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50대 중반에 논에 두렁작업(모내기를 한후 삽 등으로 논흙을 파 올려 짓이겨 논물이 새지 않도록 논두렁을 만드는 작업)을 하시다가 허리가 삐끗해서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엄니는 '바쁜 농사철에 꾀를 부린다'며 눈을 흘기셨지만 아버지는 그 후로 자리보전을 하고 말았습니다. 신약은 드셔도 소용이 없어서 엄니는 허리에 좋다는 약초를 백방으로 찾았는데......
엄니는 옆동네 어르신이 가르쳐준 약초가 '허리에는 즉방'이란 말을 전해 듣고 마침 그 약초가 우리동네에 흔해서 뿌리까지 캐어다가 정성껏 달였습니다. 그런데 그 약을 드신지 일주일만에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께서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과욕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엄니 몰래 양을 초과해서 드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조금씩 거동을 할 수 있었지만 시력이 조금씩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약초 탓인지, 노안이신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햇볕좋은 가을날, 일흔 초입의 아버지께서 동네 찻길 옆에서 나락을 말리고 계셨습니다. 나락을 덕석에 널어놓은 상태에서 햇볕을 한참 쪼이고 나면 다시 발로 골을 지어 아래쪽에 있는 벼와 위치를 바꾸어주는 작업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발자욱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점차 옅어지자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셨죠.
"거기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요? 내가 지금은 맹인이나 본시부터 눈이 먼 것은 아니요. 지나가면서 인사를 하고 지나가면 좀 좋아요."
"어르신 죄송합니다. 저는 윗마을 금동댁 큰손자입니다."
"덱끼, 이 사람! 아는 어른이 있는데 그냥 지나간단 말인가? 자네 조부하고는 막역한 사이인데, 얼마나 할아버지께서 서운해 하시겠나?"
아버지는 지팡이로 땅을 툭툭 치시면서 혀를 끌끌 차셨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에는 이웃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밖에 계시면 인사를 합니다.
"어르신, 볕이 참 좋지요. 저는 귀동댁 며느리입니다."
"고맙소, 새댁. 그래 시모님께서는 몸이 불편하시다던데, 고생이 많겠구려. 좀 쾌차하셨는지요?"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고 말씀을 나누시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그 몇해 후 정월보름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 붉은색 복주머니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때 들을 수만 있었던 아버지께서 당시 즐기시던 유일한 취미는 왕종근 아나운서가 부산 용두산 팔각정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종종 퀴즈내기를 했는데, 대학을 졸업한 저보다 무학인 아버지가 더 많이 맞히셨습니다.
아버지는 해가 지남에 따라 더욱 몸이 불편해지셔서 두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 더듬으면서 다리를 끌고 다니셔야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항상 복주머니는 차고 다녔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불편하게 보이는 복주머니를 떼시라고 말씀드렸지만 아버지께서는 더욱 복주머니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더욱 어머니께서 씻어 드리려고 해도 내놓지 않아 까맣게 때에 절어 있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등록일이 될 쯤에 나는 등록금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서 복주머니를 내밀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네 형이나 누나들이 주는 용돈을 모두 모은 것이다. 수야, 이게 모두 얼마인지 한번 세어 보아라!”
나는 복주머니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10원짜리 동전에서부터 1000원, 5000원, 10000원권 지폐까지 꼬깃꼬깃 접힌 채로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지폐를 세면서 속으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리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쉰둘에 나를 낳으신 아버지의 그 특별한 사랑을 잊지 못합니다.
요새는 육체가 고단하고 마음이 어지러운지 종종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서 더욱 그런 모양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생각만 하면 아이들에 대한 열망이 솟아서 나는 다시 힘을 얻습니다. 오늘밤에는 아버지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ε♡з예림의집으로ε♡з > 행복한 가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출산은 여자로서 해볼 만한 경험? (0) | 2008.12.20 |
---|---|
시어머님따로살자는말남편에게어떻게꺼내죠?... (0) | 2008.12.18 |
딸들에게 미안해서리... (0) | 2008.12.17 |
신생아 돌보기. 한 달 플랜 (0) | 2008.12.14 |
자녀를 화나게하는 30가지 (0) | 2008.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