼저 우주 전체 위에, 물리적 세계 위에, 동물계 위에, 열방만민 위에, 사람의 출생과 운명 위에, 인생의 외면적 성공과 실패 위애, 의외적이며 무의미한 듯한 사물 위에, 의인의 보호에, 사람의 마음의 심리적 반동에, 하나님의 백성의 수요를 공급함에, 기도의 응답에, 악의 폭로와 형벌에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을 가르친다.
셋째, 신도게요의 강조-교회는 신도게요서들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의 이의할 수 없는 실재정을 가장 강조적으로 말해왔다. 신도게요서들은 역사에나 우리의 개인생활에나 놀랄만한 일 혹은 불의의 사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모든 외관상 놀랄만한 일들과 불의의 사변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의 넓은 범위 안에 드는 것이다.
② 섭리의 요의 :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인 하나님의 작정들의 실현이다. 이 섭리를 구분함에 있어서 칼빈,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개혁파 교의학자들이 섭리의 요소로 보전과 정치만을 말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화란 개혁파 교의학자들의 저술에는 여기에 협력을 추가한 섭리의 삼구분법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보전은 만물의 실유에 관설하고 협력은 그 활동에, 정치는 그 지도에 관계하며 이것은 결코 배타적 의미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보전에도 정치의 요소가 있고 정치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으며 협력에 보전이 요소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밖에 있는 만물이 그것들의 기원을 하나님의 뜻에 의지해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는 동시에 그것들의 계속적 존재와 그것들의 특성들 및 능력자의 계속적 활동이 그의 뜻에서 온다는 것을 또한 확실히 보여 준다. 창조는 우주의 존재를 설명하고 섭리는 그것의 존속과 발전을 이해시켜 준다.
③ 섭리의 성질 : 첫째, 보편성-섭리의 범위는 보편적이다. 자연의 법칙들, 역사의 진정, 개인들의 다양화복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돌려진다. 하나님과 만유 전체와의 관계는 심히 밀접하여 조심성 없는 성경 독자는 범신론적 결론들을 향해 끌려가기 쉽다. 둘째, 주밀성-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일과 자연의 진정에 포함된 모든 세목에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임재하시며 매 것에 함께 하신다. 셋째, 주권성-하나님은 행복의 분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 것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주신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다. 넷째, 허용성-특별히 하나님의 섭리는 죄를 허용하려는 그의 작정의 실행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하시기에 죄의 조성자이시기는 만무하고 이것을 허용하실 뿐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관계를 논함에 있어 죄의 조성과 허용에는 천양의 차이가 있다.
④ 섭리의 성질에 관한 오해 : 첫째, 예지 및 선정에 국한-초대교부들 중 일부는 예지와 선정을 섭리에 포함시켜 실행보다 앞세웠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섭리는 그의 예지나 선정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계획의 실현을 위한 그의 계속적 활동을 의미한다. 둘째, 초연신론의 섭리관-하나님은 우주로부터 전적으로 물러가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활동하시나 그 활동은 일반적 법칙들의 유지에 제한되어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작은 세목들이 자연과 역사의 진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에 전자 위에 관할 없이는 후자 위에 일반적 관할이 불가능하다. 셋째, 범신론의 섭리관-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고 둘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세계를 하나님 안에 흡수시키거나 유물론적으로 하나님을 세계에 흡수시키거나 한다. 이 관점에서는 초자연이란 불가능하고 자연과 초자연이 동일시된다. 또한 기도와 종교적 예배는 미신이다. 넷째, 인본주의의 섭리관-인생의 부패와 십자가의 구속을 전하는 복음의 구속을 벗어난 계몽은 소위 온화한 섭리를 산출하였다. 이것은 심판 없는 은혜, 공의없는 사랑, 구속없는 사죄의 배경을 구성한다.
⑤ 섭리교리에 대립하는 이론들 : 첫째, 숙명론-인생의 자결정이 확실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의 자유성을 부정함으로 섭리의 자리에 숙명을 대용한다. 이것은 신적권세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의 진실과 지혜와 거룩과 사랑을 희생시키며 하나님의 인격성과 자유성의 증거를 파멸하며 필연을 유일의 하나님으로 만들고 우리의 도덕적 성질의 명령들을 현재의 정당성도 장래의 변호도 없이 남겨둔다. 둘째, 우연론-세계의 생성변전은 모두 우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우연론은 마음의 자유성을 자연에게 이전한다. 우연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섭리적 암합이기에 우리는 이것에 대해 고심할 필요가 없다.
⑥ 결정론과의 관계 : 하나님의 섭리적 활동의 주권성과 그 아래 사람이 가지는 지위에 관해 일어나는 문제는 피조물적 자유와 엄준한 결정론의 관계이다.
결정론자들은 사람이 외관적으로는 자유롭게 선택하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설택할지라도 그의 자유의지 자체가 이미 명확히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만사는 명확한 원인을 가진 것이기에 그것들은 도무지 자립하지 못하며 모든 사건들의 상호의존 이상에 오르지 못한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자유의지의 사상에 반대하였고 결정론은 자유의지를 부정하여 양자의 문제가 해결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일원론적 결정론은 그것의 본질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섭리교리에는 전여 생소하다. 기독교의 섭리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의 무적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사람의 자유와 책임의 용소를 남겨둔다.
⑦ 섭리와 그리스도인 활동 : 섭리와 그리스도인 활동의 관계에 있어서 진리는 정적주의와 자연주의라는 두 극단의 중간에 서 있다. 첫째, 정적주의에 대항-정적주의가 요구하는 인생이성과 의지의 유기에 대항하여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계속적 이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자연스러운 섭리와 그의 성령에 의한 우리 심령들의 강화로써 하여 우리로 하여금 합리적 자유적으로 우리의 일을 하며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게 하신다. 둘째, 자연주의에 대항-하나님은 그의 섭리적 역사로 인생영혼에게 계속적으로 가까이 계시며 이 섭리적 역사는 그리스도인의 성질과 수요에 잘 조절되어 의무에 관한 교훈, 종교적 성격의 훈련, 시험에 필요한 원조와 위안을 공급한다.
⑧ 섭리와 역사 : 교회의 신도게요서들은 하나님은 만사에 예외 없이 지도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역사상의 만사에 하나님의 특별섭리가 움직임을 볼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은 항상 그들의 생애에 예외적 지도를 경험한 것을 증언하였고 교회도 특별한 감사의 날들을 지켜왔다.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이 손이 만사에 동작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손가락의 특별간섭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상한 행동들을 많이 들어보이는 동시에 미숙하고 경솔한 추론들을 인출하는 일에 경고를 말하고 있다. 역사적 단편들은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한 함부로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 예기치 않은 놀라운 사실들이 하나님의 어떤 목적 있는 행동으로 즉시 알려진 것은 그것들이 신적으로 설명된 때문이다. 특히 이것은 구속의 역사를 중심으로 성경에서 보여진다. 구속은 하나님의 나라의 내림을 목표로 한 운동이기에 구속을 중심으로 한 역사의 진행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한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사변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연락하여 생각하는 것이 역사 해석의 바른 뱡항을 찾을 것이다.
제2절 보전
① 보전교리의 증명 : 신적 보전의 교리는 성경적 추론적으로 증명된다. 첫째, 성경적 증명-만물의 신적 보전은 성경 여러 구절에서 분명히 창조와 구별하여 가르쳤다. 하나님이 창조의 작업을 쉬시고 자연 세력의 질서를 설립하셨을찌라도 우주와 그것의 능력들을 유지함에 특별하고 계속적인 신적 활동이 행해진다고 선언된다. 또한 이 신적 활동은 그리스도의 활동으로 선언되었다. 둘째, 추론적 증명-신적 보전의 관념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므로 무엇이 하나님의 의지와 독립하여 생성하거나 존재할 수 없다. 또한 보전의 관념은 피조물의 의존적 성격으로 쫓아 온다. 물질과 마음은 자존재하지 못하기에 그것들의 기원과 함께 그것들의 계속이 우월한 권력에 의해 기인한다.
② 신적 보전의 성질 : 보전이란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하신 물건들의 존재를 그것들의 성질과 능력과 함께 유지하시는 계속적 동작이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우주의 구별과 의존-창조된 만물이 다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된 진정하고 영구한 존재를 가지며 하나님의 부여하신 능동적 수동적 모든 특성들을 소유한다. 그러나 이 창조된 실질들은 자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자존재란 하나님의 독점적 특성이요, 모든 피조물은 다 자체의계속적 존재의 근기를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자체 안에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적 권능의 적극적 계속적 활용-보전은 소극적 행동만이 아니다. 보전은 신적 권능의 적극적 계속적 활용의 효능이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변경하며 진보적으로 발전하는 세계를 보전하신다. 보전은 목적을 가진 것이다. 보전은 만물이 하나님의 배포하신 목적을 향해 우직이는 전 과정과 관여한다. 셋째, 유지작업의 물성조절-우리는 하나님이 자기의 섭리적 공작에서 스스로 자기의 창조물들의 성질에 조절하신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자연적 합작-보전은 물질과 마음의 모든 공작에 하나님의 자연적 합작을 함의한다. 비록 인격적 실유들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의지가유일 세력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합작이 없이는 아무 인격이나 세력도 계속하여 존재하거나 동작하지 못한다.
③ 세계보전의 의의 : 성경에서 세계의 보전은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에 관설된다. 하나님이 세계를 보전하셔서 역사를 연장시키심은 인류 중에 구원을 베풀기 위하심이다. 첫째, 노아 언약의 은혜성-노아의 언약에서 하나님이 세계의 수명을 연장하시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하나님 자신이 홍수의 위기에 불구하고 세계를 존속하시려는 의도를 언명하셨고 인류와 지상 모든 생물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다. 둘째, 보통은혜와 오래 참으심-구원의 운동에 본격적 중심적요인은 특별은혜다. 그러나 보전되는 세계와 연장되는 역사에 하나님의 보통은혜와 오래 참으심의 사역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다 인류의 구원에 준비적 보조적 사역을 행하는 요인이다. 그러므로 세계보전의 의의는 인류의 구원에 있고 그 구원의 실현은 본격적으로 특별은혜의 활동에 의한다고 결론하게 된다.
④ 신적 보전의 오해 : 우리가 회피해야 할 보전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보전은 순전히 소극적이라는 설-초연신론에 의하면 신적 보전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수의 작품을 파멸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존재를 피조물에게 전달하셨다는 것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자존재와 자유지는 창조주에게 독특한 불가공유적 특성들이다. 또한 이것은 비종교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로부터 멀리 분리하여 그와의 교제를 실제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그의 피조물 밖에 추방한다. 둘째, 보전은 계속적 창조라는 설-범신론은 보전을 계속적 창조로 해설하여 피조물은 계속적인 존재를 가지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이 권능의 영구적 공작에 의해 그 계기적 상태와 동작들이 매 순간 재생산 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범신론에 인도된다. 또한 우리의 고유적 필연적인 직관에 배치한다. 그리고 종교 자체의 근저를 타파한다.
제3절 협력
① 신적협력의 증명 :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는 피조물의 존재에만 아니라 활동 혹은 공작에도 관계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그리고 사람은 독립적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의 관할을 받는다는 일반적 진리는 성경 여러 구절에 나타나 있다. 특수하게 성경에 의하면 악한 일에도 어떤 종류의 신적 협력이 있다는 것이 현저하다.
② 신적협력의 관념 : 협력의 관념은 교의학 역사상 많은 변론을 일으켰다. 정의하자면 협력은 신적 능력이 모든 종속적 능력들과 합작함이니 그 능력들을 그것들의 선정된 법칙들에 의해 동작케 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협력의 공작을 사람에 관한한 도덕적으로 선한 인생 활동에 제한하려 하나 다른 사람들은 더 논리적으로 이것을 각종 동작에 돌린다.
이 교리에는 세 가지 요의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자신적 사역-하나님의 협력은 피조물들의 동작을 일반법칙에 맡겨 스스로 진행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친히 주도하심을 의미한다. 둘째, 제2원인의 진정성-제2원인들은 참되며 단순히 하나님의 공작적 능력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제2원인들이 참되다는 조건 아래서만 우리는 제1원인의 제2원인과의 협력을 정당히 말할 수 있다. 셋째, 두 원인의 합작-신적 협력은 제1원인의 부정(초연신론 혹 무신론)과 제2원인의 부정(계속적 창조설 혹 범신론)이라는 두 오류의 중간에 있다.
③ 신적 협력의 그릇된 관념 : 신적 협력을 오해하는 몇 가지 관념이 있어 우리의 경계를 요한다. 첫째, 능력의 일반적 전달인가?-신적 협력은 능력의 일반적 전달 뿐으로 구성되고 특정의 동작을 결정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하나님의 협력은 제2원인을 자극하나 그 자체의 특수한 동작의 양식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방임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분적 협력인가?-신적 협력은 부분적이어서 작업의 한 부분을 하나님이 다른 부분을 사람이 수행한다고 한다. 이것은 그릇된 사역분담관이다. 셋째, 동등의 작업인가?-협력에서의 하나님의 작업과 피조물의 그것이 동등이라고 한다.
④ 신적 협력의 특성 : 신적 협력의 동작하는 양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선재적 선결적임-신적 협력은 사람이 이미 선수한 활동에 따라 오는 활동이 아니다. 단 하나의 행동이라도 신적 공작이 없이는 시작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적 협력은 선재적이며 선결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논리적 의미에서이다. 둘째, 동시적임-이것은 또한 동시적 협력이다. 피조물의 활동이 시작한 후 그것이 계속하려면 매 순간에 하나님의 유효적 의지가 그것에 수반함을 요한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의지 및 능력과 독립하여 역사하는 한 순간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시적 협력은 제 일원인과 제 이원인의 동일시를 결과하지 않는다. 셋째, 직접적임-피조물 위에 하나님의 직접적 동작이 행해진다.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의욕하는 것과 행위하는 것을 아울러 하신다.
⑤ 신적 협력과 죄 : 첫째, 개혁신학의 입장-죄행은 신적 관할 아래 있고 하나님의 선결과 목적에 적응하여 생성하나 오직 신적 허용에 의하는 것이어서 하나님은 사람을 범죄하도록 동력적으로 일으키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죄인의 죄행을 관할하시며, 자기 목적을 위해 악을 누르고 선을 장려하신다. 둘째, 신적 허용설-신적합동은 사람에게 힘을 주어 특정의 행동을 작위하도록 유효적으로 결정하나 행동에게 형상적 성질을 주고 따라서 그것의 죄적 성질 때문에 책임을 지는 자는 사람이다. 셋째, 설명할 수 없다는 설-사람의 범죄도 신적 관할 아래 있으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람은 범죄자다. 범죄에서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신적 허용의 관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범죄에서의 하나님의 관할을 믿되 그와 사람의 관계는 설명하지 못한 채 버려 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한 가지 해결책이요, 한 걸음 나아가서 하나님의 허용과 사람의 자유로운 범죄를 말하여 설명을 시도하는 것은 다른 한 가지 해결책이다.
⑥ 협력의 교리에 이의 : 협력의 교리는 다양한 이유에 의해 반대를 받아왔다. 많은 비평들에는 진리의요소가 없지 않다. 우리가 자주 은폐된 사물을 탐사하여 들어가는 시험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협력의 교리에 있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시험을 경계하는 동시에 이 교리가 섭리교리의 이해에 가치 있는 보조를 제공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4절 정치
① 신적 정치의 성질 : 보전, 협력, 정치는 서로 격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 편재하시는 한 행동의 세 국면이다. 신적 정치는 하나님의 섭리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것의 전부다. 섭리를 정치로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거룩한 활동에서 대상으로 하시고 성취하시는 그 목적에 강조를 가한다. 하나님의 정치는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을 위해 만물을 목적 있게 통치하시어 자기의 신적 계획의 성취를 확실케 하시는 그의 계속적 활동이다. 첫째, 우주적 왕정-섭리는 우주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정치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신곤에 일종의 본질적 관념이니 하나님은 백성의 선택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고유한 권리로 세계를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에는 민주주의 이상을 초월하는 무상권의 성질이 있다. 이는 성경이 뒷받침 하고 있다. 둘째, 그리스도 왕정-신약전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해 증언한다. 그렇다면 천지의모든 권세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왕권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권 사이에 어떤 구별이나 합동일치가 있는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성부께서 만물을 통치하심을 일반적으로 진술할 뿐 아니라 그의 통치가 그리스도를 통한 통치라는 것을 지시한다. 셋째, 물성에의 적응성-이것은 정치를 받는 피조물들의 성질에 적응하는 정치다. 하나님은 물리적 세계에서는 자연법칙을 방편으로 하여 정신적 세계에서는 간접적으로 마음의 특성들과 법칙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성령의 공작을 통해 정치하신다. 넷째, 불가측성-하나님의 정치는 극히 장엄하여 사람의 지혜로써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정치의 난해한 방법들은 그를 향한 숭경을 격발한다. 다섯째, 무적성-신적 정치는 무적이다. 하나님의 보좌는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저항을 돌파하시고 우주로 하여금 자기 내림에 봉사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통치의 무적성은 만백성의 기쁨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한다.
② 신적 정치의 범위 : 하나님의 정치는 우주적이어서 만세와 만대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과 그들의 행동들을 다 대상으로 포함한다. 이 통치는 시간적 경계도 공간적 경계도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태초 이래의 과거, 현재, 미래에서 하나님의 만유 위에 행하시는모든 관할을 다 포괄하는 영원한 신적 계획의 실행이다.
제7장 특사와 이적
이것은 섭리의 논의가 연장된 것이다. 특별섭리는 기도의 응답을 주로하는 특별사변에 밀접히 관계되고, 비상섭리는 신적 계시의 신증인 이적의 방도이기 때문이다. 특사와 이적의 실재성은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지위를 가진 사건들이기에 상세한 고찰을 요한다.
제1절 특별섭리
① 일반섭리와 특별섭리 : 일반섭리는 우주 전체의 신적 관할을 지시하고 특별섭리는 그 각부를 전체와 관련하여 간섭하심을 가리킨다. 이는 두 종류의 섭리가 아니다. 같은 섭리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관계에서의 활동이다. 하나님은 일반 섭리에 의해 우주의 만사만물을 혼돈한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질서적이며 조화적인 혼일체로 유지하여 나가신다. 동시에 특별섭리를 통해 우주의 각사각물로 하여금 우주 전체와의 관련에서 뜻있게 전진하게 하신다.
특별섭리라는 명사는 보다 더 특별한 내포를 가져 자주 이성적 피조물들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간섭을 관설한다. 이는 기도에 대한 응답, 고통에서의 구출, 은혜와 구조가 들어오는 위급한 정상들에서와 같은 사변들의 질서에의 특별한 신적 간섭이다.
또한 교회의 신도게요서들은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만사에 예외 없이 지도하신다고 가르친다. 모든 사건들은 각각 다 하나님의 손에 빚어져서 동등으로 구경적인 의의를 가지는 듯 할 것이다. 그러므로 특사와 기도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며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특별섭리가 발동하여 특사를 일으킨다.
② 특사와 기도응답의 부정 : 예로부터 경건한 신도들은 특사와 기도응답의 실재성을 확고히 믿고 체험하여 왔지만 이것을 부인하려는 자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후 우주로부터 전적으로 물러가지는 않으셨으나 우주 안에 그의 활동은 일반 법칙의 유지에 제한된다고 주장하는 초연신론을 따르는 자들이다. 또 그 중에는 하나님을 자연법칙과 동체로 보는 과학적 범신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설들은 심사숙고의 결과가 아니다. 첫째, 비성경적 신관-하나님이 역사와 생의 상세에 간섭하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능하지도 못하시고 기도에 응답하거나 위기에 구조하거나 사람을 위해 특사를 행하기 불능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빈약하고 피상적이며 비성경적인 신관이다. 둘째, 조화의 가능성-특별섭리의 자연법칙에 대한 관계가 난제를 구성한다는 것은 부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연의 일반적 법칙의 공작과 특별섭리는 조화시킬 수 있다. 먼저 자연법칙이 모든 현상과 공작을 절대적으로 관할하는 자연의 능력들이라 단언할 필요 없다. 그것은 흔히 결함 있는 인생적 묘사일 뿐이다. 또한 자연법칙을 하나님과 관계 없이 독립적으로 동작하여 세계의 진정에 간섭하기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정체계로 보는 유물론의 견해는 절대적으로 오류이다. 자연법칙은 모든 조건들이 동일하면 동일효과들을 변함없이 산출하는 것 뿐이다.
기도의 섭리적 응답은 사실로 나타난다. 기독교인의 과거 경험과 기독교회의 과거역사는 이것의 실현을 일반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은 기도자의 신앙을 요구한다. 또한 기도의 응답에 도덕적 시련의 목적이 있기도 하다. 우리의 금생은 도덕적 시련의 기간이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이 천연 내지 거부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한 기도라야 응답을 받을 것이다.
제2절 비상섭리
① 이적의성질 : 섭리의 논의에 있어 통상섭리와 비상섭리가 구별되는데 전자는 하나님이 자연법칙에 엄밀히 응종하여 제 이원인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그가 직접적으로 제 이원인의 통상공작의 매개 없이 일하시어 이적을 행하신다.
이적의 행위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적이란 무엇인가? 이적이란 제 이원인의 방편을 사용함 없이 하나님의 직접동작이나 의지작용에 의해 생성하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적이 만일 제 이원인의 방편에 의해 산출된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이 아닐 것 즉 이적이 아닐 것이다.
이적의 종류가 구별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아무 방편에도 관련을 가지지 않는 이적들과 방편이 사용되되 불기의 결과를 산출하도록 사용되는 이적들이 있다.
② 이적의 오해 : 과거 수세기의 신학역사에서 이적에 대한 비평이 많이 전개된 것은 주로 이적과 자연법칙 사이에 난관이 있다는 오해에서 기인한다. 자연법칙과의 난관을 해결할 목적으로 이적을 함의적으로 부인하는 이적의 정의들이 나왔다. 첫째, 자연법칙의 위범인가? 복음서의 이적기사를 기독교 초기의 제자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상상이라고 말한 떼빋 스트라우스는 이적은 자연계의 조화를 파열함이라고 정의하였다. 둘째, 자연법칙에 부합하는가? 어떤 학자들은 이적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이적을 정의함에 있어서는 그 초자연성을 경감하여 사실상 이적으로서의 가치가 없게 만들어 자연법칙과의 곤난한 관계를 회피하려 한다. 셋째, 고등법칙에 의한 것인가? 또 다른 한 견해에 의하면 이적은 고등 혹은 부지의 자연법칙에 의해 발생한다고 한다. 이 견해는 이적은 자연법칙에 하나님의 불의의 간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이적을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려 한다.
③ 이적의 가능성과 개연성 : 첫째, 가능성-이적의 가능성은 합리한 유신론에 포함되어 있다. 전능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또한 전능으로 만물 위에 비상동작을 하실 수 있다. 이적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이론들은 자연법칙은 하나님의 의지의 유일한 실현이라는 것, 이적은 우주의 결함을 보충함을 의미한다는 것, 이적은 자연법칙의 위범이라는 것, 이적은 자연의 절대적 일양성을 의문함이라는 것을 이유로 하지만 이 반대론들은 정당하지 못한다. 둘째, 개연성-이적의 개연성은 도덕적 신관에서 제외할 수 없다. 우주에는 정연한 물질적 질서도 있겠지만 고상한 도덕적 질서도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그를 예배하며 신앙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실 수 없었다. 따라서 우주의 도덕적 질서를 보전하시려고 비상한 동작으로 물질계에 직접 간섭하심은 개연한 사실이다.
④ 성경이적의 목적과 추세 : 첫째, 구속의 준비-성경의 이적들은 구속적 목적을 가진다. 세계에 죄가 들어온 것은 죄의 파멸과 만물의 갱신을 위하여 사변들의 진노에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필요케 하였다. 하나님은 이적으로 우리에게 성경의 특별적 언문적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최고 사실적 계시를 주신 것이다. 둘째, 계시의 증명-구속의 신적계획의 계시를 죄인들에게 증명하여 신종케 함에 이적들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이적드이 하늘에서 계시진리를 최초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자들의 신증으로 작용하였다. 셋째, 성경의 대 이적기-성경이적들은 구속의 준비와 계시의 증명이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것으로서 또 한 특수한 추세를 보인다. 이 이적들은 성경역사의 진정 전부에 평균히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과 계시의 역사의 특별한 출현기들을 가졌다. 이렇게 최대의 이적기는 장래에 있을 것이나 성경 역사에 이미 나타난 이적들은 구속의준비와 계시의 증명이라는 그 자체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넷째, 이적의 퇴세와 소실-신약정경들이 완성되고 성경의 내면적 증거가 최대한 강력을 얻은 때에 이적에 의한 외면적 증거는 전연 철수되지 않으면 사라지기를 시작하였다.
⑤ 후대이적의 문제 : 첫째, 후대이적은 필요한가? 이적시대는 지나갔다고 믿는 것이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일반적 신앙태도이다. 성경계시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지와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여 사람들의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이적을 행할만한 충분한 원인이었지만 신약시대 이후로는 완성된 계시 즉 기독교 복음을 통해 지식을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따라서 계시의 신증인 이적이 후대에는 수요하지 않는다. 둘째, 칼빈주의의 후대 이적관-이적시대가 지나갔다는 것은 칼빈이 가르친 이적관이다.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새 복음을 전개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든 이적에 의해 확증된 동일한 진리들을 보존한다. 셋째, 가능성은 항상 있음-어떤 신학자들은 후대에라도 교회가 신설되는 피선교지에는 이적이 나타난다고 주장하여 성경에 이적시대의 종결을 표시하는 논거가 없다고 말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경에 후대이적이 없을 것을 선언한 것은 없다. 그러나 후대이적의 불필요성을 언급한 부분은 있다. 이적을 세계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때에 이적의 가능성은 항상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전능하신 창조주, 섭리주께서 자기의 피조물 위에 자기의 권능으로 비상섭리를 수시 단행하실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면 이적을 행하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제8장 변신론
변신론은 유신론의 도덕적 증거에서와 신적 의지의죄에 대한 관계, 신적 작정의 특징 또는 신적 협력과 죄를 거론하는 문맥들에서 부분적으로 접촉된다.
제1절 의의와 주요이론
① 의미와 필요성-변신론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정당화 한다. 이것은 모든 수수께끼와 비평에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계정치는 거룩, 선, 정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변신론은 세계에서와 인생생활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의 의미있음과 목적있음을 역설하므로 모든 불평 혹 비난에 대항하여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시도이다.
변신론은 필요한가? 변신론은 통상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생이성의 심판대 앞에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포함하는데 이 난제는 신학적 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돈된 세계에 의식적으로 거처하기를 원하는 각 사람의 심령을 깊이 교란하는 것이므로 간단히 포기될 수 없다.
② 주요한 이론들 : 첫째, 이원론적 변신론-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정당화함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조로아스터교와 같이 이것은 고악, 수난, 흑암과 같은 것을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문제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분리하여 설명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로 관설된다. 세계의 고악을 영원한 원리에로 밀어 돌아가는 형식의 이원론마다 필경 세계와 사람을 책임과 유죄로부터 해방한다. 따라서 이원론적 변신론은 실재로부터의 도주와 종말론에의 도주를 포함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요지에서 볼 때 이는 고악의 난제의 기만적 해결뿐으로 판단된다. 둘째, 조화적 변신론-이것은 스토아주의와 라이프닛츠의 철학에서 예시된다.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이다. 우리는 먼저 사람중심의 세계 즉 각물이 사람을 위해 창조되었다고 하는 괴변을 우리 마음에서 물리쳐야 하며 세계 안에 각 사물을 전체의 부분으로 우주적 통일체이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만상만물에 미리 설정된 조화가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자연히 우리는 그 조화 안에 어떤 어울리지 않는 음조를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이 형이상학적 고악은 발전의 불완전으로, 물리적 고악은 수난으로, 도덕적 고악은 죄로 나타난다. 이 변신론은 죄의 상대화에 의지한다. 이 변신론의 기초적 오류는 이성은 죄의 적당한 지위를 만물 안에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근본적 추상이다. 악은 이세계의 성질과 구조에 내재적이라고 말한다. 이 세계가 절대적으로 선하기는 불가능하니 만일 그렇다면 세계는 신적일 것이다. 이 세계에 악이 있다는 전 난제는 만물의 본래적 필연적 제한과 불완전에서 일어난다. 셋째, 목적론적 변신론-악은 사물들의 목적과 관련하여 고찰된다. 그 자체대로 고찰될 때 악한 것이 그것의 결과나 목적을 보면 다른 색체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것은 고통이 목적을 참으로 설명하지 못하며 변신론을 수립하지도 못한다. 넷째, 윌프렛 모노의 변신론-윌프렏 모노는 정통적 신학사상이 하나님에게 돌린 속성들을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를 거절하는 주요 이유로 보았다. 따라서 모노는 차라리 다른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전파하여 그의 도덕적 성격을 구출하려고 한다. 이 목적으로 그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부친 구속주 하나님으로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분리하려 한다. 이 변신론은 하나님의 충분한 신격을 박탈함에 의해 그를 정당화하려 한다. 다섯째, 기독론적 변신론-바르트는 창조된 세계 안에 있는 흑암의 실재에 의해 제출된 난제를 창조의 좋음과 정당화에 관한 강해에서 출발한다. 창조된 세계가 선함은 그리스도에게 관계된다. 이 뜻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신앙에게만 명료하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의 주위에 있는 세계를 관찰함에 의해서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각물이 그리스도에게, 그의 죽음과 부활에게 주목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피조세계는 불완전 중에 완전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이 현재의 악한 세계는 선하다. 피조계의 정당화는 고난 금요일과 부활절의 사신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참되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라고 객관화된 상념을 알지 못한다. 구속의 복음은 세계 안에서 신앙에지향하는 호소로 선포된다.
제2절 정당한 변신론
① 자연변신론의 약점 : 변신론에서 하나님의 속성들은 통상으로 죄, 수난, 사망의 경험적 실재들과 당면한다. 이 실재들의 광명에 비추어서 만사 위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교회의 신앙고백은 과도한 단순화라고 자주 시사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이성이 신뢰를 얻게 되면서 기독교는 신비적이 아니게 되었다. 세계는 전부 조화적이어서 우주의 화음을 들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성적 논증에 의한 하나님 개념은 공허하고 빈약한 인적 구조물로 폭로되었다. 이는 전통적 사상이 기초를 흔들었고 많은 이성적 변신론이 가져왔던 확신을 약화시켰다.
우리가 가진 철학을 통한 변신론 중 아무 것도 만족한 변신론은 없다. 세계 안에 하나님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보다 더 나은 변신론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
첫째, 실재에서 출발-변신론은 사람이 세계를 돌아보고 그것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이 방식이 공의롭다는 결론에 달한다는 것을 표시한다. 이 말은 사람이 경험의 사실로부터 이성적 변론의 길을 밟아 전진하여 하나님의 세계 통치가 공정하다는 것, 경험적 실재는 하나님의 의와 부조응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교철학 혹은 자연변신론의 방식이다. 변신론에서 사람은 실재로 출발하고 모든 사람과 같은 수준에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의의 평면에 기어 올라간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의 공통지반이나 접촉점의 탐색을 포함한다. 변신론자들은 중립지대에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과 접촉하기를 시도하는데 이것이 변신론을 구성하려고 시도한 자들의 주요한 과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가 분석을 위한 결정적 출발점으로 되지 않는 때에는 세계가 가장 사활적인 순간에 오해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 둘째, 논법의 무가치-사람이 실재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탐색하여 올라가는 것은 불능하다. 실재는 계시의 설명하는 말씀을 통해서만 능히 알려지기 때문이다. 세계를 조명하는 빛은 신앙에서만 발견된다. 따라서 모든 자연변신론은 원칙상 수납되기 불능하게 된다. 자연변신론은 항상 순환논법으로 움직인다. 이것은 경험적 실재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에게 도달한 후 실재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광명으로 실재를 조명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님은 제 일로 인생사상의 산물로 되기에 궤변이다. 셋째, 실재의 단순화-자연변신론이 항상 실재를 과도히 단순히 하는 것은 이 그릇된 논법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난 실재관은 반드시 계시의 충분한 광명 가운데 서는 대로의 실재보다 본질적으로 부족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실재관의 불충족성은 신앙하는 변신론의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변신론은 반드시 신앙으로 시작하고 미확실과 의문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
② 성경적 변신론 : 성경은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는 변론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라는 것, 그가 선과 악의 아울러 존재하는 것을 의지하셨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자기자신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겸손한 신자에게 해결을 주지 않으나 만족시키는 대답을 준다. 고악을 허용하심에 좋은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나 이것은 하나님에게나 그의 자선에 결함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앙하는 변신론의 가능성이 일찍 제시되었는데 철학적이 아니라 신학적이며 이성론에 대항하여 신앙의 학문을 단정하는 변신론이다. 이 변신론의 목적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높이 들고 사람을 인도하여 그것을 인식하게 함을 위함이다. 변신론은 신자의 선지자적 임무에 속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의에서 출발-성경은 하나님을 임시적으로나마 그늘 속에 버려두는 모든 독립적인 세계해석에 항의한다. 하나님 안에 불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신앙의 결정은 참된 변신론의 고찰에 결정적이다. 둘째, 지식의 제한 안의 평화-적당한 변신론이 불가능한 때 우리는 숨은 하나님의 불합리를 믿는 신념에로 도피해야 하는가? 성경사상은 항상 실재, 지정, 생존하시는 계시되신 하나님의 주권에 지향한다. 하나님은 위험한 전횡의 하나님이 아니라 거루가시고 긍휼하신 아버지시다. 이 하나님의 불가이해성은 우리의 지식의 단편성을 포함적으로 시인한다. 우리는 우리 지식의 제한을 고려하여 그 제안 안에서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주장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항의는 철수된다. 그리고 항의의 철수에서 예배가 출발한다. 셋째, 하나님의 진노-변신론에 있어서 논자는 통상으로 하나님의 속성들과 세계의 실존적 실재들과 대결시킨다. 그러나 그 대결은 흔히 좁고 추상적인 성격을 지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하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나님이 거룩을 강조함에는 하나님을 이 세계의 죄책과 부패에 연루시키려는 시도에 대항하는 열렬한 경고가 포함된다. 순수한 진노는 진노자의 절대적 거룩을 수요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실재성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추적할 수 없다고 하는 성경적 주장을 뒷받침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그의 거룩의 표현이다. 넷째, 사람의 죄책-성경이 인생의 죄책을 강조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를 변호한다. 성경은 만물 위에 행하시는 하나님이 활동의 범위 안에 또는 그의 목적의 무적성 안에 오히려 인생의 책임이 있음을 확언한다. 하나님의 불가해한 세계 통치는 사람의 범죄 행위에도 관계 있다는 것이 성경계시의 표시하는 바다. 성경계시에 의하면 하나님이 세계 위에 거룩한 지도를 행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념은 사람이 자기의 죄책을 인식함에서만 가능하다. 성경에서 구원의 행복과 함께 죄책은 더욱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고백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통치는 존영을 받는다. 다섯째, 교회의 송영-우리는 이 악한 세계에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세계통치에 대면하여 송영을 노래할 수 있는가? 우리는 반역하는 마음에 침묵함을 얻고 계시에 투항하여 하나님의의에 대한 조명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조심하는 때에 하나님의 행위와 심판에 대한 우리의 묵상은 이미 절정에 도달한다. 따라서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송영은 교회의 정상한 표현이다. 모든 시대의 회중은 일어나 송영에 참가하며 기쁜 노래로 그의 앞에 오며 찬송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도록 권고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찬송중에 거하시는 자로라. 이것은 참된 변신론의 처음과 나중이다. 여섯째, 죄의 허용-하나님은 사람의 범죄에 대해 허용하실 뿐이요 직접적으로 추진하지 않으시므로 그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변론은 개혁신학에서 하나의 관례적인 변신논법으로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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