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는 여기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잇다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람과 천사(고유한 방식에 따른) 동물들의 즐거움을 위해, 이 자연세계 전체를 발명하고 형성해 낸 그 위대한 상상력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을 때 그 언어가 때로 시로 타나나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알맞은, 아니 가히 필연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시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에 몸을 주는, 하나의 작은 성육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가서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었을 때 유전과 유년시절이라는 환경의 멍에도 달게 메셨다는 사실을 기억해도 좋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이러한 문장 약식을 다른 살마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며 어머니에게서 배우셧을 것입니다(그분을 주제로 한 시들을 들으며).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여기서도 같은 평행법이 등장합니다. (부수적인 아야기지만, 주님의 인성을 말할 때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은 없을까요?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를 보면, 마리아에게는 부드러운 면모와 더불어 가히 드보라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매서운 면모-대부분의 마리아 그림들에서는 제대로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중에 곧잘 매서운 면을 보이셨던 주님의 모습은 마리아의 그런 면모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저는 주님의 가정이 여러면에서 '조용하고' '온화한' 곳이었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일부 찬송가 작사가들이 떠올리는 가정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 부명 매서운 말도 오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투박하게 느꼈던 북부 지방 사투리로 말입니다.)
물논 저는 아마추어로서 '주제 전체를 다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에 다라 강조한 주제가 있는가 하면 건너뛴 주제도 있습니다. 별다른 의미를 느끼지 못한 시들이고, 그다지 주석이 필요한 시들도 아니어서 저는 긴 역사 시편들(historical Psalms)은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또 시편 연구에서 큰 주제이기는 하나 제게는 그렇지 않아서 다양한 '예배'에 사용된 시편들의 역사에 대해서도 최소한으로 다루었습니다. 일단 처음 읽을 때 거부감을 주는 시편들을 공라 먼저 달루었습니다. 제 나이 정도 되는 독자라면 그 이유를 짐작하실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접시에 놓인 음식은 하나라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맛없는 음식을 먼저 먹고, 그 다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어린 시절 미식법의 대원칙이었습니다.
저는 주로 영국성공회 기도서(th Book of Common prayer)에 나오는 커버데일(Coverdale)역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과거의 성경들과 비교해도 커버데일 역은 가장 정확한 번역은 아닐뿐더러 현대의 웬만한 성경학자들은 그보다 월등한 히브리어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문체의 아름다움과 시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력 만큼은 위대한 라팅어 번역가인 성 제롬(Jerome)과 함께 그를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저는 항상 모페트(Moffat)박사의 번역을 가지고 그의 번역을 점검했으며 때로는 수정하여 사용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도 곧 알게 되겠지만 이 책은 소위 말하는 '변증서'는 아닙니다. 이 책 어디에서도 저는 비그리스도인드레게 기독교의 진리를 납득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분들과, 책을 읽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자신의 '불신앙을 접어 둘' 준비가 되어 있는 분들으 대상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인간은 늘 진리에 대해 변호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진리를 양식으로 먹는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영국성공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자로서 이 책을 썼지만, 가능한한 교파 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비록 한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 양쪽 모두와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로 인해 양쪽 어디에서도 선의나 기도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니, 실은 그다지 크게 걱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가장 혹독한 비판을 퍼부어 오는 쪽은 로마 카톨릭 교회나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며 다른 철두철미한 신자들도 아니고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아닌, 온갖 유형의 어중간한 신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빈다 .그러한 개화되고 진보적인 인사들의 호전적인 태도는 그 어떤 예의로도 무마할 수 없고 그 어떤 겸손으로도 누구러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분명 제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훨씬 호전적인 사람일 것입니다(아마 연옥에서는 우리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보고 듣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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