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예측할 수 없는 예배자

예림의집 2008. 11. 5. 18:01

십자가에 차츰 다가가는 주간이었고, 긴장감으로 예수님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가혹하고 부정적인 태도들에 둘러싸였으며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압박은 날마다 가중되었다. 곧이어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고통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괴로운 가운데서도 '쓰디쓴 사막에서 달콤한 오아시스 같은' 아름다운 행동이 일어났다.

예수님은 시몬이라 부르는 사람의 집에 계셨고, 그때 갑자기 한 여자가 향유 옥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녀는 옥합을 깨뜨려,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머리 위에 옥합의 향유를 전부 쏟아 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미친 일이었고,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여긴 한 가지 이유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향유는 한 번에 전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씩 떨어뜨려 일정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행위를 그런 식으로 보지 않으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

그분에게 이것은 시기 적절한 헌신의 행동이었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행동이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냉소적인 종교적 태도에 물들지 않은 한 여자의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날 종교적 태도들과 마주쳤지만, 그런 태도들 때문에 영향받지 않았다. 이것은 '규칙들' 을 알지 못했던 한 여자의 경배였다. 예수님의 영화로움을 보기 원했던 예측하지 못한 때묻지 않은 마음이었다.

 

오늘날 예수님의 예배자인 우리도 우리의 경배에서 이런 종류의 예측 불가능성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항상 신선하고 놀라운 측면들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생명의 표시이다. 경배는 서로 대면하여 즉흥적인 방법으로 사랑이 오고 가는 흥미진진한 만남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게리 퍼와 밀번 프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배는 대화이며,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기 때문에, 역동적이고 예측할 수 없으며 끝없이 열려 있다."

물론 이것은 똑같은 형식을 추구하는 몇몇 예배에 해당하는 말이다. 전통들은 교회의 전반적인 주류를 형성하며,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시고자 한다. 익숙한 요소들은 예배자에게 자신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만으로는 생명력을 잃고 전통 그 자체로 즐거워하면서 즉흥적인 사랑의 여지를 남기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만날때, 중요하기는 하지만 절대 구조가 생명으 ㄹ빼앗아 가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종교는 절대 연애 감정이 무뎌지게 해서는 안된다. 체스터튼은 '때때로 우리의 경배가 애정 사건보다 더 이론적' 이라고 염려했는데, 아마도 이 점을 지적한 것 같다.

 

하나님은 그의 신부인 교회의 마음을 얻었다. 어것은 메마르고 예측 가능한 관계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생명과 활력이 충만한 '신과의 연애' 이다. 진정한 연애는 결코 예측할 수 없다. 진정한 연애는 흠모하는 사람에게 본능적인 반응들을 드러낼 수 없다. 연애의 마음은 마음을 두드리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들을 찾아 나선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신나간 짓을 많이 한다. 가끔은 심지어 그들의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 향유 옥합을 들고 에수님께 온 여자도 아마 그방에 있던 모든 독신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만 제외하고 말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신부는 자기가 사랑하는 오직 한분을 우해 좀 더 미친 짓을 할 때가 아닌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수님은 그 교회가 처음에 했던 것들을 하기 바란다고 우리에게 말슴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는 사랑이 떠난 것 같다. 그 교회는 고난을 견디고 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예수님을 기뻐하지 않는다. 견디기는 하지만, 더 이상 기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종류의 관계인가? 이 교회가 언젠가 알게 되었던 첫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흠모를 드러내며 한 때 꿈꾸었던 연애의 감정은 어디에 있는가?

 

냉소적인 사람은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삶이며, 이런 류의 전락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때때로 내 안에 있는 냉소적인 존재도 똑같은 말을 한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 삶에서 높은 수위를 기록했던 몇몇 순간들을 다시 생각한다. 그때 내 마음은 예측할 수 없는 미친 방식으로 하나님을 더욱 흠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처함 종교적 환경이 어떤 것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옥합의 뚜껑을 깨고 아낌없이 향유를 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때때로 열정이나 자발성 없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의 기름을 한 방울씩 배급해 드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너무 특별하거나 자리에 맞지 않은 것 같은 경우에는 예측하지 못한 경배를 드리기가 두려워진다. 그러면서 나는 예배 인도자가 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의 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관계는 예날 신발 짝 같이 닳거나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안다. 이 관계는 응답해 주시는 바로 그 은혜처럼, 아침마다 새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내 마음에, 더 중요하게 하나니므이 마음에는, 경배의 연애 장소, 즉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부르심이 잇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하신 하나님의 초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