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집을 아는 그는 가만히 누운채 불규칙한 숨소리만 낼 뿐이다.
캄캄한 침대위에서 맨정신에 이렇듯 그와 함께 한 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 얘기가 있다며 그를 붙들었지만 어디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다.
더 난감한 건, 내가 그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는 거다.
[얘기해]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 그의 실루엣이 조금씩 잡혀갈즈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잤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당황해서 멍청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어디 눈만 감으면 잠이 온다더냐, 안자니까 말을 하는거 아니니..
[잠이 안오네.]
무거운 숨소리가 그를 누르고 옆에 앉은 나에게까지 닿는다.
[속은 좀 어때..]
나도 참 어지간하다.
주변머리없이 왜 자꾸 당연한 소리만 해대는걸까.
[안좋아.]
뻔한 대답이 나올 게 분명한데..
[머리도 아프고..]
OK. 딱 거기까지만 해라 원규야.
속안좋고 머리아프니까 오늘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자고 하려거든 그냥 잠자코 있어주렴.
[방이 좀 추운 거 같은데..]
고개를 돌리자 담요를 반만 걸치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눈에 비쳤다.
내가 일어나 앉으면서 담요가 통째로 딸려온 모양이다.
속을 게워내서 안그래도 으슬으슬 할텐데...
그럼 적당히 땡겨다 덮기라도하지 너라는 인물도 참 둔하고 또 둔하다 싶다.
두르고있던 담요를 슬그머니 걷어내어 덮어주려는데 마침 몸을 일으키던 그의 얼굴에
손이 닿았다. 흠칫 놀라 손을 움츠리자 그도 몸을 일으키다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린다.
아니 뭐 내가 널 어쩌려던 건 아니고..
[이불...]
말을 하다 말았다.
눈치없이 두근대는 가슴을 그가 알까싶어 억지로 입을 다물고 숨을 참아본다.
주책없이 쿵쿵거리는 속을 욕하며 미간을 지푸리자 난데없이 쓴웃음이 나왔다.
이럴줄 알았으면 다른 사람들과 실컷 사랑해보고 낡고닳은 가슴으로 결혼할 걸 그랬다.
그랬음 이렇게 그와 한두번 닿는것만으로는 두근거리지도 않았을텐데.
그와 나란히 침대에 있을 때면 나는 항상 이렇게 가슴이 아리다.
그의 성향을 알고나서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이제 안타까운 마음에 속까지 타는 것 같다.
왜 하필, 이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신경을 하나하나 뜯어먹는 기분.
[추워?]
그래, 속이 뜨거워서 그런지 몸은 오히려 시리구나 원규야.
둔하다못해 냉정하기까지한 이 남자는 이불이라는 말만 듣고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마저
걷어내어 밀어준다.
[손이 차갑네.]
나는 원래 손발이 차가운 편이다.
손발이 차가우면 마음이 따끗하다고들 하지만,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두통약 좀 먹고 올게.]
그가 마저 몸을 일으키더니 침대를 빠져나간다.
[약, 여기 있어..]
협탁쪽으로 몸을 기울여 서랍을 열자 소화제에 두통약, 각종 연고 등등 없는 것이 없다.
결혼선물로 오빠가 해준 것들인데, 약 먹고 죽으라는 건가. 아니면 이걸 다 챙겨먹을 정도로
매일매일 아프기만 하라는 건가. 하긴, 두통약은 거의 끼고 살다시피하니, 고마운 일이다.
[아냐, 서재에도 있어..]
'바로 코 앞에 약을 두고 굳이 서재까지 가려는 이유가 뭐야..'
목구멍까지 치미는 말을 꾹꾹 눌러담았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힘겹게 침을 삼키는 그가
안쓰러워 그저 어디에 있는 무슨 약이라도 먹고 나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적당히 마시지..]
달리 할 말이 없어서 방문을 나서는 그에게 들릴락말락 중얼거렸다.
[며칠동안 마무리 작업해서 넘기느라고 좀 무리했나봐.]
어둠에 눈이 밝아진 그의 슬리퍼가 불꺼진 거실을 가로질러 서재를 향해 그를 끌어간다.
튀어나가 물이라도 한 컵 따라줘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엎어져서 그에게 하고 싶다던 얘기나
정리해야 하나 나름대로 생각을 고르는 사이에 열린 방문사이로 주방의 오렌지빛 조명이 비집
고 들어온다. 그리고 잠시 후에, 달그락대는 소리가 잠잠한 새벽을 가르며 선명하게 들려왔다.
'머리 아픈게 아니라 배고픈 건가...? 밥 없을텐데..'
몇주전 엄마와저녁을 먹은 이후로 저녁을 챙겨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틀전 마음먹고 싱크대를 정리하다가 콩나물 500원어치를 얻기까지 했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 씻겨내려간 콩들이 개수대 아래서 결실을 맺고 있었던 거다.
물내려가는 속도가 영 답답해서 개수대쪽의 음식물 분쇄기를 꺼냈다가 하루 종일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습기를 먹은 콩들이 말그대로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들어차서 물을 막고 있었다.
[치워놓길 잘 했네.]
그래도 신랑.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배가 고프다면 챙겨주기는 해야하지 않겠는가.
챙겨주지는 않더라도 척은 해야 속이 편할 거 같다. 추우냐며 이불까지 선뜻 내준 사람인데..
주방으로 그를 따라나서서 거실 형광등을 켜자 싱크대쪽에서 뭉긋대던 그가 나를 돌아본다.
[뭐 해..?]
그의 손에는 이제 막 물기를 털어낸 딸기가 들려있다. 으으, 딸기다 딸기...
내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자 싱거운 표정으로 딸기 하나를 입에 넣으며 우물거린다.
[배고파서 그래?] 얘기 들어주는 게 그렇게 싫으니 원규야.
대답대신 반짝거리는 딸기 한알을 내밀며 먹어보라는 시늉을 한다.
이럴 때는 입에 넣어줄 정도로 살가운 사이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겠지.
저걸 먹고나면 내일 하루 종일 약 먹고 뻗어있어야 할 거다. 몸을 박박 긁으면서..
그래도 차마 싫다고 할 수는 없어서 두 손가락으로 딸기 꼭지를 아슬아슬하게 받아들었다.
[앉아서 먹어..]
그제서야 의자를 빼고 접시를 식탁에 올려놓는다.
[안달다.]
뭐? 안달났냐고?
딸기를 어떡할지 몰라 난처해하고 있는데, 웅얼대는 그의 말이 타이밍도 절묘하게 들려왔다.
[너무 신데.. 조금만 꺼내길 잘 했다.]
아, 딸기 말이구나.
살짝 눈을 감으며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마치 딸기광고라도 찍는 것 같다.
[뭐 다른 거라도 먹을래?]
찬거리를 찾는 척 냉장실 문을 열자,
음료수칸에 입을 벌린채 버티고 있는 딸기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의 눈치를 살짝 보며 들고있던 딸기를 봉지속에 던져버렸다.
[먼저 자..]
너 붕어아니니.. 내가 아까 할 얘기 있다고 했잖아.
먹을거리고 뭐고 냉장고문을 쿵 소리나게 닫고 뒤를 돌아봤다.
[머리 좀 나아지면 들어갈게.]
끝? 할 말 다 한거야?
딸기 하나를 입에 더 넣고는 주방을 빠져나가 서재로 들어가버린다.
발이라도 걸어서 넘어뜨리고 싶었지만, 머리가 아프다니까 그런가보다 하기로 했다.
저런 사람을 붙들고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사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는 했지만, 그다지 급하게 할 말도 없었다.
아기에 대한 말이 나와서 답답한 마음에 그를 다그치려고 했던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혼자 남은 주방에서 딸기를 안고 있는 그릇을 내려다봤다.
손대기도 꺼림칙해서.. 나중에 고무장갑끼고 잔반처리기에 넣어야지 마음을 먹는다.
[국그릇에 왠 딸기...]
중학교 때는 미국에서 혼자 학교를 다녔고, 입국 후 기숙학교를 다니다가..
1년이 지나지않아 다시 미국으로 가서 대학까지 마쳤다고 들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익숙해서 일까, 예전에 그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나란히 앉아 저녁을 먹고는 먼저 털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버려서 상당히 난감했었다.
시어머니께서 오히려 무안해하시며 '저 녀석이 저렇게 숫기가 없다'고 위안을 해주셨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걸 했을까.
자신의 성향을 알았다는 건 남자에게 사랑을 느껴서가 아닌가.
사람을 사랑하는 원규의 모습은 어떨까.
머리가 아파서 눈을 떴다.
그가 침실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먼저 잠들었는데..
어제 누운 그대로의 이부자리를 보면 그는 아마도 서재에서 잔 모양이다.
[후.....]
상쾌한 아침, 두통약으로 배를 채우자니 조금 비참하다.
더듬더듬 협탁서랍을 열어 제일 위에 있는 상자를 꺼냈다.
오만상을 찌푸린채 잡아뜯다시피 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손에 털어낸다.
[하아---]
손에 털려나온 건 알약이 모두 빠져나간 쓰레기..
오빠가 보면 결혼해서 약만 먹고 살았냐며 혀를 찰 노릇이다.
침대에 물린 몸을 어렵사리 빼냈다.
입안에 바짝바짝 마르고, 한쪽 귀청이 윙윙 울려댄다.
시계를 보니 아직 9시가 안됐다. 오늘은 늦게 나간다고 했으니, 아직 있겠지.
상처투성이의 맨발로 소금을 밟는 기분으로 거실을 지나 서재까지 다리를 끌었다.
[있어?]
의례적인 노크.
문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내 머리를 두드리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두 번이면 충분하다.
[나 좀 들어갈게..]
자고 있는 건가.
손잡이를 돌리자 힘없이 문이 열렸다.
[......]
어제 새벽에 분명히 그가 이 서재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꿈을 꿨나.
머리가 아프다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자 걱정이 앞섰다.
일단은 나부터 살고 보자.
지끈거리는 한쪽 머리가 땅에 닿을듯 무겁기만 하다.
ARON Tab.
비습관성 수면 유도진정제.
그의 서재 어디에도 두통약은 없었다.
책장 한쪽 구석의 서랍속에서 찾아낸 이 약말고는 약이랄 건 하나도 없었다.
ARON Tab.
비습관성 수면 유도진정제.
물론 수면제가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지독한 불면에 시달리게 되면 수면제라도
먹고 자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서랍속에 들어있던 다른 약상자들이다.
어림잡아 스무개도 넘어보이는 상자들이,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을 제외하고 모두 빈통이었다.
상자 하나당 10정이면 200알. 용량을 보면 성인 1일 1회 1정.
만일 그가 새벽에 서재로 들어와 이 약들을 한꺼번에 털어넣었다면..
[누워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200번 가까이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다는 소리가 된다.
평생동안 복용해온 약상자를 결혼하면서 챙겨온 것이 아니라면..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까.
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닥에 주저앉아 1시간 넘게 약이름만 아로새기고 있었다.
아픈 머리에 생각이 겹치자 눈앞이 캄캄하다.
마른 입술을 깨물며 안방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 먹겠다던 것도 두통약이 아니라 수면제였나.
그래서 억지로 서재까지 와서 찾아먹은 건가.
그의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는 동안 목소리만 듣고 끊어야지 생각했다.
약을 다 털어넣고 잠든 것이 아니라, 다 챙겨나간 거라면 어떡하나 싶어 조마조마했다.
그에게 그럴 이유가 있을까를 생각할 여유까지도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마음이 급하고.. 그리고 너무 머리가 아팠다..
-여보세요..
감사합니다 하느님..
-여보세요?
[언제 나갔어.]
-조금전에 도착했는데, 왜?
[원규야.]
-........
술자리에 앉아있으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분위기에 취하는 것 처럼..
빈상자만 쳐다봤는데 약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여보세요?
[.......어떡해..]
-왜 그래? 무슨 일인데..?
정신나간 사람처럼 웅얼거리자, 그의 목소리가 빨라진다.
-얘기해, 왜 그러는데?
[서재에 없길래, 잘 갔나해서.]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나보다.
나와의 결혼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그는 매일 약을 먹고 잠들었나보다.
멀쩡한 목소리를 들은 건 다행이지만,
200일동안 수면제로 잠든 그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그는 이렇게... 이런 방법으로,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했던 걸까.
[끊을게.]
그 날, 눈물이 마른다는 소리를 실감할 정도로 울었다.
눈물이 마른 자리에 피가 흘러 심장이 죄어올 때까지...
이렇게까지 해가며 그 사람이 나와 살아야하는 이유가 뭘까..
'ε♡з예림의집으로ε♡з >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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