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후원 사역†/선교이야기

인디안의 사도 존 엘리오트(John Eliot)

예림의집 2008. 10. 15. 07:53

인디안의 사도 존 엘리오트(John Eliot)


존 엘리오트는 선교사라기보다 한 회중교회의 목사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안 선교에 끼친 그의 공헌이 너무나 커 모든 교회역사를 통틀어서 그는 가장 위대한 선교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오늘날까지 그의 선교방법이 적용되고 있다. 그는 영국에서 출생하여, 캠브리지에서 목회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청교도의 아버지인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아래서 수년 간 학교 교사로 봉사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보스톤에서 1년간 대리 설교자로 봉사하던 중에 보스턴에서 2마일 정도 떨어진 록스베리라는 영국 이주민 정착촌 교회의 사역자로 초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한나 멈포드와 결혼을 한다.


처음에는 엘리오트도 교인들을 돕는 일로 정신없이 보냈다. 그는 록스베리 주변의 인디안들과도 평화롭게 지냈고,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인디안 복음화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가져온 병균으로 인해 인디안들이 죽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땅을 청소하시는 것”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1644년 엘리오트는 40세가 되어서야 인디안 선교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게 환상이나 직접적인 하나님의 명령이 없었지만, 그럴 필요를 느꼈기에 그는 인디안 선교의 첫발을 디뎠다. 그는 선교의 첫 단계로 알곤퀸 부족의 언어를 공부하였다. 2년 후 엘리오트가 근방에 사는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다지 큰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한 달 뒤 더 많은 인디안들이 그의 설교를 들었고,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계속되는 집회 속에서 인디안들의 복음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 갔다. 사역 후 1년이 지나서 수많은 인디안 개종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엘리오트는 기독교인 인디안들을 위한 특별한 구역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 의회 등지에 청원서를 낸 결과 보스톤에서 18마일 떨어진 지역의 땅을 허락받게 된다. 그곳은 “기도하는 도시”로 알려진 나틱이었다. 이 도시를 세워가는 엘리오트의 한계는 기독교화에 대한 오해였다. 그는 참된 기독교화는 정신과 마음의 변화 뿐 아니라 생활 양식과 문화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선교사역의 큰 맹점이었고 후배 선교사들이 똑같은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복음전도자로서의 모범과 성경번역 사역도 인디안 선교사역의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나틱에서 기독교인 인디안들의 수가 늘어가고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서 동시에 동족들을 위한 인디안 사역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유럽인들과의 경제적인 마찰로 비롯된 전쟁이 일어나 미국 식민지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전쟁으로 기록된 필립왕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디안들은 학살당하거나 추방당하고, 지역은 피폐하게 되었다. 엘리오트의 많은 사역들은 전쟁으로 산산조각 났지만 85세의 임종을 맞기까지 그는 쉬지 않고 인디안 지역을 위해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인디안 선교의 뛰어난 업적을 쌓고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일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낙천주의적인 사고와 남을 돕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신앙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