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총신신대원/현대신학

망한 예배자 2

예림의집 2008. 10. 19. 13:25

요나서 역시 망한 예배자들의 마음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 예배자가 되었을 때, 요나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살펴본다. 요나서 1장 9절에서 그는 자신을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라고 말한다.

그러나 매우 무서운 사람들에게 매우 엄한 말씀을 전하라고 들었을 때, 그의 자격은 혹독하게 시험을 당한다. 우리 모두는 이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부르심에 따르지 않고 도망가기로 결정했고, 거대한 물고기의 배에서 끝이 난다. 물고기 안에 있을 때, 당신은 어떤 진지한 영혼 탐구의 시간을 얻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요나는 망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고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기를 열망하게 된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2:7).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조명은 요나를 비추었다. 며칠 동안 물고기 안에 있는 것이 힘들기는 하다. 그러나 풍랑 치는 바다 속에 있으면서 더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를 정련하는 불에 통과시키셨고, 그는 더 강하고 순수한 예배자로 나왔다.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2:9).

그리고 이사야와 하나님의 만남이 그에게 밖에 나가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주었던 것처럼 요나도 다시 시작한다. 이번에는 니느웨로 간다. 때때로 우리도 길을 잃고 헤메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흔드셔서 다시 바른 길로 돌아가도록 하셔야 한다. 그분은 종종 우리에게 몰락의 계절을 주신다. 이 시간에 우리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다시 초점을 맞추고 점검하게 된다.

 

몇 년 전에 나 자신이 이런 계절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새로운 경배곡으로 음반을 제작하는 일로 바빴으며, 더구나 많은 사역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는 금요일, 일주일 내내 기타를 친 후에 나는 두 곳의 소울 서바이버(Soul Survivor) 집회를 위해 네덜난드로 떠났다. 비행기로 기타를 나르면서, 나는 팔에 통증이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단순히 '피곤해서 그렇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말 동안 키타를 칠 때마다 통증이 더 심해졌다. 우리가 떠나는 그날, 나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별 도움이 안되는 의료 처방을 받았고, 내 팔 전체가 부어오르기 시작하더니, 심지어 조금만 움직여도 괴로웠다.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 우리는 마쳐야 할 음반이 있어요. 저는 지금 일어난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내 손이 경직되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에, 몰랍게 비트시고 돌리시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나는 최고의 손 전문의가 있는 외과병원을 방문했다. 그 전문의는 내가 매우 심각한 건염(腱炎) 증상을 보인다고 확신하면서, 그때 자기가 보지 않았더라면, 내 손은 영원히 못 쓰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끔직한 순간이었다.

 

이후 7주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내가 키타를 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가장 절망하게 했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머리 속이 복잡해서 집에 앉아 있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마귀가 그렇게 했나?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건가? 나는 정말 아무런 신학적 답변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곧 나는 그 질문의 답변이 무엇이건 간에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종으로서 나는 무익하며, 상전의 말에 따라 종은 오고 간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구에게라도 그분의 왕국에서 무슨 일이든 하도록 선택하실 수 있다. 예배 인도자로서 나는 대처될 수 있었다. 우리가 일부분을 담당할 특권이 있었던 그 집을 위해 하나님은 누군가를 사용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과 자녀로서 나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결코 다른 내가 될 수 없었다. 자녀는 대처할 수 없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더 나은 관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수년 동안 예배를 인도하면서 내가 가진 계획을 다소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피트 스톱'(pit stop, 자동차 경기 중 급유나 정비를 위해 정차하는 곳)을 주셨다. 이는 내가 마음으로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망한 예배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그분은 나에게 가르치셨다. 7주가 지나고 내 팔이 훨씬 좋아졌을 때,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훈련 방식으로 나에게 복 주시려고 그 계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셨는지 알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 크리스도인 프랑소아 페넬론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모든 몰락은 그 몰락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계속해서 신뢰하고 겸손을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에 대한 비참한 확신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유용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망하게 하신다. 우리 주위의 상황으로, 주님의 영광을 희미하게 하심으로, 또 우리가 어수선한 일을 겪을 때 그 상황에 대한 단순한 언급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오랫동안 그렇게 우리를 떠나지 앟으신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하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정말 자주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훈련의 손길 뒤에는 재빨리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이 이어진다.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것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39장의 마지막에 한바탕 거친 비난이 나온 뒤에는 온유하고 새 힘을 주는 말씀이 온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 외처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나고...."(사 40:1-2).

 

그래도 때때로 우리는 '절뚝거리고 걸으면서' 떠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로운 계절로 길을 떠나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분이 행하신 일이라고 기억나게 하는 것을 뒤에 암기신다. 사도 바울은 절뚝거리며 걸었거나, 아니면 자신이 설명한 대로 자기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육체의 가시'를 지니고 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약함을 기억나게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하셨고, 곧 바울 자신도 이것을 자신이 교만해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고후 12:7-9).

이따금씩 나의 건염은 아직도 재발하며, 사실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도졌다. 의사는 그 병이 항상 재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마 언젠가 나는 완전히 치유될 것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제 이 병이 나를 괴롭히는 모든 시간 동안 나는 그 상황 속에서 내게 하나님이 말씀하셧던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다. 이 병은 내가 다시 무릎을 꿇고 망한 에배자로 남으라는 초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