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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제자 삼는 부모를 위한 7가지 티칭 포인트

예림의집 2008. 11. 13. 00:32

자녀를 제자 삼는 부모를 위한 7가지 티칭 포인트

1. 가정이 교육의 출발이다

미국은 크리스마스 휴가가 보통 2, 3주가 된다. 그때는 사람들 모두가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미국 유학생들은 그 무렵이 제일 외롭다. 놀아 줄 사람도 없고 놀러 갈 데도 없다. 나도 그때가 제일 외로웠다. 그런데 남동생이 미국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기간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오셨던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때 우리 3남매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연말연시가 아버지가 가장 바쁜 때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실 수 있었을까. 나중에 교회 중직들이 아버지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를 구하면 되지만, 내 자녀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져 줄 사람이 없소.”

지금 생각해 봐도 아버지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는 나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정에 대한 우선순위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버지의 자리가 1차적인 하나님의 사역임을 알았다면, 가정을 세우기 위해서 다른 것은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2.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라

하나님은 부모에게 귀한 자녀를 주셨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완벽한 자녀들을 원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의 기대치에 부흥하는 것이 축복은 아니다. 한국적 정서 속에서 자식은 아버지의 소유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녀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자녀를 하나님께 다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내게 다시 바치면 다시 돌려받는다고 말씀하신다.

아기가 내 몸 안에, 우리 집 안에 들어온 이유는 떠나기 위해서이다. 아이가 들어서는 순간 기도해야 한다. 아이들이 잘 떠나가게 해 달라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기에, 자녀를 하나님께 다시 드리지 못했기에 너무나 많은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아니라 욕심의 가정이 되고 있다. 욕심을 버렸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부모는 밤마다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 한다. “이 아이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3. 살아있는 신앙 교육을 하라

나는 이런 설교를 감동적으로 들은 적이 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을 보라. 예수님도 4가지 영역에서 자라나셨다. 키는 신체적, 지혜는 인지적, 사람은 사회적, 하나님은 영적을 말한다. 성경적 근거도 있고 아주 그럴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문제점은 영역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것을 안다면 이분법을 깨뜨려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기독교의 세계관, 그 세계관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다. 어른들부터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컵에 담기면 물이고 대야에 담기면 물이 아닌 게 아니듯, 신앙과 그 신앙에 근거한 교육은 연속선상에 있다.

4. 신앙의 갈등을 충분히 겪게 하라

“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까요?” “왜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학교 최 선생님은 왜 34살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을까요?” “성부, 성자, 성령? 셋이면서 하나라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도덕적 교훈대로, 이미 알고 있는 정답대로 살아가도록 기독교는 사람을 로봇과 같은 존재로 만들기 쉽다. “삼위일체가 뭐야?” 아이들이 물었을 때 “물이 수증기도 되고, 얼음도 되는 것처럼, 형체는 다르지만 하나라는 거야.” “나는 너희들의 아빠지만, 엄마의 남편이기도 하고, 학교 선생님이기도 하잖아. 이렇게 하나지만 역할이 다르잖아.” 하지만 두 가지 다 삼위일체의 올바른 설명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세상의 이치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라고 하셨다. 타락한 인간의 인지로는 수용하지 못할 하나님의 인지가 있다. 그래서 패러독스에 직면했을 때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다. “얘들아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나도 알고 싶어.” 아이들의 신앙적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해 주면 안 된다. 질문을 무마시키지 말고,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스스로 신앙 갈등을 겪도록 해야 한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알 수 없다. 앎에 대한 작은 힘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통로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앎이 더 넓어질 것이다.

5. 여섯 살 이전에 교육하라

우리 집은 아이들이 넷이다. 첫째와 둘째는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제법 조용하게 지낼 줄도 안다. 하지만 셋째랑 넷째가 붙어 있으면 언제나 집은 북새통이다. 어느 날은 그 둘이 붙어 있는데도 너무 조용했다. 신경이 쓰여서 아이들을 찾아봤더니 둘이 함께 화장실에 있는 게 아닌가. 뭘 하는지 궁금했다. ‘둘이 목욕을 하나? 아님, 혹시 같이 일을 보나?’ “이제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이들은 일명 침례 놀이 중이었다. 셋째가 목사님을, 넷째가 성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누가 목사 아들 딸 아니랄까 봐!’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의 놀이는 아이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기독교 교육을 하면 할수록 더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세상의 풍속, 유혹, 죄악들을 접하기 전, 그러니까 3, 4세부터 하나님으로 물들여 주어야 한다. 이러한 세계관이 아이들의 마음을 지켜 줄 것이다.

6. 자녀를 향한 계획을 갖고 있으라

나는 혼혈아로서 한국인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이 늘 힘들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요셉아, 너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대학교 때부터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거야. 알았지? 너는 외국인처럼 생겼지만 네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한국인 교육을 받기 위해서야. 그렇게 알고 있으렴.” 아버지의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 아버지가 내가 힘든 것을 몰라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에 힘이 난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께 나를 위탁받은 자로서 되는 대로, 그럭저럭 나를 키우신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을 갖고 나를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모로서 교육의 주권을 회복하는 자세이다. 틀려도 좋으니까 확신을 가지고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켜 드려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7. 훈육의 아픔을 충분히 견뎌라

가정의 부모, 교회의 목회자, 학교의 선생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위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부모가 함부로 자녀의 손을 들어줄 때, 훈육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린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를 얻고 열을 잃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나이가 들수록 가지를 더 깊이 잘라낸다. 우리 하나님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깊이 절단하신다. 우리의 깊숙이 있는 죄의 부분을 도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부모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아이들을 훈육할 뿐이다. 부모가 훈육할 수 있는 짧은 기간 동안에 훈육의 과정에 잘 적응해서 결국은 장기적인 훈육을 이해하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픔을 감사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진정한 거룩의 과정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