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역사신학

하나 속에 셋인 존재

예림의집 2012. 10. 29. 16:19

하나 속에 셋인 존재

 

  오늘 날에 기독교 신자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예들을 사용한다. 달걀의 껍질, 흰자, 노른자와 나무의 뿌리, 가지, 열매등이다. 또한 물이 얼음, 액체, 증기 등으로 형태가 변하는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이들은 물론 모두 기발한 생각들이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 속에서는 실제로 삼위일체 개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기독교 교리가 가진 인격적 요소들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이 교리가 의존하고 있는 진정한 기초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게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어,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목수로서 우리들의 세계로 뛰어들어 오셔서, 구원하기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오순절 날 행동하셨다. 즉 기독교회와 생명을 나누시기 위하여 성령으로서 강림하시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영원히 한분이시라면,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세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이심으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들의 사고나 언급의 예는 인격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들이 인격적인 유추들을 찾아 헤맬 때 우리들은 거기에 오직 두 가지 방도밖에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한 분으로 생각하든가, 아니면 세 분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세 분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삼성(threeness)은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지만, 우리들은 이제 통일성(unity)을 설명해야 한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세 위격이 너무나도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우리들은 이들이 공동의 삶을 나누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즉 이들은 서로 한데 긴밀히 묶여 있으므로 이들을 분리시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유추적 설명은 세 위격의 사회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신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사회적 유추(social analogy)라 부른다. 이 유추의 강점은 하나님의 삼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문제는 어떻게 그 단일성을 분명하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한 위격으로 생각할 것 같으면, 이제 우리는 그의 삼성을 설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한 한 가지 바업은 한 분이라 할지라도 지성, 감성, 의지 등의 서로 다른 기능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추는 심리적인 기능을 이용하는 것이므로, 신학자들은 이를 일러 심리적 유추라 하였다. 이의 장점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데 있다. 그는 한 위격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삼성이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현대의 신학자들, 레오날드 허그슨이나 칼 바르트 등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에서도 이러한 유추들을 사용하였다.

  325년에서부터 다시 제 2차 공의회가 개최되었던 381년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아리우스 논쟁에 휘말렸던 교회 지도자들은 점차 "위격(person)"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분명히 정의하기 시작하였다. 소위 카파도키아 교부들이라 불렸던 세 사람의 신학자들이 이 방면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니, 그들의 이름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그리고 대 바질 등이다.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사회적 유추의 방법을 사용하는 동시에 이러한 세개의 신적 위격들의 서로 구별되는 차이점은 오직 그들의 내부적 신적 관계에 있음을 파악하였다. 결코 세개의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세개의 전달구를 가진 하나의 신적 존재이셨다. 그리하여 세 위격의 한 하나님이신 것이다(one Godhead in three "persons").

 

  그런데 초대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고 사용하였던 "위격"의 의미는 오늘날 우리들의 그것들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들에게는 위격(인격)이라 하면 곧, 철수나 영희 등 구체적 이름을 가진 개인들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원래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라 하면 이는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쓰는 가면들을 의미하였다. 삼위일체의 신학상 이러한 마스크는 하나님께서 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쓰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은 삼위일체를 생각할 때 우리들의 생각이나 사용하는 용어로서의 세 위격들이 아니라, 그의 진정한 모습에 일치하는 하나님의 세 인격적인 노출을 상상해야 한다.

  얼마 후, 카르타고 근처 히포의 감독이던 어거스틴은 심리적 유추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되었다면 그는 삼위일체의 형상을 반영하리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한 그의 유추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기억(memory)과 지성(intelligence)과 의지(will)와 같다고 설명하였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말할 때 세 위격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나의 위격으로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물론 어거스틴은 이것이 단지 유추에 불과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단순히 천국에 앉아 있게된 영광을 받은 인간의 모습 정도로 묘사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사색가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에 관해 말하려면 우리는 직접 이를 묘사 할 수 없음으로 유추의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유추는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결코 단신으로 온 세상을 대항하여 쌍누 것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그의 생전에 그가 목숨을 걸고 주장하였던 그의 신학적 이론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그는 75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소천하였다. 그는 마침내 그의 말년 명실공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으로서 아무도 그의 권위와 위치에 도전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그가 니케아와 그 이후에 계속 위하여 싸워왔던 그 신경이 교회의 신경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세 위격의 하나님, 복되신 삼위일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