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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가 : 조건 없는 사랑의 통로

예림의집 2008. 11. 4. 00:20

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가 : 조건 없는 사랑의 통로

나는 아직도 칼 파워스 상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촉촉한 눈가를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을 만큼 아버지의 집안은 가난했다.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로 가는 날 6.25 동란이 터졌고, 아버지는 미군부대가 있었던 수원으로 다시 내려와야 했다. 한 미군이 뭐라고 손짓발짓을 했는데 용케도 아버지는 그것이 나무 해 오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논두렁의 말뚝을 뽑아갔다. 그것을 기특하게 여긴 미군이 하우스보이로 취직을 시켜 주었고, 성실한 아버지는 미군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전세에 밀려 미군과 함께 경산까지 내려갔을 때, 그곳에서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에게 뜻밖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빌리 김, 미국에 가서 공부하지 않을래?” 아버지는 처음에 그의 말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부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팔레치아 산맥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났고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한국 전쟁이 터져서, 가난 때문에 군에 지원했던 것이었다.

칼 파워스 상사는 아버지를 미국의 유명 기독교 사립 고등학교인 밥 존스 고등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은 돈을 빨리 벌려고 사립대를 포기하고 2년제 교대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공부를 끝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간 뒤에야 칼 파워스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아이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학교를 은퇴한 지금까지도 그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그 산골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값없이 은혜를 나눠 주는 통로는 교육이었다. 칼 파워스의 삶을 쏟아 부은 교육, 그것은 우리 집의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누구든 아버지 김장환 목사님처럼 유명한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칼 파워스 상사가 될 수는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미국인 엄마의 손을 붙잡고 학교에 간 첫날, 나는 스타덤에 올랐다. 아이들은 동물원의 사자나 원숭이가 나타난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놀림을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온돌방에 엎어져서 잤다. 그렇게라도 하면 코가 납작해질 것 같아서였다. 머리카락이 까매지고, 눈동자가 까매질 수 있다면, 피부가 노랗게 될 수 있다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선생님은 이제부터는 도시락을 싸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엄마와 함께 수원영동시장에 갔다. 반짝반짝 빛나는 양은 도시락을 사고 보니 마치 내일 소풍이라도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엄마는 양은 도시락을 신문지로 싸서 내 가방에 넣어 주셨다. 드디어 점심시간, 모두가 들떠 있었다. 함께 모여서 도시락을 열어 보기로 했다. 콩자반과 단무지, 김칫국물에 물든 꽁보리밥, 가뭄에 콩 나듯 멸치와 계란프라이가 등장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도시락을 들 때 조금 가볍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뻤다. 김밥인 게 분명했다. 내가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들이 일제히 말했다. “어! 저건 뭐야? 역시! 양코쟁이는 먹는 것도 달라!” 내 양은 도시락에 얌전히 담겨 있는 것은 햄앤에그 샌드위치였다. 아이들의 눈총이 화살처럼 꼭꼭 박혔다. 창피해서 도저히 교실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교실을 뛰쳐나갔다. 뒷산에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 엄마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엄마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셨지만, 나는 엄마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엄마, 친구들이 그럴 줄 알았으면서 나 샌드위치 싸 준 거지? 내가 놀림 받을 거 알면서 한국 학교에 보낸 거지? 엄마 왜 한국에 있어? 엄마 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한국 사람이랑 결혼했어? 우리 미국에 가서 살면 안돼?” 내 원망 섞인 하소연을 잠잠히 들어주시던 어머니는 날 꼭 껴안아 주시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Because of Jesus! 예수님 때문에!” 엄마의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마음의 살갗이 벗겨지는 듯 아팠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고향 미시건으로 여행을 떠났다. 미시건에 있는 한 크리스천 스쿨에 입학했다. 처음 보는 미국인 학교 정문이 점점 가까워지자 가슴이 콩닥콩닥 튀었다. 4학년 교실에 배정되었다. 부모님을 뒤로 하고 교실에 들어서니 또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첫 시간은 스펠링 수업 시간이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난 들을 줄만 알지 스펠링은 모르는데, 어떡하지!” 선생님이 물어보는데 내가 아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점점 내 차례가 다가왔다. 나는 그만 숨어 버리고만 싶었다. ‘어떻게 하지? 하필이면 스펠링 수업이 첫 시간일 게 뭐람! 앞으로 창피해서 학교를 어떻게 다니지? 정말 어떻게 해’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어쩌면 전학 왔다고 선생님이 봐 주시지 않을까?’ “김요셉! 앞으로 나와 봐!” 내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봐 주기는커녕 칠판 앞으로 불러내시다니!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내리깐 채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은 단어 카드를 들고 내 옆으로 다가 오셨다. 바지에 오줌을 싸기 직전이었다. “너희들, 이야기했지? 한국에서 온다는 선교사님 자녀 말이야. 얘가 바로 그 요셉이야. 요셉이는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우리와 다른 말을 배우며 자라나서 한국어를 아주 잘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말로 써 줄래?”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한국어로 쓰라고? 영어가 아니고? 그것도 달랑 이름 하나를?’ “선생님 이름은 샤프야!” 나는 칠판에 선생님의 이름을 한글로 또박또박 적었다. “샤 프” 까짓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탄성과 환호가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한국말로 써 줘! 내 이름은 탐이야!” “나도, 나도! 나는 메리야!” “나는 수잔!”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감탄사를 내뿜으며 박수를 쳤다. 근심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기쁨과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내게로 몰려들어 자신의 이름도 한국말로 써 달라고 했다. 소동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날 수업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때는 고등학교도 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수원의 신흥 명문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미션스쿨인 유신고등학교를 지원하기로 했다. 입학원서를 내러 온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모집 정원은 7백 명인데, 자그마치 2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응시한 것이다. 순간 아찔해졌다. 드디어 입학시험 당일, 시험지가 배부되었다. “시험지 뒤집어!” 선생님의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이 문제 푸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마치고 시험 문제를 풀어 내려갔다. 다음 시험 시간에도 마찬가지로 5분 정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시간까지 기도를 한 뒤 시험을 봤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내 이름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처음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런데! 맨 처음에서 두 번째에 흔하지도 않은 내 이름 석 자가 똑똑히 적혀 있었다. 2등이었다. 4문제만 틀려 2등으로 합격한 것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벌판 가운데 우뚝 선 고등학교에 들어섰다. 신설 학교라 그런지 선생님들의 열의가 대단했다.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따로 모아 강훈련을 시켰다. 일명 명문대 진학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전체 2등으로 입학한 나는 자연히 우등반에 배정됐다. 우등반 아이들은 중학교 때 친구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갓 입학한 학생들답지 않게 공부를 알아서 척척 해 나갔다. 친구들과 친해지려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우등반은 정말 재미없는 반이었다.

2학년이 되었다. 학교의 입시반, 우등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학부모들의 원성과 나라의 평준화 교육 제도 때문이었다. 신이 났다. 우등반에 들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사라졌으니까, 또 재미없게 악착같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았다.

3학년이 되니까 취업반이 생겼다. 학교 편에서 보면 진학을 포기한 아이들을 취업반으로 빼서 학교 전체 진학률이 조금이나마 오르니 좋고, 학생 편에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자기 길을 찾게 해 주니 좋았다. 우리들은 그 반을 돌반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돌반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것은 오후 2시면 수업이 모두 끝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그 반에 들어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딱 꼬집어서 말하면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당장 선생님을 찾아가 말씀드렸다. “부모님과 얘기가 다 됐어요. 전 대학은 미국으로 가기로 돼 있거든요. 저는 입시를 치르지 않으니까 그냥 취업반으로 보내 주세요.” 선생님의 허락 하에 나는 당당히 돌반에 입성했다.

돌반에서의 생활은 아주 짜릿했다. 돌반에는 공부도 못하고, 별 볼 일 없는 문제 아이들 투성이었지만 그곳에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인간적인 의리가 있었다. 나는 거기서 깊은 사랑이 싹트는 진정한 공동체를 체험했다. 평생을 같이한 친구를 만난 것도 돌반에서였다. 만약 내가 돌반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나도 성공을 위해서 남을 이용하는 관계를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정한 앎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상호 협동과 타인에 대한 배려는 공동체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