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안나 빈스트라(Johanna Veenstra)
죠안나 빈스트라는 여러 가지 점에서, 20세기에 자신의 몸을 드려 해외 선교사로 헌신했던 수많은 독신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한 표본이었다. 그녀는 어느 침례교의 집회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 평신도 선교사역에 참여하다 19세에 뉴욕에 있는 연합 선교사 훈련학교에 입학하여 도시 전도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졸업하기 전에 해외선교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수단 연합선교회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의 원칙이 25세 이상만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3년을 기다리게 되었고, 그 기간 동안 칼빈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의료교육을 받으며 선교를 준비했다.
수단 연합선교회가 그녀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아프리카 루페에서 개척사역을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파송되어 간 곳의 환경은 열악했으나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뉴욕에서의 화려하고 즐거운 생활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주님의 일터의 어두운 구석으로 온 것이다. 주 예수께서 친히 언제나 내 동반자가 되어주셨기 때문에 희생이란 것은 없었다”라고 고백한다.
대부분의 다른 독신 여성 선교사들처럼 죠안나는 여러 가지 사역을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청년들을 복음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기숙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또한 바쁜 와중에도 복음 사역과 의료 봉사를 하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복음 사역에는 실패와 성공이 번갈아 뒤따랐다. 개종자가 생겨도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죠안나가 개척자로서 복음의 기초를 쌓고 그렇게 해서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청중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사역의 성공이었다.
죠안나가 비록 아프리카식의 움막에 즐겨 살았고 원주민들에게도 잘 대해 주었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우월의식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선교사가 우월감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었고, 우리가 더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권의를 주장하고 그 권위를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그 당시로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태도는 결국 원주민들에게 적대감을 심겨주어 몇 십 년 뒤에는 이 지역에서 폭력사태를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죠안나가 아프리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일하고 있던 20년대와 30년대에는 표면적으로는 선교사들에 대한 적대감정이 없어보였다. 특히 그녀의 의료사역은 큰 인기를 끌었고 사람들은 그녀의 기숙사 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1933년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수술을 받기위해 선교사 병원에 입원했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한 것은 루페 주민뿐 아니라 이웃 마을에 까지 슬픔을 안겨주었다.
아프리카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보냈던 편지가 그녀가 죽은 후 미국에 도착했었는데, 그 편지는 그녀 자신에게 꼭 맞는 제목이었다. 그 제목은 바로 “아프리카의 움막에서 하늘나라의 저택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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