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교육 하는가?
교육의 주체는 학생과 더불어 교사이다. 그러기에 어떤 교사가 교육하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 특히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을 다하여 교육하기로 작정한 교사는 과연 어떤 교사이어야 하는가?
1. 준비된 교사
언젠가 딸아이가 늦게 귀가한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아저씨 어서 오세요.”
순간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나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니 내가 왜 아저씨냐?”
“일찍 들어와서 놀아주면 아빠지만 이렇게 내가 잠 잘 시간에 들어와 놀아주지 못하면 아저씨지요” 라고 대답하였다.
‘아빠’는 아이들을 낳는 순간에 자연스럽게 되지만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아빠’는 또 다른 노력이 있어야 함을 느낀다.
교육이란 일종의 양육이다. 교사가 학생을 전도하여 자기 반으로 만들었던지, 아니면 일정한 아이들을 반 학생으로 배정을 받았던지 시작은 동일하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일년동안 영적 부모와 같은 역할을 잘 하려면 역시 준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한 학년을 시작하는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
루드(R.W.Rood)는 교사를 다음과 같이 ‘준비된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1) 학습자들을 좋아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2) 가르칠 내용을 좋아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3) 가르치기를 좋아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4) 자신의 특수한 달란트를 계발하고 단련하기를 좋아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5) 교실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교사로서 ‘나는 어떻게 준비되어져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보았다.
(1) 학습자들을 좋아하기 위하여
교육은 단순히 교사가 주입식으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어떤 정보나 심상을 심어주는 것 이상이다. 과거의 기가 막힌 추억이라도 그 사람을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훌륭한 목사님의 모습을 흠모하면서 목회자가 된 사람이라도 과연 그 모델처럼 목회를 하고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성공적인 교사는 학생과 특별한 관계, 즉, 사랑하는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어떤 전도사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랑의 고백’을 받았다.
「지난 눈 덮인 겨울, 설악산 노루목 모텔에서 목사님을 처음 만나 뵈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 동안 청소년사역에 대한 꿈을 버리고 싶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신학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번뇌가 저를 찾아올 때마다 저를 지탱하여 준 단 하나의 이유는 손 목사님이라는 사실을 아마도 손 목사님은 모르셨을 겁니다.
노루목 모텔에서 청소년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시던 그 모습은 ‘내가 과연 목회의 길을 가야 하나’ 하는 의문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찾지 못하던 저에게 청소년사역에 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저의 목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목사님은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제대한 후에도 손 목사님과 보냈던 시간들은 군대에 있을 당시, 거의 포기 상태에 있었던 저의 신앙에 많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제가 선교회에 제대 후 찾아간 것 역시 더 이상 신앙적으로 물러설 곳이 없어 마지막으로 찾은 저의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저의 마지막 기대를 충분히 채워 주셨습니다. 저에게 목사님은 포기하고 싶은 저의 목회에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손 목사님,
그 털털거리던 차를 몰고 전주를 갔던 추억도 역시 제겐 참으로 소중하기만 합니다. 아무도 저를 알아주지 않을 때,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은 신학생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인정을 해주신 분은 바로 손 목사님이셨음을 아시는지요. 합동신학교 게스트룸에서 목사님과 함께 있었을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손 목사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손 목사님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한 사이입니다.’
사실 목사님께 저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선교회 내에서 목사님이 저에 대해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겠지요. 게다가 선교회 모임에 불성실한 저의 태도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을까’ 하는 생각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늘 붙들고 계시는 목사님의 그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과정을 아는 사람들은 의아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사자들만이 느끼는 회한이 이 안에는 있고 또 더 노력해야 할 나의 다짐도 일어난다. 1997년 1년간 부산 제자훈련반을 위해서 시간을 내었더니 어떤 이들이 물었다. “왜 부산까지 내려오십니까?” 막상 답변이 궁했다. 그들을 만나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 서울의 제자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아니었다. 똑같이 나를 향한 성실함과 믿음을 함께 나누는 열심이었으니까. 어디서나 나를 필요로 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들을 좋아할 것이다. 학생을 좋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 어떤 상황이든지 최선을 다하는 교사가 되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을 좋아하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1) 학생에 대한 많은 지식이 있어야 한다.
가정과 학교생활 그리고 친구문제를 아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의 자랑과 기쁨을 아는 일도 필요하다.
2) 학생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시간낭비로 비칠지라도 그 삶에는 사랑인 것이다.
3) 학생을 위해 돈을 쓸 준비가 있어야 한다.
대부분 학생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주는 교사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무모하리 만큼 자유스럽다. 나도 평생의 업이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이기에 남보다는 조금 더 노력한다.
4) 학생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그의 꿈과 가능성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변한다. 특히 학생은 성장을 위하여 먼 곳으로 달려나가는 연어와 같다.
5) 공통적인 접촉점을 마련해야 한다.
서로가 유사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해심이나 신뢰감을 형성하는데 실패하기가 쉽다. 특별히 나와 관계된 부분, 그의 나에 대한 감정을 아는 일도 중요하다.
(2) 가르칠 내용을 좋아하기 위하여
교사의 역할이란 학생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서 심각한 변화를 이루게 하는 일이다. 이 때 진리란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지루한 설교와 재미없는 공과시간에 대한 우리 학생들의 불만이 현실일 때 우리의 답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설교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따금 교사들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개인적인 능력을 떠나서 일반적인 생각을 들라면 ‘부흥강사’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은 부흥사이다. 따라서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영적 감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늘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대상에게 설교하는 이들과는 그 준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고를 보지 않고 그 내용에 자유로움을 느끼며 설교를 한다. 언젠가 옥한흠 목사님은 설교학 시간에 이러한 것을 ‘freedom’이라고 지적하면서 성령의 자유케 하심을 설명하였다. 이 때 청중이 갖는 감동이 특별하다. 늘 설교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끼는 나는 그래도 늘 하는 강의나 설교에는 어느 정도 자유함을 느끼며 전달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때로는 결석한 교사를 대신하여 짧은 시간을 가르칠 때도 이러한 자유함을 느끼는 주제는 잘 전달되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1)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전해야 할 중요한 것임을 자각할 때 소홀히 하기가 어렵다. 전도사로서 처음 장년설교를 할 때는 학생설교를 준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만큼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부담감이나 꼭 전해야 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준비하는 자세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이것이 마지막 설교다’라는 자세가 필요한 것처럼 교사도 심각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2) 교과내용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암기하는 일이 필요하다.
주제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있고 대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가능하게 하며 용어와 구체적인 해석에 대해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읽기를 통한 피상적인 이해가 아니라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이를 내 것으로 만드는 숙지과정이 필요하다. 간단한 메모만으로도 설명의 준비가 될 수 있어야 한다.
3) 그 내용을 실천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교사는 가르치려는 공과를 먼저 자신의 삶에 적용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적용에서 머물지 말고 그 실천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을 준비해야 한다. 전도를 하고서 그 기쁨으로 간증하는 일이나 사랑을 실천하고 그 감동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 공과는 교사에게 즐거운 내용이 된다. 심지어 실패한 경험마저도 학생들에게는 심각한 도전이 된다.
(3) 가르치기를 좋아하기 위하여
‘재미없는 주제는 없다. 다만 재미없게 가르칠 뿐이다’ 강의를 하면서 느끼는 나의 도전이다. 그저 그런 교사는 전달을 하지만 좋은 교사는 설득을 하고 더 좋은 교사는 감동을 주며, 가장 좋은 교사는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학생에게 설득을 하고 있는가? 가끔 우리의 가르침을 인정하는 반응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가 있다.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따라서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응대하는 모습은 가르치는 일을 자랑스럽게 한다. 그러나 강의를 듣고 ‘잘 배웠습니다’가 아니라 ‘참 은혜스러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모호한 대답이라서 불만이기도 하지만 그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감동을 받은 이의 흥분을 읽을 때면 참으로 보람이 된다. 아마 그들에게 새로운 시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시도가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을 인한 강력한 영감이 있어야 가르침이 완성된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도전을 주셨을 때 베드로는 감동 이상의 것을 받았고 ‘죽기까지 증인이 되고 양을 치는 사람’이 된 것을 우리는 안다. 이러한 베드로의 변화가 또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형제여 어찌할꼬?’ 하며 가슴을 찢는 성령의 감동을 가져왔다. 우리의 가르침이 영감이 있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1) 기술이 있어야 한다.
존 밀톤 그레고리는 모든 일에 법칙이 있듯이 교육에도 법칙이 있다고 하였다(「교육의 7가지 법칙」, 생명의 말씀사). 나는 ‘교수설계’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마치 집을 짓는 사람이 설계도를 철저하게 그리듯이, 가르치는 내용을 잘 설계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것이 교안 작성이다. 때로는 일반학과에서 제시하는 교안 작성하는 요령과 그 표본을 읽곤 한다. 왜냐하면 내가 배우지 못한 교수설계를 깨우쳐 주기 때문이다. 가끔 방송국에 가면 ‘sheet’를 작성하는 작가들이나 PD들의 수고를 보게 된다. 얼마나 철저한지.
그리고 학습동기를 유발하고 주의집중을 시키며, 학생들에게 기억을 남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무엇과 왜, 어떻게를 설명해주고 그것을 적용하여 실천하게 하며 나아가 그 실천이 몸에 습관이 되어 인격을 형성하게 하는 일을 추구하려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로 인해 학생이 자기에게 변화를 준 진리를 남에게 잘 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2) 충분한 자료를 준비한다.
에드가 데일의 ⌜경험의 원추⌟는 상징과 관찰 그리고 경험에 이르는 다양한 교수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호랑이를 가르칠 때 백 마디의 언어로는 거의 불가능한 설명을 그림으로 하고, 사진을 보여주며, 녹음기를 틀어서 들려주고, 실제로 동물원에 데려가서 보여주는 노력은 엄청난 이해와 감동을 준다. 나는 칠판사용을 항상 준비하지만 이따금 빔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영상을 보여주고 나아가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슬라이드를 노트북에 담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기계들을 운반하는 번거로움이 무척 불편하지만 더 나은 자료를 계발하려는 노력을 계속한다.
3) 더 나은 기술을 얻는 비결은 가르친 후에 열매를 확인하는 일이다.
교육은 심각한 변화를 가져오고 그로 인한 기쁨과 자랑을 맛보게 한다(살전 2:19-20). 지금도 가르침에 대한 슬럼프에 빠지면 ‘목사님은 돌멩이(?)’라던 한 교사의 말을 떠올린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셨습니다” 라고 하던 대답은 부족함과 심신의 피곤함에 주저앉으려는 나를 일으켜 세워준다. 그래서 나는 자꾸 교육현장에서 물어본다. “나를 좋아하세요?” 처음에는 쑥스러워하지만 이런 피차의 확인은 또 다른 상승효과를 가져온다.
(4) 자신의 특수한 달란트를 계발하고 단련하기를 좋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영생과 그에 따른 많은 복들이다(롬 8:32). 따라서 성도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남들 앞에서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은사들을 계발하여 교회와 이 세상을 위하여 활용해야 한다(고전 4:7).
은사란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 믿는 이들에게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값없이 부어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은사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와 관련되어지기 때문에 재능과 구분해야 한다.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다. 그런데 이 재능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난 후 하나님의 영광과 지체들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어질 때 그것은 은사가 되는 것이다
은사의 종류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로마서 12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은 ① 예언 ② 섬기는 일 ③ 가르침 ④ 권면 ⑤ 다스리는 일 ⑥ 긍휼이며, 고린도전서 12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은 ① 지혜의 말씀 ② 지식의 말씀 ③ 믿음 ④ 병 고침 ⑤ 이적 행함 ⑥ 예언 ⑦ 영 분별 ⑧ 방언 ⑨ 방어통역 ⑩ 사도 ⑪ 선지자 ⑫ 교사 ⑬ 신유 ⑭ 돕는 것 ⑮ 다스리는 것이 있고, 에베소서 4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들은 ① 사도 ② 선지자 ③ 전도자 ④ 목자 ⑤ 교사들이 있다. 이러한 은사를 발견하기 위해서 은사점검표를 사용해 보라(「은사확인검사」(성령의 은사와 교회성장) 리차드F. 휴츠/ C. 피터 와그너, 도서출판 나침반사).
나에게는 가르치는 은사와 지식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권면하는 일도 중요한 은사로 부각된다. 그런데 신유의 은사와 통변의 은사가 약하다. 그래서 부족한 은사를 사모하고 시간을 내어 노력하려는 계획을 세우곤 한다. 물론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더 준비하고 기술을 연마하기를 노력함은 물론이다. 단점을 개선하는 일보다는 장점을 계발하는 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선교회 사역 가운데서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지난 23년간의 청소년 사역은 잘 가르치기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한다.
(5) 교실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참으로 마음에 부담을 주는 일이다. 나는 과연 가르치는 현장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강하신 사랑을 체험하며 가르치는가 생각해 본다.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찬양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헌신의 찬양을 하다보면 가슴이 메인다.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이신지, 그러나 이러한 감격을 가르치는 현장에서는 잃어버리곤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은 안 계시고 가르치는 내 열성과 배우는 학생의 진지함만이 교과내용을 통해서 교감되는 듯한 경우를 보게 된다.
때로는 나의 경험담이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기도 하지만 영감을 주는 일보다는 감동으로 끝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심각한 변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인한 감격이 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오직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경건이란 기독교인에게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경건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 라고 정의할 때 경건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하심을 느끼며 사역하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데 이러한 체험은 가르치는 중에도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한다.
1) 죄를 떠나는 일이다.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고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서 우리를 듣지 못하게’(사 59:2)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오히려 이러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C.S.루이스는 말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끊임없이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주의 깊게 냄새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기도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9).
2) 하나님과의 동행을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이 율법책을 내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8).
3) 기도하는 삶을 산다.
기도는 단지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영적 생활의 최전방에 서게 한다. 또 기도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것이며 사도 바울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고전 3:9) 라고 말한 수준에 이르러야 하며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기도 응답은 기도를 통하여 더 큰 믿음과 확신을 갖고 용기와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조지 메레디스는 말했다. “기도한 후에 더 나은 사람으로 일어서는 사람은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이다.” 인생의 절정기에 느닷없이 가시의 공격을 받아 쓰러졌던 니버 목사는 오랫동안 인고의 기도 끝에 다음과 같은 위대한 기도로 일어섰다. “오, 하나님!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를 침착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우아함을, 우리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를 변경할 용기를, 우리가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아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 놀라운 구원의 이름으로 지상에서부터 하늘나라 아버지께로 위대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눈물의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여도 적은 양의 눈물로도 능히 꺼진다. 왜냐하면 눈물은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이다“(요한 크리소스톰).
윌리암 제임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태도가 바뀌어서 남의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위대한 혁명이다.” 학생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내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자신을 준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교사이며 준비된 교사로 시작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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