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구약신학

영웅의 탄생과 아이러니의 승리-②

예림의집 2012. 10. 4. 09:07

영웅의 탄생과 아이러니의 승리-②

 

  나는 예전에 <리더십의 그림자>라는 책에서 이 어머니와 가족들이 모세를 내다버린 것이 모세로 하여금 평생 동안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며, 그의 리더십에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 글은 잘못된 해석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모세의 어머니가 결코 모세를 무책임하고 매정하게 내다버린 것이 아니라는 점은 2:3이 잘 말해준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을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이 구절에서 보듯이 어머니는 모세를 그냥 강에 갖다 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안전을 위해서 아주 세밀하고 섬세한 준비과정을 거쳐 그를 나일 강에 내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녀는 갈대 상자를 만들고, 그 상자에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였다. 그리고 그 상자가 그냥 물길을 따라 무작정 흘러가지 않도록 "갈대 사이에" 두었다. 그녀가 이 장소를 주의 깊고 섬세하게 골랐을 것이라느 점은 5절에서 바로의 딸이 상자를 발견한 곳 역시 "갈대 사이"라는 점이다. 아마 이 장소는 모세의 어머니가 골랐던 그 곳과 동일 장소였을 것이다. 그 장소가 무척이나 안전하고 고정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상자는 바로의 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곳에서 별탈없이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세 어머니의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두었다"라는 동사에서도 은밀하게 드러난다. 1:22에서 바로는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를 나일 강에 던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모세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던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고르고 고른 장소에 "둔다." 이처럼 "던지다"와 "두다"라는 단어의 차이는 그녀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마음 쓰고 있다는 것을 은밀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드러내준다. 그러므로 모세가 비록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생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놓쳐서는 안 된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기 전에 "갈대 상자"라는 표현을 통해 출애굽기 내레이터가 창세기의 모티프를 다시 한 번 빌려 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상자"라는 단어에 사용된 히브리어 테바는 구약 성경에서 오직 노아의 방주와 이 "상자"에만 사용되었다(창 6:14). 사르나는 이 상자와 방주의 연결은 그 안에 든 사람들의 무력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보호를 강조해준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연결을 통해서 이 모세의 탄생 이야기와 홍수 이야기를 연결시킴으로써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의 연결점들을 생각해 볼 때 바로의 인종 말살정책이 "반창조적"이라고 한다면 모세의 탄생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반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를 향해 사랑을 베푸는 것은 어머니만이 아니다. 4절은 모세의 누이가 자기 동생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지켜보기 위해 "멀리" 서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이 "멀리"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단어이다. 왜냐하면 이 "멀리"라는 단어는 비록 물리적인 거리상으로는 멀지만 심리적인 거린는 아주 가까운 이율배반적인 경우를 표현해 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이 단어에 대한 연구를 출애굽기 33:7의 회막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내레이터는 "모세가 항상 작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아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진 박에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된 회막은 원래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영적인 이혼을 나타낸 것이라고 칼빈 등의 주석가들은 해석하였다. 즉 32장의 황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저지르자 하나님은 원래는 이스라엘 한 가운데에 있어야 할 회막을 모세로 하여금 진 밖 먼 곳에 치게 만드시고 이를 통해서 자신과 이스라엘간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표현하고자 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33:7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이혼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진 밖으로 멀리 떨어진 회막"은 사실 양자간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절의 마지막 부분이 밝히고 있듯이 "여호와를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가며"라고 말하고 있고, 이어지는 8-11절의 내용 역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가까움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이 "멀리"란 단어가 물리적인 거리는 멀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더 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33:7-11에서의 "멀리"의 의미는 필자가 이해한 바가 맞다고 굳게 확신하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이 단어의 용례들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나는 최소한 두 곳에서 이 단어가 물리적인 먼 거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심리적으로 더 가까운 거리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두 곳의 본문은 출애굽기 2:4과 창세기 21:16이다. 이 중 창세기 21:16을 개역개정판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하갈이) 가로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여기에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라는 어구는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멀리 떨어져"라고 번역해야 원문을 제대로 살린 것이 된다. 내레이터는 "멀리"란 단어를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이라는 표현을 덧붙여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화살 한 바탕 거리" 만큼의 먼 거리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해설들을 찾아보던 중 알더스란 학자의 해석이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기 아들이 목말라 죽어가는 고통에 찬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약간의 거리를 물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멀리 가지 않았다. 단지 살 한 바탕쯤의 거리를 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만약 자신이 자기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있다면 도움을 주기에 충분한 만큼 가까이 있을 수 있엇을 것이다(사역)."

  그의 해석에 따르면 "화살 한 바탕 거리"는 눈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어머니가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떨어지고자 하는 만큰의 물리적 거리이다. 그러나 또한 혹시 아들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언제라도 어머니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바로 다가갈 수 있을 만큼의 가까운 심리적인 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