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왜 하는가?
사람은 “왜 해야 하는지 그 행동의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면 목숨을 건다.” 그리고 그러한 목숨을 걸만한 동기유발은 우리의 암담한 교회교육의 새로운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교육을 해야 하는가? 다음의 3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명령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늘 확신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 것이니라”(요 5:34). 이러한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구원사역이 충분하게 이루어졌다. 역시 우리에게도 이러한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인해 매일을 살아간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었고(롬 5:8)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롬 8:32). 그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을 뜻을 따라 헌신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교사에게는 당연한 도리이다. 그 많은 하나님의 명령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을 위한 명령을 주셨다.
(1) 창 1:28-31의 문화명령
27절에 따르면 사람의 존재는 우리에게 독특한 역할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한 권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사되어야 한다. 이 명령은 ⌜문화명령⌟으로 명명되며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 성경은 “그들에게 이르시되”(요멜)라고 기술하는데 이것은 “가로되”(레몰)가 어류와 조류에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기 위한 단순한 연결어인데 반하여 “이르되”(요멜)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상으로 말씀하심을 나타내서 최초의 계시로서 인간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준다.
“생육하고”(파라 베라타)는 어류와 조류에게도 동일한 명령으로 암수가 생식능력으로 종족을 유전시키도록 명령하지만 “번성하라-땅을 채우라”(밀레우 하아레츠)는 22절에서 “물에 채우라”가 수중생물이 물을 채우듯이 육지의 생물도 가득 채우라는 의미를 떠나서 여기서는 미지의 지역에 대한 개발의지와 개척정신을 의미하고 있다.
“땅을 정복하라”(카바쉬 하아레츠)는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다, 마살)와는 달리 ‘주무르다, 발로 밟다’로서 점유하거나 사용하는 일, 즉 자연개발, 농경, 채광(문화생활)과 지리적 발견, 과학적 발명(탐구생활)을 하라는 명령이다..
“다스리라”(라다)는 ‘복종시키다, 소유하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를 따라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명령하는 것이다. 마 10:29가 이를 증명한다.“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받은 문화명령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나의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창조, 계발은 그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후손에게 계승이 되어야 한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계승이 되어서 더 나은 것으로 발전해야 한다. 즉 나의 은사와 나의 일생에 걸친 열매는 또 다른 사람에게 계승되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멘토링이라고 한다. 멘토링이란 “나의 탁월한 은사활동의 영역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여 그로 하여금 최대한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는 우선적인 관계”라고 할 때 문화명령의 궁극적인 지향점임을 알 수 있다. 문화명령은 교육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2) 마 28:19의 지상위임
주님은 12명의 제자와 120명의 문도들, 나아가 500여 명의 부활의 증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하신 명령 중에 가장 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의 모습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해야할 것은 주님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하여서 그대로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전도가 아니라 교육, 즉 양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은 단순히 지역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근대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코메니우스는 『범교육학 (Pampedia)』이란 책에서 모든 사람에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시에 소외된 사람들의 부류를 여성과 가난한 사람, 장애인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사들은 교회에 불성실한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지각하는 아이,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아이, 변화가 더딘 아이 모두가 우리가 품어야할 “모든 족속“이다.
(3) 행 1:8의 증인이란 소명
주님은 승천하시며 약속을 확인하셨다. 새로운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는 이전의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시면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서 주님의 온전한 증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것을 본대로, 그리고 아는대로 증거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그로 인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발생하는지, 그 분이 하신 일을 우리는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그 내용을 몸으로 보여주며 또 그대로 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유능한 증인은 자신이 일을 잘 할 뿐 아니라 훈련받는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증인으로서 가장 확실한 것은 한 번의 만남과 증언이 아니라 상대방이 이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신앙과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1년 52주를 통해 증언하는 것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부른다.
나아가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교회학교에서 만나는 우리의 학생들과 그들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바로 우리 증언의 대상이 된다.
(4) 딤후 2:2의 제자로 맺는 열매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2:2). 여기에는 <바울-디모데-충성된 사람들-다른 사람들>이라는 연결고리가 나타난다. 바울이 디모데를 가르쳤고(들은 바) 디모데는 충성된 사람을 가르치면(부탁하면) 그 사람들이 충성된 삶을 살면서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식물은 성장과정에서 3단계의 활동을 하는데 첫 번째 생명을 유지한다. 식물이 생명을 유지한다는 건 본연의 자세이다. 생물과 무생물이 있다. 생물은 식물, 동물로 구분된다. 식물은 생물이어야 돼요.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는 식물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리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한다. 얼마나 노력을 할까?
미국의 사막 지대에 포아(Poa)라고 하는 풀이 있다. 호밀과에 속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포아하고는 달리 미국 사막지대에 사는 포아는 키가 별로 크지 않고 5cm쯤 된다고 한다. 그런데 사막 지대에 사니까 어떻겠는가? 물과 영양분이 필요하니까. 결국 뿌리를 깊게 내린다. 깊은 정도가 아니다. 넓게 내려야 한다. 넓은 정도가 아니다. 잔뿌리들이 무수히 있다. 키는 5cm인데 그 뿌리가 얼마나 길까? 학자들은 이런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많은 표본을 캐어 가지고 이어 붙이고 자로 잰다. 그럼 얼마가 될까? 놀라지 말라. 평균 600km라고 한다. cm로 계산해 보면 6000만cm이다. 5cm를 위해서 6000만cm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뿌리가 키의 천 이백만 배이다. 식물은 살아남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한다. 그러니 우리가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귀한지 모른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는다. 식물이 살아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성장을 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는 식물은 의미가 없다. 조만간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크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산들이 없겠지만 미국에는 그랜드 캐년이 있고 로키산맥이 있는데 특별히 로키산맥은 높은 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산들에 선이 그어진다고 한다. 나무가 살아 있는 가장 높은 곳이 형성하는 선, 그 위에서는 나무가 살 수 없는 곳, 이걸 이름하여 수목한계선이라고 하는데 해발 삼천 미터라고 한다. 그런데 이 끝에 있는 나무들은 어떻게 자랄까? 나무가 잘 살 수 있는 곳은 촘촘하고 빽빽하겠지만 한계선에 가까울수록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진 비바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용트림을 해야 한다. 꺽이지 않기 위해 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나무들의 별명은 <무릎이 굽은 나무>라고 부르는 참 못생긴 나무들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공명이 잘되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어떤 나무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면 주로 이런 나무로 해야 된단다. 그 유명한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바로 이런 나무로 만들어졌다. 아무튼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성장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거친 나무는 아름다운 것처럼 사람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 형편에서 꿋꿋하게 살아와서 오늘의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않았았는가? 나도 지난 50년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숱한 어려움을 견디며 오늘날 청소년사역자로 살아가게 되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진멸되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애3:22, 23). 그래서 아침마다 주의 성실하심에 감사기도를 드린다.
세 번째, 그러면 그걸로 끝날까? 모든 생명체에서 중요한 것은 종족 보존이다.
예를 들면 바다거북은 등딱지 길이가 1~1.2m이고, 몸무게는 180~300kg이며 한배에 100~200개의 알을 모래 해변에 낳는데, 네 다리가 지느러미 모양이고 힘이 세서 사는 곳과 알을 낳는 장소가 1,000km 이상 떨어진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고기와 알의 맛이 뛰어나 식용으로 남획되고 있다. 태평양과 인도양의 열대 및 아열대・온대 해역에 널리 분포하며 한국에는 주로 만류(灣流)를 따라 동해안과 남해안 주변에 찾아온다. 이 거북이 수백 마리가 산란기가 되면 해변으로 나와서 알을 낳고는 다시 바다로 사라진다. 이 때를 기다린 사람과 동물들이 알을 파내어 먹거나 가져간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알이 부화되어 5cm정도 되는 새끼 거북들이 바다를 향하여 하는데 사람과 동물들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들도 공격한다. 새들은 거북을 뒤집어 놓고 여린 살들을 파먹는다. 그 중에 살아남은 몇 백 마리 안 되는 새끼거북들은 바다로 갔다가 다시 산란기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오고 또 알을 낳고는 바다로 돌아간다. 이렇게 반복이 되어 종족이 보존되고 역사가 이어진다. 생명을 보존하고 대를 잇는 것은 아주 숭고한 일이다. 따라서 식물이 열매를 맺고 동물이 새끼를 낳듯이 우리도 열매를 맺는 게 필요하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요 1:12)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고(요 5:24)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히 9:27). 생명을 가졌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면 그걸로 끝날까? 그러면 집단 자살해야 된다. 천국이 좋으니 그냥 올라가자. 그러면 뭐하러 사는가? 예수 믿는 그 순간 바로 자살하면 돼지. 그런데 자살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복음을 주시고 그 다음에 우리가 성장하길 원하신다. 에베소서 4장 11절 12절의 말씀인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열심히 성장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숙해지기만 무엇을 하는가? 그걸로 끝날까? 아니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열매를 맺는 모습이 무엇일까?
에베소서 4장 12절 말씀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가운데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하고 봉사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장성했다는 것은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그런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교사는 이렇게 어린 성도를, 제자를 양육하여서 봉사하는 성숙한 성도로 만들어야할 책임이 있다. 이것을 열매 맺는 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적인 열매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맺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얻는 것이다. 단순한 전도를 넘어서 마태복음 28장 19절에 있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그런데 이상하게도 선교사들은 주로 이 본문 가지고 전도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교회로 안내하고 복음의 소식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선교사들의 마음 속에는 전도만 있으면 안 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양육도 있어야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에서 배우고 지금의 신앙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다면 당연이 다음 세대에게 우리의 배움을 전수해야할 책임있는 것이다. 남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장차 그 선물에 상응하는 선물을 줄 때 의미가 다 한다면 우리가 남에게 배운다는 것은 훗에 우리가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적 행위를 통해 사도행전이 28장 이후가 지금까지 기록되고 있다.
2. 가장 큰 가치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갑작스런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건물의 좁은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나와 같은 처지의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시작하자, 할아버지 한 분이 가세하셨고 그런 다음 중년 아저씨 한 분, 마지막으로 아주머니 한 분이 비좁은 틈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출근시간의 만원버스처럼 작은 처마 밑은 낯선 사람들로 금세 꽉 찼습니다. 사람들은 이 비좁은 틈에 서서 멀뚱멀뚱 빗줄기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뚱뚱한 아줌마 한 분이 이쪽으로 뛰어왔습니다. 아주머니가 그 큼직한 엉덩이로 우리 대열에 끼여들자 그 바람에 맨 먼저 와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튕겨나갔습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쭉 훑어 보았지요. 모두들 딴 곳을 바라보며 모른 척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습니다.
"젊은이 세상이란게 다 그런 거라네..."
그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길 저쪽으로 뛰어갔습니다.
한 사오분 지났을까?
아까 그 청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닐우산 다섯 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세상은 절대 그런게 아닙니다..!"
청년은 다시 비를 맞으며 저쪽으로 사라졌고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청년이 쥐어준 우산을 들고 총총히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던 할아버지는 차마 우산을 들고 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청년보다 나은건 나이밖에 없네그랴...' 그리고 우산을 바닥에 놓고 장대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마지막 우산은 청년의 것이기에....
사람은 왜 사는가?
산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는데 그 가운데 곧게 자라서 나중에 좋은 목재로 쓸만한 것이 많지 않다. 해마다 모든 나무는 몇 뼘씩 자라는데 쓸모 있는 나무만 자란다면 오직 좋을까 생각한다.
이런 것이 어떻게 풀과 나무에게만 국한될 것인가? 인간사회에도 그와 비슷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도서관에 앉아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한 사람은 유능한 인물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하여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효과 있게 이용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고 있다면 동일한 시간을 동일한 장소에서 보내지만 그들이 보낸 시간의 질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상당한 정도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요 유일하게 자율적인 피조물이다. 인간만이 선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다.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결정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삶의 가능한 목적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허무주의
우선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입장은 허무주의다. 삶이란 그 자체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세네카는 “삶이란 죽기 위하여 생겨난 하나의 선물일 뿐, 삶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점이란 그것이 다행히도 길지 않다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쇼펜하우어도 “인생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투쟁과 그것이 만족되었을 때 엄습해 오는 권태 사이에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뿐이다”고 하였다. 아마 심각하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따진다면 현대인의 상당한 부분은 이런 허무주의자들일 것이요,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자살로 삶을 마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허무주의는 삶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없다는 ‘허무’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2)쾌락주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삶을 가장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란 태도다. 이런 쾌락주의는 인간을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란 사실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모든 동물이 모두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인간도 그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그러나 쾌락주의는 쾌락의 획득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쾌락주의는 결국 허무주의로 이끌고 말 것이다. 삶에는 즐거움도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건과 경험을 통해 우리는 성숙해지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기에 쾌락을 삶의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사람은 아픈 만큼 성숙해 지고 성도는 고통 속에서 믿음의 커다란 진보를 가져온다.
(3) 자기완성
또 하나의 후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사한 바대로 자기완성이란 것이다. 모든 만물과 같이 인간 개개인에게도 어떤 가능성이 주어졌고, 그 가능성은 현실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넓은 의미로 자연주의적이요 고대에 유행했던 실체주의적인 관점이다. 즉 인간은 자연의 일부요, 자연의 다른 모든 부분들처럼 그 본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른다면 의미 있는 삶을 위한 인간의 노력은 어떤 결단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천성과 능력과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요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주의의 약점은 인간의 인격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삶의 의미는 타율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기성장을 추구하는 치열한 삶이 남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남에게 좌절과 상대적 박탈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속담에 “이웃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결국 남에게는 아픔을 주는 삶은 가치있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이룬 후에 남에게 그 열매를 나누어주려는 더 나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
(4) 사랑이 삶의 참다운 목적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삶의 의미는 사랑이다. 사랑은 단순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 아니라 바로 그 자체이다. 아가페는 삶의 목적으로 적합하다. 우선 그것은 자연발생적이 아니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삶의 목적으로 적합하다.
아가페는 충분히 보편적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랑과 함께 아가페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인격에 향한 것이다. 아가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은 아가페가 철두철미 이타적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모든 사람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더욱 풍부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연의 재해이기보다는 인간사회의 부조리요, 그 뒤에 숨어서 작용하는 우리 모두의 이기주의다.
(5) 사랑 중의 제일은 남을 세우는 일이다.
사랑은 남을 배려하고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것은 나의 물질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랑에도 등급이 있다.
먼저 이웃에 대한 선한 도움이다. 내 주변에는 마음을 두고 도움을 주는 제자들이 있다. 그들이 원하면 가능하면 함께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위로와 지도를 한다. 남에게 베푼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담이어서 늘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에 상쾌하다.
두 번째는 부모로서 자식에 대한 베품이다. 이따금 집에서 딸과 아들을 대하면서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용돈을 달라거나, 공부하는데 필요한 물질과 늦은 밤 귀찮아하지 않고 버스 종점으로 마중을 나가는 일이 나에게 큰 기쁨을 준다. 나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더 고급한 사랑이 있다. 더 지혜로운 부모는 물고기를 달라는 자녀에게 물고기를 줄 뿐 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의 끝은 자기가 없어도 자녀가 늘 같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물고기를 계속 먹게 하시 위해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듯이 가장 큰 사랑이란 그 사람을 가르쳐서 온전한 사람(딤후 3:17)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기에 접어든 한 청년이 1919년 시카고에 있는 작은 아파트 하나를 빌렸다. 그가 그 집을 고른 것은 근처에 유명한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은 널리 격찬을 받은 소설 ‘윈저버그, 오하이오’를 집필했으며 젊은 작가들을 잘 돕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졌으며 2년 동안 거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멀리 산보도 나갔으며 기교에 대해서 밤늦게까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젊은이는 자기의 습작들을 종종 앤더슨에게 가져갔으며 그 노련한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솔직한 비평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젊은 작가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매번 그는 경청하면서 조심스럽게 노트에 메모해 갔으며 그런 다음 원고를 향상시키기 위해 타자기와 함께 살다시피 하였다. 그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셔우드 앤더슨을 만날 때까지는 어떻게 글을 쓰는지 조차 몰랐다.“
이 청년은 헤밍웨이였다. 그 후에 앤더슨은 뉴올리온즈로 이사가서 거기서 또 한 청년을 도왔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였다.
열망을 품고 있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멘토로서 도움을 준 앤더슨의 역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수년 동안 여러 작가들 중에서도 극작가 토마스 울프와 존 스타인백이라는 젊은이와 함께 작품활동을 했다. 앤더슨의 문하생 중 세 명이 노벨 문학상을, 네 명이 퓰리처 문학상을 탔다. 유명한 문학 평론가 말콤 카울리는 앤더슨을 평하기를 ‘다음 세대의 문체와 비전에 자신의 자취를 남긴 그 세대의 유일한 작가’라고 했다」
여기서 앤더슨의 삶은 실패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장 귀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제자들이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귀한 가치이다.
3. 상급
바울은 자기를 그토록 배척했던 데살로니가 성에 사는 성도들에 대해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20절)라고 고백한다. 교사로서 뼈아프게 경험했던 탈출의 비애와 아덴까지 끈질기게 뒤쫓았던 저들의 사무친 증오심 속에서도 바울은 자기가 얻게 될 영광과 기쁨의 원천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베뢰아 사람보다 신사적이지 못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 그러나 그들은 교사인 바울의 눈에 너무나 소중한 존재로 파악되고있다. 학생들을 장차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미래의 면류관과 영광으로 바라보는 혜안을 가진 바울은 핍박자의 가시 돋친 가해행위마저 면류관으로 다가가는 전초단계일 뿐이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홀랜드 오퍼스⌟라는 영화가 있었다. 1964년에 케네디 고등학교에 부임한 선생님과 학생들의 30년에 걸친 아름다운 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작곡가의 꿈을 키우다 교사의 길에 들어선 홀랜드는 성실하고 따뜻한 교육자상(像)을 대표한다. 처음엔 생계를 위해 잠시 스쳐가는 직업으로 생각했으나 소질 없는 아이를 격려하고, 말 안 듣는 아이는 다잡으며 음악만큼이나 학생들도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30년 세월을 학생들과 함께하는 동안 작곡가로서의 성공은 멀어져만 간다. 하지만 주지사가 된 제자가 은퇴 기념 연주회에서 한 감동적인 연설처럼 그의 헌신은 더 큰 성공으로 보상받는다.
“홀랜드 선생님은 저와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후회 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부와 명성을 안겨줄 심포니 작곡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부자도 아니고 이곳에서만 유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 그건 잘못이죠. 왜냐하면 부와 명성을 초월한 성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세요.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훌륭히 성장했죠. 우리가 선생님의 심포니입니다. 우리가 선생님 작품의 음표이자 음악인 것입니다.“
나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었다. 성경공부를 혼자서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신 강도사님과 본문의 재창조를 알게 해준 성경학자. 학문의 길을 소원하게 하셨던 목사님과 전도사님, 예수님을 소개해준 친구와 목사님, 철학 하는 재미와 깊이를 알게 하셨던 교수님, 사회과학자들에 대한 갈증을 갖게 도전하셨던 교수님, 전문성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도전하였던 기업체의 사장님들과 여류인사, 세상을 관조할 수도 있음을 알게 해준 여러 시인과 수필가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아름다움과 진지한 노력을 가르쳐준 형제와 자매들. 다시금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도구로 나를 위해 사용되어진 그분들을 생각하며 가슴 벅찬 감동을 갖는다.
얼마 전에 저금통장에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이름이 찍혀 있었다. 1981년에 만난 그 학생은 예배시간이면 항상 고3인데도 맨 앞자리에 혼자서 앉았다. 반듯한 그 모습에서 진지한 삶의 자세를 발견하였는데 교회를 떠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만나기가 힘들었다. 그런 몇 년 전에 우리 집을 가는 연신내 로터리에 있는 롯데리아에 점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한번 햄버거라도 얻어먹어 볼까 하고 들어갔더니 건강이 안 좋아서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만나볼 수가 없었는데 친구를 통해서 알았는지 후원금을 보냈다.
같은 시기에 고등부에 다니며 마음을 나누던 학생이 어느덧 가정 주부가 되어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유년부 부장을 하면서 어렵사리 자기 교회 교사헌신예배에 초청을 하였다. 그리고 “평생에 가장 값비싼 식사대접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싶다며 저녁을 함께 하였다. 먹는 일에 그다지 큼 마음을 두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을 읽을 때는 감동이 왔다.
이것이 교사의 학생으로 인한 자랑과 기쁨이다. 어눌한 우리말 실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친구나, 나 때문에 목사와 선교사가 되어서 먼 이국 땅에서 선교사역에 삶을 투자한 제자, 어렵사리 영어과외를 해주었더니 이제는 교수가 되어서 많은 책을 번역한 학생. “목사님 같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34년을 기다렸네요“ 라고 감격해 하는 이들이 있어서 나의 교사를 향한 사명은 한길로 이어질 수가 있다.
사람에게는 장점이 있다. 교사의 할 일은 그것을 감지하고 학생 스스로가 깨닫고 계발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하루만 보지 않아도 조금씩 성장하는 아이를 발견하는 부모의 눈으로 자라나는 학생들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말 귀한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교육을 해야 하는가를 잘 이해하고 이 일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는 교사가 되어야 한다. 한번 교사는 그 하는 사역의 가치를 알기에 영원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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