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학습 도움이

서론 - 3. 오늘의 상황과 구원론

예림의집 2009. 3. 24. 07:58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이 땅에서의 삶에 모아져 있다. 사람들이 원래 추구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러하다. 과거에는 현세를 넘어서 내세의 삶을 인정하고 또 물질적인 삶보다는 정신적인 삶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면 오늘날에는 사람들은 내세가 아니라 현세를 정신이 아니라 물질을 삶에 있어서 중요한 관심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그러한 이 땅의 삶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와 구하는 것은 영적인 생명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구하는 관심으로 교회에 찾아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자신들의 삶의 변화를 원한다. 특별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면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고 이것은 모든 관심을 집중할 것을 요구하기에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이것과 다른 영적인 것을 찾을 마음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자신의 관심사에서 작은 것으로 만들고 대부분의 관심을 세상사에 두고 있다. 구원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보다 중요한 관심은 영적인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잘 사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 해도 실제의 삶에서 구원이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하다. 이미 구원을 받았고 긴급한 것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것이다. 구원이 확신은 갖고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인 체험이 없다. 구원의 체험은 과거의 사실이고 지금의 삶에서 지속하고 있지 못하다.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미 주어진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어지는 것인데 오늘날에는 이 현재의 삶에 계속되는 구원을 알지 못한다.

구원이 과거의 사실로 이해되고 현재의 과정으로 이해되지 못할 때 우리의 신앙 생활에 세속적인 관심이 지배적이게 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믿은 후에 구원의 계속적인  성장에 대한 소망을 알지 못하고 신아의 의미를 이 땅의 삶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찾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소용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자신의 현재적 삶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삶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바란다. 처음에는 신앙이 영적인 것에서 출발했는데 점차 세속적인 관심에 종속적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영적인 구원은 처음 믿음으로 끝나 이제는 세속적인 관심으로 신앙생활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영적인 구원의 삶에서 세속적인 삶을 부정하고 영적인 삶에로 바꾸지 않으면 이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님을 말해야 한다.

이 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목회자들은 점차 구원의 의미를 현세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잇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과 다름 장향을 취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목회자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복음에서 말하는 것에서 떠나 사람들이 원하는 현세적인 삶을 구원으로 정당화해 주고 있다. 오늘의 새로운 신학자들은 복음주의 신학까지 포함하여 구원의 현실적인 의미를 찾는데 집중하고 있다. 구원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적인 삶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현실적으로 풍성한 삶으로 이해된다. 예수를 믿어서 얻는 것은 천국의 영원한 복락이 아니고 이 땅에서 보다 풍성하고 자유롭고 윤리적인 삶으로의 변화이다. 사실상 자연적인 생명에 속한 것을 이제는 새로운 생명의 의미로 높여 이런 생명에 대한 추구를 영적인 구원의 삶으로 간주한다. 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은 하나로 통일되어 가고 있고 이것을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말한다. 목회자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이 되지 못하는 것은 성경이 아무리 강조해도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될 십자가는 다 빼버린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풍성한 삶을 말한다. 이것은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 말해지고 있지만 사실상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삶을 성경의 용어로 포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특별히 이렇게 구원을 현세적으로 만드는 신학적인 틀이 구원을 창조의 회복으로 보는 생각이다. 구원을 창조의 회복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구원은 아담이 범죄로 상실한 축복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창조에 종속되는 것이고 창조를 넘어선 새 창조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에 서 있는 것 같고 또 정통적인 구원론의 노선에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죄에서의 구원이라 해도 그것은 창조의 회복의 의미가 아니었고 또 종교개혁자들 역시 그러하다. 창조의 회복으로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구원을 현세적인 의미로 바꾸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복음에서 말하는 영적인 구원은 창조를 넘어서고 또 이 세상에서의 삶을 부인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을 부정하고 이것을 창조에 속한 것으로 바꾸게 한 것이다. 결국 창조의 회복이란 견해는 현실의 행복과 평화를 구하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의 행복을 구하는 시대적인 사조와 창조의 회복으로 구원을 이해하는 견해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구원을 이해하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살모가 영적인 삶의 갈등은 필요 없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충실한 것이 곧 영적으로 성숙하고 새 생명이 성장한 것을 드러내주는 표시가 된다.

창조의 회복으로 구원을 이해하는 경우 구원의 삶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윤리이다. 사실 교회사에서 구원을 윤리적인 것으로 오해해 온 것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더욱 더 구원의 의미가 윤리적인 삶으로 오해되고 있다. 죄에서의 구속을 윤리의 회복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성숙은 윤리적인 성숙에 의해 측정된다. 이것은 인격에 대한 강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의 변화를 강조하고 여기에 구원의 생명이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는 것에 진리의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변화에서 영적인 성숙을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을 현실적인 삶에서 찾으려는 동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 비인격적인 사람이 인격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구원과 다른 차원의 것임이 가려져 있고 이 양자가 혼동되고 있다. 이 양자가 혼동되어 잇을 때 새 창조로서의 구원은 창조의 차원으로 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임을 강조해야 한다. 창조의 회복으로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구원의 진리가 복음의 핵심이고 또 이 구원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나타난 새 창조에속한 것인데 구원을 강조하면서 이것을 창조에 종속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을 추구하면서 영적인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그 렇게 될 때 세상에 대한 추구가 더욱 강화되고 구원의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가장 위험한 세속화이다. 이것과 싸움은 복음 진리의 수호를 위해 절대적이다.

이렇게 구원을 창조이 회복으로 이해할 때 자연히강조되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다. 복음의 구원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고 인간의 삶을 넘어선 것이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혀 의미를 지닐 수 없다면 창조의 회복으로 구원을 이해하면 이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결국 인간이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를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이해했고 이신칭의란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며 오직 은혜로 되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이렇게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하고 인간의 무능함과 무가치함을 부각시킴에 대해 오늘날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복음주의자들도 전통적인 오직 믿음만으로 된다는 믿음의 강조를 비판하면서 믿음은 행위로 그 진실성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음 보다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한 강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라는 전통적인 믿음의 강조를 떠나서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약화시키고 인간적인 것을 신뢰하는 인본주의에 빠지게 되고 이것은 기독교 신아으이 기초를 무너뜨리는 겨로가를 가져온다. 이런 행함에 대한 강조는 구원을 윤리와 혼동하고 있고 또한 하나니므이 은혜로만 주어질 구원을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낸다. 행함을 강조하는 오늘의 경향은 바른 복음의 기초에 서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주어진다는 종교개혁의 강조는 복음의 바른 회복이고 이것은 오늘 인본주의적 신학의 경향에 대해서도 역시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